시칠리아 왕국

 


'''시칠리아 왕국'''
'''Regno di Sicilia'''
'''Regnu di Sici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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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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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년 ~ 1816년
위치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수도
팔레르모(1130년~1266년)
나폴리(1266년~1282년)
카타니아(1282년~1401년)
팔레르모(1401년~1816년)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루제루 2세(1130~1154)[1] 피디리쿠 2세(1198~1250)
카를루 1세(1266~1285)
언어
이탈리아어, 시칠리아어, 나폴리어, 라틴어
종족
시칠리아인, 나폴리인, 노르만인
종교
가톨릭
주요사건
1130년 건국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 건국
성립 이전
시칠리아 백국
해체 이후
양시칠리아 왕국
1. 개요
2. 역사
2.1. 배경
2.1.1. 중세 초기의 이탈리아
2.1.2. (동로마) 제국의 역습
2.1.3. 중세 초기의 시칠리아
2.1.4. 노르만 인의 도래
2.1.5. 노르만 정복
2.2. 공식적인 건국(1130년)
2.3. 노르만 왕조
2.3.1. 전성기
2.4. 호엔슈타우펜 왕조(독일)(1194~1266)
2.5. 앙주 왕조(프랑스)(1266~1285)
2.5.1. 시칠리아의 만종(1282)
2.6. 바르셀로나 왕조(아라곤)
2.7. 합스부르크 왕조(스페인)(1516~1713)
2.8. 사보이 공국(1713~1720)
2.9. 보르본 왕조(스페인)(1735~1816)
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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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시칠리아어
Regnu di Sicilia
나폴리어
Regno 'e Sicilia
이탈리아어
Regno di Sicilia
라틴어
Regnum Siciliae
스페인어
Reino de Sicilia
프랑스어
Royaume de Sicile
카탈루냐어
Regne de Sicília
독일어
Königreich Sizilien
영어
Kingdom of Sic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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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세기~19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존속했던 왕국이다. 북유럽(노르만)계의 오트빌 왕조, 독일계의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랑스계의 앙주 왕조를 거쳐 아라곤 왕국에 편입되었다. 가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이 모두 거쳐간 시칠리아 위에 세워진 국가로서 다양성이 두드러진 문화를 자랑하였다.

2. 역사



2.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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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반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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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반 이탈리아

2.1.1. 중세 초기의 이탈리아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이후 이탈리아는 오도아케르의 지배를 받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을 지나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6세기 들어 정복에 나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동로마 제국은 기나긴 고트 전쟁(535년 ~ 553년)을 거쳐 서로마의 고토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회복하였다. 562년, 이탈리아 전역은 동로마 군대에 수복되었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남부, 북부 할 것 없이 이탈리아는 황폐화되었고 568년 나르세스 휘하의 게르만 용병으로 쓰였던 롬바르드 족이 남하하였다. 라벤나, 베네치아, 제노바(리구리아) 일대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는 572년에 파비아가 함락되며 롬바르드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반도 중부로 진출, 569년에 토스카나, 570년에 스폴레토 일대를 점령했다. 일부는 571년부터 더 남하하여 반도 중남부 내륙을 정복, 베네벤토 공국을 수립하였다. 7세기를 지나며 동로마는 남부에서는 카푸아, 살레르노, 크로토네 등의 도시를 빼앗겼고, 663년에는 콘스탄스 2세가 친히 반격에 나섰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 이후에는 674년과 717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681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수립, 698년 카르타고 함락, 720년대부터의 성상파괴운동으로 동로마는 국내외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탈리아에 쏟을 여력이 부족했다. 한편, 90여년이 흐른 후 북부에서는 총독부가 위치한 라벤나가 751년에 롬바르드 왕국에게 함락당하였다.
이후 이어진 로마에 대한 위협에 동로마는 교황의 구원 요청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교황은 북쪽의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프랑크 국왕 피핀 3세는 754년과 756년에 롬바르드를 공격, 라벤나를 점령한 후 로마-라벤나의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하면서(피핀의 기증) 교황령이 탄생했다. 한편, 마지막 롬바르드 국왕 데시데리우스는 758년에 북부 왕국과 남쪽의 스폴레토, 베네벤토 공국을 합병하였다. 772년, 롬바르드 군대가 로마에 입성하였고 교황은 재차 프랑크 측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774년, 카롤루스 대제의 군대가 남하하여 교황령을 회복시켰고 결국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776년에 북부 이탈리아가 평정되자 프랑크 군대는 남하하여 그 해 말에 스폴레토 공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2] 이후 베네벤토 공국은 수도인 베네벤토가 제2의 티키눔(파비아)이라면서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786년에 로마를 공격하려 하다가 787년에 프랑크 군대가 살레르노를 포위하자 그 역시 프랑크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
788년에는 데시데리우스의 아들을 앞세운 동로마 군이 베네벤토를 공격하였으나 프랑크-롬바르드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지리적 한계로 인해 791년, 792 ~ 793년, 800년, 801년의 원정에도 베네벤토 공국은 결국 프랑크 제국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다. 한편, 800년 성탄절에 서로마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른 카롤루스는 802년에는 동,서 로마의 제위를 합치고자 동로마 여제 이리니에게 청혼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측에서 거부하자 805년 ~ 807년, 810년 ~ 812년에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양 제국 간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동로마가 카롤루스를 프랑크 인의 황제로 인정하며 일단락되었다. 814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프랑크 제국의 입김은 약해졌고, 베네벤토 공국은 지카르드 공(832년 ~ 841년)의 지휘하에 838년에 일시적으로나마 아말피를 점령하고 나폴리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카르드가 암살당한 후 10여년간 내전이 일어났고, 그의 친척인 지코눌프가 살레르노 공국을 수립하며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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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벤토 공국에서 떨어져 나온 살레르노 공국

2.1.2. (동로마) 제국의 역습


8세기 이후 이탈리아에 거의 신경쓰지 못하던 동로마 제국은 바실리오스 1세 (867 ~ 886년) 때부터 재차 이탈리아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868년, 제국 함대가 달마티아에 대한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이후 아풀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아랍 세력과의 전쟁을 통해 873년에 오트란토, 876년에 바리를 수복하였다.
891 ~ 895년간 베네벤토 공국을 수중에 넣기도 하였다.

2.1.3. 중세 초기의 시칠리아


한편, 652년과 669년에 이집트에서 발진한 아랍 해군의 공격을 받은 시칠리아는 7세기 말엽부터 동로마 제국의 테마가 설치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대에 북아프리카가 평정되며 703년, 728년, 729년, 730년, 731년, 733년, 734년에 집요한 습격이 있었고 740년에는 아프리카 총독 하빕에 의해 시라쿠사가 함락되었다.(다만 베르베르 대항거마그레브가 혼란에 빠지자 곧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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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경의 남부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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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노르만 인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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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년 로베르 기스카르를 위시한 노르만 기사들이 시칠리아 섬을 지배하던 이슬람 군주들을 몰아내고 세력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1130년 시칠리아의 백작인 루제루 2세(Ruggeru II)가 대립교황에게 축성을 받아 성립했다.

2.1.5. 노르만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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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 11세기까지 남부 이탈리아를 놓고 패권 경쟁을 하던 동로마 제국, 롬바르디아 공국들, 아랍 세력을 일망타진했다.

2.2. 공식적인 건국(11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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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노르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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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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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왕국과 동로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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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 안나의 묘비석.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히브리어의 네 언어로 적혀 있다.
킹덤 오브 헤븐 영화에서도 십자군이 거쳐가는 항구 앞 해변에서 무슬림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이 잠깐 나왔듯, 시칠리아는 매우 다문화적인 모습을 띈 곳이었다. 노르만 인들은 반란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슬림,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고 그들을 고위직에 등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독일인들 역시 이를 답습하였고, 따라서 이집트의 사절 파크르 앗 딘은 시칠리아가 기독교 지배를 받는데도 이슬람 예배를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고 시내에 많은 모스크가 있어 놀라웠다고 기록하였다.

2.4. 호엔슈타우펜 왕조(독일)(1194~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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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6년 루제루 2세의 유복녀이자 상속자인 쿠스탄차(Custanza)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권리가 제국의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나 교황은 황제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남부에 뻗치는 것을 싫어 했고[3], 프리드리히 2세콘라트 4세가 잇따라 죽고 콘라트 4세의 아들인 콘라딘의 왕위를 배다른(서자) 숙부 만프레디(Manfredi)가 찬탈하자 프랑스 앙주[4] 백작이며 루이 9세의 동생인 샤를(카를루 1세, Carlu I)를 불러 왔다. 카를루는 만프레디를 전투 중 전사시키고 시칠리아 왕이 됐다. 적법한 왕위를 주장하고 쳐들어온 콘라딘까지도 1268년에 무찌르고 살해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적통 후손을 단절시키자 시칠리아에서 카를루에 도전할 사람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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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시칠리아 국왕으로는 페데리코 1세)가 아풀리아에 세운 가스텔 델 몬테 성채.

2.5. 앙주 왕조(프랑스)(1266~1285)


카를루 1세는 이후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노리고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미카일 8세를 전복시키기 위해 영내의 주민들을 압제하고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 불만에 차 있던 시칠리아 사람들은 1282년 만프레디의 사위이자 아라곤의 군주인 페로 3세(Pero III) 대왕과 미카일 8세의 사주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일으켜 카를루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 나폴리로 달아났고, 국명과 달리 시칠리아 왕국에 시칠리아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나폴리로 쫓겨난 앙주 왕조는 계속해서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했으며 이 앙주 왕조의 시칠리아 왕국은 훗날 나폴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2.5.1. 시칠리아의 만종(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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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바르셀로나 왕조(아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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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독립한 시칠리아는 곧바로 페드로 3세가 왕위에 올라 아라곤 왕국에 속하게 된다. 아라곤 왕국은 1443년 앙주 왕조가 지배하던 나폴리 왕국마저 정복하여 시칠리아 왕위와 함께 나폴리 왕위도 아라곤 왕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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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해상 제국

2.7. 합스부르크 왕조(스페인)(1516~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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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의 이탈리아
1492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스페인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스페인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의 카를5세로 계승됨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압스부르고 왕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패권을 위해 샤를 8세부터 프랑수아 1세까지 줄기차게 8차례에 거쳐 이탈리아에 개입했지만 이탈리아 전쟁 결과 별 소득없이 물러났고, 남이탈리아의 패권은 스페인이 쥐게 되었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팔레르모의 인구는 1600년에 110,000명으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2.8. 사보이 공국(1713~1720)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의 결과로 사보이 공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사보이와 지리적으로 멀었기때문에 곧 시칠리아와 샤르데냐를 맞교환해서 사보이 왕가의 지배는 이탈리아 통일까지 미루어졌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시칠리아를 넘겨받아 잠시 통치를 했다.(1720~1735)

2.9. 보르본 왕조(스페인)(1735~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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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년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펠리페 5세가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재탈환하여 자신의 5번째 아들 카를로스(훗날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를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했고 다시 스페인 왕가와의 혈연관계가 이어졌다.
이후 나폴레옹의 2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나폴리 왕국이 무너지자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시칠리아로 대피해 영국군의 보호를 받았다.[5]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는 잠시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1816년, 남이탈리아 본토의 나폴리 왕국과 1282년 이래 다시 법적으로 합쳐서[6]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재 탄생한다.

3. 관련 항목



[1] 로베르 기스카르의 조카
[2] 789년부터 프랑크계 공작이 다스렸고 10세기 전반에는 로마 교황에 간섭하며 서로마 황제의 관을 지니기도 하였다.[3] 호엔슈타우펜 가는 중앙집권화 및 세속왕권 확대에 진력했고, 그게 후대의 프랑스보다도 훨씬 빨리 이뤄질 뻔도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1세기 전 1차십자군 때의 초절정 교황권은 다소 약해졌던 상황에서, 이런 야심을 가진 신성로마제국에게 남북으로 둘러싸이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4] 앙주 제국 할 때의 앙주와는 봉작명만 같고 전혀 무관하다.[5] 이 때 시칠리아까지 호위한 사람이 다름아닌 호레이쇼 넬슨.[6] 1282년 만종사건으로 시칠리아에서 쫓겨나고부터, 남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 섬은 다시금 같은 군주 밑에 있었던 적도 상당히 길지만, 법적으로는 별개의 동군연합 상태였다가 1816년에야 그게 해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