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켈론

 



1. 개요
2. 역사
2.1. 십자군 전쟁기
2.1.1. 아슈켈론 전투(1099년)
2.1.2. 1차 아슈켈론 공방전(1111년)
2.1.3. 2차 아슈켈론 공방전(1153년)
3. 현대
4. 매체에서 등장


1. 개요


아랍어عسقلان
이스라엘 남부의 항구도시로, 지중해와 접하고 있으며 텔아비브에서 약 50km 남쪽(버스로 약 40분), 가자 지구 경계에서 약 13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슈켈론이라는 이름은 서부 셈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면적은 약 47.788㎢이며, 인구는 2016년 기준 134,454명이다.

2. 역사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항구이며, 서아시아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 중 하나이다. 가나안비잔틴 문명의 유적이 도시 아래에 많이 묻혀 있다고 한다. 아슈켈론은 이스라엘에 저항한 블레셋(필리시테) 인들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매우 번영하였다. 스키타이 인들의 남하 때에 점령된 아슈켈론은 기원전 604년, 격렬한 저항 끝에 가나안 일대의 도시들 중 마지막으로 신바빌로니아에게 함락되었고 본보기를 보이기로 결심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파괴되었다. 노예가 되어 끌려간 주민들은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야 풀려났다. 이후 도시는 페르시아 문화에 크게 영향받았다. 아스켈론은 '아스켈로니안'이라는 붉은 양파의 산지였는데 이는 십자군 시대에 에샬로트란 이름으로 유럽으로 전해진다.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 아슈켈론은 재차 유대 국가인 하스몬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70년경 왕국의 섭정이던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초기 마녀사냥의 일환으로 아슈켈론의 여인 80여명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 도시에선 헤롯 대왕이 태어났다. 비록 헤롯은 로마의 영토가 된 아슈켈론을 직접 통치하진 못했지만 그곳에 목욕탕 등의 건물과 여러 기념물을 세웠다. 기원전 6년, 유대 지방이 로마 속주로 개편될 때에 아슈켈론은 시리아 속주에 남았고 이후 유대 전쟁 시에도 로마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다. 700여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은 후 아슈켈론은 이슬람 시대에 접어들었다.

2.1. 십자군 전쟁기


십자군 당시 아슈켈론은 파티마 왕조의 강력한 전방 요새로써 매년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습격대가 출정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의 남부 장악력은 불안정했으며, 십자군은 아슈켈론 북쪽 30km 내에 이벨린(이브네), 블랑슈가르드(텔 에스 사피), 베스 기벨린(바이트 지브린) 등의 요새를 쌓아 그에 대비할 정도였다. 결국 십자군은 3번의 시도 끝에 결국 도시를 정복하였다(1156년). 이후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의 육로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되었다. 이후 이집트를 장악한 살라흐 앗 딘이 3차 십자군의 리처드 1세에게 휴전 조건으로 십자군의 아슈켈론 포기를 못박은 이유이다.

2.1.1. 아슈켈론 전투(1099년)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자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 알 아프달 샤한샤는 여론에 못이겨 성지 회복을 위한 군사 원정을 준비하였다. 단 며칠만에 2만 대군이 소집되어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십자군은 7월 22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성묘의 수호자로, 8월 1일 아르눌프 드 코퀘스가 예루살렘 주교로 선정하였다. 아르눌프는 8월 5일 성십자가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파티마 조의 사절이 방문하여 십자군에게 예루살렘에서 떠날 것을 요청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그리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병력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나섰다(8월 10일). 기사들이 성문을 나서는 동안 은자 피에르는 가톨릭과 정교회 성직자들과 합동 예배를 드린 후 성묘 교회에서 성전산까지 행진하며 신의 가호를 기원하였다.
고드프루아를 믿지 못했던 레몽 드 생 질과 노르망디 공 로베르는 예루살렘에 남았다가 이집트 군대의 북상에 대한 자기 편의 보고를 들은 후에야 다음날 출정하였다. 그들은 라믈라 인근에서 저번 달에 나블루스를 점령하기 위해 떠났던 탕크레드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후 고드프루아와 레몽이 합세한 십자군은 1천 2백의 기사들과 9천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지를 점령한지 한달도 안되어 병력의 대부분을 이끌고 파티마 대군과 마주하는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웠으나 성십자가와 성창 등의 성유물을 대동한 십자군의 사기는 충만하였다. 한펴 아랍, 튀르크,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쿠르드, 에티오피아 인 등의 다국적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알 아프달은 아슈켈론 항구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자신은 성밖의 알 마즈달 계곡에 주둔하였다. 그는 감히 십자군이 자신의 대군을 대적하러 올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한편 탕크레드가 라믈라 인근에서 사로잡은 이집트 정찰대는 알 아프달의 성향과 병력 규모 등의 유용한 정보를 십자군에게 알려주었다. 8월 11일, 십자군은 아슈켈론 교외에서 풀을 뜻고 있는 소, 양, 염소, 낙타 등의 가축 떼를 발견하였다. 정찰대 포로들은 그 광경이 이집트 측의 전략으로, 십자군이 흩어져 가축들을 약탈하는 동안 손쉽게 그들을 제압하려는 의도라고 말하였다. 십자군은 군대의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 가축들을 대동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2일 새벽 무렵 파티마 진영을 발견한 십자군은 좌익에 고드프루아, 중앙에 탕크레드 & 노르망디 공 로베르, 그리고 우익에 레몽을 배치하곤 전투를 개시하였다. 아직 다수가 잠들어 있던 파티마 군대는 허둥지둥 전투 태세를 갖추고 화살을 날렸으나 곧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에티오피아 군대가 십자군 중앙을 공격하고 이집트 군대가 그들의 후면을 포위할만큼 분전하였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고드프루아가 직접 원군을 이끌고 오자 전세는 역전되었고 기사들의 돌격 앞에 파티마 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파티마 측 중장 기병대가 가담하기도 전에 전투는 한시간만에 끝나버렸다. 알 아프달은 아슈켈론 성으로 도주하였고 십자군은 그의 깃발과 검을 취하였다. 도망치지 못한 이집트 군대의 생존자들은 자비를 청하였지만 십자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일부는 숲의 나무를 타기도 했지만 십자군 궁병들에 의해 사냥당하여 죽었다. 역사가 이븐 알 칼라니시는 이 한번의 전투로 1만 2700명의 파티마 병사들이 죽었다고 추정하였다. 이로써 이슬람권의 첫 예루살렘 탈환 시도는 처참히 무산되었다. 십자군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던 한번의 회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우투르메르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전투 이후 십자군은 버려진 파티마 진영에서 밤을 보냈다. 한편 공포에 질린 알 아프달은 요새화된 아슈켈론도 버리고 살아남은 병력을 챙겨 이집트로 향하였다.
고드프루아는 남겨진 수비대에게 항복을 요구했는데, 성벽 위에서 십자군의 학살을 목격한 수비대는 고드프루아 대신 상식적인 사람으로 통하던 레몽 드 생 질에게만 항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당시 아슈켈론 소유권을 두고 레몽과 다투던 고드프루아는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 역시 지친 군대로 잘 방비된 아슈켈론을 공격할 엄두가 나진 않았다. 결국 십자군은 알 아프달이 남긴 진영에서 할 수 있는 약탈을 한 후 나머지엔 불을 지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후 십자군 중 대다수는 유럽으로 돌아가고 수백명만이 남았다. 하지만 곧 여러 증원군이 도착하였고 파티마 측도 아슈켈론을 십자군에 대항하는 강력한 기지로 활용하며 공방전은 이어졌다. 내분으로 이집트로 향할 기회를 놓친 십자군의 패착이었다. 1101년 1차 라믈라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도 파티마 군대는 아슈켈론으로 후퇴하였다.

2.1.2. 1차 아슈켈론 공방전(1111년)


1109년 7월 트리폴리, 1110년 5월 베이루트, 그리고 같은해 12월 시돈이 함락되자 이제 레반트 해안에 남은 무슬림 도시는 티레와 아스켈론으로 국한되었다. '이집트의 관문'으로 불리며 교역 도시이자 파티마 왕조의 요새 도시였던 아스켈론은 십자군의 입장에서 큰 위협이었다. 따라서 1111년,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의 포위가 시작되었다. 당시 아스켈론의 총독이던 샴스 알 칼리파는 십자군의 연이은 승리에 지레 겁을 먹고 7천 디나르의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공격을 무마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도시에는 십자군을 피해 남하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다수 머물고 있었고 그들은 총독의 비겁함을 지적하며 카이로의 칼리파에게 그를 파면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자신의 탄핵이 제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샴스 알 칼리파는 조정의 처벌을 두려워하며 이집트 관료들을 추방한 후 십자군에 투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십자군 측에게 도시를 넘길 것을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흔쾌히 승낙한 보두앵은 3백명의 기사들을 보내었다. 이에 아슈켈론의 주민들은 분노하였고 사원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111년 7월, 샴스 알 칼리파가 보두앵과 합류하기 위해 성문으로 향할 때에 군중이 그를 덮쳐 난도질하였다. 이후 그의 경호를 맡았던 베르베르인 병사들까지 시민들과 합세하여 성안의 십자군을 찾아나섰고 그들은 성채들에서 저항했으나 결국 3백여명 모두 사망하였다. 뜻밖의 결과를 보고받은 보두앵은 아슈켈론을 포기하고 기독교 영토에 고립된 티레로 향하였다. 수많은 피난민들의 결사적인 저항과 함께 티레 역시 133일간의 포위를 견뎌내었고 1112년 4월 10일의 반격으로 십자군을 격퇴하였다. 오랜만에 각지의 모스크에서 연이은 승전보가 울려퍼졌다.

2.1.3. 2차 아슈켈론 공방전(1153년)


1148년 다마스쿠스 공격에 실패한 2차 십자군의 독일왕 콘라트 3세는 꿩대신 닭이란 의미인지 아슈켈론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미 타격을 입은 다른 십자군이 그를 돕지 않아 포위는 금방 풀렸다. 한편 2차 십자군을 물리치고 1149년엔 이납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국까지 격파한 누르 앗 딘은 시리아를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그 역시 예루살렘 왕국을 정복할 역량은 없었다. 따라서 동쪽에서 전선이 유지되는 동안 십자군이 당시 쇠퇴해가던, 그러나 부유했던 서남쪽의 이집트에 눈길을 돌리는 수순은 당연했다. 1150년,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3세는 파괴된 가자를 복구하고 템플 기사단을 주둔시켜 아슈켈론 일대에 대한 빈번한 습격을 명하였다. 가자는 아슈켈론보다 약 10km 가량 남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아슈켈론은 이때부터 사실상 포위된 것이다.
1152년 친위 쿠데타를 통해 모후 멜리장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보두앵 3세는 같은해 장기 왕조의 공세를 격퇴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십자군의 염원이었던 아슈켈론 정복, 더 나아가 이집트로의 관문 확보에 나섰다. 1153년 1월 보두앵 3세는 예루살렘 주교 풀크와 여러 귀족들을, 그리고 병원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 등 왕국의 병력 대부분이 출정하여 아슈켈론 외곽의 과수원들을 장악하였다. 그중엔 후에 안티오크 공국을 차지하는 르노 드 샤티용도 있었고 당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순례객들도 합세하였다. 시돈에서 발진한 15척의 해군이 항구를 봉쇄함과 함께 포위가 시작되었다. 당시 도시에는 카나니야 부족과 카이로에서 파견된 5백의 기병대가 있었다. 그리고 파티마 조의 와지르 이븐 앗 살라르는 3월경 아슈켈론에 대한 수륙 양면의 지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집트 군대가 빌베이스에 이르렀을 무렵, 직접 함대의 훈련과 급여 문제를 감독하던 와지르 이븐 앗 살라르는 양아들 압바스 이븐 알 푸투가 섭외한 장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4월 3일). 지원군은 다 준비가 된 상태에서 카이로로 회군하였고 압바스는 희망대로 와지르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오직 해군만이 출정하여 5월경 소수의 십자군 함대를 격파하고 아슈켈론 항에 당도하였으나 항만 시설이 대규모 함대를 수용하기엔 미비하여 곧 회항하였다. 사실상 지원이 무산되었음에도 아슈켈론의 수비대는 5개월간 승패를 주고받으며 버텨내었다. 기존에 파티마 조가 신경을 쓴 덕분에 성 내에는 공격군보다 두배 많은 병력이 있었고 1년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구비되어 있었다.
8월, 수비측은 공격측 공성탑에 화공을 가했는데 풍향이 바뀌며 역효과가 났다. 성벽에 틈이 생겼고 이에 지휘관 중 한명인 베르나르가 템플러들과 함께 돌격하였으나 수비군의 반격에 그를 포함한 40여명의 기사들이 전사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요새 외벽에 걸렸고 수급들은 카이로에 보내졌다. 그러자 십자군 내부에서도 포위를 풀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주교와 병원 기사단은 승리가 목전에 있다며 보두앵 3세에게 포위를 지속하자고 권하였다. 3일 후 십자군은 총공세를 펼쳤고 치열한 싸움 끝에 아슈켈론은 함락되었다(8월 19일). 성채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수비군도 3일 후 항복하였다. 주민들은 거취의 자유가 주어졌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집트로 피난하였다.
아슈켈론은 즉시 예루살렘 대주교 산하의 주교구가 되었다. (비록 400년 전엔 베들레헴 주교 하에 있었지만) 모스크는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도시 자체는 보두앵의 동생 아모리가 소유한 자파 백작령에 소속되었다. 이후 자파-아슈켈론 백작령으로 불리게 된 그 영지는 왕위 후계자 혹은 강한 제후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한편 아슈켈론의 상실은 파티마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 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1162년 예루살렘 국왕이 된 아모리는 치세 내내 아슈켈론을 거점으로 5차례의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파티마 왕조는 1171년 살라흐 앗 딘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3. 현대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이집트의 1949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아슈켈론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다.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사건 때 하마스의 단골 공격지였으며, 그 이후로도 틈만 나면 공격받고 있다.

4. 매체에서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