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날짜'''
1119년 6월 28일
'''장소'''
현재 터키안티오키아 지방 사르마딘 부근
'''이유'''
안티오키아 공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아르투크 왕조의 공세
'''교전국'''
<^|1>'''안티오키아 공국'''
<^|1>'''아르투크 왕조'''
'''지휘관'''
<^|1> 안티오크 섭정 루지에로
<^|1> 일 가지
'''결과'''
아르투크 왕조의 대승, 안티오키아군 전멸
'''영향'''
안티오크 공국의 약체화 우트르메르에서의 무슬림, 동로마의 세력 강화
'''병력'''
안티오키아 기사 700, 보병 3000, 아르메니아 왕국 기병 500, 다수의 투르코폴레스 총 5000여명
8,000~40,000명 [1]
'''피해규모'''
'''전멸''', 2명 생존
피해 미상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의 성급한 출격
3.2. 1차전, 안티오키아의 판정승
3.3. 신풍이 불다
4. 결과

Battle of Ager Sanguinis
피의 들판 전투

1. 개요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는 1119년 7월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루지에로가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에게 패퇴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전투로 안티오키아 공국은 대부분의 병력과 섭정을 잃고 위기에 빠졌다. 전장의 이름을 따서 사르마다 전투라 하기도 한다.

2. 배경


1113년, 알레포의 영주 리드완이 사망하면서 알레포-마르딘을 잇는 투르코만 영주들 사이에서 권력 공백이 생겼다. 이는 안티오키아와 에데사 백작령의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 루지에로는 알레포의 영주 루루와 동맹을 맺고 북시리아 일대에서 공국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1114년의 강진으로 안티오키아의 2중 성채가 무너져 방위 공백이 생긴 시점에서도 오히려 허를 찌르는 기동을 통해 셀주크 투르크의 장군 부르수크를 패퇴시켰다. 이 덕분에 공국은 사이자르, 하마 등의 성채를 일시적으로 점령, 많은 전리품과 영토를 얻어내었다. 이런 위기 상황속에서 결국 아르투크 왕조는 일 가지의 기치 아래 집결했고, 1119년, 북시리아를 유린하던 노르만 공국을 토벌하기 위해 집결했다. 이미 1118년에 알레포의 관문이던 아자즈를 점령해 승세를 탄 루지에로와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일 가지를 요격하기 위해 안티오키아에서 집결, 아르타로 향했다.

3. 전개



3.1. 의 성급한 출격


아르타는 안티오키아와 알레포 사이에 있는 요충지이자, 주요 가도들이 놓인 교통 요지였다. 베르나르도 총대주교는 섭정 루지에로에게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1세트리폴리 백국의 폰스 백작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아르타를 굳게 사수하면 일 가지를 패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승기에 취한 루지에로는 현명한 조언을 거절하고 일 가지가 포위공격을 실시하고 있는 알 아타리브의 항구도시로 향했다. 베르나르도는 아르타에 남아 수비를 맡았다. 사실 섭정 루지에로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700여명의 노르만 기사들과, 아르메니아 왕국 출신의 500명의 중기병, 3000여명이 넘는 보병대와 투르코폴레스들로 이루어진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공성중인 일 가지의 병력이 약 3분의 1정도 많은 편이었지만, 포위전을 진행하는 도중 역포위를 가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안티오크의 섭정이 기동을 멈추고 숙영하면서 말라버린 숲과 급경사의 언덕으로 둘러쌓인 사르마다의 버려진 가도에 진을 쳤다는 것이다. 물론 언덕을 끼고 배치한 안티오키아군은 적의 습격을 막아내기 쉬운 위치를 선점했지만, 역으로 자신들의 퇴로도 차단해 버린 것이다. 6월 26일, 뷰에 퐁의 소규모 기병대가 알 아타리브의 일 가지 진영을 기습하여 적을 패퇴시키는 성과를 올렸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일 가지에게 적을 옥죄일 기회를 주었을 뿐이었다.
기습으로 피해를 입은 일 가지는 알 아타리브의 포위를 풀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후퇴했다. 다마스커스의 영주와 투르코만 토후들의 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그의 중신들은 신중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도 루지에로처럼 지원군을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급한 마음에 6월 27일 밤, 재빠르게 루지에로가 있는 사르마다의 가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그날 밤의 기습은 이미 진을 치고 있었던 루지에로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고, 진짜 전투는 6월 28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3.2. 1차전, 안티오키아의 판정승


루지에로는 그의 부대를 5개 제대로 나뉘 편성했다. 적의 포위를 막고 돌파를 쉽게 하기 위해 다섯 제대는 V자 꼴로 배치되었고, 좌,우익은 각각 생 로의 로베르, 수도사 조프리와 피에르, 중앙에는 프레넬의 기가 이끌었으며, 그 자신은 기사대를 이끌고 포진해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레나드 멘소에르라는 기사에게 예비대를 맞기고 투르크 유목민들이 흔히 사용하는 후방 침투에 맞서 후위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아침 나절부터 양익은 투르코만 궁기병들의 화살 세례를 받았지만 안티오키아의 장궁병들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몰아냈다. [2] 전투 초반,수도사 조프리와 피에르가 이끄는 안티오키아군 우익이 적을 돌파해냈고, 중앙의 기병대도 프레넬의 지휘 아래 적 중앙과 맞닥드려 승기를 잡았다. 안티오키아의 궁병대는 적의 머리에 탄막을 날리며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전투는 쉽게 십자군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다.

3.3. 신풍이 불다


전투가 한창일 무렵, 갑자기 강한 북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말라버린 숲에서 먼지바람이 불어와 정통으로 십자군 기사들의 안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좌익은 혼전 양상에서 패퇴로 바뀌었고, 생 로의 로베르가 지휘하는 투르코폴레스 용병들과 십자군 기사들이 앞다투어 루지에로의 중앙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패배의 그림자가 안티오키아 전군을 휩쓸었다. 이 혼란은 잘 싸우고 있던 중앙, 우익으로 전염되어 십자군은 아르투크 왕조의 궁기병들에게 포위당하는 양상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3면 포위에 성공한 일가지는 십자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루지에로는 맹렬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자신의 군기였던 거대한 십자가 깃발 아래로 몰렸다. 수 십명의 투르크 병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칼로 얼굴을 관통당해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레나드 멘소에르의 예비대는 항구로 돌아가 보두앵 왕의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떠났으나, 곧 잡히고 말았다. 4000~5000여에 이르던 안티오크의 야전군에서 살아남은 기사는 단 두명이었다. 대부분은 전사했고, 약 400~5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일 가지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포로가 된 안티오키아의 대법관 월터는 이 광경을 '''피의 들판'''이라고 표현했고, 결국 이 전투의 이름이 된 라틴어 '''아제르 상귀니스'''[3]가 태어났다.

4. 결과


일 가지의 군대는 바로 안티오키아를 공성하러 출전했다. 그러나 일 가지가 승리를 축하하는 주연에서[4] 술병을 얻어 안티오키아의 포위가 늦어졌고, 이 틈을 타 사로잡히지 않았던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급히 수백명의 십자군 병력을 소집하고 안티오키아 방어전을 준비하였다.
트리폴리 백국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를 이끌고 온 젊은 백작 폰스는 안티오키아가 포위되기 하루 전에 겨우 도착해 일 가지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십자군은 합 지방에서 일 가지의 군대를 밀어내고 안티오키아의 포위를 풀어냈다. 하지만, 알 아타리브 항구, 사르민, 제르다나와 같은 북시리아의 도시들이 일 가지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아직까지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2세는 너무 어렸으므로, 새 군대를 꾸려 일 가지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베르나르도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을 안티오키아의 섭정으로 임명했고, 예루살렘의 군대 수천이 안티오키아에 진주하게 되었다.
이 때의 패배로 안티오키아는 만성적 병력 부족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에몽 2세가 장성한 후 노르만 령 시칠리아 왕국에서 수천의 병력을 끌어오지만 이마저도 부족했다.
결국 이 패배로 인해 무슬림에게서의 보호처가 필요해진 안티오키아 공국은 자연스럽게 중흥의 때에 있었던 동로마 제국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에 동로마 제국의 속령이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1] 현대의 역사가들은, 안티오키아군이 기동하자 일시적으로 일 가지가 격퇴당하고 후퇴기동한 점, 지원군을 기다리라는 장군들의 조언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일 가지의 군대가 안티오키아군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애초에 거대한 전제 왕조들인 셀주크와 파티마, 동로마도 4~5만 명을 동원 못하는데, 지방 왕조가 이만큼의 군대를 동원했다고 보기 힘들다. 아마 대패의 충격때문에 생긴 과장이 아닐까.[2] 궁기병이 사격전에서 후퇴했다는 것이 신기할 수도 있지만, 당시 보병의 장궁은 궁기병의 합성궁보다 사거리가 길었다.[3]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단어 자체는 유다가 예수를 팔아 산 땅의 이름을 말하는 성경 말씀에서 비롯되었다.[4] 무슬림은 원래 금주이지만, 투르크족은 종교에 있어서 그리 빡빡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탕(...) 마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