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포 수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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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fo Suárez'''
- 생몰연도: 1932년 9월 25일 ~ 2014년 3월 24일
- 재임기간: 1976년 7월 3일 ~ 1981년 2월 25일
1932년 스페인 아빌라 주에서 태어나 패전한 공화파 가정에서 성장했다. 평전가들에게 따르면 때문에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와 삼촌들이 정치적으로 박해 받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생리에 극도로 민감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배경이 이렇게 중도적이라서 그런지, 직업이 언론사 사장으로 성장했으니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노출 될 기회가 많아서 그랬던지, 프랑코가 죽자 얼마 안가 민주화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며 이를 시행하였다.
그가 이끄는 민주중도연맹이 보수파에 의해 분열되고 그의 정책이 경기 침체와 불투명성으로 비판받자 1981년에 사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레오폴드 칼보 소텔로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사임 직후에는 민주화 이행기 당시의 공적을 인정받아 공작에 봉작되었고 그의 공작위는 귀족중에서도 끝발있는 귀족의 모임인 그란데스 데 에스파냐의 일원이 되었다.
그가 사임한 후 새 총리 선출 과정에서 극우파의 쿠데타가 있었고 본인도 이 당시 국회에서 쿠데타군에게 인질로 잡혔는데, 아돌포 수아레스는 당시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와 함께 눈앞에 총구로 협박하는데에도 너희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냐라는 배짱으로 당당하게 있었다. 수아레스가 쿠데타 상황에서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후안 카를로스와 함께 민주화의 국부로 거론되기에 충분함을 보여주었다. 프랑코 정권이 끝날때부터 군과 마찰을 빚어가며 총리직을 했던 인물의 배짱과 배포를 보여준 장면으로 이 당시의 이미지로 스페인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5위로 손꼽혔다.
2003년 신경계질환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자택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2014년에 만성 폐쇄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비판점도 있었지만, 스페인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마드리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아돌포 수아레스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이 있다. 아무래도 배경 자체가 중도적인 성향이 짙어서인지, 언론계에서 성장하며 자유주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2010년대 작금에 와서 여당 보수 우파 세력인 인민당 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수권 세력으로 평가 한다. 하지만 중도의 한계라는게 그렇듯이 그가 집권 여당으로 이끌었던 민주중도연합 자체가 수아레스 본인의 카리스마와 매력 중심으로 모인 정당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평가는 높아도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 유지를 이어간 계파를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비슷한 성향의 중도 자유주의 성향의 정당이라면 시우다다노스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정당의 역사나 계보로 봐도 21세기의 시민당과 수아레스 총리의 정당이었던 민주중도연합은 하등의 관계가 없다. 시우다다노스는 본질적으로 카탈루냐 내에서 분리주의는 반대하지만 인민당이 대표하는 본격적인 보수 우파 이념과는 또 성향이 안 맞는 사람들이 2010년대에 창당한 신규 정당이고, 수아레스 재임 시절 여당이었던 민주중도연합은 카스티야 중심 전국 정당이었다 전직 프랑코 정권 출신 보수파가 아예 제도적 민주주의 자체를 못 받아들인 극우 세력들이 23-F 사태이후 몰락한뒤 인민당을[1] 따로 차리면서 수아레스 본인의 레임덕 현상과 함께 폭망해서 유의미한 후신을 못남기고 사라졌다.
다만 후신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 아돌포 수아레스가 당시 스페인에서 가졌던 위상을 알려주는데 군부의 힘이 남아있고 사상적으로도 좌우가 갈라진 당시 스페인에서 스페인을 하나로 묶어낸 건 수아레스 총리 본인의 카리스마와 배포였다. 그런 인물이니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총리로 임명한 것이지만 결국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투표, 좌파 정당(사회노동당 및 공산당)의 합법화, 다당제 민주주의를 위한 총선 실시 결과적으로 프랑코 체제의 상징인 조합주의 코르테스를 해체해낸건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원 아래에 군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던 수아레스의 업적이며 이 때문에 수아레스의 퇴진 이후 그에 버금가는 후신이 없을수 밖에 없었다.
[1] 당시 이름은 Alianza Popular, 민중 동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