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F

 

1. 개요
2. 쿠데타의 배경
3. 쿠데타의 발발
4.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움직임
5. 결과
6. 자작극?


1. 개요


1981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 23-F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2월 23일을 의미하는 '''23 de febrero'''[1]의 약자이다. 쿠데타의 주동자인 안토니오 테헤로 스페인 국가 헌병대[2] 중령의 이름을 따 스페인어로는 Tejerazo라 부르기도 하며, 이는 1930년대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 미수를 Sanjurjada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스페인과 중남미권에서는 쿠데타가 딱히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고유의 정치적 전통(...)으로 여겨졌고, 다른 나라의 쿠데타와 비교해서는 황당하지만 저렇게 정부 기관을 장악하기도 전에 "우리 군부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저러저러하게 나약하고 부패한 정부가 나라를 망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라고 '''선언부터 하고 쿠데타질 하는 걸'''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라고 부르며, 개별 쿠데타 사건을 두고 저렇게 그 주동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전통이 있다. 프랑코 정권을 낳은 스페인 내전의 발단이 된 1936년 여름 쿠데타는 일단 개인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3], 저렇게 황당하게 자기 쿠데타 한다고 떠벌리며 사건 터트린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쿠데타가 실패하고 장기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프로눈시아미엔토에 해당되지 않는 예외적인 사건으로 취급한다. 반대로 이 테헤로 중령의 쿠데타는 전통적인 히스패닉권의 쿠데타 행동 양식과 비슷하여 '''최후의 프로눈시아미엔토'''로 취급하기도 한다.

2. 쿠데타의 배경


스페인 내전으로 정권을 장악, 스페인을 철권통치하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1975년 11월에 사망하고 스페인의 권력은 프랑코에 의해 옹립된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넘어가 1931년에 폐지되었던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잘 알고 있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제 군주제를 취하지 않고 프랑코 시대의 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4]
프랑코 정권 말기에 수상을 맡았던 아리아스 나바로가 1976년 7월에 퇴진하면서 스페인의 민주화는 가속화되었다. 후임 수상에 임명된 아돌포 수아레스는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박차를 가해 1977년 4월에는 그동안 불법이었던 스페인 공산당을 합법정당으로 인정했다. 이 결과 스페인 내전 이후 소련에 오랫동안 망명해 있던 라 파시오나리아로 유명한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등이 귀환하기도 했다.
1977년 11월에 열린 총선에서는 수아레스 수상이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의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민주주의로의 급속한 이행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를 '''스페인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워 했다.
하지만 이런 수아레스 총리와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민주화 개혁에 프랑코 총통의 추종자들을 주축으로 한 육군 내의 우파 성향 장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게다가 공산당의 합법화나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20%가 넘는 실업률 등으로 우파 내에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독재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77년 11월 군부 내 우파의 대표적 인사인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과 피타 데 바이가 해군대장이 하티바에서 회동을 가지고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한 뒤 국왕을 앞세운 소위 구국내각을 구성해 의회 권한을 축소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수립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978년 11월에 헌병대의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과 사엔스 데 이네스트리자스 중위가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인 갈락시아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테헤로 중령은 반란모의 혐의로 '''징역 11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갈락시아 계획의 실패 후 군부 내 우파세력의 쿠데타 모의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국내에서는 군부의 쿠데타 소문이 끊이지 않아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3. 쿠데타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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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11개월을 살고 풀려나와 다시 '''헌병대 중령으로 복귀'''한 안토니오 테헤로는 1981년 2월 23일, 200명의 치안 경비대를 이끌고 스페인 코르테스(국회) 의사당에 난입해 350여 명의 국회의원과 정당 대표, 수아레스 총리를 인질로 잡았다.
마침 이날은 수아레스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고 새 총리를 선출, 지명하려는 날이었기 때문에 의사당에는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모여있었고 새 총리의 선출과정을 생중계하기 위해서 방송국과 신문 기자들도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테헤로 중령은 의사당에 난입한 뒤 국회의원들에게 모두 엎드리라 고함을 지르고 쿠데타에 가담한 쿠데타군 병사들이 자동소총과 기관단총을 난사하자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은 의석 탁자 밑으로 엎드렸다. 그러나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와 스페인 공산당의 산티아고 카리요 서기장은 '''내가 왜 니들 말을 들어야 하니?'''라면서 엎드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당시 남겨진 사진들 보면 이 둘은 일부러 쏠테면 쏴 보라는 듯 다리 꼬고 담배피고 있다.(...) 또다른 야당 사회노동당의 펠리페 곤살레스 서기장은 동료의원이 밀어 넘어진 상황이었다.
이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는 반체제 인사로 숱한 고생을 겪어 쿠데타에도 눈 깜짝 안하고 패기롭게 있을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시기 부터 최전선에서 싸우며 망명 시기에는 공산당 당수로서 숟하게 암살,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가 강산이 3번하고도 반 바뀐 뒤에야 모국에 돌아왔던 카리요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살아 보지도 못했던 시대로 역행하려고 드는 철부지들이 고까웠을 것이다. 일단 테헤로 중령에 비해 20년 가까운 연장자여서 볼거 못볼거 다 본 광기의 시대를 겪었고 본인이 내전 도중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공화파가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에게 저지른 파라쿠에요스 감옥 학살 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다.[5] 정치인으로서든 사형집행인으로서든 테헤로에게 겁 먹을 이유는 없었다. 반면 테헤로 중령은 1932년 생으로(같은 시기 한국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동갑) 20살이 되었을 1952년을 기점으로 해도 프랑코 정권의 빈곤은 겪어 보았어도, 공포정치와 피비린내나는 자국민 대학살 숙청이 정점을 이루었던 1940년대에는 열살배기 어린아이였다.
한편 수아레스 총리는 프랑코 정권 시절 RTVE(스페인 국영 방송사) 사장을 맡는 등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한 우익 인사였지만 성품이나 정치적 성향에서는 온건한 인물로 민주화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사람이었고 그만큼의 배짱은 있었기에 현재에도 좌우익 대립이 험악한 스페인 정치판에서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존중하는 초당적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수아레스 총리는 아버지, 삼촌부터 내전 이후 콩밥 먹었던 아빌라의 공화파 가정 출신으로서, 프랑코 정권이 살아 있을 때는 프랑코주의자들에게 순종했지만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공공연히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덕분에 '''프랑코 정권 내의 인사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진 엘리트'''로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게 낙점되었고, 총리로 발탁되었다. 그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성장했지만 프랑코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재임 시기부터 유난히 당시 좌파로 분류되던 언론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망명 후 돌아온 주로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심지어 사석에서는 '''내 본심은 사민주의자요'''라고 종종 말하기까지 했다. 23-F와 수아레스 총리에 대한 서적 중 베스트셀러인 한 순간의 해부학 (Anatomia del instante, 2009)의 저자 하비에르 세르가스의 평에 따르면, '''어떤 사상이던 한번도 진실하게 믿어 본 적이 없고, 그렇기에 또 그 시대에 필요했던 위대한 인물'''이라 평했다. 이 쿠데타가 터졌을 당시의 수아레스 내각은 레임덕으로 인해 이미 해산되었고, 차기 수상에게 인수인계 하던 시절이라 수아레스 총리는 스페인 정치판, 언론 전반에서 까이고 욕 먹던 시점이었으나, 여기서 제대로 된 지도자다운 배짱을 제대로 각인시켜 결국 2007년 안테나 3 방송국에서 진행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은 누구인가'''란 설문 조사에서 '''5위'''를 먹는 기염을 토했다.[6]
또한 마누엘 프라가는 사상적으로 골수 프랑키스타(franquista, 프랑코주의자)라 할지언정 어떤 형식으로든 의회민주정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당장 국회의원 직책 가지고 군부에 개입할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쿠데타에 대해 '''이게 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군인으로서 할 짓이냐, 이런 무법패악질은 프랑코 각하가 살아 계셨어도 인정받을리 없다'''라는 어조로 항의했다.[7]
그리고 '''육군 중장'''이며 당시에는 수아레즈 내각 내 군부의 일원으로서 부총리 자리에 있었던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본인이 1936년 그 쿠데타에 참가하여 스페인 제2공화국을 작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새웠던 골수 군부 인사이자 전직 프랑코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젊은 헌병들이 거의 두들겨 패듯이 앉히려는 것에 저항하며 테헤로와 쿠데타에 참여한 스페인군 장병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시만 해도 징병제가 살아 있어 경직된 군사 문화를 체감하고 살았던 스페인인들은 쿠데타 장면이 생중계되면서 쿠데타 군인들이 까마득한 상관이었던 구티에레즈-메야도를 거칠게 대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당시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군인 → 내전 참가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나갔으면서 팔랑헤 초창기 멤버였으나[8], 스페인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문민 내각에서 부총리직을 수행하며, 수아레스 내각이 추진한 군부 개혁으로 선임 장교단을 몰락시켰다고 인식하고, '''군부의 배신자로서''' 스페인 군부가 찢어죽이려고 이를 바득바득 갈던 인물이다. 구티에레스 메야도 본인은 결코 공개 석상에서 이를 인정한 적은 없지만 말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민주화, 현대화가 이루어진 다른 나라 군인들과 교류하며 생겼던 심정 변화를 토로하곤 했다. 말년에는 젊었을 때 쿠데타에 가담하여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확실히 느꼈으며, 이에 기반한 회개 의식에서 수아레스 총리와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적으로까지 상당히 친밀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에 가담한 헌병들은 구티에레스 메야도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등 뒤에서 심하게 어깨를 찍어 누르는 등 강압적으로 앉히려고 했으나,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총리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수아레스 총리가 '''친구로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 나를 봐서라도 앉아 달라'''라고 호소하여 겨우 자리에 앉았다. 이 장면들은 고스란히 TV를 통해 스페인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와 같은 시각에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이 이끄는 전차부대가 발렌시아마드리드로 난입해 마드리드에 있는 RTVE(스페인 국영 TV방송국)을 점령했다.
하지만 행동대장 격이었던 테헤로가 무력으로 의회를 점거하고, 미란스 델 보슈가 발렌시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른 사단장들을 설득할 동안, 국왕과 문민 정치인들과 협상하는 역할, 즉 쿠데타의 정치적 브레인이자 주동자 중 가장 높은 계급에 있었던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이 예측했던 바와는 반대로 사상적인 차원에서든, 제도적인 차원에서든, 표현의 형태로든 스페인 정계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코 정권 출신의 민간 정치인 동지들에게 버림 받은 순간 쿠데타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비에르 세르카스를 비롯한 현대 스페인의 지식인, 언론인들은 좌우익 상관 없이 민주적 과정에서 벗어난 정권 찬탈 시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스페인 내전기와 프랑코 독재를 상징했던 세명의 거두[9]가 힘을 합쳐 몸으로 쿠데타를 막았던, '''진정한 스페인 민주주의가 탄생한 순간'''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그리고 쿠데타 주동자들의 내부 결속 또한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쿠데타 발발 전만 하더라도 계급과 정계, 왕실과의 연줄로 쿠데타의 주동자 노릇을 했던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 장군은 막상 본인이 쿠데타의 주동자이면서도 테헤로, 미란스 델 보슈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르마다는 민주주의 체제를 역행하는 것엔 관심도 없고, 다만 후안 카를로스의 전직 개인 교사이자 비서로서 누리던 총애와 관심을 수아레스 총리가 뺏어갔다는 지극히 사소한 개인적 원한으로 쿠데타를 결행한 것이다. 테헤로와 보슈가 '''프랑코 장군이 세우신 위대한 스페인을 의회 정치, 민주주의, 계몽주의로 타락시키려고 하는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에 대항하여 1936년의 성전을 다시 일으키려던 와중에''', 아르마다는 도저히 받아 들일수 없는 '''공산당만 빼고''' 나머지 정당들을 규합해 좌우파를 막론한 거대 정당 정치인들과 차기 정권에서 군부의 지분에 대한 협상을 하고 있었다.
아르마다는 태생부터 직업은 군인이지만 실제 하는 일은 궁정의 고위 귀족에 가까웠던, 왕가와의 연줄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귀족 정치군인 가문 태생으로, 일반적인 보수 우익 수준의 반공 의식을 제외한다면 뚜렷한 정치적 지향점도 없고, 민주정 같은 건 안하는게 좋지만 그걸 또 막는다고 국가적 난리를 칠 마음은 없는 구시대 엘리트 기회주의자였다. 게다가 본인의 정치적 영향력도 프랑코 정권 말기 차기 후계자로 내정 받았던 후안 카를로스의 비서 겸 개인교사로서 생긴 연줄이었으니 '''아르마다 입장에서 뭔짓을 하던 국왕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건 그냥 자살''' 수준으로 멍청한 짓이었다. 미란스 델 보슈는 사상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반대했으나, '''근왕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정을 반대했기에 민주정을 전복하고 싶어했지만 이를 이루려고 국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반면 테헤로는 '''국왕이 프랑코 각하의 유지에 반하며 민주주의를 도입하려고 들면 국왕도 때려잡아야할 빨갱이에 불과하다'''는 골수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았기에 하술된 국왕의 호소가 발표된 다음에도 한동안 점거를 풀지 않았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쿠데타가 터진 그 순간까지 자신들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테헤로가 국회를 점거해 놓으니 아르마다는 멀리서 전화로 "수고했네. 이제 내가 민간 정치인들과 '''협상'''을 할 테니 자네는 물러나 있게."라는 식으로 나오자 아르마다는 물론, 아르마다와 마찬가지로 멀리서 전화로 자신을 통제하려고 했던 보슈에게까지 뻣대면서 결국 쿠데타 자체를 주도했던 두 상급 지휘관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상술한 하비에르 세르카스는 이를 두고 "아르마다는 수아레스의 타도를 목표로 하고 의회민주정과 국왕은 그대로 두는 쿠데타를 꿈꿨고, 보슈는 의회민주정은 전복하겠지만 국왕은 건드리지 않는 쿠데타를 꿈꿨으며, 테헤로는 민주정을 전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국왕이 쿠데타에 반대한다면 국왕까지 폐위하려는 쿠데타를 상상했다"라고 하며, 어찌 보면 영화 라쇼몽이 생각나는 동상이몽 때문에 쿠데타가 틀어졌다고 표현했다.
현대 스페인의 보수 우익은 왕당파가 다수이지만 보수 우익이라고 해서 스페인 왕정이 이미 한번 날아 갔다가 프랑코 덕분에 어거지로 돌아왔다는 역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70-80년대만 하더라도 테헤로처럼 '''왕가도 빨갱이'''라는 식의 골수 우익 문자 그대로 파시스트들도 꽤 있었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수아레스와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사후 몇년 동안은 군부에게 '''선거나 의회는 장식일뿐, 국정 주도권은 여전히 군부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메세지를 끊임 없이 보내야 했고, 결국 뒤늦게 군부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이 기만당했다는걸 깨닫게 되자 이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쿠데타를 계기로 이렇게 군부 내에서 '''왕실로도 속이 안차는 골수 파시스트'''들이 줄줄이 몰락해서 스페인 민주정은 극우파의 위협에서 한풀 안전해 질 수 있었다.

4.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움직임


쿠데타 발발 후 육군 참모총장인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 장군은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전화를 걸어 왕궁에서 알현을 요청했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코민 장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본토와 발레아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등 각 지역의 주둔군 사단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쿠데타에 동조, 참여하지 말것을 명령했다. 이 때의 사단장급 장성들 대부분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 알게 되어 친해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국왕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쿠데타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10]
헌병대 사령관인 아란블루 트페테 장군이 테헤로 중령에게 쿠데타를 멈추고 투항할것을 설득했지만 테헤로 중령은 거부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코민 장군도 테헤로 중령을 국외로 망명시키려고 설득했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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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로 중령이 투항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직접 스페인 육군 정복을 입고 쿠데타군이 방송국을 점령하기 전에 빠져나온 취재진들을 통해 기자회견을 열어 그날 밤, 스페인 전국에 자신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에게 쿠데타군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텔레비전 연설. 육군 정복 차림으로 등장해 민주세력의 지지를 호소했다. 끝에 스페인 국가가 연주된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Al dirigirme a todos los españoles, con brevedad y concisión, en las circunstancias extraordinarias que en estos momentos estamos viviendo, pido a todos la mayor serenidad y confianza y les hago saber que he cursado a los capitanes generales de las regiones militares, zonas marítimas y regiones aéreas la orden siguiente:

모든 스페인 국민들을 위해 확신과 절제함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저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의 평화와 신뢰를 묻습니다. 저는 육해공군 전 장병들에게 다음 명령을 하달한 사실을 통보합니다.

«Ante la situación creada por los sucesos desarrollados en el Palacio del Congreso y para evitar cualquier posible confusión, confirmo que he ordenado a las Autoridades civiles y a la Junta de Jefes de Estado Mayor que tomen todas las medidas necesarias para mantener el orden constitucional dentro de la legalidad vigente. Cualquier medida de carácter militar que, en su caso, hubiera de tomarse deberá contar con la aprobación de la Junta de Jefes de Estado Mayor.»

국회의사당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상황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나는 행정 당국과 합참이 헌법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만일 (어떤) 군사적 조치가 취해질 필요가 제기될 경우 합동 참모가 승인해야 합니다.

La Corona, símbolo de la permanencia y unidad de la patria, no puede tolerar en forma alguna acciones o actitudes de personas que pretendan interrumpir por la fuerza el proceso democrático que la Constitución votada por el pueblo español determinó en su día a través de referéndum.

국가의 영속성과 단합의 상징인 국왕은 국민 투표에서 스페인 국민이 승인한 헌법의 민주적 절차를 무력으로 중단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모든 행동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결국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쿠데타에 참여한 헌병들은 총기를 버리고 의사당에서 탈출했다.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은 테헤로 중령은 중위 이하의 헌병대원들이 기소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4일 새벽 인질로 잡고 있던 국회의원들을 석방한 뒤 항복했다.

5. 결과


당초 쿠데타 세력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를 바탕으로 구국내각을 구성해 군사독재를 부활시킬 작정이었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반대로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군부의 위신은 추락했다. 23-F 이후로도 군부가 쿠데타를 도모하는 일은 몇 번 있었지만 기도 단계에서 발각되었고, 얼마 못가 사회노동당이 집권하여 숙군작업을 펼침으로써 스페인의 민주화는 확고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숙청이라고 해봤자 불건전한 사상들을 그냥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살게 되어야 했던 정도 밖에 안되어서, 지금도 스페인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스페인 국내에서도 말이 많이 나오곤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미란스 델 보슈 육군대장과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 아르마다 장군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최종심에서 테헤로 중령과 보슈 육군대장은 30년형, 아르마다 장군은 26년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테헤로 중령은 스페인 단결당(Solidaridad Española)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1982년 총선에 옥중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선에는 실패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테헤로 중령이 1996년에 석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쿠데타 주동자인 테헤로 중령은 석방된 후 고향인 말라가에서 미술가로 살고 있다.(...) 석방 이후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망언들을 내뱉으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조용히 생활하는 중. 보슈 대장은 1991년에 사면되어 조용히 마드리드에서 살다가 1997년에 뇌종양으로 죽었고, 아르마다 장군은 건강상의 이유로 1988년에 사면을 받아 석방된 이후 갈리시아에서 조용히 살다가 2013년에 사망했다.

6. 자작극?


한편 스페인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스페인의 저명한 작가인 호세 루이스 데 비라젠가 후작 등은 이 쿠데타에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연관이 있는 은행가나 가톨릭 교회 인사 등의 민간인들이 후원하고 있었음을 들어 의혹을 보내고 있다. 이런 자작극 의혹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긍정도 부정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일단 후안 카를로스가 스페인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경력이니 이게 사실이면 후안 카를로스 뿐만 아니라 보르본 제3차 복고 왕정 전체의 정통성과 명분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 스페인 정국 전체를 시궁창 대혼란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의혹이지만, 그 민감성도 워낙 절대적이다 보니 아직은 의혹 수준에 멈추어 있다.
그리고 상술한 하비에르 세르카스를 비롯한 다른 이 사건에 대한 전문가,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국왕이 쿠데타를 원했으면 진짜로 이루어지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국왕의 의중은 그냥 악세사리에 불과하고 프랑코 독재 체제 부활을 추구했는데 이 와중에서 국왕이 반대한다면 국왕도 쳐버릴 파시스트들이 그런 자작극에 넘어가고도 지금까지 아무런 폭로도 없었을리가 있냐"며 가치 없는 루머로 취급한다.

[1] 즉 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2.23 군사반란 정도쯤 되겠다.[2] Guardia Civil: 과르디아 시빌[3] 프랑코는 쿠데타와 내전 초기에는 공화국과 좌파에 반대한다는 것만 빼고는 딱히 구심점이 없었던 국가군 진영의 유력 지도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4] 실제로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시키면서도 정작 정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으며, 이에 카를로스 1세가 정치에 대해서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프랑코는 '''"지금의 통치 방식은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안될 것이니 저에게 묻지 마세요."'''라고 잘라 말했다. [5] 본인은 부정했지만 당시 역사적 기록과 교차 증언을 참고하면 카리요가 지휘했던 사건이란게 거의 확실하다. 학자들에 따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단위 이상의 규모라고.[6] 해당 설문조사에서 1위는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고, 2위에서 5위까지 각각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소피아 왕비가 차지했다. 1위에서 5위 중에 3명이 결국 프랑코 정권 말기와 민주화 과정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현대 스페인 사회의 역사인식에서 내전, 프랑코 독재, 민주화의 경험이 가진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7] 수아레스 총리와 마누엘 프라가는 모두 스페인의 정치 지형에서 우파로 평가되는 인물이지만 둘은 이념이 다르다. 마누엘 프라가는 오늘날 스페인 우파 주요 정당인 국민당을 창당한 사람인데, 마누엘 프라가와 국민당(스페인 전 총리 마리아노 라호이의 정당)은 사상적으로 프랑코주의자들 중에서 테헤로보단 덜 과격한 인사들이 제대로 된 내부 합의도 없이 어물슬쩍 현대적 보수우익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기에 아직도 골수 프랑코주의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초당파적 포용력은 아돌포 수아레스 수상과 옛 중도민주연합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수아레스는 마리아노 라호이 전 총리보다도 훨씬 더 합리적이고 초당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8] 팔랑헤는 34년 세워졌고 이 사람은 35년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이 터지기 이전 팔랑헤의 규모는 미미했다.[9] 공산당, 공화주의자 - 카리요, 독재 정권의 테크노크라트 - 수아레스, 열정적인 프랑코주의자였고, 퇴역 중장이었던 구티에레스 메야도[10] 참고로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사관학교로 보내 군사 교육을 받게 한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설적이게도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군내 인맥을 탄탄하게 만들어준게 나중에 쿠데타를 막아내고 프랑코 이후에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에게 후안 카를로스의 정치는 본인의 정치와 다를 것임을 이야기한 적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