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카를로스 1세
1. 개요
Juan Carlos I
스페인의 전 국왕. 1975년부터 2014년까지 약 40여 년간 '''스페인의 19대 국왕'''을 역임했다.[1]
공식적인 칭호는 '스페인·카스티야·레온·아라곤·양 시칠리아·예루살렘·나바르·그라나다·톨레도·발렌시아·갈리시아·마요르카·세비야·사르데냐·코르도바·코르시카·무르시아·메노르카·하엔·알가르브·알헤시라스·지브롤터·카나리아 제도·스페인 령 동인도 및 서인도 제도의 왕, 오스트리아의 대공, 부르군트·브라반트·밀라노·아테네 및 네오파트라의 공작, 합스부르크·플랑드르·티롤·루시용 및 바르셀로나의 백작, 비스케이와 몰리나의 영주(Rey de España, de Castilla, de León, de Aragón, de las Dos Sicilias, de Jerusalén, de Navarra, de Granada, de Toledo, de Valencia, de Galicia, de Mallorca, de Sevilla, de Cerdeña, de Córdoba, de Córcega, de Murcia, de Menorca, de Jaén, de los Algarves, de Algeciras, de Gibraltar, de las Islas Canarias, de las Indias Orientales y Occidentales y de las Islas y Tierra Firme del Mar Océano, Archiduque de Austria, Duque de Borgoña, Brabante, Milán, Atenas y Neopatria, Conde de Habsburgo, Flandes, el Tirol, el Rosellón y Barcelona, Señor de Vizcaya y Molina)'이다.
스페인 왕은 과거 보유했던 칭호들은 현재 상태와 상관없이 그대로 보유한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결과로 없어진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합스부르크 동군연합이 유지되던 짧은 시기의 지위인 오스트리아 대공위,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벨기에의 독립으로 상실된 플랑드르 백작위 등이 그러하다.
2. 생애
2.1.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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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1세(左),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中), 아들 펠리페 왕세자(右). 1989년 7월 16일 촬영.[2]#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며 193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알폰소 13세 일가가 스페인 내전 때문에 로마에 망명해 있던 상황이었다.[3]
섭정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자신의 사후''' 왕정이 부활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오랜 새 왕가 물색 끝에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선택하여[4] 1969년부터 차기 왕위계승자의 위치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의 왕위계승자에게는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가 부여되나(영국의 왕위계승자에게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칭호가 부여되는 것과 같은 이치)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스페인 공(Príncipe de España)'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계승서열을 따진다면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왕위계승자가 되어야 했지만[5] 그의 자유주의 성향을 꺼린 프랑코는 후안의 아들을 대신 지명했다.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코가 죽는 순간까지 프랑코에 저항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그가 지목했던 후계자는 블랑코 제독이었고 프랑코는 블랑코 제독을 1973년 수상에 임명하면서 그에게 권력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스페인 군부도 예전에 쫓겨난 왕실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었고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애송이라고 조롱했다. 그런데 블랑코 제독이 수상에 임명된지 얼마 안 되어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 ETA의 테러로 암살되면서[6] 프랑코는 당황하였고 하는 수 없이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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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대신해 왕위계승자가 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가 죽은 직후인 1975년 11월 왕위에 올라 왕정복고를 실현했다. 군주제 1차 내각으로 과거 프랑코가 임명했던 아리아스 나바로 내각이 유임되었고 1976년 1월 28일 코르테스 선언은 프랑코 체제와 스페인 왕국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과거 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후안 카를로스 1세 치하의 스페인이 과거와 다를바 없는 군사독재로 흘러가는 듯하였고 벙커파를 비롯한 프랑코주의자들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카우디요를 대신한 철권통치를 하길 바랐다. 이에 전 세계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어떤 통치를 할지를 주목했다.[7] 당시 스페인은 마드리드에서만 20만 명이 파업했고 2400개의 단체가 파업을 일으키는 등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고 스페인 경제는 악화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가중되고 있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체제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카드라는 것을 인식했고 나바로 총리를 벙커파의 기수라고 비판하는 등 압박하여 자진 사퇴하게 했다. 그리고 1976년에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에 임명하고 민주화 개혁에 착수했다. 수아레스 역시 프랑코 정권 시절의 테크노크라트였으므로 민주주의 세력은 처음엔 수아레스의 총리 임명에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고 실망했지만, 수아레스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천명하고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투표, 좌파 정당(사회노동당 및 공산당)의 합법화, 다당제 민주주의를 위한 총선 실시를 약속했다. 그리고 프랑코의 조합주의 코르테스 해체를 주장하는 등 본격적으로 프랑코 체제의 해체를 '법에서 법을 통한' 체제 안에서의 개혁의 방식으로 추진했다. 한편 그 때까지도 스페인 왕위를 주장했던 후안 백작은 아들의 민주화 노력을 보고 아들을 스페인의 국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왕위계승권을 포기해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7년 6월에는 전국 단위의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스페인 역사에서 약 40여 년 만의 총선거였다. 총선으로 소집된 새로운 양원제 의회는 1978년에 민주주의, 의원내각제, 지방자치, 양원제,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현행 스페인 헌법을 제정하여 공식적으로 프랑코 체제를 해체한다.
2.2. 민주주의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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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정치개혁에 반대하는 스페인 군부 내 일부 극우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각 각료와 국회의원 350여명을 인질로 잡고 그에게 프랑코 체제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23-F라고 한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후안은 각 지역 사단장들에게 쿠데타에 참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모두가 이에 복종했으며[8] '''육군 원수 예장차림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쿠데타 세력에게 항복을 요구함과 동시에 민주 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전 국민에게 호소했다.'''
결국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적극적인 반대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때 계급 타파가 지상 과제라는 스페인 공산당의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조차 "오늘 우리는 전부 왕당파다! 후안 카를로스 1세 만세!"라고 외쳤다고. 스페인 내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자세한 내막은 해당 항목 참고.
2.3. 국왕으로서의 업적
1982년에 프랑코 사후 최초의 사회노동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스페인의 민주정은 안정화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입헌군주정과 민주정의 취지에 맞게 정치 개입을 자제하여 스페인 정치에서의 국왕의 역할을 확립했다. 그의 정치적 역할은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역할과, 정국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정파 간 협상을 중재하는 정도에 그쳤다. 국왕은 헌법에 따라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권한은 오로지 내각의 조언에 따라 행사될 뿐이었다.
더불어 스페인의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민주화를 추진하여 프랑코 정권의 독재로 인해 추락한 스페인의 외교적 위상을 복구해 스페인의 NATO 및 유럽공동체 가입에 큰 역할을 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악화되어가던 바티칸과의 관계도 개선했다.
2.4. 재위 말년의 굴욕, 그리고 퇴위
2007년에 가장 존경스러운 스페인인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왕이었지만 경제난 와중에 각종 병크를 터트리면서 후안 카를로스의 1세의 지지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14일, 코끼리 사냥을 하려고 보츠와나를 방문한 국왕이 . 불과 몇 주 전에 '청년 실업과 경제 위기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말한 국왕이 한 마리 사냥에 9천~2만 6천 달러가 들어가는 여흥을 즐기러 해외 여행을 나갔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라 스페인의 여론이 악화된 상황. 게다가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동물보호단체인 '월드 와일드라이프 펀드'의 명예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비난 여론이 더 거세다. 결국에는 사상 최초로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 사과를 했지만 하기 전에도 '국왕의 사과는 전례 없는 일'이라며 사과를 거절했다가 혹독하게 비난받았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민주적'인 이미지와 국민들의 지지는 이 사건으로 한 순간에 날아가버렸다.'''
참고로 저때 받은 엉덩이뼈 수술의 후유증 때문인지 공식석상에 나올 때 보조 기구를 한동안 차고 다녔다. 상태가 호전돼 보조 기구의 도움 없이 다니게 된 후에도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녀서 건강 악화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에 독일 여성과 염문설이 터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2010년대 경제 위기 때문에 스페인 본토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는데, 왕가의 이런저런 삽질로 왕실에 대한 여론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9] 프랑코 사후 현대 민주 스페인 체제 자체가 내전기와 프랑코 독재 50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에서 받은 상처를 경제 성장과 사회적 자유화의 물길을 타고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땜빵해 놓은 성격이 짙었는데, 경제 위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 평소에는 소수 의견으로만 존재했던 공화정 복고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10]
후안 카를로스 본인이야 뭐... 요즘 취급이 말이 아니기는 하다만 그래도 왕년의 업적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고, 또 평생 일다운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팔순 노친네를 갑자기 실직자로 만들 수야 없는 노릇이니 이 영감이 만년에 아무리 삽질을 하고 다녀도 스페인 국민들이 그냥저냥 참고 봐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아들 대까지 지금의 경제 위기와 왕실에 실망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물려받을 왕위 자체가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11] 통계 자료가 들쭉날쭉 하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비율은 20%가 안 되었는데, 언론사마다 성향이 다른 걸 감안 하더라도 2013년에는 국민의 과반수가 넘는 비율이 공화국을 지지한다고 응답하였다. #
후안 카를로스가 2000년대까지 스페인에서 무한하게 누렸던 존경과 경의는 사실 프랑코 체제 사후였다는 특수성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프랑코 사망 직후 1977년 몬클로아 협정 체결과 내전 이후 최초의 성공적인 총선, 1978년 신헌법 통과, 1981년 2월 쿠데타 시도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몇 년 동안 막 나가던 극좌파계 테러 집단[12] , 테러 집단은 아닌데 어쨌든 같이 신나서 다시 튀어 나온 CNT, UGT, 등의 좌파 거대 노조들과 각종 단체들, 또 프랑코 정권이 수립한 스페인 민족국가에 대한 도전과 변경도 거부해 마치 벙커에 들어 박힌 양 군다고 당시 '벙커파'라 불렀던 군부와 정계 내 극우 인사, 이런 극우 성향을 행동으로 옮기며 2번째 항목, 즉 합법화된 좌익 노동운동가들이나 변호사 등에게 테러 하고 다녔던 극우 테러단체 [13] , 기존의 좌우 내전 시절 정치 대립에는 관심 없이 어쨋든 여기 저기 폭탄 싸재끼고 다닌 ETA, 또 이 ETA보고 우리도 저리 해야 한다며 강경해지는 카탈루냐, 갈리시아의 민족주의 세력 등이 막 섞여서 서로 신나게 테러를 벌이고 다니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국민 전체가 '이러다가 2차 내전 터지는거 아니냐.'고 두려움에 떨던 불안한 시대였다.[14] .
후안 카를로스의 인기는 2월 쿠데타 진압으로 민주화 과정의 잡음과 두려움, 불안정을 잠재우고 부드러운 체제 변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절대적이었던 것인데, 당연히 정권 교체기의 살얼음판 같았던 불안함과 누구든 좋으니 2차 내전만 막아 달라는 두려움 따위는 기억에도 없는 젊은 층에게 딱히 어필할 요소가 없다. 말년의 굴욕은 스페인 정치사회가 프랑코 정권의 그림자를 벗어 나면서 그 그림자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수혜자였던 후안 카를로스에 대한 경의도 사라져 가는 것이다. 여기에 3년여 만에 8차례나 수술을 받는 등 정상적인 공무 수행을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펠리페 왕태자에게 양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 왕실과 총리는 양위 가능성을 부인했으나, 결국 2014년 6월 2일 국왕이 퇴위한다고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위한 지 약 40년, 예전같지 않은 건강에다 떨어진 인기, 왕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증가 등을 의식해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퇴위한 당일 전국에서 개헌 요구 시위가 터지는 등# 퇴위한다 해서 상황이 안정되지는 않았다. 11일, 스페인 하원에서 찬성 299표, 반대 19표, 기권 23표로 국왕의 퇴위 동의안을 승인했다. 17일 상원에서도 퇴위 동의안을 승인하여 펠리페 왕태자가 6월 19일에 펠리페 6세로 즉위했다.[15]
퇴위하고 조용히 사나 싶었는데, 퇴위 후 고작 한 달여만인 2014년 8월 초에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자신의 친부라고 주장하는 Alberto Sola라는 남성과 Ingrid Sartiau라는 여성이 각각 나타나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시 파문이 커졌다. 부랴부랴 퇴위하고 양위한 이유가 알고보니 이것 때문이었냐는 비난의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원래는 재위 기간에만 적용되는 면책특권을 퇴위 후에도 적용되도록, 퇴위 직전에 의회에서 통과시킨 것으로 알려져 더 비난을 샀다.
이렇게 통과시킨 면책특권 덕에 친자확인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고, 스페인의 상급 법원이 친자확인 요구를 할 수 있는 권한은 있다지만 2017년 9월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이에 Ingrid Sartiau는 2017년 6월 기준 본국인 벨기에에 머물고 있으며 소송을 절차대로 진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스페인 국적인 Alberto Sola는 상술했듯 전 국왕의 면책특권 때문에 친자확인소송이 기각되어 2015년 이후 특별한 소식이 없다.
그래도 2015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율은 41%로 높은 수준이다. 펠리페 6세의 지지율은 66%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2018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내연녀로부터 탈세와 돈세탁 혐의로 고발당했다. 내연녀의 주장에 따르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자신의 이름으로 모로코에서 쇼핑을 했으며, 스페인이 낙찰받은 사우디아라비아 하라마인 고속철도 사업에서 공사대금 2억 1천만 유로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고 지연된 것을 중재하는 대가로 수수료 8천만 유로를 받아 사촌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스위스에 보관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내연녀는 앞서 언급한 문제의 그 코끼리 사냥 여행을 주선한 그 사람이라고 한다.
2019년 6월에 완전한 공직생활도 은퇴하였다.#
2020년 3월에 왕실 배당금을 박탈당했다.# 위의 부패 스캔들로 여론이 악화되자 스페인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전직 국왕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상 해외도피를 한 셈이다. 8월 3일에 아랍에미리트(UAE)에 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스페인에서는 급기야 후안 카를로스의 이름을 없애려는 듯한 움직임도 있다.#
신용카드 부정 사용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이 67만8천393.72유로(약 9억원)에 달하는 미신고 세금을 일괄 지불했다.#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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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출신 공주인 소피아 왕비[16] 와의 사이에서 엘레나 공주, 크리스티나 공주, 펠리페 6세 등 1남 2녀를 두었다.
10대 시절 남동생 알폰소(생몰년도 1941~1956)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있다. 1956년 3월 29일 포르투갈에서 부활절 가족 휴가를 즐기던 중 알폰소가 의문의 총기 사고로 사망한 사건인데, 공식적으로는 알폰소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라고 발표되었으나 어머니인 바르셀로나 백작부인 소피아와 그녀의 의상 제작자인 조세피나 카롤로가 '''후안 카를로스가 동생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증언을 했다. 또 그리스의 작가인 헬레나 마테오풀로스도 후안 카를로스의 누이 필라르에게서 후안 카를로스가 총을 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3.1. 엘레나 공주
이혼 전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스페인 국내에서도 탈세와 비리를 저지르며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킨 여동생 크리스티나 공주보다는 낫다는 평을 받고 있다.
3.2. 크리스티나 공주
2012년 2월 25일, 왕의 둘째 사위로서 크리스티나 공주의 남편인 이냐키 우르단가린이 사기와 횡령 등의 혐의로 법정에 출두해 왕실 체면에 먹칠을 했다. 2013년에는 왕실 인사들이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다. 2015년 6월 12일, 펠리페 6세가 누나 크리스티나 공주가 받았던 팔마 데 마요르카 여공작 작위를 박탈했다. 재판을 앞두고 공주측 변호인이 작위 박탈을 반려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자 왕이 편지를 받기 전에 먼저 결정한 것. 2016년 1월 11일,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형사재판 법정에 남편과 함께 섰다.
4월 18일, 공주 부부를 고소했던 시민단체 대표가 소송 취하를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 혐의로 구금되었다.
크리스티나 공주는 기소된 이후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자신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너무 바빠서 남편과는 제대로 얘기한 적도 없었고, 전부 남편이 주도한 일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크리스티나 공주의 전략이 먹혀들었는지 결국 2017년 2월 17일 마요르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 남편은 6년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일단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지만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불법으로 취득한 이득(???)'''을 반납하라는 처분을 받아 횡령액의 일부를 국가에 환수당하게 되었다. 자기 계좌에 돈은 받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이 받아서 무죄, 다만 받은 돈은 환수하라는 괴상한 판결이 나오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로 크리스티나 공주는 현재 스페인 왕실 일가들 사이에서도 미움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특히 남동생 펠리페 6세 현 국왕은 크리스티나 공주에게 내려진 공작 작위를 박탈한 것으로도 모자라 둘째누나의 왕궁 출입 권한까지 제한해버리며 둘째누나를 아예 노골적으로 적대하고 있다.
3.3. 펠리페 6세
4. 여담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먼 후손이기도 한데, 정확히는 루이 15세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딸 파르마 공녀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 페르난도 7세의 후손이다.[19]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요트 선수로 참가한 경력이 있다.
1996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공식 방한한 바 있다.
2007년 11월 10일,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20] 정상회담장에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마이크가 꺼져 있는 상태에서도 스페인의 전 총리 호세 마리아 알프레도 아스나르 로페스(José María Alfredo Aznar López)를 비난하면서[21] (당시) 총리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José Luis Rodríguez Zapatero)의 발언을 방해하였다. 당시 차베스의 발언은 아스나르(우파)의 정책에 반대했던 당사자인 사파테로(좌파)마저도 듣다 말고 황급히 아스나르를 옹호해줘야 했을 정도로 심한 막말이었다.이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너!(¡TÚ!)"[22] 하고 주의를 주었지만(위 영상의 16초쯤) 씨알도 먹히지 않자, "'''그 입 닥치지 못할까?'''(¿Por qué no te callas?)" 로 일갈하여 차베스를 입 다물게 한 적이 있다. 저 영상 28초에서 확인해보자. 하지만 차베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신나게 떠들어댔다(…).
물론 차베스는 다음날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발언을 놓고 '성난 투우 같았다'고 조롱하기도 했고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끊을 거라고 징징대기도 했지만, 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스페인 국민들 사이에선 왕이 속 시원한 발언을 했다며 왕의 발언을 두고 각종 패러디가 쏟아졌다고 한다.
2011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센테 델 보스케를 후작으로 임명했다.
[1] 참고로, 그에게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재임 기간은 13382일, 후안 카를로스의 재위 기간은 13383일로, 불과 1일 차이이다.[2] 후안 카를로스에게는 3살 터울의 동생 알폰소가 있었는데, 56년에 함께 작은 리볼버 권총을 가지고 놀다가 사고로 사망했다. [3] 후안 백작이 자유주의자임에도 당시 프랑코를 지지하지 않던 사제들마저 급진 공화파에 의해 살해되고 있던 상황이라 계속 남아있다간 언제 총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4] 원래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선택되었고 프랑코는 1961년 그에게 공식적으로 왕위를 제안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거절하고 스페인 왕위계승서열 1위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추천했다.[5] 정확히 말하면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위에 형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가 있었으나 청각 장애인인 이유로 알폰소 13세가 하이메 대신 후안을 지명했다. 다만 왕태자의 작위인 아스투리아스 공에는 오르지 못했다. 알폰소 13세의 장남이자 후안의 맏형인 알폰소가 아스투리아스 공이였기 때문. 참고로 알폰소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박탈당했다.[6] 암살될 때 폭발 충격으로 타고있던 차가 공중으로 치솟아올랐는데 그게 짤방 및 인터넷 밈으로 남아서 아직까지도 스페인 인터넷에서 조리돌림당하고 있다.[7] 프랑코 체제 당시 관계 복원이 되었던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 등은 물론이고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도 상황을 예의주시 하고 있었다.[8] 이 때의 사단장급 장성들 대부분은 후안이 각군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시절 만나 친해진 인물들이었는데, '''후안을 사관학교에 보낸 인물이 바로 프랑코였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코가 후안의 군 인맥을 잘 만들어둔 덕분에 큰 힘이 된 셈.[9]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에선 왕실 관련 지출은 거의 대부분 왕실이 자체적으로 관광 상품이나 사업을 통해서 지불하는 반면, 스페인에선 왕실 관련 지출이 전적으로 국민 세금으로 한다.[10] 프랑코 사후 30년이 지난 2000년대 중반까지 스페인에서는 제대로 된 과거사에 대한 조사나 규명 노력이 거의 없었다. 프랑코에게 탄압당한 좌익이 여당으로 장기 집권했을 때도. 2000년대 들어 사파테로의 사회당 정부에서 대대적인 과거사 조사가 이루어 졌으나, 경제 위기로 집권당이 프랑코 시절 떡고물 얻어 먹고 자란 우익으로 바뀌면서 다 망했어요.[11] 불과 2007년만 하더라도 국왕을 비꼬는 만평을 내 놓은 잡지가 정부에서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도 여론 악화로 인해 공개 사과를 해야 할 만큼 왕에 대한 스페인 국민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12] 10월 1일 반파쇼 저항 그룹 Grupos de Resistencia Antifascista Primero de Octubre, GRAPO, 반파쇼 애국 혁명 전선 Frente Revolucionario Antifascista y Patriota, FRAP 등이 대표적이다.[13] 악명 높은 1977년 아토차 총격 사건을 일으킨 Fuerza Nueva 등이 대표적[14] 이 불안함의 시대가 가고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모두가 느낄 만큼 안정적으로 정착하자 스페인은 유럽의 전통적인 뒷북 치는 역할을 충실하게 물려 받아 남들은 10년, 20년 전에 끝낸 68혁명과 비슷한 La movida madrileña라는 10년간 문화적, 사회적 르네상스를 맞았다. 물론 여기서 르네상스라는 것은 68혁명의 방식 그대로 마약, 섹스, 혼란, 광기, 젊은 세대 특유의 낭만으로 가득찬 르네상스를 일컬는다. 이 시절 스페인 영화들이 이 시기 초입에 데뷔한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비롯해 폭주하는 성향이 짙은 것도 이런 분위기랑 관련이 있다.[15] 그런데 하필이면 즉위 당일에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이 칠레에게 패해 예선에서 탈락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까지 했기에 충격은 더 컸다고. 경제 위기에 이런 이유까지 겹쳐져 즉위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치러졌다.[16] 이 때문에 결혼식은 가톨릭 예식이 아닌 정교회 예식으로 치뤄졌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과 5촌 관계이며, 후안 카를로스 1세와는 8촌 관계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5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증손자, 소피아 왕비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의 증손녀이다.[17] 특히 딸 빅토리아의 얼굴 생김새가 마치 20대 시절 어머니 엘레나 공주와 많이 닯았다.[18] 언론인 출신인 레티시아는 왕태자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 한번 이혼한 적이 있어서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 교리와 충돌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었지만,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이 교회법에 따른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이혼했더라도 가톨릭 교회가 금하는 이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이 내려져 태자와의 결혼이 가능했다.[19] 여담이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루이 14세의 10대손이다[20] 스페인 주도로 창설된 정치,경제,문화 공동체이다.[21] 아스나르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스페인의 총리로 재직한 정치인으로 국민당(PP) 소속이다. 1996년 총선에서 젊은 이미지를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하고, 총리로 재직했을 당시에는 부동산 규제 완화로 자산 가격이 급속도로 올라서(사실 따지고 보면 현 스페인 경제 위기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루마니아나 콜롬비아·모로코 등으로부터 이민자가 대거 밀려올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었기에 그럭저럭 인기를 누렸던 총리였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04년 지하철 폭탄 테러 사건의 여파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총선에서 참패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즉, 차베스의 발언은 일종의 부관참시인 셈(…).[22] 높임법이 아닌 보통 평어체의 'YOU!'라고 보면 된다. 'TÚ'의 존칭은 'Usted'이다(단, 이 단어는 3인칭이다). 즉 이 때부터 이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너 임마!'라고 강하게 주의를 주고 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