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대지진

 




당시 MBC의 보도내용
'''Սպիտակի երկրաշարժ'''
'''Спитакское землетрясение''', '''Ленинаканское землетрясение'''
발생일시
(현지시각/GMT)

1988년 12월 7일 11시 41분경
1988년 12월 7일 7시 41분(GMT)
진앙
소련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스피타크 지역
북위 40.8°, 동경 44.3°[1]
진원의 깊이
'''5km(!)'''
최대 진도
MMI 기준 '''X (Extreme)'''
MSK 기준 '''X (Devastating)'''
규모
'''M 6.8-7.0'''
전진의 규모
'''M 3.0'''(12. 6. 15:27 GMT)
여진의 규모
'''M 5.8'''(12. 7. 07:45 GMT)
사상자
사망자, 부상자 총합 45,000여명
사망자
25,000여명
부상자
19,000여명
이재민
500,000여명
1. 개요
2. 재앙의 시작
3. 구조작업
4. 피해
4.1. 피해가 컸던 이유
4.2. 복구작업
5. 일화
6. 같이보기


1. 개요


이전까지 소련에서 6.0이상 강진은 자주 일어났고 9.0이상의 지진도 난적이 있었으나 대부분 극동지역이나 시베리아 지역과 같이 사람이 거의 살지않는 지역에 국한되었으나 아르메니아 지진의 경우 7.0의 강진이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직격한 지진으로 그 피해가 엄청났다.

2. 재앙의 시작


1988년 12월 7일, 점심을 조금 앞둔 시각인 11시경 아르메니아 중부에서 지진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원래 아르메니아 지역은 아라비아 판과 유라시아 판의 경계에 위치했던지라 다른 캅카스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지진은 꽤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0여분이 지난 시점, 또다시 지진이 아르메니아를 덮쳤다... 그리고 그 '''규모는 무려 7.0에 달하였다!''' 엄청난 강진이 발생하자 대부분 내진설계가 되어있지 않던 석조주택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진 스피타크 시내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지진에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무너진 건물에 갇힐 수밖에 없었고, 이는 피해를 키우는 데 큰 원인이 되었다.

3. 구조작업


지진이 발생하자 소련 정부는 그 즉시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하였으나 도시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으며 도로 역시 다를 바 없었기에 구조대가 일찍 도착하지 못하였고 결국 주변을 수습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구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소련은 이례적으로 서방 국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여러 서방 국가들이 소련에 구조대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구조에 속도가 붙어 구조하기 시작했지만, 사고 3일경 사망자 수는 이미 2만명을 넘겼다.

4. 피해


[image]
[image]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차라리 죽을 수 있다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당시 구조된 생존자의 인터뷰-

사망자 추정 25000~50000명, 부상자 추정 31000~130000명.
진앙지인 스피타크 시에서만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인구 2만 명 중 74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웃한 레니나칸시(인구 약 29만)또한 다를 것이 없어서 200동의 건물들이 붕괴되었다.
인구 17만의 칸의 피해는 비교적 경미하였으나 역시 10동 이상의 건물이 붕괴되었고 수백여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4.1. 피해가 컸던 이유


이 지진은 비슷한 규모의 샌프란시스코 지진#s-2보다도 피해가 넘사벽으로 컸고 이보다 더 강했던 '''고베 대지진'''보다도 '''사망자가 4배나 더 많았다.'''
게다가 거론된 두 지진 모두 '''100만이상의 대도시'''였으나 비교적 소도시에서 일어난 이 지진이 피해가 배 이상 났던 이유는
본래 이 지방은 원래 아라비아 판과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지역으로서 강도 5.0∼7.0의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근세기 동안 이렇다 할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고 때문에 '''지진다발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붕괴된 건물에 깔려 압사하였음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실제로 대부분 조립용 콘크리트 부품으로 만든 주택이나 석조주택의 대부분은 실제의 진동을 밑도는 강도로 설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재빠른 아파트 건설에 치중하다보니 부실한 자재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상당수 있었고, 참사로 이어진것이다.
또 지진의 진동이 아르메니아 전역을 휩쓸었던 것 또한 한몫했는데, 지진의 진동이 이웃한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에서도 느껴졌고 캅카스 산맥을 넘어 체첸 지역에서도 진동을 느꼈다고 한다.

4.2. 복구작업


지진 직후 소련 정부는 즉시 아르메니아를 복구하기 시작했지만 아르메니아는 제모습을 찾지 못했다. 소련 정부는 '''2년전의 지구를 홀라당 날릴 뻔한 대형사고'''만으로도 힘들었고 오늘 내일하던 시점이라 복구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는 복구가 다 되기도 전에 독립해 버렸고, 이후 아르메니아 역시 내ᆞ외부적으로 영 좋지 못했던지라 아직도 완전히 복구되지는 못했다. 그나마 최근 아르메니아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서 거의 대부분 복구가 되었다.
[image]
사진은 복구 작업중인 성 구세주 교회(Սուրբ Աստվածածին եկեղեցի Saint Mestop Mashtots Church).
아르메니아 대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록 에이드 아르메니아라는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5. 일화


아르메니아 대지진 때의 일화가 내려오며 감동을 주는데 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 스물여섯살의 스잔나 페트로시안과 네살된 딸 가야니가 건물 벽 속에 갇혔습니다.

모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의 공포 뿐, 아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지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스잔나는 '''유리조각으로 손가락을 찔러 딸 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보챌 때마다 차례차례 '''손가락을 베어 아기의 입에 물렸습니다.'''

이들 모녀는 매몰된지 14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는데

어머니 스잔나의 손가락 열개는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저 모녀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6. 같이보기



[1] 아르메니아 지질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