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드 알 라흐만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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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رحمن الثالث‎
Abd al-Rahman III
(889 ~ 961)
1. 개요
2. 초기 생애
3. 재위
4. 반란 진압
5. 칼리프 선언
6. vs 파티마 왕조
7.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
8. 말년
9. 여담
10. 참고 문헌


1. 개요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잡은 후우마이야 왕조에미르이자 코르도바 칼리프. 왕권을 강화하고 알 안달루스를 개편하여 후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슬람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의 영향이 크다.

2. 초기 생애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 왕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무함마드는 7대 에미르인 압달라 이븐 무함마드의 장남이었는데,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어린 시절에 동생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도였고 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의 하렘에서 보냈다.

3.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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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년, 라흐만 3세의 즉위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형세
조부인 압달라 이븐 무함마드의 아들들이 잇따라 죽자 압달라 이븐 무함마드는 자신이 총애했던 손자인 알 라흐만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래서 알 라흐만은 조부가 죽고 난 뒤 20세의 이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레콩키스타 운동과 반란 세력으로 인해 이베리아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었고 조부의 가혹한 통치로 시민들의 불만이 커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8대 에미르로서 알 라흐만이 맡은 과제는 힘겨워 보였다.

4. 반란 진압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내부 통치 질서를 재확립하였다. 하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에게 반란 세력들은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재위 초반부터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 세력과의 마찰은 가능한 피하고자 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후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시아파 반란을 일으킨 우마르 이븐 하프순[1]을 진압하기 위해 913년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 동남부로 진격하였고, 917년에 우마르가 사망하며 반군의 기세가 꺾였다. 뒤이어 바다호스톨레도를 되찾은 알 라흐만 3세는 마침내 928년 반군이 끝까지 저항하던 보바스트로 요새를 함락하며 안달루스 전역을 장악했다.

5. 칼리프 선언


알 라흐만 3세는 내란을 평정한 이듬해인 929년, 아바스 왕조와 파티마 왕조에게 서신을 보내 스스로를 칼리프라 선언했다. 아미르 알 무미닌(amīr al-mu’minīn; 신도들의 우두머리)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세 칼리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6. vs 파티마 왕조


알 라흐만 3세는 안달루스의 시아파 반란군을 지원하여 자신에게 큰 위협을 선사하였던 파티마 왕조에 대한 복수를 꾀하였다. 당시 마그레브의 이드리시 왕조는 쇠퇴 중이었고 파티마 왕조는 모로코를 점령할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931년 우마이야 군대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세우타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향루 30년간 마그레브를 두고 벌어질 두 칼리파 국가 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7.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반란을 진압하던 중인 917년에 레온 왕국의 오르도뇨 2세는 이베리아에서 이슬람 축출을 선언하며 후우마이야 왕조의 국경에 있는 영토를 점령했다. 이에 알 라흐만은 이븐 아브디 아브다 장군을 보냈지만 세비야 북동부의 산 에스테반에서 격퇴당했다.
전투에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알 라흐만은 병력을 다시 모집하여 오르도뇨 2세와의 장기전에 들어갔다. 후우마이야 군대는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나바라까지 진군하였다. 924년 나바라 왕국의 수도인 팜플로나에서 격전이 벌어진 끝에 후우마이야 군대가 승리하여 기독교 세력은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오르도뇨 2세가 사망한 뒤 932년 라미로 2세가 레온 왕위에 올랐다. 알 라흐만 3세는 알 안달루스 일대를 차지하여 라미로 2세를 부르고스로 후퇴시키고 그의 숙모인 나바라의 토다 여왕에게 가신으로서 그에게 복종하도록 했다. 하지만 939년 시만카스 전투에서 레온 왕국에게 크게 패배했다. 레온 왕국도 반란으로 인해 승리로부터 큰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950년 바르셀로나의 보렐 2세로부터 기독교 세력과 평화조약을 맺는 대가로 알 안달루스의 패권을 인정받았다. 덤으로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 안달루스에 유배된 레온 왕국의 산초 왕자의 복위를 도와 레온 왕국과 사이가 좋아졌다.

8. 말년


알 안달루스의 평화로운 통치를 이룩한 알 라흐만은 내치를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인 코르도바는 번영하여 인구가 30 ~ 50만에 달했으며, 호화로운 궁전과 많은 사원들이 지어졌다.
961년 코르도바 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기 전 남겼던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꼈던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되었는지 헤아려보니… 겨우 14일이었다. 그러니 세상사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지어다."


9. 여담


  • 보통 하렘은 여성[2]들의 공간[3]이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동성애자 내지 양성애자였는지 남성 하렘도 있었다.
  • 그래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13살의 노예 소년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 50년간의 재위 기간 중 칼리파로서는 32년 재위했는데 후우마이야 조의 개창자이자 그의 롤모델이었던 알 라흐만 1세가 32년간 재위하였다.
  •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 군주들에 대한 평가들이 박하나, 이 군주만은 스페인에서도 평가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후우마이야조에서는 이 사람이 마지막 명군으로, 그의 후계자 알 하캄의 사후 후우마이야조는 급격히 쇠락한다.

10. 참고 문헌


https://www.ancient.eu/Abd_al-Rahman_III/

[1] 스페인계 기독교도였으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후우마이야 왕조에 불만을 지닌 아랍인들을 모아 코르도바 남쪽 산악지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청교도적인 선교사 알 사라즈를 파견, 900년 우마이야 왕족 이븐 알 키트 역시 반란에 가담시켰다. 알 키트는 스스로를 마흐디로 칭했으나 기독교도와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에 우마르는 파티마 왕조의 알 마흐디와 연락하여 그로부터 '카임' 칭호를 받았다.[2] 우마이야의 칼리프들은 금발을 선호했다고. 권력상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3] 6천명 가량을 두었다고 한다.[4] 로맨틱한 관계는 아닌지 수청을 거절하면 여자 첩은 얼굴을 태우고, 남자 첩은 사지를 찢었다고(...). 다만 이건 기독교인들이 지어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