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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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계기: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3. 레콩키스타의 시작
4.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선의 교착
4.1. 알 만수르의 반격
5. 타이파 분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성장
5.1. 톨레도 함락 (1085년)
7. 십자군 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남진
7.1. 사라고사 함락
7.2. 리스본 함락
9. 기독교 국가들의 대공세
10.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노력: 마린 왕조
11. 공수의 역전: 세우타 함락 (1415년)
12. 대항해시대와 그라나다의 연명
13. 1492년: 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
14. 결과
15. 영향
15.1. 레콩키스타 이후의 가톨릭 국가 스페인
15.2.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문화적 교류
15.3. 종교적 공존과 충돌 사이
15.4. 인종적 교류
16. 기타
17. 관련 문서


1. 개요


레콩키스타(Reconquista)[1]는 재정복(Reconquest)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한다. 포르투갈어로는 스페인어의 전동음 r이 구개수음이라 헤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한다.
서고트 왕국 멸망 후에 세워진 가톨릭 왕국들[2]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밀려서 이베리아 반도 북쪽 작은 영토만 남기고 축소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전성기에도 근근히 버티다가, 내전과 정권 싸움으로 약해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 수백 년 동안의 과정을 총칭하는 단어. 그래서 국토 회복 운동이라고도 한다. 711년에 시작하여 포르투갈에선 1249년 알가르브 함락, 스페인에선 1492년 그라나다 왕국 함락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백년전쟁처럼 실제 그 기간 동안 전쟁이 계속된 것은 아니다. 십자군 전쟁 시기와 맞물려 성전으로 취급되었다.
레콩키스타 전 과정을 단일한 사건으로 본다면 이는 역사에 기록된 전쟁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이다.''' 그 기간은 무려 781년.참조

2. 계기: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이베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은 내분을 틈탄 무어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다. 당시 서고트 왕국은 서고트 왕국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복잡한 정치 체계 때분에 내분이 잦았고, 많은 외적과 싸우느라 힘이 소모된 상태였다. 게다가 내전으로 인해 무어의 편을 든 '''배신자''' 귀족들이 있었고, '''기병이 너무 적었고''', '''해군이 전무해서'''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게 철저하게 털리며 끝내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내몰릴 지경으로 간다.
무어의 본거지였던 북아프리카는 로마 이전 시절부터 이름 높은 말의 산지였다. 반면 이베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고원 지대라 기병을 키우기에는 영...
대부분의 상황에서 해군의 육성은 안정적으로 국경을 방어할 규모의 육군이 갖춰진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당시 여러 외적과의 전쟁과 내전으로 육군의 소모가 심했던 서고트는 해군까지 육성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무어는 해군, 정확히는 해적이 강했는데, 로마 제국 시절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베르베르인들과 아랍인들은 11세기 전까지는 관개 수로를 잘 사용하지 못해 농업 기반이 열악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바다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가까이 있던 스페인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도 그 중 하나로, 이러한 해적 행위 자체가 이후 국가 기간 산업 중 하나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한편 이베리아이슬람 제국이 점령한 이후 이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은 금지되는데, 이는 동남부의 영주들인 아랍인들과 해적질을 하던 베르베르인들 간의 갈등의 또다른 원인이 된다.

3. 레콩키스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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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22년 피레네 산맥 기슭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300명의 서고트 잔존 세력이 2,000명가량의 아랍 군대의 침공을 막아낸 코바동가 전투(Battle of Covadonga)의 승전으로[3] 서고트 왕국의 피난민들은 명맥을 존속할 수 있었고, 이후 이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살아남은 고트족들이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하여 이베리아 북서부에 대한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4]의 규모나 군사적 위상은 이베리아를 장악하던 이슬람 왕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이슬람 왕국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는데, 첫째 이유는 카탈루냐 일대를 두고 전쟁을 벌이던 프랑크 왕국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이슬람 왕국 내부에서의 분열, 특히 기독교인들과 베르베르인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이베리아를 점령한 이슬람 왕국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불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성당들을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바꾸어[5] 기독교도들이 미사를 드리기 힘들게 했고, 개종했는데도 종교세를 내라고 하거나[6], 반발하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공개처형 및 직위와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박해를 가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거들었다.[7]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고 813년의 코르도바 반란이나 912년의 팜필로나 반란 등의 크고 작은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기를 통제당해 무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이슬람 왕조들은 쉬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은 달랐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 계열 왕조였고,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들도 다들 아랍인들이었으나, 일부 호족이나 대부분의 군인들은 베르베르인이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베르베르인들을 야만인이라면서 극도로 무시했다. 베르베르인들은 아랍인들이 안전한 후방에서 성이나 지키는 동안 기독교인들과의 최전선에 나가서 피를 흘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보상은 아랍인들에 비해 적었으며[8], 심지어 종교세 도 강요받아야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때 베르베르인들은 무슬림들이었다.
이러한 차별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39년, '귀족 전쟁'이라 불리우는 내분을 이베리아 반도 각지와 마그레브 지역에서 전개한다. (베르베르 대항거) 이러한 내전은 743년까지 이어졌고, 우미이야 왕조의 쇠퇴를 촉진시켰다. 아랍 군대들은 베르베르 반군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만 마그레브 지방은 위낙 넓은 데다가 베르베르의 홈그라운드니만큼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고 만다. 그 와중에, 스페인의 베르베르 귀족들이 귀족 전쟁에 참여하느라 군대를 움직인 틈을 타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횡재다!'''를 외치며 텅 빈 갈리시아 지방을 접수하고 레온 왕국과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발전한다. 이밖에도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들도 '''베르베르 귀족들의 영토였던''' 북부 이베리아를 점령하며 뻗어나갔다.

4.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선의 교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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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년의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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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년의 이베리아 반도[9]
하지만 756년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알안달루스로 피난 온 우마이야 왕조의 왕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이 혼란스러운 알안달루스를 안정화시키고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면서 한동안 기독교 세력의 남진은 정지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도루(Douro)[10] 강을 사이에 두고 수백년 간 대치하였고 10세기 경부터 후우마이야 왕조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기독교 세력은 다시 남진을 시작하였으나 이 때 후우마이야 왕조에 알 하지브 알 만수르라는 걸출한 재상이 등장하였다. 알만수르는 후우마이야 왕조 최후의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비틀거리는 후우마이야 왕조를 일시적이나마 다시 안정화시키고 레온과 나바라, 아라곤에 대한 여러 차례의 지하드를 개시하였다. 기독교 왕국들은 알만수르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8세기경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교도들에게 이베리아를 내어주는 상황의 데자뷰같은 모습이었다.

4.1. 알 만수르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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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의 이베리아 반도
알만수르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985년 바르셀로나를 불태우고, 988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을 불태웠다. 997년에는 이베리아 기독교의 최대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공격해 도시를 불태우고 유명한 대성당은 문과 종을 떼어내 코르도바의 모스크[11]를 장식하거나 녹여서 촛대로 만드는 등 기독교 세력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12]
하지만 1002년 알만수르가 죽고 쇠락해가는 왕조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후우마이야 왕조는 1031년 멸망하게 되고 이후 알안달루스는 타이파(طائفة)라는 소규모 왕국들로 분할되어 기독교 세력에 각개격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에서 축출되는 1492년까지의 역사는 위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강력한 이슬람 왕조가 나타나 기독교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지만, 얼마안가 붕괴된후 타이파 시대가 시작된다. 그후 기독교 세력은 타이파들을 각개격파하고 남하한다. 그리고 다시 이슬람 왕조가 역습을...

5. 타이파 분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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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년의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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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년의 이베리아 반도: 카스티야 & 아라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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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하나의 도시와 그 주변 배후지를 기반으로 하는 작은 토후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런 토후국들을 타이파 국가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분파" 혹은 "파당"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상황은 고대 말 그리스의 폴리스들의 상황이나 근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각 타이파 국마다 지도자들의 배경도 달랐는데, 아랍계 베르베르계 외에도 슬라브계 맘루크 출신 타이파들도 많았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이런 무슬림 소국가들을 압도하면서 이른바 "보호 거래" 시스템을 만들었다. 북부의 기독교 국가들은 타이파 국가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일 때 기독교 왕국에서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금화를 조공받거나 혹은 침공하지 않는 대가로 금화를 받기 시작했다. 타이파 국가끼리 전쟁을 벌일 때는 한 쪽 편을 들면서 다른 한 쪽 영토를 조금씩 점령하는 식으로 무슬림들이 장악하는 전체 영토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5.1. 톨레도 함락 (1085년)


톨레도 함락은 레콩키스타 가속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인 알폰소 6세에 의해 톨레도가 함락된 것은 1061년 코임브라 재정복이 포르투갈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 것처럼[13]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톨레도는 로마 시절부터 톨레툼이란 이름으로,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천혜의 자연 요새로 인해 이베리아 중부 고원 메세타의 최고 핵심 전략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카스티야에게 넘어간 건 기독교 세력의 진출에 분수령이 되었다. 사상적으로 또한 톨레도 함락과 함께 거의 같은 시기 십자군 전쟁이 선포 되면서 11세기는 레콩키스타라는 '''하나의 국가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형성'''에 분수령이 된 시대였다.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기독교 국가들의 연속체로서 서고트 왕국 → 아스투리아스 왕국 →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이어지는 '''중부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왕조 국가'''로서 계승성을 표명한 사료는 9세기의 알베다 수도원 연대기(Crónica Albedense)밖에 없었고, 다른 사료들은 딱히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기독교의 이베리아 반도 '수복'이란 의식을 딱히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실제 정치판에서 이 시대는 바로 다름아닌 엘 시드의 시대. 당장 권력과 이익만 맞아 떨어지면 반도 북부의 기독교 소국들과 분열해가는 알 안달루스의 타이파 세력들이 종교고 나발이고 신경 안쓰고 지극히 실리적인 현실정치(realpolitik)을 따르던 시대다.
그러나 톨레도가 함락되고 교황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종사하는 건 레반트 성지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다툼에 종교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부여하자 레콩키스타는 기독교 왕국들이 하나의 초월적, 역사적 사명이자 성전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체화 되기 시작한다. 또한 교황은 기독교 왕국들에게 레콩키스타가 곧 십자군 전쟁이므로 군인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톨레도 함락 이후 약 반 세기 뒤 쓰여진 알폰소 7세 시절 쓰여진 황제 알폰소 연대기(Chronica Adefonsi imperatoris)를 기점으로 이 이후 연대기와 사료들은 강렬한 종교적, 지정학적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중심으로 '''국체의 기원을 아스투리아스 넘어 서고트 왕국에서 찾으며''' 단순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한때 기독교 세계에 속했던 고토의 회복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흔히 불가분의 관계로 말하는 스페인 국가적 민족주의와 전투적 가톨릭 신앙의 일치화가 이데올로기로서 뿌리를 잡게 된 것이다.

6.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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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의 군소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의 맹공을 견디지 못했고 사라고사의 알 무타미드도 그 중 하나였는데, 그는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자 유수프 이븐 타쉬핀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유수프는 1086년 사그라자스 전투에서 기독교 군세를 격파하고 후계자가 죽는 바람에 한번 돌아갔지만 1090년에 돌아와 타이파들이 종교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명목 하에 그들을 강제로 병합, 알 안달루스 전체를 다스리게 된다. 무라비트 왕조는 이후 1097년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엘 시드가 단독으로 점령했던 발렌시아도 1102년에 탈환하며 레온-카스티야 왕국을 밀어붙인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가까스로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나 우클레스 전투에서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잃는 바람에 딸 우라카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관이 이브레아(보르고냐)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140년대까지 무라비트 왕조와 기독교 국가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처음에는 1134년 파가 전투에서 무라비트 왕조가 승리하고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를 살해하는등 무라비트 왕조가 우세했지만 무와히드 왕조에 의해 무라비트 왕조가 빠르게 몰락하면서 기독교 세력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7. 십자군 열기와 기독교 국가들의 남진



7.1. 사라고사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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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왕국우에스카(1096), 사라고사(1118), 토르토사(1148), 예이다(1149)를 차례로 점령했다. 오늘날 아라곤 주 깃발에 그려진 참수된 무어인 네 명은 각각 상술한 네 도시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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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마이야 왕조가 파토난 1018년부터 1110년까지는 사라고사에 따로 타이파국이 세워져 번영을 누렸으나, 무라비트 왕조가 이 지역의 타이파를 무찌르고 정복하였고, 그 후 8년만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점령한 후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타이파의 궁전이었던 알하페리아(Aljaferia, 아랍어 발음으로는 알 자으파리아) 건물은 후에 아라곤 왕국의 왕궁으로 쓰여오다가 현재는 아라곤 주 의회의 건물로 쓰인다고 한다.

7.2. 리스본 함락


1108년 시구르드 1세가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이 도시를 함락시켰으나 3년만에 무라비트 왕조가 도시를 탈환하였다. 이후 1147년 포르투갈의 알폰소 1세가 도시를 재정복하였다. 1147년 7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펼쳐진 공성전에는 포르투갈 병력 7천에 영국에서 온 십자군 6천에 독일에서 온 십자군 5천, 플랑드르에서 온 십자군 2천이 가담했다고 한다. 도시를 방어하던 바다호스 타이파국은 넉넉한 방어 병력(15000명 정도로 추산)에도 불구하고 무라비트 왕조와 싸우는 와중에 십자군의 포위 공격까지 받자 버티지 못하고 도시를 내주고 말았다.

8.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


이번에는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킨 무와히드 왕조가 1149년 세비야와 코르도바를 정복하고, 1172년 무슬림-스페인 영토의 레콩키스타로 빼앗긴 영토 상당수를 탈환하였다. 1195년 카스티야 왕국은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대패했고, 기독교 국가들의 세력은 크게 꺾였다. 하지만 무와히드 왕조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둔 기독교 국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로간의 반목을 잠재울 기회를 얻었다. 또한 무와히드 왕조는 반복되는 북아프리카에서의 반란과 기독교 국가들의 공격으로 계속해서 국력을 소모해야만 샜다.

9. 기독교 국가들의 대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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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년의 이베리아 반도.

9.1.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12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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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년의 이베리아 반도
1211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알 나시르는 기독교 국가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역대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알 안달루스에 출정하였다. 그러나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군은 숫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기독교군에게 대패했고, 이 결정적인 전투를 기점으로 무와히드 왕조는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1249년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종료되었다.
그 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1236년 한 때 알 안달루스의 중심지였던 코르도바(스페인)을 함락하고 12년후 여세를 몰아 세비야까지 함락시켰다. 무와히드 왕조 붕괴 이후 다시 등장한 타이파들은 레콩키스타 세력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249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3세가 포르투갈의 마지막 이슬람 거점이던 파루를 함락시키면서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끝을 맺었고 나머지 타이파들 역시 1270년대까지 모두 멸망하여 카스티야나 아라곤의 영토가 되었다. 다만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측출되지는 않았다. 1232년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가 카스티야 왕국에 예속되는 것을 조건으로 그라나다에 나스르 왕조를 창건했기 때문이다. 나스르 왕조는 이후 1492년까지 근근히 살아남아 알 안달루스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10.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노력: 마린 왕조


1264년 기독교 왕국 영토의 무슬림 신민 무데하르들과 나스르 왕조의 무슬림 및 마린 왕조의 군대가 일제히 들고 일어나 레콩키스타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마린 왕조 군대가 카스티야-레온 왕국 군대에게 격퇴당하면서 봉기는 실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코르도바와 세비야에 거주하던 무슬림 무데하르들은 대부분 추방되었고, 북부 기독교인 이주민들이 빈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1275년 마린 왕조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알헤라시스 지방을 나스르 왕조로부터 양도받은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마린 왕조는 이베리아 남부의 몇개의 도시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지만, 1340년 살라도 강에서 카스티야 왕국이 마린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마린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11. 공수의 역전: 세우타 함락 (1415년)


1415년 마린 왕조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틈을 타서 포르투갈 왕국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세우타를 점령하였다. 1418년 마린 왕조는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이것을 서구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2. 대항해시대와 그라나다의 연명



13. 1492년: 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


1469년에 아라곤 왕국의 왕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이사벨이 결혼하며 양국의 연합이 가시화 되었다. 그리고 1474년에 이사벨이 카스티야 왕이 되자 페르난도는 공동왕이 되었고 1479년,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으로 즉위하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이 탄생하였다. 교황은 그들에게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주며 그라나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482년, 그라나다 왕국 (나스르 왕조)의 술탄 핫산에게 페르난도 2세는 평화를 대가로 조공의 양을 늘리라 요구했다.
애초에 강경파에 속했던 핫산은 그에 불복하였고 조공 비용으로 무기를 제작했다. 이에 카스티야 군대가 그라나다 겨우 30여 km 떨어진 알하마를 공격했다. 그러자 그라나다에서 반란이 일어나 핫산이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인 보압딜이 무함마드 12세로 즉위했다. 한편, 핫산은 동생인 엘 사갈의 영지인 말라가로 피신했다. 이후 그라나다와 말라가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핫산은 기독교 군대와 연합해 보압딜을 패배시킨 후 복위하였다. 그라나다 내전을 틈타 카스티야 군대는 그라나다 왕국 깊숙히 진격했다. 1484년 6월에 알하마, 같은 해 9월에 세테닐이 함락되었다.[14] 동시에 페르난도 2세는 보압딜을 석방하며 그라나다 내전을 재차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1485년 5월, 그라나다 왕국의 서부 요충지인 론다가 함락되었고 이에 핫산은 재차 폐위되었다. 그리고 그의 복위를 도왔던 동생인 엘 사갈이 무함마드 13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 역시 1486년에 로하, 그리고 결정적으로 1487년 8월에 그의 세력 기반이던 말라가를 상실하자 폐위되었다. 따라서 그의 조카인 보압딜이 복위하였고 카스티야 군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489년에 바자[15]와 알메리아까지 함락되며 무함마드 12세의 영토는 그라나다 일대로 축소되었다. 무함마드 12세는 페르난도 2세에게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켰으나 돌아온 대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그라나다의 도움 요청은 모로코, 이집트 등지에 전해졌고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파병하진 않았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1491년 4월에 그라나다 포위가 시작되었고 8달이 흘렀다. 무함마드 12세는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11월 25일에 가톨릭 국왕들과 그라나다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492년 1월 2일에 성문을 나와 선조들의 땅인 북아프리카로 향하니, 782년간 지속된 스페인에 대한 이슬람 지배의 종결이었다. 항복 당시 20만이던 그라나다 인구는 19세기 초에는 1만 8천으로 감소해 있었다.

1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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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어인들은 베르베르인에게 남쪽에서 털리고 북쪽에서 기독교도들에게 털리는 양상의 반복 끝에 축출되고 말았는데, 무어인들은 기독교 왕국의 위협에 대항하여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등을 세운 베르베르인들에게 같은 이슬람 형제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오히려 베르베르인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알안달루스의 무어인에 비해 종교적으로 엄격했던 베르베르인들은 무어인들이 이룩한 문화재를 훼손하였으며, (알안달루스 문화에는 다행히도) 무와히드 왕조가 기독교 왕국에게 참패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중단되었으나 레콩키스타를 저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인구에서도 여전히 기독교 왕국한테 열세였다. 결국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왕국들은 차례차례 기독교도 왕국들에 정복당했고 1492년 1월 2일에 그라나다의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 1세(카스티야), 페르난도 5세(아라곤)에게 항복하여 나스르 왕조가 멸망하면서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었다. 위의 그림은 그라나다를 떠나 모로코로 망명하는 무함마드 12세와 그 휘하의 이슬람 교도들을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가 불러세워서 함께 살아갈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다. 무함마드 12세는 이를 거부하고 아프리카로 물러났다.[16][17]
레콩키스타는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십자군 전쟁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당시에는 십자군의 일부로 인식되었으며 교황도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동방으로 가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실제로 2차 십자군이 '지나가던 길에' 이슬람 세력의 거점이었던 리스본을 함락시키고 가기도 했다.

15. 영향



15.1. 레콩키스타 이후의 가톨릭 국가 스페인


한때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체가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다는 사실은 스페인인들의 자존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비록 어쩔 수 없이 개종하였고, 레콩키스타 이후 기독교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기독교의 수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는 '''스페인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스페인은 더욱더 철저한 원리주의적 가톨릭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각지의 유대인이나 무어인은 철저하게 추방하려고 하였다. 무어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은 이슬람 지배기간 동안 기독교도들에 비해 훨씬 많은 자유를 부여받으며 무슬림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무어인들도 감시받았으며, 17세기 초에는 펠리페 3세에 의해 약 27만 명의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이 추방되었다. 금융, 의료, 상업, 공업 등 소위 전문직에 종사하던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의 대거 추방으로 인해 스페인은 종교적 열망과 국가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충만하게 채웠을지 몰라도 실제 '''경제와 사회 구조는 작살났다.''' 당장 알함브라 칙령 이후에도 지역 농민 인구의 과반수 가까이가 개종한 무어인, 즉 모리스코였던 발렌시아무르시아 같은 지방은 노동 인구부터 박살났고, 이렇게 경제적 활동도 종교에 따라 분화되어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문직들이 다 추방당하자 스페인 고유의 상업적 경쟁력은 기반부터 무너졌다.
이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의 첨병에 나서 엄청난 양의 아메리카의 귀금속과, 이에 맞추어 부상한 카스티야의 양모,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등 산업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유통하고 관리할''' 금융, 상업 계층의 부재로 이를 전부 제노바 공화국에 아웃소싱할 수 밖에 없었다. 당장 필요한 자금줄과 상업 행위에서 제노바 상인들과의 동맹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대신 제노바 상인들은 카스티야 내부 많은 지방의 조세권부터 시작해 왕실 소유였던 시칠리아, 나폴리 왕국의 경제적 이권 등을 철저하게 챙기며, 장기적으로는 현지 민중, 토착 엘리트와 스페인 왕실 사이가 점차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페인 제국은 그 이전 중세의 종교적 공존, 즉 콘비벤시아(Convivencia)를 박멸하며 전성기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 몰락의 장기적인 원인 중 많은 부분이 이러한 공존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기반의 상실에서 기인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고찰 대상이다.
지금이야 그라나다 함락을 레콩키스타의 끝으로 인식하고는 있지만[18], 당시에는 '''이베리아의 완전한 통일'''과 '''로마의 영토였던 마우레타니아, 즉 모로코 + 북알제리 + 서튀니지까지의 영토 수복'''이 완료되지 않는 한 진정한 레콩키스타의 완료가 아니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왕과 포르투갈 왕은 스페인의 첫째 공주 이사벨[19]을 포르투갈 왕가의 계승자 알폰소에 시집보내, '''포르투갈 + 카스티야 + 아라곤의 모든 왕위 계승권을 가진 진정한 스페인의 왕'''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실제로 둘은 정략결혼임에도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알폰소는 병으로 객사해 버렸으며, 이사벨은 슬픔에 빠져 재혼을 거부했지만 이베리아의 재통합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은 두 왕가는 알폰소의 동생 미겔과의 재혼을 추진했다. 하지만 알폰소의 동생인 미겔과 재혼한 이사벨마저 남자아이를 출산하다 죽어 버렸다(...). 다행히도 아이는 살아남아 미겔[20]이라는 이름을 받고, 진정한 스페인의 왕이자 평화를 가져올 자로써 추앙받아 '''평화왕'''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그라나다에서 어렸을 때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다른 공주들은 이미 옛날 옛적에 다른 왕가에 시집 보낸지 오래였고, 부부왕의 아들인 후안도 요절하면서 이베리아의 재통합, 진정한 스페인이라는 원대한 꿈은 산산히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합스부르크로 시집간 부부왕의 둘째 딸 후아나를 통해 왕위계승권을 받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알제나 튀니스 등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한편 북아프리카의 몇몇 항구 도시들을 지배하에 두는 등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지만,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함께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세력을 경계하여 계속해서 덤벼드는 바람에[21] 국력 대부분을 프랑스와의 전쟁에 쏟아부었고, 영토 면에서나 경제 면에서나 아무 소득 없이 스페인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만다.
그나마 1580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가의 대가 끊기고[22] 마누엘 1세의 외손자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면서[23] 이베리아의 재통합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동군연합을 주도한 스페인 측의 학정이 이어지면서 결국 스페인의 지배에 질려버린 포르투갈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발발, 카타리나의 손자였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이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 즉위하여 포르투갈에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베리아의 재통합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포르투갈에서는 과거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진정한 통합[24]과 평화왕을 그리워하며, (지브롤터의 탈환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한 나라로 통일하지 않는 이상 레콩키스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스페인 왕정복고 당시 포르투갈 총리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스페인 내에서 있었다. 물론 이런 낭만주의적 역사관이 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자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거지, 그렇다고 해서 실제 이베리아 반도의 현실적인 정치, 사회, 종교적 인식에서 요즘 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합하고 다시 북아프리카로 처들어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면 그건 나름대로 신박하게 미친X 취급 받을 것이다. 큰 의미에서 과거사 인식이 그렇다는 거다.
콩키스타도르와 레콩키스타는 어원에서도 실제 역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두 단어의 어원 자체는 스페인어로 정복하다를 뜻하는 '''conquistar'''(콩키스타르)에서 같이 유래한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레콩키스타가 끝나면서부터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콩키스타도르가 나타난 것도. 단적으로 레콩키스타 당시 그리스도교 국가들, 특히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수호 성인이자 주된 공경 대상이었던, 붉은 칼십자가가 새겨진 백색 망토를 두르고 무어인을 짓밟는 기사로 표현된 성 야고보(산티아고)의 형상, 즉 무어인 처단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omoros)의 신앙을 신대륙으로 건너가 콩키스타도르들 사이 똑같은 기믹에 대상만 바뀐 인디오 처단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indios)란 형상으로 숭배 받았다. 근대 들어와 스페인 극우파 일각에선 스페인 내전 당시 이런 형상을 또 빨갱이 처단자(...) 성 야고보 (Santiago Matarojos)로 기믹을 또 바꿔 푸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안그래도 반프랑코 진영에서 열렬하게 띄운 가톨릭 스페인을 수호하겠다고 내전 일으킨 자들이 바로 그 북아프리카 무어인 용병들을 끌고 와 스페인 노동자 농민들을 죽였다. 선전 메세지 때문에 골머리 싸매는 중 저건 프랑코파 본인들이 생각해도 좀 너무 오바다 싶었는지 조용히 묻혔다.

15.2.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문화적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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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두는 크리스찬무슬림.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전쟁기에 이슬람권에서 유럽으로 전래된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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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인 학도를 가르치는 이븐 루시드.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세 초 이슬람 문화를 공유하던 알 안달루스는 스페인, 더 나아가 서유럽 지성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무슬림이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깊히 연구한 대학자 이븐 루시드의 문서를 보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이븐 루슈드가 재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하고 또 반박하면서 중세 서양 철학을 다듬어 나갔다. 또한 알 안달루스를 통해 소개된 이슬람 수학과 천문학, 연금술, 의학 등은 중세 초 서유럽인들에게 모방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700년 넘게 공존하면 상호 영향이 없을 수 없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에서 가톨릭 교조주의가 수백년동안 기승을 부리면서 아랍-이슬람 문화와 유대 문화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했지만, 당장 전통 민요, 춤, 음식, 농경, 미술 등 일상 사회 문화에 밀접하게 녹아든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전적으로 청산한다는건 불가능했고, 오히려 그 청산을 주도하는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도 자신들 마음에 드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은 취사선택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장 카톨릭 교권 민족주의의 전성기였던 15-17세기, 카톨릭 공동왕-합스부르크 시절 지어진 왕실, 대귀족의 궁전, 고위 성직자들의 주교궁들만 하더라도 어디 관광 책자에 명함 내밀만한 명소면 빠짐없이 모스크에서 많이 보이는 기하학적 패턴 장식된 천장들이 빠짐없이 나온다. 유명한 플라멩코에서 부터 카스티야, 아라곤 등 중부 고원 지방의 펄쩍 뛰면서 추는 전통 춤인 호따, 파에야 같은 유럽에서 흔치 않은 쌀 기반 요리 까지 일상 민속 문화에서도 무어인들의 영향은 강하게 남아 있고, 그나마 이슬람의 지배를 거의 받은적 없는 칸타브리아 산맥 이북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지방에서나 민속 문화가 별로 이슬람하곤 상관 없고 오히려 고대 켈트족의 영향력이 더 드러나는 편이다.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는 아프리카"라는 도발을 벌인 이후에는 아랍-이슬람 문화 잔재에 대한 청산이 가속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스페인어에 남아있는 아랍어 잔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후우마이야 왕조 시절에는 스페인의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아랍어를 일상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이런 기독교인 중에는 라틴어를 잊어버리고 아랍어로 미사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 스페인어에 남은 아랍어의 깊은 영향력은 16세기 고전소설인 돈키호테부터 돈키호테산초 판사에게 "우리 말 중에서 alfombra (카펫), alcazar (왕궁), arroz (쌀), almohada (배게) 같이 al-로 시작하는 단어는 전부 아랍인들에게서 온 것이란다"라고 가르쳐주는 대목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돈키호테 소설 그 자체도 세르반테스가 특유의 메타픽션 구조로 쓰면서 중간의 '번역자'로 설정한 캐릭터가 아랍인 시데 아메테 베네헬리일 만큼 당시 정치적으론 적대하는 관계였어도 문화적으로는 짙었던 이베리아 무슬림 문화의 영향 또한 깊게 다루고 있다.[25]
스페인에서는 알 안달루스의 유명 이슬람 건축물의 건축 양식을 재해석한 알무데하르(Almudejar) 건축 양식이 있다. 150년전인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사조부터 나머지 유럽과는 다른 스페인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을때마다 정부 기관에서 기차역, 일반 상업 빌딩까지 채택한 양식이다. 현대에 와서도 프랑코 정권 시절 국가 주도 관광 사업 프로그렘 구호마냥 '스페인은 (나머지 유럽과) 다르다!'란점을 강조하고 싶을때마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네오무데하르 건축물을 들이민다. 다른 유럽인 들이 '(유럽도 아닌)아랍 종자' 운운하면 발끈하며 무어인 살해자 형상의 성야곱을 민족주의적 상징물로 숭상하면서도 반대로 문화적인 면에선 바로 저 '나머지 유럽과는 뭔가 다른 점'을 오히려 본인들이 적극 수용하고 내세우는, 이중적이면서고 복잡미묘한 현대 스페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자기인식을 만든게 레콩키스타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15.3. 종교적 공존과 충돌 사이


기존 스페인의 카스티야 중심, 가톨릭 우월 교권 민족주의 (nacionalcatolicismo)가 20세기 들어와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 지방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가톨릭 공동왕 이후 제국, 왕정 시대 내내 이슬람, 무어인과 관련된 모든건 나쁘고 비스페인적인 것으로 취급하던 경향도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48년,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해 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가 España en su historia[26]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그 이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하고, 반면 서로 전쟁은 해도 기독교권이나 이슬람권이나 자국 내 이교도 커뮤니티를 아예 없에려는 전반적인 시도는 없었던 레콩키스타 시절 중세를 '''세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빛나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한 황금기'''로 재조명하는 사관이 한동안 유행했다.
이런 가톨릭 유일주의 근세 스페인을 부정하고, 중세적 종교적 관용과 다양성을 낭만적으로 보던 사관도 스페인 사학계가 근대성 논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학적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 와서는 많이 퇴색됐다. David Nirenberg 같은 중세 스페인 사회사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학자들의 현대적 공론은 집요하게 가톨릭 유일신앙을 추구한 근세에 비해선 확실히 중세 레콩키스타 시대가 종교적 다양성이 있었지만, 실리적 이유에서 공동체내 이교도의 존재를 '참고 견디는거지' 타자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존중에 기반한 현대적 의미에서 '관용'은 결코 아니었고, 레콩키스타 자체가 800년짜리 장기 과정이었던 만큼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도 시대에 따라 빡빡해졌다 느슨해졌다 반복하는 케바케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출신 자체가 바로 그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가문이었던 후우마이야 왕조의 경우 이교도와의 문화적 교류와 공존에도 익숙했지만, 반대로 발원지도 원래부터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짙었던 시리아, 레반트 일대가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던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같은 베르베르계 국가들은 이념 자체가 종교적 원리주의, 순수주의를 구심점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적 개혁운동으로 시작했던만큼 불관용도 더 심해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현대 이베리아 반도 중세 사학계에서는 보통 흑사병을 이후로 그 이전에는 심해졌다 느슨해졌다 반복하던 기독교권의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이 전례 없이 강해지며, 이런 기조가 후기 트라스타마라 왕조 르네상스 시절까지 유지되고, 나머지 유럽 기독교 세계도 종교재판의 설립, 알비 십자군 같은 기독교 내 이단 박멸 체계가 더 완성되면서 결국 1492년 알함브라 칙령과 비개종 이교도 전면 추방, 이후 종교재판소를 통한 개종자 박해와 무어인 추방으로 정점을 맺게 되었다고 본다. 중세 이베리아 무슬림 국가들이 의식적으로 민족가톨릭주의 사관에 반박하려고 했던 20세기 초중반 지식인들의 주장처럼 마냥 관용적인건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근대 민족가톨릭주의 사관의 프로파간다를 여과없이 수용하는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중세 이베리아 이슬람 국가들이 훗날 16세기의 가톨릭 스페인 제국이 그랬던 것 처럼 조직적으로 기독교도들을 박멸하려고 했다면 전례어는 아랍어를 쓰면서 여전히 기독교를 믿는 모사라베 커뮤니티를 비롯한 수많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혼성적 (syncretic) 정체성을 가진 문화적 공동체의 발현이 설명이 안된다.
이교도 정복 이후 건물 개조, 특히 이슬람권의 금요일 모스크나 기독교권의 주교좌 성당 같은 마을 한복판에 떡 자리 잡아서 그 지방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표출하는 대표적 종교적 상징물을 서로 마개조한건 비단 이베리아 반도 뿐만 아니라 발칸 반도 같은 훗날 오스만 제국과 대치하게된 다른 지역에서도 관례적으로 하는것이었고, 이베리아 반도 또한 이슬람권, 기독교권 양쪽 모두 이렇게 주요 종교 건물은 자기 종교에 맞게 개조하더라도 현실적인 이유로 그 지방에 살던 이교도들이 사용할 지정 모스크/교회/시나고그 또한 남겨두는게 일반적이었고, 그래서 톨레도, 사라고사 같이 세 종교가 모두 유의미한 규모로 오래 같이 살았던 도시들은 기독교인들이 영구 정복한건 12-13세기여도 해당 지역의 시나고그, 모스크들이 전면적으로 몽땅 폐쇄, 개조당한건 보통 15세기 들어가서야 보이는 현상이다. 이베리아 내 이슬람 왕국에 기독교도 신민 모사라베가 있었듯 기독교 왕국에도 이슬람 신앙을 믿을 권리를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받은 무데하르 공통체가 존재했다.
레콩키스타 말기 쯤 들어가면 카스티야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서 겨우 정복 안 당하고 목숨을 연명하던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에미르국 같은 경우 힘센 카스티야, 아라곤 눈치 보느라 기독교를 전면 박해할 상황도 안됐고, 실제로 그라나다 정복을 다루는 당시 사료들도 현지 기독교인들의 존재에 대해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동기나 사정, 패턴은 어쨌든간에 무와히드 왕조 같이 기반이 근본주의적 종교적 혁명 집단이 아닌 시절만 하더라도 기독교인 커뮤니티를 완전 박살내려고는 하지 않았는게 일반적이었던 중세 무슬림 국가들에 비해 그라나다 문따고 들어갈때는 '피정복민들의 종교와 재산을 보장한다' 해놓고 바로 돌아서자마자 종교재판소와 강제개종을 강요하고, 여기에 심지어 카스티야인들 본인들도 너무 심한거 아니냐고 반발하자 본인들도 궁색한 '이교도와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신학적 주장을 동원해오면서 까지 강압적이고, 결과적으론 스페인인들 본인들에게도 막대한 손해와 혼란을 불러 일으킨 종교적 일원주의를 강요한 근세 스페인이 더 악질적으로 보이는건 어쩔수가 없는 사실이다. 콘비벤시아(Convivencia) 테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실증주의적 태도는 물론 중요하지만, 중세 이베리아 무슬림 국가들과 이데올로기 자체를 종교에 대한 불관용에 둔 근세 가톨릭국가 스페인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15.4. 인종적 교류


이슬람 치하의 이베리아의 기독교인 주민들은 모사라베라고 불렸다. 정복 과정에서 많은 아랍인, 베르베르 전사들이 정착했고 이후 아랍 무슬림 지주들이 자신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토지의 중간 관리를 맡길 목적으로 유대인들을 불러오면서 유대인이 대거 정착하여 세파르딤 유대인 문화가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무역을 통해 적잖은 슬라브인들이 후궁이나 환관[27], 노예병으로 유입되었다. 이들 슬라브인 노예병들은 후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하자 군벌화되어 독자적인 타이파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다. 무라비툰 왕조 때는 많은 흑인 전투원들이 스페인에 정착하였으며 이 덕분에 한동안 중세 유럽에서 무어인이 흑인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독일과 저지대 국가에서 많은 기사들이 레콩키스타에 합류하기 위해 스페인에 들어왔다가 정착하였고 이들 역시 현대 스페인인의 조상의 한 갈래를 이룬다.
이슬람의 이베리아 정복 초기에는 많은 수의 모사라베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레콩키스타 이후 다시 많은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스페인의 인종 구성이 복잡해졌다.[28] 알 안달루스 당시 혼혈인들을 부르던 다양한 어휘들은 후에 대항해시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화한 이후 백인, 아메리카 인디오, 흑인 사이의 다양한 혼혈들을 칭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의 혼혈을 칭하던 말인 "물라토"는 아랍어로 아랍인과 혼혈인이라는 뜻의 무왈라드에서 유래했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을 의미하던 "모리스코"는 흑백혼혈 중 백인에 가까운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16. 기타


과거에 멕시코 영토였다가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미국이 강탈한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의 영토에서 히스패닉계가 갈수록 급증하는 것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레콩키스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항목도 있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새로운 식민지를 물색하던 스페인의 제국주의 파벌(Africanist)들이 모로코 식민지화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17. 관련 문서


위의 이사벨라 1세의 삶을 다루는 스페인 사극. 레콩키스타는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내용이다.
노래 자체의 배경이 레콩키스타를 다루고 있다.
실제 레콩키스타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인터넷 밈일 뿐이지만 이슬람을 제거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엮인다.


[1] 스페인어는 영어처럼 /nk/ 발음이 [ŋk\]로 변하므로 '레콘키스타'보다 '레콩키스타'가 원음에 더 가깝다. 국립국어원에서 nq 조합도 /nk/라는 걸 까먹고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누락시켜서 '레콘키스타'라고 표기하는 게 규정에 맞았는데(...) 2015년, 은근슬쩍 재심의로 콩키스타도르와 함께 ㅇ 받침으로 표기를 변경했다. 관용 표시가 없는 걸 보아 앞으로도 이렇게 심의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립국어원은 외래어 표기법의 스페인어 표기법에 nq의 n도 받침 ㅇ으로 적는다는 비공개 추가 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외래어 표기법/스페인어 문서 참고.[2] 균등 상속제로 인해 행여나 왕위가 합쳐져도 다시 분할되기 일쑤였다.[3] 넓은 의미에서의 레콩키스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레콩키스타의 시작년도라고 언급된 711년은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이 시작된 해이다. 718년 경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 작업을 거의 끝마쳤다.[4] 이후 레온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며 분할 상속된 나라 중 하나가 카스티야로 발전하게 된다. 서고트의 멸망에서 배운 게 없는 건지, 초기 레콩키스타 국가들은 게르만의 분할 상속제를 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스투리아스는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레온, 나바라, 카스티야 등으로 왕자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가 합쳐졌다가를 반복했다가 결국 카스티야로 수렴된다. (그 와중에 카스티야-레온 왕국에서 포르투갈이 떨어져 나간다.)[5] 이슬람 역사가들은 술탄이 기독교도들로부터 코르도바 대성당을 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말이 구매지 이슬람에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반론도 있다(동전 한푼 주고 구매해도 구매한 것이니). 강탈이든 구매든 이로 인해 서고트 왕국 시절 성당은 얼마 안 남있다. 이를 이슬람 세력의 불관용의 증거로 보기도 하며, 반론으로는 이슬람 치하에서도 성당 기능을 그대로 쭉 유지한 성당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제시한다.[6] 1300년대엔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90%에 이르렀다. 지도자들로써는 중요한 수입원인 종교세가 줄어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종교세 지즈야를 거두는 것은 스페인의 이슬람 왕조만 했던 일이 아니고 전 세계의 아주 많은 이슬람 왕조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종한 기독교도들한테만이 아니라 후술하듯이 이슬람교 확장 초창기 때부터 개종했던 베르베르인들에게도 이런일들이 벌어졌다.[7] 물론 유대교도들이나 후술하듯이 종교세 문제 관련해서 이슬람교도들인 베르베르인들도 아랍인들에 반대하면 얄짤없었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은 워낙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유대교도들이나 기독교도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서고트 왕국 항목 참고.[8] 아랍인 귀족들은 풍요로운 스페인 중남부의 영토를, 베르베르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습하고 험한데다가 기독교들과의 최전선인 갈리시아 등의 북부 지방의 영토를 받았다.[9]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토는 줄었지만 이슬람 전체의 영토는 오히려 늘어났다.[10] '도루'는 포르투갈어로 스페인어로는 '두에로(Duero)'라고 한다.[11] 1236년 코르도바를 점령한 카스티야는 모스크를 허물지 않고 하기아 소피아마냥 성당으로 개조는데 이 성당이 바로 오늘날 메스키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코르도바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카스티야는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모스크의 문과 종을 가져가 톨레도 대성당을 장식하였다.[12] 이 때 성당에 남아있던 성 야고보의 묘 및 기타 성유물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잘 알고 있던 알만수르가 부하들에게 훼손하지 말도록 엄히 명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13] 물론 포르투갈이 레온-카스티야에서 분리된 것은 12세기 일이지만, 분리가 가능했던 것도 영토 기반이 있어서였다.[14] 그 중 세테닐 공성전은 미디블2: 토탈 워의 역사적 전투로 재현되었다.[15] 여기는 엘 사갈이 지켰다. 그는 1490년에 카스티야에 투항한다[16] 나중에 스페인 내 비기독교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면 이게 옳은 결정이었다. 무함마드 12세는 스페인을 떠나기 전 페르난도 & 이사벨 부부와 조약을 맺어 그라나다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그라나다의 무슬림의 스페인 잔류 및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아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에게 마지막 보호막을 세워주고 떠났으나 몇 년 안 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약은 무효화되고 반란 진압 이후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은 전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17] 그나마 그라나다가 마지막 무어인 왕조였기에 멸망 후 잠시나마 대접을 받은 것이지, 그라나다 이전에 정복당한 무슬림들은 얄짤없이 강제 개종 아님 추방 작업을 거쳐야했다. 당장 이사벨과 페르난도 또한 가톨릭 원리주의자로 레콩키스타 완료 직후 악명높은 종교재판을 처음 시작한 자들이니.[18] 성전의 이베리아 3번 트랙 '침략하는 자, 당하는 자' 도입부에 레콩키스타 직전까지의 역사를 읊는데, 그 마지막 문장이 그라나다 함락이다.[19] 어머니와 구분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의 이사벨이라고 부른다. 아스투리아스는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스페인의 뿌리가 되는 최초의 왕국이며, 스페인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이자 작위명이다. 영국의 왕세자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웨일즈 공)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 [20] 미겔 데 라 파스. 데 라 파스(de la Paz)는 '평화의' 라는 의미로 아래에서 나오는대로 '''평화왕 미겔'''이라는 의미이다.[21] 실제로 프랑스와 스페인은 1521년부터 1559년까지 다섯 번 전쟁과 강화를 되풀이하는데, 이 다섯 번 모두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 포고했다.[22] 1578년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이 24살의 어린 나이에 모로코와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세바스티앙의 종조부 엔히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사람은 본래 추기경의 신분이었는지라 결혼해 자식이 있을 리가 없었고, 즉위했을 때 이미 노인이었기 때문에 즉위 2년 만에 사망하였다.[23] 펠리페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그 과정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는데, 원래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한 사람은 펠리페를 포함해서 총 3명이 있었고(펠리페 2세,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 크라투 수도원장 앙토니우, 3명 모두 마누엘 1세의 손자녀였다) 이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인물은 앙토니우였으나 펠리페는 막강한 스페인의 국력을 이용해 포르투갈을 침공, 앙토니우를 쫓아내고 자신의 포르투갈 왕 즉위를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었다.[24] 펠리페 4세시도했던 바와 같이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 부부왕에 의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경우처럼 동등한 위치에서의 통합.[25] 실제로 세르반테스 본인도 레판토 해전 후 알제리에서 포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아랍어를 배웠고, 캐릭터 이름 또한 "시데 아메테"는 아랍어로 Sayyid Hamid/Ahmed, 즉 '아흐메드 나리'의 스페인어역이고, 성인 Benengeli는 ابن الأيل Ibn al-ayyil, 아랍어로 '사슴의 자손'이란 뜻인데 이 또한 Cervantes란 이름 자체가 ciervo (사슴)이란 철자가 비슷한걸 이용해 작명한 패러디 이름이다. 즉 시데 아메테 베네헬리=세르반테스 본인이란 소리.[26] 영어권에는 The Structure of Spanish History, '스페인사의 구조'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27] 다만 환관으로는 백인 노예보다 흑인 노예가 더 선호되었다고 한다. 가끔 실수로 거세가 제대로 되지 않은 환관이 바꿔치기해서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이럴 때 환관이 흑인이면 만약에 환관과 후궁 사이에서 애가 나온다 해도 바로 판별이 되기 때문...[28] 다만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경우 조상이 아랍계인 경우보다 스페인 현지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