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나 다카시

 

'''朝比奈 隆'''
[image]
'''국적'''
일본
'''출생'''
1908년 7월 9일,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사도하라초
'''사망'''
2001 12월 29일, 일본 효고현 고베시
'''직업'''
지휘자
'''학력'''
교토대학 법학부, 문학부 졸업
[youtube]
아사히나 다카시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브루크너 교향곡 5번. 그의 수족과도 같은 오사카 필하모닉과의 연주.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만주국
2.2.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3. 도쿄의 오케스트라들과 말년
2.4. 사망 후


1. 개요


일본지휘자. 일본에서 서양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이래 정통 독일 낭만주의 음악, 특히 브루크너로 대대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지휘자 중 하나이다. 영미권에서는 일본의 카라얀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 간사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무려 57년간이나 상임지휘자로 재직하였다. KBS 교향악단의 초대 음악감독 임원식 선생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출생과 만주국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사도하라초에서 출생했다. 출생할 때의 이름은 코지마 다카시였으나 직후 철도원 기사인 아사히나 리노스케의 양자가 되어 아사히나 다카시가 되었다. 어린 시기에는 몸이 좋지 않아 가나가와현의 친척 집에 맡겨졌으나 중학교 때부터는 도쿄로 와 학교를 다녔다. 이 시기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실내악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신교향악단(후일의 NHK 교향악단)의 제1회 정기공연을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특이하게도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고 졸업 후 다시 문학부를 다니기도 했다. 대학 시절 교토제국대학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고 이 악단의 지휘자 에마누엘 메테르에게 지휘를 사사했다. 1936년부터는 오사카 음악 대학 시간 강사로 일하다 1937년부터는 교수가 되어 독일어, 영어, 음악사를 가르쳤다. 1937년 교토제국대학 교향악단을 지휘해 비공식 데뷔했고 1940년 신교향악단을 대타로 지휘하여 (곡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공식 데뷔한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인 1942년부터는 오사카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했고 1943년부터는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1944년부터는 하얼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 패전을 맞이했다. 소련군의 만주 진주 후에 소련군이 일본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제자 임원식과 그의 팬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2.2.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일본으로 돌아간 아사히나는 본인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오사카 방송 교향악단과 오사카 음악대학 관현악단, 오사카 음악학교 관현악단의 단원들을 모아 1947년 4월 간사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 같은 시기 간사이 오페라 협회의 창단 멤버로 참여했으며, 1990년대까지 이 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오페라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간사이 교향악단의 연주에서 얻은 명성으로 유럽에서는 이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등 유수의 관현악단을 객원지휘했고, 이 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만나 공연들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에는 간사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개칭되었고 종신 음악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유럽과 북미, 한국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기도 했다. 아사히나의 제자 임원식도 객원지휘자로 여기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71년 11월 4일, 5일에는 서울 시민회관에서 초청 연주를 가지기도 했다. 첫날 공연은 아사히나가, 둘째날 공연은 임원식이 지휘를 맡았다. 첫날 공연에서는 벤저민 브리튼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을 임원식의 해설로 공연하고, 피아니스트 문용희씨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특히 영롱한 현과 명쾌한 관을 통해 화려한 연주였다는 평과 아사히나의 수족처럼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의 연주 특성답게 온화하면서도 웅장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열연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소리의 다이내믹한 표현에 비해서 오케스트라의 피치가 불투명하고 세련되지는 못하다는 평도 있었다. 청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앙코르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둘째날 공연에서는 임원식의 지휘로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를 연주했는데 오케스트라의 중압감이 강렬하고 구성력이 당당하나 전반적으로 금관군이 너무 거칠다는 평을 받았다.
1973년은 아사히나와 오사카필의 전환점이 된 해였다. 도쿄 연주에서 선보인 브루크너 교향곡 5번는 청중들의 열광을 이끌어냈고 그 때까지 일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브루크너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공연이었다. 곡이 끝나자 관객들이 20여분간 기립박수를 쳤다고 한다. 1975년에는 유럽 투어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을 연주해 브루크너 마스터라는 평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특히 브루크너의 무덤이 있는 오스트리아 린츠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 공연은 아사히나의 브루크너 연주 중에도 수연으로 꼽힌다. 이 공연은 하스판을 사용했지만 브루크너 악보 교정 편집자인 레오폴드 노바크가 이 공연을 보고 대호평을 하여 공연이 끝나고 아사히나를 찾아갔고, 아사히나는 노바크에게 노바크 판을 사용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하자 노바크는 이런 훌륭한 공연이라면 판본은 상관이 없다고 한 사실이 있다. 해당 공연은 현재도 LP와 CD로 구할 수 있다.
1977년에 오사카 음악당에서 열린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와 1978년에 도쿄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연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는 모두 음반화되어 일본에서는 이미 일본을 대표하는 거장급 지휘자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2.3. 도쿄의 오케스트라들과 말년


1980년대부터는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오케스트라, 신일본 교향악단 등 도쿄의 다른 주요 오케스트라들과도 협연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쿄에서의 주요 공연들은 신일본 교향악단이 담당했다. 1972년 문화방송과 후지 텔레비전이 재정난으로 인해 일본 교향악단에 대한 지원을 중지했는데,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오자와 세이지가 이에 반발해 자신을 따르는 단원들과 함께 창단했고 창단과 함께 아사히나는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 브루크너,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회 시리즈와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를 일본 최초로 전곡 상연하며 화제가 되었다. 이와 함께 오사카 필도 도쿄 공연에 자주 출현해 오사카와 도쿄를 오가며 공연했다.
그러나 아직 아사히나는 60년대에 마지막으로 NHK 교향악단을 지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도쿄의 청중들도 아사히나가 한번 정도는 베토벤이나 브루크너로 NHK 교향악단 정기 공연에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1986년에 찾아왔는데. NHK 교향악단의 정기 공연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지휘한 것이다. 비록 매년 송년 음악회로 공연하는 프로그램이기는 하나 정기 공연으로 베토벤 9번이 연주되는 것은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으로 볼프강 자발리슈가 전곡 공연을 지휘한 것 이후로는 처음 있는 공연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격이 높은 지휘자를 초청해 귄터 반트의 지휘로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귄터 반트가 질병의 악화로 지휘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악단 측에서도 다른 지휘자들을 대타로 초청하고자 하였으나 독일에서는 찾지 못하고 결국 일본에서 지휘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사히나 다카시가 정기공연 며칠 전에 신일본 교향악단과 니벨룽의 반지 공연을 도쿄에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급히 초청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이 공연도 실황으로 음반화되었는데, 그의 베토벤 9번 연주 중 최상으로 꼽힌다. 1986년에는 독일 대공로 십자장을, 1994년에는 일본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음반들이 해외에도 소개되면서 북미와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장이었던 헨리 포겔이 아사히나와 오사카 필의 브루크너 공연을 본 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에 초청해 브루크너 교향곡 5번, 8번, 9번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 때 미국에 알려지며 브루크너 연주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2001년이 되면 7개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과 4종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 녹음, 3종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녹음을 남겼고, 90세가 한참 넘어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최고령 지휘자 기록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도 점쳐졌다. 그러나 2001년 9월 오사카 필과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연주회와 10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연주회 대 신체적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은퇴하게 된다. 은퇴 후 12월 29일 타계하였다.

2.4. 사망 후


2001년 12월 31일 장례식에서 그가 지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브루크너 교향곡 3번과 함께 묻혔다. 이후 2002년 6월에는 히로시 와카스기의 지휘로 브루크너 교향곡 3번과 임원식의 지휘로 바흐 관현악 모음곡 3번의 아리아로 구성된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그는 죽을 때까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250번 가량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일본에 말러와 브루크너를 알린 몇 안 되는 음악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