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생상스, 죽음의 무도 (rec. 1936)
본 윌리엄스, 푸른 소매 환상곡 (rec. 1949)


파야, Ritual Fire Dance (rec. 1960)
바그너, 신들의 발할라 입성(rec. 1960-1961)
1. 개요
2. 생애
3. 특징
4. 기타


1. 개요


레오폴드 안토니 스토코프스키 (1882.4.18 ~ 1977.9.13)
폴란드아일랜드 혈통의 영국 지휘자.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다.

2. 생애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03년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1905년 뉴욕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12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1938년까지 26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악단에 있으면서 소위 '필라델피아 사운드'라는 특유의 색채감있는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필라델피아의 지휘자였던 중장년기 시절에는 매력있는 외모와 지휘봉 없이 맨손을 이용한 절도 있는 지휘 동작으로 여성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판타지아를 비롯한 몇 편의 영화에 직접 출연하여 지휘는 물론 배우로서 연기까지 선보였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그만둔 후 1940년 25세 이하 유망주들을 모아 올-아메리칸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그러나 1942년 진주만 공습 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해단했다.
1941년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었다가 이듬해 토스카니니가 다시 복귀하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1944년까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1944년 뉴욕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1946년에는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 객원지휘자가 되었다. 또한 여러 곳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했다. 1954년 토스카니니가 은퇴하자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으며, 1955년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번스타인처럼 전형적인 콘서트 지휘자였지만, 1960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몇 편의 오페라를 지휘했다.
1962년에는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1972년 미국을 떠날 때까지 이끌었다. 또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다.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본까지 가서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고향인 런던에서의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상임지휘자인 오토 클렘페러가 고령으로 운신이 제한되었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지휘자가 되었고[1] 이어 앙드레 프레빈과 마찰을 빚고 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도 비슷한 롤을 맡았다. 60년대 후반부터 활동 무대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바뀌면서 독일 오케스트라 객연도 늘어났다. 1972년 영국에 완전히 정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3. 특징


197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영상과 녹음이 많이 남아 있어 최근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구시대의 인물이다. 1882년생으로 푸르트벵글러보다 4년 연상이다. 구스타프 말러가 한창 활동하던 1909년에 지휘자로 데뷔했고 그의 전성기였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절은 1912년부터 1938년까지였다. 워낙 장수한데다가 죽기 직전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한 탓에 필라델피아에서 은퇴하고도 약 40년간 더 활동했던 것. 95세에 사망하기 직전까지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자료들은 그의 최만년 시기의 것이다.
기존 작품에 음향 효과를 극대화 하는 가필 및 편곡을 적극적으로 하여 대중들에게는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바흐의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은 지금도 유명하다. 또 고전주의 이후에 작곡된 작품들도 현대 악기에 맞게 오케스트레이션을 가필해서 연주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를 비판했지만 많은 음악가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다른 지휘자들에 대한 독설로 유명한 세르주 첼리비다케도 스토코프스키는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를 음색의 제왕(Ein König der Farben, der Klänge)이라 평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역시 스토코프스키의 사운드를 부러워하여 재연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스트코프스키가 편곡한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음반으로 취입되거나 연주회에서 종종 연주된다.
오케스트라를 통한 다양한 혁신과 도전을 하였다. 현대음악을 가장 많이 초연한 지휘자이며, 초기 전기녹음 시대부터 레코딩 취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오케스트라 배치에 관해서도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미국식 오케스트라 배치법 역시 스토코프스키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스토코프스키 본인은 한가지 배치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의 성격과 홀의 울림,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특성에 따라 연주회 때 마다 다양한 배치를 취했다.
그의 음악 해석 스타일은 20세기 전반기의 여러 지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휘자의 주관적 해석을 극대화한 편이다. 푸르트벵글러처럼 소위 주정주의 혹은 낭만주의적 해석이라고도 불리는 스타일의 선봉격인 지휘자였다. 특히 푸르트벵글러처럼 적극적인 템포 루바토를 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푸르트벵글러처럼 음악적인 전개에 철저히 몰입하여 이루어진 템포 루바토에 비해 스토코프스키의 템포 루바토는 극적인 과장이 심한 편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호불호가 다소 갈리는 편이다 스토코프스키 지휘의 진가는 사운드 그 자체의 유려함에서 나타난다. 그가 종종 사용했던 자유 운궁(프리 보잉)도 스토코프스키 특유의 사운드와 연관되어 있다. 스토코프스키가 만년에 자신이 창단한 청소년 오케스트라 등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오케스트라와 많이 공연하였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스토코프스키 사운드의 진가가 드러난다. 당대에는 카라얀베를린 필과 10번 쯤 리허설한 컨디션 좋은 첼리비다케를 제외하면 그에 필적할 만한 사운드를 뽑아낼 수 있는 지휘자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스토코프스키가 어떻게 그렇게 화려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는지 무척 궁금해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다고 한다. 만년에 데카에서 주로 음반을 녹음했지만 당시 데카는 잔향을 작게 잡는 편이었고 당시 런던의 녹음 홀 음향도 뛰어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스토코프스키 특유의 음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1950년대 후반에 뱅가드 등 몇몇 마이너 레이블에서 녹음한 음반들이 비록 오케스트라 수준이 떨어지기는 해도 그의 사운드의 특성을 더 잘 드러낸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스토코프스키 특유의 화려한 색채감이 녹음빨이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하는데, 그가 실황으로 남긴 음원들, 특히 서독의 여러 방송 교향악단들과 녹음한 음원들을 같은 조건에서 녹음된 다른 지휘자들의 음원들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다른 지휘자들과는 차별화되는 음향을 뽑아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바흐의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것이 많이 유명하지만, 이는 그의 음악의 일부분일 뿐이며 실제로 스토코프스키의 레퍼토리는 매우 방대하다. 고전주의에도 능했고 현대음악 연주에도 적극적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당시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말러의 교향곡을 자주 지휘하는 지휘자 중 한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스토코프스키는 화려한 색채감과 극적인 루바토가 전매 특허인 지휘자였기 때문에 차이코프스키바그너, 국민악파 같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차이코스키의 경우 교향곡 뿐만 아니라 발레에서도 훌륭한 녹음을 남겼고, 바그너의 경우 독일 지휘자들의 정공법적인 해석과는 차별화되어 있는데, 다른 연주에서 듣기 힘든 내성부나 숨어있는 선율미를 뽑아내는 내공이 대단하다. 또 오늘날 바흐 작품으로 유명한 것처럼 바로크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바흐 외에도 다른 바로크 작곡가들도 종종 지휘했고 심지어 몬테베르디프레스코발디와 같은 극초기 작곡가들과 그들 보다도 앞선 버드 등도 지휘하였다.

4. 기타


여성 편력이 매우 화려하였는데 3번의 정식 결혼 중 세 번째 부인이 미국의 대부호 가문 밴더빌트 가의 상속녀이자 모델과 작가로도 유명한 글로리아 밴더빌트이다. 그 때 글로리아 밴더빌트의 나이는 22살이었고 스토코프스키는 64살이었다. 그런데 글로리아는 그 결혼이 재혼이었다(...).[2] 한편 할리우드 유명 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사귄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사생활 자체는 매우 조용했다. 당대의 스타 음악가였기 때문에 언론이 스토코프스키의 사생활을 캐기 위해 많이 노력했으나 사생활을 잘 관리했기 때문에 거의 가쉽이 없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주최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에 출연하기도 했다. 여기서 번스타인은 바흐의 오케스트라 편곡들을 소개하면서 스토코프스키를 모셔 그 곡에 한정해 지휘를 맏겼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아주 젊은시절 유럽으로 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3]를 만나러 갔는데 당시 그도 이름이 알려진 지휘자가 아니여서 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LP판 하나를 놓고 갔는데 스트라빈스키가 그 음반을 듣고 감명해 그와 친해졌다는 일화가 있다.
루니 툰벅스 버니가 자신을 괴롭힌[4] 오페라 가수를 골탕먹이기 위해 비슷하게 위장한 지휘자가 등장한다.레오폴드라고 나오는 이름하며 머리스타일도 또 지휘대에 오르자 지휘봉을 부러트리고 쓰지 않는 모습도 영락없는 스토코프스키. 링크

[1] 정작 스토코프스키가 3살 더 나이가 많은데 클렘페러 사망 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추모음악회도 지휘했다.[2] 두 사람은 10년 뒤 이혼하였는데 글로리아 밴더빌트는 2번 더 결혼했고 네 번째 남편인 작가 와이어트 쿠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CNN의 유명 앵커 앤더슨 쿠퍼이다.[3] 스트라빈스키의 젊은 시절에는 미국에 없었다.[4] 사실 자기가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쌍방 과실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