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니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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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안드로니코스 2세 (Ἀνδρόνικος Βʹ)
'''휘'''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Ἀνδρόνικος Παλαιολόγος)
'''생몰년도'''
1259년 3월 25일 ~ 1332년 2월 13일
'''재위기간'''
1282년 12월 11일 ~ 1328년 5월 24일
1. 개요
2. 생애
2.1. 치세
2.1.1. 초기 생애
2.1.2. 재정 위기와 베네치아 문제
2.1.3. 아나톨리아 전선
2.1.3.1. 오스만투르크의 발흥
2.1.3.2. 크레타 침공
2.1.3.3. 바페우스 전투
2.1.3.4. 카탈루냐 용병대
2.1.3.5. 방어선의 붕괴
2.1.4. 불가리아와 전쟁
2.1.5. 내전 (1321~1328)
2.2. 가족관계
3. 참고 자료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제2대 황제. 미하일 8세의 아들로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옥좌에 앉아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무책임한 정책을 수습하는 개고생을 했다. 특히 개판난 경제는 그를 괴롭혔고 결국 재정난 해결을 위해 상비군을 대폭으로 감축하고 해군을 해체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제국에 독이 되고 만다.[1] 말년에는 손자와의 내전을 벌였고 결국 패배하여 수도원에서 죽었다. 한마디로 안 좋은 상황 속에서 나름 노력은 했지만 그 과정이 좋지만은 않아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게 된 황제.[2]

2. 생애



2.1. 치세



2.1.1. 초기 생애


풀네임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그는 미하일 8세 와 테오도라 팔레올로고나의 아이들중 가장 오래 살았다. 또한 그는 요안니스 3세 와도 혈연관계가 있다. 그는 1261년, 아버지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직후 공동황제로 임명되었다. 1282년 미하일 8세가 죽자 단독황제로 즉위하였다.

2.1.2. 재정 위기와 베네치아 문제


1285년, 그는 재정 위기와 화폐 가치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 증세와 함대 축소를 결의하였다. 그의 치세동안 히페르피론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면세자들의 수를 줄이며 약 80척을 보유하던 해군을 해체한다. 따라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제노바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에 의존하게 되었다.
1296년에 제노바 인들이 황제의 묵인 하에 콘스탄티노플 갈라타 지구의 베네치아 상인들을 학살하자, 1296 - 1302년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동로마 - 제노바 측이 패하여 산토리니 섬 등이 베네치아 령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뒤늦게 경제사정을 이유로 해군을 해체 한것이 멍청한 짓이었음을 깨닫게 된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0년대부터 해군재건을 목표로 20대의 드로몬을 만들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2.1.3. 아나톨리아 전선



2.1.3.1. 오스만투르크의 발흥

1281년, 에르튀그룰 사후 부족을 이어받은 오스만 1세는 1289년에 에스키셰히르를 함락, 제국 측에 충격을 주었고, 1299년에는 기존의 칭호인 가지를 버리고 베이 칭호를 쓰며 쇠위트를 수도로 정한 후에 오스만 제국이 될 국가를 세웠다.

2.1.3.2. 크레타 침공

안드로니코스 2세는 1277년 베네치아인들과의 조약으로 제국으로 송환된 호르타치스(Hortatzis)에게 크레타공격을 명령했다. 크레타를 완전 정복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여기서 납치한 크레타인들을 메난드로스 강가에 이주시켰다.

2.1.3.3. 바페우스 전투

오스만 1세는 1282년 부족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약 20년동안 동로마령 비티니아에 여러번 침입하여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301년 오스만 투르크는 니케아 제국의 수도였던 니케아를 포위했고, 여러차례 푸르사를 공격했다. 또한 근처 농지를 황폐화하고 니코메디아를 굶기겠다고 협박을 했다.
1302년 봄,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9세는 마그네시아방면 원정을 계획했다. 투르크인은 동로마군의 수에 압도당하며 전투를 피해다녔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군은 너무나 깊숙히 진격해 버렸고 결국 그들은 마그네시아에서 고립되게 된다.
결국 징집병들은 그들의 가족과 집들을 지키기 위해서, 알란족은 트라키아 일대의 그들의 가족들을 지키기위하여 떠나면서 동로마 군은 전투없이 와해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하일도 막대한 난민들과 함께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후 니코메디아를 구원하기위해 안드로니코스는 메가스 헤타리아 게오르기 무잘란에게 2천의 군사를 주어 보냈고 1302년 6월 27일 바페우스 평원에서 (아마도 니코메디아 인근) 오스만 1세가 이끄는 5천의 투르크군 경기병대와 조우했다. 5천의 투르크군은 오스만 1세의 군대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맹인 파플라고니아와 메난드로스 강 인근 투르크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투르크의 돌격이 시작되자 전투에 관심없었던 알란인들이 철수 하기 시작했고, 동로마군의 전열은 붕괴되었다. 게오르기오스는 남아있는 군사를 이끌고 니코메디아로 후퇴했다.

2.1.3.4. 카탈루냐 용병대

미하일 9세의 실패와 바페우스 전투의 패배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지중해에서 끗발좀 날리던 로저 드 플로가 이끄는 카탈루냐의 알모가바르들을 고용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명성대로 여러번 투르크인들에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복지를 제대로 관리하기는 커녕 투르크인들보다도 더 잔인하고 야만적이게 통치하고 약탈 해댔고 이러면서 미하일 9세와 여러번 충돌했다.
1305년 로저 드 플로가 사망하자 적이었던 투르크인들과 함께(...)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황폐화했다. 거기에 아테네 공국과 테베를 정복하여 아예 거기에 눌러 앉으며 동로마 제국을 제대로 엿먹인다.

2.1.3.5. 방어선의 붕괴

투르크인들은 계속하여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대부분의 비티니아일대는 오스만 1세와 오르한 1세의 공격으로 상실되며 안드로니코스 2세의 치세말기에는 푸르사까지 잃는다.
오스만만 문제가 아니였다. 카라시 왕조는 1296년이후 팔로카스트론(Paleokastron)을 포함한 미시아 강가일대를 정복했다. 게르미얀(Germiyan)은 1328년 시마브(Simav)를 점령했다. 사루한은 1313년 마그네시아를 정복했고 아이딘역시 1310년 스미르나를 정복했다

2.1.4. 불가리아와 전쟁


테오도레 스베토슬라브의 불가리아 제국 역시 큰 문제로 다가왔다. 그는 1305~1307년간 미하일 9세를 박살내고 북부 트라키아일대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 전쟁은 미하일 9세의 딸을 불가리아 황제와 혼인시키며 종결되었으며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안드로니코스 2세와 내전을 치룬다

2.1.5. 내전 (1321~1328)


1320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의 형제였던 마누일을 죽였다. 이 살인과 방탕하고 불성실한 행동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의 분노를 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폐위당했다. 폐위당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부활절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해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후 요안니스 6세가 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시리아네스 팔레올로고스등의 지지자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시리아네스는 노황제와의 협상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공동황제에 오르며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다스리게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나머지 영지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두 안드로니코스들은 말이 공동황제였지만 사실상 별개의 국가였으며 두 세력 모두 자유롭게 외국과 조약을 맺었다.
1321년의 평화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는데 안드로니코스 3세 진영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리아네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받은 보상이 활약에 비해 너무 크며 그는 그의 활약에 비해서 너무 적은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안드로니코스 3세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관계에 분개하였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부인을 탐하자 더더욱 화를 참을수 없었다. 결국 시리아네스는 1321년 12월 안드로니코스 2세쪽으로 갈아탄다.
시리아네스는 진영을 갈아탄 대가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메가스 둑스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노황제에게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다. 허나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평화를 원했고 손자와 할아버지는 1322년 6월 영토를 2차 내전이후로 원상복귀하는 것으로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시리아네스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버렸고 그는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시리아네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농노들의 지속적인 반란이 문제가 되어 1327년 2월 두 안드로니코스 사이에 새로운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내전에는 다른 발칸반도의 국가들 역시 참여했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슈 3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의 차르 미카일과 동맹을 맺고 내전을 치룬다.
마지막 내전의 무대는 마케도니아였다. 여러 전투이후 테살로니카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이런 승리로 고취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계획했고 1328년 5월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콘스탄티노플 입성 이후 그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자진 퇴위하게 압박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진 퇴위하고 2년 후에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2.2. 가족관계


''헝가리의 안나''(헝가리의 스테판5세와 엘리자베타사이의 딸)와의 자식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데스퍼트' (1278~1335) 안드로니코스에의해 수도원에 유폐됨
''몬페라토의 올란다''(이레네로 개명), 윌리엄 7세의 딸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데스퍼트' (1286~1308)
  • 바르톨로메오 팔레올로고스 (1289)
  • 테오도레 1세 팔레올로고스 (1291~1338) 몬페라토를 상속받음
  • 시모니스 팔레올로고나 (1294~1336년 이후) 세르비아의 스테판 밀루틴과 결혼
  • 테오도라 팔레올로고나 (1295)
  •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데스퍼트' (1297~1343)
  • 이사키오스 팔레올로고스 (1299)

3. 참고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황제 본인도 당장 경제가 안좋아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것이 멍청한 짓임은 알고 있어서 경제 사정이 어느 정도 나아지자 뒤늦게나마 군사력 복구에 힘썼고 그 결과 육군은 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에 미하일 8세 수준은 아니더라도 다시 적극적인 군사원정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되지만 해군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2] 특히 해군 해체 건은 오늘날에 봐도 쉴드가 불가능하다. 이때 해체된 해군 전력이 나중에 오스만 해군으로 편입되거나 해적이 되어 제국에게 향한 칼날이 되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