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니코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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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진: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턴스 장서고의 초상화
'''제호'''
안드로니코스 3세 (Ανδρόνικος Γʹ)
'''휘'''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Ανδρόνικος ʹ Παλαιολόγος)
'''생몰년도'''
1297년 3월 25일 ~ 1341년 6월 15일
'''재위기간'''
1328년 5월 24일 ~ 1341년 6월 15일, 부제(카이사르): 1313년 즉위, 칭제: 1321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할아버지와의 내전
2.3. 니케아의 상실
2.4. 대 불가리아 외교
2.5. 세르비아와의 관계
2.6. 니코메디아 상실 (1337년)
2.7. 에페이로스 정복
2.8. 사망
3. 여담
4. 참고자료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 제국과 동맹하였고,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2 불가리아 제국과 동맹하여 내전을 치렀다. (1321, 1322, 1327-8년)
오스만 제국에게 니케아와 니코메디아 등 제국의 핵심도시를 상실하였고 불가리아와 동맹하여 14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세르비아를 견제하였다.
풀네임은 근본 넘치는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다. 그의 아버지는 공동황제를 역임했던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이다. 1313년 이전 공동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에 대항하여 내전을 벌인 후 황제로 즉위한다.
그의 치세 도중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루소카스트로에서 패배했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서진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키오스, 레이보스, 포키아, 테실리아, 그리고 에페이로스를 다시 수복했다. 그의 요절은 이후 요안니스 5세요안니스 6세의 내전의 원인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내전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안드로니코스 3세는 1297년 3월 25일, 그의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38번째 생일날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295년 공동황제로 즉위한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였다.
1318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앙리 1세의 딸,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레네와 결혼을 했다. 1321년 즈음 그녀는 아들을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한다.
1320년,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아버지 미하일 9세가 사망한 후 그의 형제 마누일을 살해한다. 이런 살인 행위와 함께 귀족 출신의 무리들과 방탕하게 어울려 지냈고 이는 당시까지 황제였던 그의 할아버지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1321년, 손자의 태도에 화가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그를 후계자에서 내친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수도를 떠나 그의 지지자들을 모아 트리키아에서 황제를 참칭하였고, 대립황제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2.2. 할아버지와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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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 벌어지기 얼마 전인 1307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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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년,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형제였던 마누일을 죽였다. 이 살인과 방탕하고 불성실한 행동으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의 분노를 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폐위당했다. 폐위당한 안드로니코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빠져나와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321년, 부활절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를 빠져나와 그의 할아버지에 대항하기 위해 아드리아노플로 도망쳤다.
안드로니코스에게는 든든한 우군들이 있었다. 이후 요안니스6세가 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그리고 시리아네스 팔레올로고스 등이 있었다.
시리아네스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목적은 늙은 황제와의 협상이었다.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공동황제에 오르며 트리키아, 마케도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나머지 영지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스리게 되었다.
1321년의 평화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두 안드로니코스들은 공동황제였지만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두 세력 모두 자유롭게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었다. 평화는 안드로니코스 3세 진영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깨지게 된다.
시리아네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받은 보상은 활약에 비해 너무 컸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활약에 비해서 너무 적은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안드로니코스 2세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관계에 분계하였다. 마지막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부인을 탐하자 화를 참을 수 없었고, 1321년 12월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세력으로 갈아탄다.
시리아네스는 진영을 갈아탄 대가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메가스 둑스(μέγας δούξ, 수군도총관, 水軍都摠管)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늙은 황제에게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다.
허나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평화를 원했고 두 손자와 할아버지는 1322년 6월 영토를 2차 내전이후로 원상복귀하는것으로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시리아네스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시리아네스는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계획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고 시리아네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농노들의 지속적 반란은 문제가 되었다. 1327년 2월 안드로니코스들은 사이에 새로운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내전에는 다른 발칸반도의 나라들 역시 내전에 참여했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내전을 치룬다.
1327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체르노멘 조약을 체결하여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미카일과 동맹을 맺었다. 이는 세르비아의 왕이었던 스테판 우로슈 3세와 그의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내전의 무대는 마케도니아였다. 여러 전투 이후 테살로니키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이런 승리로 고취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계획했다.
1328년 5월 드디어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콘스탄티노플 입성 이후 그는 그의 할아버지를 자진 퇴위하게 압박했고 그의 할아버지는 자진 퇴위한 지 2년 만에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8년 단독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그의 조력자였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새로운 권력자로 등극한다. 이후 요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가 군대를 이끌때 내정을 담당하는 등 제국의 요직을 맡았다.
이 내전은 늙은 제국을 더욱더 지치게 만들었다. 내전으로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으며 재정은 악화되었다. 다만 이후 새 정부는 법과 제도를 재편하여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편 내전 도중 그의 아내였던 이리니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1324년 8월 16/17일에 죽었다. 1326년 그는 사보이의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327년 딸을 낳는다. 딸의 이름은 마리아(나중에 이리니로 개명함) 팔레올로고나였다.

2.3. 니케아의 상실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일어난 니케아는 제국의 제2의 수도였다. (중국 명나라의 난징과 같은 느낌) 안드로니코스는 이곳을 투르크인의 포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병을 보냈다. 그리고 그 곳으로 파견된 지원병들은 오스만군에게 격파되었다.
1326년, 튀르크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주요거점 중 하나였던 부르사를 점령하였다. 안드로니코스는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포위로부터 구원하고 소아시아의 국경을 안정화 하는것을 목표로 하였다.
안드로니코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후일 요안니스 6세)와 함께 최대한도로 징집할수 있는 4천 명의 병력(최소 2천 명)을 이끌고 니코메디아로 향하였다. 한편 오르한 1세가 이끄는 투르크군은 약 8천 명이었고 펠레카논 언덕에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니코메디아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6월 10일, 오르한은 300명의 궁기병대를 보내 언덕을 올라오려는 동로마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은 동로마군에게 격퇴되었다. 두 군대들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승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동로마군은 후퇴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투르크군은 동로마군이 후퇴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투르크군의 습격으로 안드로니코스와 요안니스는 경미한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진중에는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전투 중 퍼졌고, 동로마군은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 동로마군은 붕괴되었고 이는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니케아는 결국 1331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니케아는 이즈니크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다시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현재 이즈니크의 인구는 중세 니케아의 인구와 비슷하다.
안드로니코스는 니코메디아를 포함한 다른 소아시아의 거점들도 유실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는 오스만 투르크에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휴전을 맺었다.
한편 1329년에 키오스 섬은 마르티노 자카리아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재정 악화로 해체되었던 해군을 이끌고 이룬 성과였다.
1329년, 키오스 섬을 수복한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꾸준히 재정 악화로 약해진, 사실상 해체된 제국의 해군을 증강하려고 노력하였다.
1332년, 동로마 제국의 해군은 고작 10척의 배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아직 그는 비상 시 100척의 상선을 징집할 수 있었다.

2.4. 대 불가리아 외교


세르비아에게서 별로 이득을 얻지 못하자 안드로니코스는 불가리아로 시선을 돌렸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령 트리키아를 합병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불가리아의 새로운 차르, 이반 알렉산데르에게 저지당한다. 동로마 제국군은 1332년 7월 18일 루소카스트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트리키아 정복의 꿈은 날아갔다.
다만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그의 딸 마리아(훗날의 이리니) 팔라이올로고나를 이반 알렉산드르의 아들 미카일 아센 4세에게 시집을 보내며 평화 조약을 맺었다.

2.5. 세르비아와의 관계


1327년 이후, 지속되었던 불가리아와의 동맹은 동로마 제국에 어떠한 이득을 가져주지 못했다.
1330년, 벨부즈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에게 박살났을 때 동로마 제국군은 뚜렷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테살로니키의 지배자였던 시리아네스 팔레올로고스(Syrigiannes Palaiologos) 는 세르비아의 왕이었던 스테판 우로쉬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의 마케도니아 공격을 도왔다. 세르비아군은 카스토리아(Kastoria), 오흐리드(Ohrid), 프릴레페(Prilep), 스트룸니카(Strumica), 그리고 아마도 에데사를 점령했으며 1334년 즈음에는 테살로니키까지 진격했다. 마케도니아 유실은 기정사실화 되고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군의 진격은 동로마 제국군 장군이었던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Sphrantzes Palaiologos)의 활약으로 저지되었다. 그는 배신자로 위장하여 세르비아군 진영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시리아네스 팔레올로고스 (Syrigiannes Palaiologos)를 죽였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군의 혼란을 불러왔다.
1334년 8월, 스테판 우로쉬 4세는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고, 동로마 제국은 마케도니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2.6. 니코메디아 상실 (1337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포키아를 제노바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도메니코 카타네오로부터 빼았았다. 이처럼 안드로니코스는 차례차례 이오니아 일대에서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오스만의 서진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제국은 공물로 오스만의 술탄 오르한을 달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오스만 투르크는 계속해서 소아시아를 공격했다. 소아시아의 거점들은 조금씩 투르크인들에게 정복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1337년 니코메디아가 오스만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니코메디아는 이즈미트로 개명되었다. 이제 소아시아에는 필라델피아를 제외하곤 동로마 제국의 거점이 남아있지 않았다.

2.7. 에페이로스 정복


테실리아의 지배자였던 스테판 가비를로플로스가 1333년 즈음에 죽자 안드로니코스는 이때를 노려 테실리아를 제국의 통제하에 두었다. 소아시아에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리스에서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337년, 니코메디아가 오스만 투르크에 떨어졌지만, 그리스에서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두카스를 이용해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을 합병했다. 1204년에 라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독립한 에페이로스는 150여년 만에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8. 사망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 6월 15일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죽었다. 그의 사망 원인은 말라리아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은 그의 치세에 여러 성공을 이루었지만, 결정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서진을 막지 못했고, 결국 그의 통치는 비참하게 끝났다고 평가한다. 다만 그의 지도력 문제보다는 주변 상황이 너무 안 좋았고 무엇보다도 그의 후계자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했고, 이는 비참한 내전으로 이어진다.

3. 여담


14세기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1332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 황제를 알현하였다고 한다. 다만 동로마 측 기록에는 황제를 알현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흑해를 건너 킵차크 칸국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킵차크의 우즈베크 칸(Öz Beg khan)의 기독교인 아내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 바얄룬 팔레올로기나( Bayalun Palaiologina)가 출산을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자 우즈베크 칸의 명령으로 그녀를 수행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게 된다.
게임 징기스칸 4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징기스칸 4에서는 능력치는 수수하지만 등용 특기가 있어서 영주로서 인재 등용을 맡기면 된다.

4.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 영문 위키피디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