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하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봉하는 1855년생이며, 황해도 수안군 수안읍 석교리 출신이다. 그는 수안읍 천도교구장으로서 천도교 포교 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1일, 곡산의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이 그를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이에 안봉하는 김영만(金永萬), 나찬홍, 최용식, 이영철(李永喆), 홍석정, 한청일 등 천도교 관계자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안봉하는 3월 2일 천도교 시일집회를 이용해 위의 인사들을 비롯한 김동선(金洞宣), 이달하(李達河), 나용일(羅龍一), 장성도(張聖道), 안창식(安昌植), 홍길재, 이윤식(李潤植), 홍두익(洪斗益)[1] , 이응호(李應浩) 등과 함께 교구실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3월 3일에 군내 각 면의 천도교인들을 동원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헌병의 퇴거를 요구할 것을 결의했다. 그는 한청일과 홍석정에게 만셍시위의 연락, 준비, 진행을 담당하게 했고, 대천, 오동, 연암, 공포 등 각 면의 신도들에게 개별적으로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눈치챈 헌병대에 의해 안봉하를 비롯한 김영만, 나찬홍 등 대부분의 주동급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한청일, 홍석정, 이영철은 체포를 모면했고, 그들은 예정대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헌병의 퇴거를 요구했다. 이에 헌병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해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안봉하는 1920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안봉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