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청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청일은 황해도 수안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접수받은 수안읍 천도교구장 안봉하로부터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받자 즉각 찬동했고 김영만(金永萬), 나찬홍, 최용식, 이영철(李永喆), 홍석정 등 천도교 관계자들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했다.
3월 2일 천도교 시일집회(侍日集會)를 이용하여 김동선(金洞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龍日)·장성도·홍두옥·안창식·홍길재·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1] ·이응호(李應浩) 등과 교구실에서 회의를 갖고 3월 3일에 군내 각 면 천도교도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 및 헌병의 퇴거 요구 등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한청일은 홍석정과 함께 연락·준비·진행을 담당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대천·오동·연암·공포 등 각 면의 교도들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시위 계획을 미리 눈치 챈 헌병대에 의해 안봉하·김영만·나찬홍 등 대부분의 주도급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가까스로 검거를 모면했고, 3월 3일 새벽 6시에 읍내의 천도교 교구실 앞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2개의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는 군사경찰 분견소로 행진해 군사경찰 중위 길야광(吉野匡)에게 조선은 독립되었으니 퇴거하라고 요구하여 퇴거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오전 11시 각 면으로부터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계속 모여들어 사기가 오르자 군중은 헌병 분견소로 달려가 또다시 군사경찰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시위군중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한청일은 홍석정(洪錫禎)과 함께 군중을 지휘하여 오후 1시경 시가지를 돌며 만세운동을 계속했고, 다시 군사경찰분대로 나아가 억류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군사경찰대의 발포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한청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