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함경도(관북)'''
咸鏡道(關北) | Hamgyeong Province(Gwanbuk)

【한반도 전도에서 위치보기】

'''위치'''
대한민국(한반도) 동북부 / 북한 동북부
'''면적'''
52,322.49㎢
'''인구'''
약 689만 명 (추정)
'''도지사'''
김재홍(함경북도), 한정길(함경남도)
'''인구밀도'''
112.57명/㎢ (추정)
'''행정구역'''
[image] 함경북도
[image] 함경남도
'''최대도시'''
함흥시
'''별칭'''
관북
1. 개요
2. 자연환경과 지리
3. 인문환경
3.1. 실향민
4. 역사
4.1. 고려 이전
4.3. 근현대
4.4. 북한 치하의 함경도
4.5. 통일 이후의 전망
5. 둘러보기
6.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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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행정구역상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의 대부분[1], 강원도의 일부[2], 자강도의 일부[3]에 해당하는 지역. 이북 5도상 행정구역으로는 당연히 함경북도+함경남도. 이름은 함흥시경성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철령 이북, 관북 지방이라고도 일컫는다.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는 마천령산맥이다.
행정구역의 직접적 전신은 고려동계이며, 동계가 확장되어 고려 말~조선 건국 초에는 동북면(원간섭기 이후~공양왕까지, 태조, 정종), 그리고 함길도(태종[4] ~ 세조)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 경우는 경성 대신 길주에서 따와 붙인 것. 북방 영토가 확립되기 전에는 길주가 동북 지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으로 길주가 2개 현으로 분할되면서 세조 13년에 함경도로 고쳤는데 성종 1년, 영흥 품관 김영로가 함흥이 반역향이라는 이유로 영안도(영흥+안변)로 개칭할 것을 청하여 이를 따랐다가, 다시 연산군 4년부터, 함흥을 강등한 것은 세조의 뜻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함흥을 다시 부로 승격하고 함경도가 되었다. 함흥은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마냥 반역향 딱지를 유지하기에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마천령산맥을 경계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아마도 함경북도는 한반도에 포함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다만 세종 본인은 조종이 일으킨 땅을 헛되이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의견에 찬성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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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연환경과 지리


1896년 이전에도 남·북도로 나뉘었는데[5], 그 기준은 압록강두만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백두산이었다. 경계는 현재 함경남도·함경북도와 비슷했다. 1945년 대한민국이북 5도 기준으로는 혜산군무산군(북한 행정구역 상 삼지연시) 사이.
함경도의 면적은 약 51,000㎢ 정도로 '''한반도 전체 1/4를 차지하는 거대한 도이며''' 팔도 중에서 가장 넓고 국가로 따지면 네덜란드대만보다도 크고, 코스타리카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면적이 비슷하다. 내륙지역은 개마고원을 필두로 한 산지가 많고 대다수의 인구가 밀집한 평야는 주로 동해안에 있다. 이러한 지형상 강원도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이다. 남쪽 끝인 안변군과 북쪽 끝인 나진시 사이의 거리는 600km에 달하는데 이는 부산광역시 - 평양시 간 거리보다 길다.
극한지(極寒地)로 알려진 평안북도(자강도) 중강진후창군(김형직군)에서 바로 이웃 고을이다. 6.25 전쟁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가 한파로 고전한 장진호 전투의 무대 장진군도 이곳에 있다. 참고로 함흥시 이북 한정이지만 대체로 여름이 시원한 지방이다.[6] 개마고원은 물론이고, 청진시, 성진시 등의 해안 지역도 여름 기온이 낮은데 북한한류(寒流)의 영향 때문이다. 동해안 연안은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생각하는 것처럼 춥지는 않다.[7]
전근대사회 시절에는 함경도 남쪽의 함흥평야 일대를 제외한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추운 탓에 농업의 발달이 어려워서 척박한 고장으로 여겨졌었다. 옥수수감자는 조선 중기때야 들어온다. 개마고원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함경도 해안지역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에도 북한한류의 영향으로 흐리고 안개끼는 날이 많아 냉해를 자주 입어 상대적으로 온난한데도 벼농사를 짓기가 힘들다. 물론 이제는 농업 기술이 발달해서 예전에 비해서 농업 발전이 가능한 고장이 되었다. 지리적 환경 때문에 쌀보다는 주로 , 옥수수, , 감자를 심는다. 개마고원 일대의 목초지에서는 목축이 발달해서 , , 염소들을 많이 키우고 있다.
또한 이런 험악한 지리 환경에다 외적을 방비하는 최전방이란 특성 때문에 고려-조선 내내 함경도에 주둔한 육군은 고려/조선군 중 정예부대로 꼽혔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에서 메이커 사단 같은 요직을 논하듯이, 옛날에는 무신이라면 이 동네에서 고생 좀 해봐야 능력을 어필할 수 있었으며, 이는 이성계가 이곳을 기반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새 왕조를 열었던 것, 이순신 장군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한 일대기에서도 알 수 있다.

3. 인문환경


방언은 정평군 이북은 동북 방언을 쓰고 그 이남은 중부 방언권에 속한다. 함경도의 도민성은 성격이 억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평안도/황해도와 함경도 주민간의 성격차이와 갈등에 대해서 다루었다. 영상 20분부터

3.1. 실향민


혼란한 해방정국과 6.25 전쟁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여 실향민이었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은 고향과 가까운 영동지역이나 경상남도 거제, 마산부근이나 부산광역시 등 근방 대도시 등지에 정착했다.[8][9] 그 중 강원도 속초시의 경우 함경도 실향민들이 몰려와 일종의 파워그룹을 형성하여 속초 아바이마을[10]을 형성하였다.[11]
서울 지역에서도 이러한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성북구 하월곡동, 길음동 부근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판자집을 짓고 많이 살았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부근에 함흥냉면집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실향민들 중에서 함경도계가 가장 적어서인지 황해도, 평안도 출신 실향민들과는 달리 지역 모임이라든지 동질감은 덜한 편이다(...)... 특히 함경북도나 개마고원 출신 실향민은 매우 드문 편. 함경남도 동해안 출신 실향민은 속초나 부산 등지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실향민은 적지만 탈북자 80%가 함경도, 량강도 출신일 정도로 탈북민의 함경도 비중은 높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징병검사 기록에서 한반도에서 가장 키가 큰 지역으로 나와있기도 하였다.

4. 역사



4.1. 고려 이전


현재 사학계는 함경남도 일대에 임둔군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원삼국시대옥저의 영역이었다. 뒷날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고, 신라 진흥왕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 리원군 마운령까지 진출했다가 지금의 강원도에 속하는 안변군 일대의 이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남북국시대에는 대체적으로 안변군을 포함한 남부 지역(현재의 강원도(북한)의 대부분)은 통일신라, 그 외에는 발해의 영역이었다. 현재 사학계는 함흥 혹은 북청에 남경남해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발해 관련 유물, 유적들로는 함경북도 명천군의 개심사, 청진시 동쪽의 부거리 일대의 유적들, 함경남도 금호지구의 오매리 일대의 유적들이 있다.
윤관동북 9성이 있던 땅. 고려시대에는 동계에 속했으며, 함경도 출신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 원나라쌍성총관부가 된 이 땅에 전주 이씨 일가가 자리잡았고 고향으로 삼은 땅("흥왕지지")이 바로 "영흥", "화주"의 동북면(함경도)이었다. 한때 이성계의 영향력이 목단강에 닿았을 정도며 1380년 정도엔 이미 함경도 전체가 이성계의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4.2. 조선


조선 왕조 극초기에는 이성계의 연고지였던 만큼 풍패지향, 흥왕지지(興王之地)로 일컬어졌으나[12] 조사의의 난(1402년)과 이징옥의 난(1453년), 이시애의 난(1467년)이 연달아 일어난 뒤 반역향[13]으로 찍히고 계속 멸시를 받았다.
자신들을 차별해온 조정에 대한 분노는, 급기야 임진왜란 때 북상한 가토 기요마사에게 조선 최북단 회령 아전 국경인(鞠景仁) 등이 임해군, 순화군을 팔아넘긴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국경인은 전북 전주에서 유배되어 온 사람으로, 물론 나중에 의병장과 유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함경도는 일본도호쿠 지방 정도로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것.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냥 '식민지 대접' 이라고 표현했다. 본국의 확장이라 여기면서도 2등 시민대접하는 건 과거 서양 본토에서 식민지를 보던 시각과 비슷.
택리지에서 함흥 이북으로는 설명이 거의 없다. 태조가 서북[14] 사람들을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기록, 세종 시절에 6진을 개척하였다는 기록, 함흥 이북 지역의 한두 개 정도의 성씨들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없다. 조금 더 설명을 부연하자면 택리지에서 각 지역을 설명할 때, 각 도에 속한 지금의 우리로 치자면 광역시나 시나 군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인 부나 목, 군, 현에 대한 개괄적인 위치나 이름은 모두 언급한다. 물론 대도시나 역사가 깊은 도시라면 자세한 설명이 더해진다. 그런데 함경도의 경우, 함흥화령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전혀 언급도 않는다. 당시에 이 지역이 얼마나 조선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 그나마 팔도사람들의 인심을 설명할 때 한번 더 언급한다. 함경도 사람에 대해서 '오랑캐와 마주한 탓에 사람들이 굳세고 사납다.' 라고 평가했다. 확실히 춥고 거칠고 야인들까지 많이 쳐들어오는 땅이었으니 사람들이 유순하다면 그게 더 말이 안되긴 한다.
척박한 지역이었던 탓에 4군 6진 개척 이후 사민정책이 반강제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많은 반발과 탈출이 있었다. 또한 오성대감 이항복과 추사체로 알려진 김정희북청군으로 보내진 적이 있었을 만큼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했고 유배지이자 첩첩산중의 대명사로도 유명한 개마고원삼수군, 갑산군이 바로 이곳에 있다.[15]
또한 얄개, 돌상놈같은 비하어들이 이때 나왔으며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어디메 울고 가니'로 시작되는 함경도 전래 민요의 배경설화도 매우 비극적이다. 물론 이 설화의 경우 함경도 출신이라서 보다는 무당의 딸로써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신분계급상 극심한 천대에 더 중점을 맞추긴 하였지만. 국어 영역 고전시가 부문에서 '묏버들 가려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로 시작하는 기생 홍랑의 시조에 담긴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도 함경도이다. 당시 함경도 주민들은 한양은 고사하고 강원도마저 내려올 수 없게 아예 법으로 막아놔서 생긴 비극이었다.[16][17][18]
원래 평안도는 한국사 최초의 대도시 평양이 위치해 문명을 흡수하기 좋다는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조선 말기에 과거합격자 비율이 조선 팔도 중 1위라는 사실에 대비해 함경도는 평안도보다 문화적으로도 여진족의 영향에 오래 있었고 평안도보다 더 조선 왕조의 거리 밖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평안도가 그래도 함경도보다 당대 기준으로는 문화적으로 앞서나간 지역일 거 같지만 이런 생각과 달리 구한말에는 의외로 인구대비 양반의 수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많았다. 다만 이들을 사대부로 인정하기는 싫었는지 택리지에서는 함경도에는 사대부가 없다고 깠다.(...) 단 함경도에서 사대부가 없는 이유는 함경도가 계속 차별받다보니 사대부가 가서 살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하긴 했다.

4.3. 근현대


하지만 조선시대 때 차별 당한 북한 지역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에 더 적극적이었다. 당시 북한 지역이 지리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개화기 당시 이곳에서는 주로 '자강 운동'이 벌어졌고 근대식 교육 및 산업의 발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원산, 흥남, 청진의 발전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라선특별시, 무산군철광과 장진/부전호 수력발전소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덕분에 이 당시 함경도를 포함한 북한 지역은 '동양의 덴마크'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생활 수준이 남부 지방보다 높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한반도 병참기지화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을 의미할 뿐 식민지 피지배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함경도민의 강한 자립심은 '북청 물장수'라는 말로도 알려져 있다. 아직 서울 시내에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는 일일이 물동이를 지고 떠서 날라야 했는데, 이 일을 맡은 사람들이 대개 북청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했다.
함경도에 없는 것 3가지는 노복(奴僕, 머슴), 기생, 거지라는 말이 있었다.[19]
광복 전의 기행문에 묘사된 바로는 함경도 일대의 장터는 거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장마당 상인들 중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달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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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신장 역시 1930년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수준(함남 166.2cm, 함북 166.8cm)이었다. 김연옥의 "기후학개론"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는 가장 큰 허베이성이 165.9cm, 가장 작은 후난성이 159.5cm, 2번째 단신 광동성이 159.7cm , 몽골계 칼카스 및 부리야트는 각각 165.4cm 와 164cm, 퉁구스계 만주족, 오르촌족, 다후르 족은 각각 164.2cm , 160.8cm , 162.6cm이었으며 한국은 평균 162~4cm, 일본은 가장 큰 지역이 161.3cm(간사이)이었다. 당시 한국 최단은 161.7cm의 충청남도전라북도.그 당시 한국의 지역별 평균신장 링크 프로레슬러 역도산(김신락)도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이다. 80년이 흐른 남한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4cm, 일본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0.7cm, 중국 화북, 만주 일대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3~174cm임을 감안(중국 평균키는 일본보다 작다). 북한이 의식주로 제대로 해결 못하는 극단적으로 가난한 나라만 아니였다면 북한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5~176cm에 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평균 162cm 전후로 집계된 한반도의 남부 지역이 영양 보급의 증가로 현재 평균키 174cm가 되었으니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경제력이 충분한 함경도 지역의 평균키는 '''178cm 이상(!)'''이 될 수 있었다.[20]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함경도 출신 군 장성들이 대거 월남하였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 및 군 수뇌부에 발생한 파벌싸움에서 '알래스카 토벌작전'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된다. 당시 '알래스카'가 군내에서 함경도 출신 인사를 가리키는 암호명이었다. 안습.[21]

4.4. 북한 치하의 함경도


러시아가 연해주를 먹으면서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기도 했고, 간도 논쟁도 다 여기서 온 것이다. 반면 일제가 패전할 때는 만주 작전에서 가장 먼저 점령된(청진) 곳이기도 하다.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남존여비가 뿌리박혀 있기로 유명한 북한 중에서도 함경도 남자는 기가 세고 남존여비를 내세우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북한 내의 지역감정 때문에 평안도와 알력이 심하다고 한다.[22] 물론 특권층의 본거지인 평안도에 많이 밀리지만(…).
탈북자 강연에 의하면 2000년대 이후로 함경도가 '''탈북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탈북자 가족들이나 바깥세계에 끈이 닿아 있는 주민들이 꽤 많다고[23] 그리고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역시 탈북 브로커가 거의 본업 수준이라 한다.[24]
거기다 상술했듯이 차별을 꽤 많이 당해온 지역이라 체제에 대한 감정도 나빠, 폭동이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25] 북한 최대의 쿠데타 기도 사건인 6군단 반란사건도 유명하다. 라선특별시(라진, 선봉)은 남포특별시보다도 잘 살아서 북한에서 제2의 소득을 자랑하는데, 이것이 다 중국, 러시아와의 무역 때문이다.
2016년에는 '''기록적인 폭우로 두만강 연변에는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렸다.'''
만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땅 영역과 간도, 연해주를 맞닿아 있어 통일 후엔 국경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지역이다.
풍계리 핵실험장으로 인해 방사능 오염과 지하수 오염이 심각하다. 기본적으로 함경도 출신 탈북자는 피폭검사를 해야 할 정도이다.
2020년 현재까지도 함경도는 정치범수용소가 제일 많은 곳이다.
백두산 위인이라고 김씨 일가를 선전하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통일 후엔 평안도와 함께 김씨 일가의 반감이 높은 지역으로 예상되는 지역이다. 제왕적 독재와 우상화가 김정은이 가진 게 전부이다.

4.5. 통일 이후의 전망


임산자원과 중국, 러시아, 일본의 교차지를 보유하고 있어 발전 잠재력이 매우 높다.
또한 백두산, 칠보산 같은 명산들과 개마고원도 이곳에 있고 두만강동해안을 끼고 있어 관광지로서 발전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특히 여름이 시원하여 피서지로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고 꽤 길게 이어지는 곳이라 향후에 동계스포츠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중국,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도 왕래가 가능하므로, 넓은 배후 시장도 확보되어 있다. 실제로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함경도 지역은 일본 본토를 제외하면 아시아 제일의 중화학 공업 지역이었으며, 관광 명소이기도 했다.
인구밀도는 희박하지만 워낙 땅이 넓어[26] 인구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700만 명이 거주해서, 경상도(약 1,300만)나 평안도(약 1,100만)보다는 적지만 충청도전라도(각각 약 500만)보다는 많다.
때문에 통일이 이루어진 후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경기도, 강원도에 있던 메이커 사단의 일부가 이쪽으로 옮겨 가서 이 쪽이 전방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희망적인 것은 대한민국으로 온 탈북자들의 대부분이 이곳 함경도 출신이라 한국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비밀리에 형성되어가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27]
통일 이후에 량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역에 따라서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로 흡수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중국러시아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각축전이 될 수 있는 곳이다.[28]

5. 둘러보기




6.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1] 김형직군의 대부분의 지역은 원래 평안북도 소속이었다.[2] 원산시, 문천시, 안변군, 고산군, 천내군, 법동군[3] 랑림군은 원래 함경남도 소속이었다.[4] 태종 대 당시 처음엔 영길도(영흥+길주)로 불렀다.함길도는 함흥과 길주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5] 함경도는 다른 도들이 좌우도로 나뉜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도 좌·우도가 아닌 남·북도로 나뉘었다.[6]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냉대동계건조기후가 나타나지만 대부분 Dwa인 반면, 함흥 이북 함경도는 Dwb(내륙)/Dfb(동해안)다.[7] 1월 평균 영하 5도 정도. 북위 41~42도에 있는데, 한참 아래 38선 바로 위에 있는 철원이나 양구 등지보다 따뜻하다(함경도 동해안은 일교차가 작기 때문에 최전방마냥 영하 15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은 적은 편.). 동위도의 북아메리카 내륙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다.[8] 전쟁 당시 북한지역이던 함경도는 한국전쟁 당시 다시 후퇴할 무렵 남쪽으로 피난한 경우가 많으며 육로로 피난하기보다는 미군의 함선을 써 피난한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항구도시인 거제시에 정착한 경우가 제법 많을 수밖에. 흥남철수 항목 참조.[9] 그러한 실향민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문재인 대통령(실향민 2세다.)이 있으며, 부산의 음식에도 영향을 끼쳐 밀면이라는 음식을 탄생시키기도 했다.[10] 그래서 아바이마을 내 식당의 이름에는 함경남도의 지명이 많이 붙어있다. 북청, 단천 등..[11] 사실 실향민이 피난하여 정착한 지역에서 파워그룹을 이룬 경우는 많다. 대표적으로 김화라든가.[12] 당시 '서북'은 평안도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며, 함경도 쪽은 '동북(면)'이라고 지칭했다. 따라서 이성계의 저 발언은 평안도 출신의 임용을 막은 것이지 함경도와는 관련 없는 발언이다.[13] 반역향으로 찍힌 지역 출신은 과거 시험 응시를 제한당했다.[14] 평안도(황해도를 포함하기도 한다.)와 함경도를 통틀어 서북, 서북 양도라고 일컫는다.그런데 함경도의 경우에는 종종 동북 혹은 동북면으로 호칭하는 사료들도 있다.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보통 서북면은 평안도,동북면은 함경도 지방을 가리킨다.[15] 참고로 갑산에 유배왔던 이들 중 하나가 윤선도[16] 실향민 출신인 윤승운 화백이 분개하는 부분이다. 배우 이순재회령 출신.[17] 함경도 음식에 대한 대목이므로 이순재 씨의 회고를 그대로 기록한다. "국수를 말고 떡을 쳤죠. 함경도식 국수를 즐겨 먹었습니다. 함경도식은 메밀이 아니라 당면으로 만들어요. 양념을 해서 고기와 오이무침을 같이 말아 먹는데 상당히 쫄깃쫄깃합니다. 냉면이 아니라 온면으로 만들어 먹었어요. 서울시내에서 그런 국수를 파는 데는 없죠. 떡도 그렇습니다. 찰떡도 함경도 식으로 먹었죠. 보통 콩가루에 묻혀 먹잖아요. 우리는 팥가루에 묻혀 먹었습니다. 모양도 형태도 제각각이지만 그 맛을 무엇에 비교하겠습니까."[18] 제주도 또한 비슷하게 섬 사람들의 한반도 육지부 상륙을 아예 법적으로 금지하는 출륙금지령이 존재했다.[19] 노복은 노비도 의미하는데 노비를 가지려면 노비를 데리고 있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척박한 땅이니 경제력 있는 부자가 있을 리가 없고 부자들이 없으니 기생들이 있을 리도 없다. 그리고 거지들도 빌어먹을 곳이 있어야 빌어먹지 가난한 곳에서 뭘 빌어먹을 지는 둘째고 거지는 집이 없으니 '''그 함경도 겨울을 견딜 수는 있을까...'''[20] 대략 독일 남부,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값이 나온다.[21] 여담으로 평안도 출신 군 인사는 '텍사스', 전라도 출신 군 인사는 '하와이'라고 불렸다. 해방 직후에 미군 제24군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한반도 8개 도 각각에 대한 작전명으로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고.#1#2 이들 '텍사스'나 '하와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평안도, 전라도 출신 군 인사들도 차례차례 숙청된다.[22] 그 단적인 예로 탈북자들이 출연해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한 방송분에서 강명도가 "함경도는 척박한 생활환경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드세며, 평안도 사람들은 순하고 참하다"고 언급하자, 출연한 탈북녀들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열렬하게(?) 이의를 제기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만갑에 출연한 탈북녀들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들이다.[23] 탈북자의 80% 정도가 이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탈북자 출신지를 보면 함경북도(64%), 량강도(12%), 함경남도(9%)가 각각 1,2,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를 합하면 85%에 달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하는 탈북자들도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들이다.[24] 아무리 북한이 선군정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뿌리 깊은 부정부패 때문에 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게 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에서 직접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니(...) [25] 강명도는 한 좌담 프로에서 김일성이 '''관북 출신들은 간부로 등용하지 마라'''란 교시를 내렸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거기에 불만을 가진 갑산파박금철의 고향과 김일성 가짜설을 퍼뜨리고 김일성의 부모를 비판한 오기섭의 고향이 이곳이기 때문. 1 2 [26] 면적은 경상도의 1.5배쯤 되고, 수도권(휴전선 이남)의 5배이다(...) 같은 함경도인데도 '''함흥에서 온성'''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400km''', '''철도 이동 거리는 약 760km'''에 달한다.[27] 이와는 별개로 인프라 개설및 개발은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낭림산맥이라는 험지가 버티고 있어서 난공사가 될 것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서 육로를 통한 수송에 어려움이 있을 전망이다.[28] 함경도는 중국에 있어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위기상황이 다가올 것을 대비해 인민해방군을 함경도 국경 지역으로 배치해 놓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는 부동항의 필요성과 지정적 조건으로 인해 함경도를 붙잡아놔야한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가장 이곳을 주목할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알래스카 주와 거리도 가까울 뿐 아니라 이 두 적대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고 붙들어 놓는데 함경도만큼 명당자리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