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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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승락은 1913년 4월 1일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에서 안병현(安秉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 사립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재학 중에도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유하며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이후 병을 얻어 귀향했다가 1930년 9월 상경하여 중앙기독교청년회 학교 제1부에 입학했지만 공산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 후 서울과 고향을 여러번 왕래한 그는 1932년 '적위대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 후 서울 동대문 일대에 머무르며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으며, 1933년 10월부터 1개월간 서울에서 '공산당재건 경성준비 그룹'을 지도하던 이재유와 여러차례 만나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사 및 그에 대한 비판,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코민테른과의 관계, 운동통일의 방법, 공장 내의 조직 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안승락은 공산주의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철공장에 취직했고, 이재유의 지휘 아래 동대문과 용산 일대를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 4월 하순부터 5월 10일까지 공산주의자 권영태(權榮台)를 만났고, 10월경에 김윤생(金潤生)의 소개로 알게 된 김희성(金熙星)을 동부 이와무라(岩村) 제사공장에 직공으로 잠입시켜 1935년 1월 하순까지 수십 차례 만나 공장 내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또한 김희성에게 이병희(李丙禧), 홍순형(洪淳逈)을 소개하고 그들과 함께 동지 규합 및 공상에서의 활동 방침 등을 정하도록 했다.
1935년 4월, 박인선(朴仁善)을 만난 그는 자신이 속한 국제노선인 '콤그룹'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승낙을 받아냈다. 또한 다옥정 부근에 단독 주택을 구입하여 동지들의 아지트로 삼았고, 백명흠(白明欽)으로부터 운동 자금 700원을 받았고, 6월 하순에는 백명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사용했다. 1935년 5월 이후엔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 종로구 중앙의원에서 회계와 수금을 담당했다. 그리고 9월 상순경엔 중앙의원에서 안창대(安昌大), 강탄구(姜彈求), 박인선과 만나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할 때까지의 준비를 자신의 뜻에 따라 협의할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1935년 10월 경찰에 체포된 안승락은 12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2월 26일 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그는 19개월간 예심을 거치며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1937년 7월 10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43년 8월 6일 경성부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 안승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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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승락은 1913년 4월 1일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에서 안병현(安秉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 사립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재학 중에도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유하며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이후 병을 얻어 귀향했다가 1930년 9월 상경하여 중앙기독교청년회 학교 제1부에 입학했지만 공산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 후 서울과 고향을 여러번 왕래한 그는 1932년 '적위대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 후 서울 동대문 일대에 머무르며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으며, 1933년 10월부터 1개월간 서울에서 '공산당재건 경성준비 그룹'을 지도하던 이재유와 여러차례 만나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사 및 그에 대한 비판,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코민테른과의 관계, 운동통일의 방법, 공장 내의 조직 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안승락은 공산주의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철공장에 취직했고, 이재유의 지휘 아래 동대문과 용산 일대를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 4월 하순부터 5월 10일까지 공산주의자 권영태(權榮台)를 만났고, 10월경에 김윤생(金潤生)의 소개로 알게 된 김희성(金熙星)을 동부 이와무라(岩村) 제사공장에 직공으로 잠입시켜 1935년 1월 하순까지 수십 차례 만나 공장 내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또한 김희성에게 이병희(李丙禧), 홍순형(洪淳逈)을 소개하고 그들과 함께 동지 규합 및 공상에서의 활동 방침 등을 정하도록 했다.
1935년 4월, 박인선(朴仁善)을 만난 그는 자신이 속한 국제노선인 '콤그룹'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승낙을 받아냈다. 또한 다옥정 부근에 단독 주택을 구입하여 동지들의 아지트로 삼았고, 백명흠(白明欽)으로부터 운동 자금 700원을 받았고, 6월 하순에는 백명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사용했다. 1935년 5월 이후엔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 종로구 중앙의원에서 회계와 수금을 담당했다. 그리고 9월 상순경엔 중앙의원에서 안창대(安昌大), 강탄구(姜彈求), 박인선과 만나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할 때까지의 준비를 자신의 뜻에 따라 협의할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1935년 10월 경찰에 체포된 안승락은 12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2월 26일 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그는 19개월간 예심을 거치며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1937년 7월 10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43년 8월 6일 경성부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 안승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35년 12월 3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