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재유(李載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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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5년 8월 28일[1]
함경남도 삼수군 별해면 선소리[2]
(現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
<color=#fff> 사망
1944년 10월 26일 (39세)
청주보호교도소
<color=#fff> 묘소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매장 당시)
(現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color=#fff> 학력
송도고등보통학교 중퇴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color=#fff> 이명
박윤식(朴允植)·강성칠(姜成七)·김소수(金素洙)
윤기순(尹基淳)·김소성(金小成)·신용수(申龍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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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이재유#
1. 개요
2. 생애
3. 사후 평가
4. 참고
5. 대중매체


1. 개요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930년대 활발하게 공산주의 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 당대 최대의 슈퍼스타급의 사상범
자세한 행적

2. 생애


이재유는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해면 선소리(현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의 화전민 가정에서 아버지 이강범(李玒範)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종운(李鍾運)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돌아가시고, 이후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아 그 사이에 두 명의 동생이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낼 수 없어 몇 개월도 안되어 자퇴했으며, 이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5년 '민족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일제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것을 기치로 하는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 카토츠카(下戶塚)에 거주하면서 니혼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퇴학당했고, 이후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계열의 합법적 노동조합인 동경합동노동조합(東京合同勞動組合)에 가입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1927년 11월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이 되었으며, 1928년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고, 같은 해 5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그러다가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경성부로 압송되었고,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미결구류 500일 통산)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2월 21일 만기출옥한 이재유는 경기도 경성부 수송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종래의 파벌에 의한 운동 방향을 배격하기로 결의하고 조선공산당 재건그룹을 지도하는 한편 1933년 7월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 트로이카'라 불리는 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일보사를 통한 언론활동, 공장 중심 노동조합 조직, 지방별 농민조합 조직 및 독서회를 통한 학생운동 지도 등 각 부문별 운동을 통해 반제국주의 독립의 기반을 조성하려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그는 당대 1급 불령선인으로 지목될 정도로 엄청난 공산주의자였다.
일본제국 경찰은 이재유를 체포하기 위해 엄청난 안간힘을 썼으나 번번히 놓쳤다. 그만큼 이재유는 일본제국 경찰로부터 검거망을 피하는 능력이 대단했었다. 당시 언론들[3]조차도 이재유를 굉장히 크게 다뤘다! 그만큼 이재유는 당시 검거망을 피하는데 있어서 신출귀몰했었다.[4]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재유에 대해 굉장히 화제거리로 다루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재유와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와의 일화가 있다. 이게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한번 다뤄진적이 있었다. 미와 경부가 그렇게 잡을려고 혈안이었던... #[5]
1934년 일본제국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있었을 때 이재유도 그해 1월 21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당하여 취조를 받고 있었는데, 같은 해 4월 14일 간수가 순시를 하던 틈을 이용해 탈옥에 성공하였다. 그는 곧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제2강좌 교수이자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의 경성제국대학 관사 다다미 마룻바닥 밑에서 수 개월간 은신했으며, 이 도움으로 이재유는 일본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나 무사히 도주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일본제국 경찰은 발칵 뒤집혀 졌으며, 미야케 교수는 이 사건으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석방 후 귀국해서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다시 교수직을 맡지 못했다.[6]
이후 이재유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거주하면서 도로공사장 인부, 농부 등으로 위장하면서 은신하는 한편, 1936년 6월 조선의 절대 독립 및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재건그룹(조선공산당 경성지방협의회)을 재차 조직하고 끊임없이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활동 및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6년 12월 25일,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경춘선 신공덕역 근처에서 끝내 체포당하고 만다. 이재유를 검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형사만 60여 명. 어찌나 기뻤던지 이들은 잠복하면서 했던 복장을 갈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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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추격개시 이래 4년여, 원흉 이재유 드디어 잡혀 묶이다
일체의 국제 루트와의 절연, 붉은 독재자를 꿈꾼 암약
이재유 체포를 다뤘던 경성일보 기사. 당시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다뤘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국내 독립운동의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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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 체포 당시 일본제국 경찰들이 기념사진 찍은 모습. 앞줄 왼쪽에서 2번째로 두 손을 앞에 모은 인물이 체포된 이재유다. 일본 형사들은 체포 성공을 기념한다고 변장한 복장 그대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재유를 체포했던 담당 경찰서였던 당시 서대문경찰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관제언론이었던 매일신보에서 하루 날짜 지면 전체가 '이재유 특집' 정도로 도배되었을정도였다.
1937년 4월 30일자 1면
1937년 4월 30일자 2면
1937년 4월 30일자 3면
1937년 4월 30일자 4면
그는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다 채워졌음에도 이재유는 비전향자라는 이유로 출옥하지 못했고, 전향을 끝까지 거부하여 너무나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7] 이렇게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청주보호교도소로[8]옮겨져 지내게 되고,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끝내 광복 10개월 전인 1944년 10월 26일 옥사했다. 묘는 고향인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에 있다.

3. 사후 평가


당대 공산주의자 중 거물급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죽하면 일본제국 경찰이 이재유를 검거하고 ''조선 내 사회주의 운동계는 이제 궤멸되었다"하고 한숨 돌릴 정도였다. 그만큼 이재유가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는 증거. 193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음에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묻혔다. 가족으로는 아내 박진홍 이 있었는데, 박진홍도 이재유와 같이 노동운동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나중에 풀려나 박진홍은 1944년 김태준[9]과 함께 중국 옌안으로 망명하여 결혼한다. 부부로 위장해 함께 살았던 이순금도 이재유를 연모했었다고 한다.
이재유의 자손들은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신청도 못하고 거의 존재감없이 묻혀져 갔었다. 박진홍(朴鎭洪)이 감옥에서 낳은 아이가 있었지만 기형이었고 얼마 살지 못한 채 죽었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이재유는 기존의 소련 코민테른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른 국제주의 운동자들의 운동 방식을 거부하고, 구체적 삶에 뿌리박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실천운동을 주장해왔었다. 그는 국제주의자들이 경시 내지는 무시하였던 민족문제를 운동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로 평가받는다.

4. 참고


그의 일생을 자세히, 하지만 쉽게 접하고 싶다면 안재성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읽는 것을 권장. 작가가 원래 소설가라 논픽션을 소설체로 써서 읽기가 편하다.

5. 대중매체


  •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에 등장한다.

[1]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함평 이씨 집성촌이다.[3] 조중동 항목2번, 심지어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등 총독부 관제언론[4] 당시 기사 중에는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사도 있는데 취조실에서 수갑을 풀고 탈출했다던가, 경찰서 건물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는 기사도 있다.[5] 이 에피소드는 여러 면에서 고증이 개판인데, 우선 이재유가 미야케 교수 집에 토굴 같은 것을 만들고 숨어있었던 건 사실이나, 미야케 교수가 모종의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을 견디며 증언거부를 하는 사이에 이재유가 도망가버리고 나서야 저런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 드라마처럼 미와 패거리에게 실실 쪼개며 여유있게 시치미떼고 오리발 내밀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백발의 노교수로 나오 지만 실제로는 30대 중반의 젊은 교수였다. [6] 엄밀히 말하면 미야케 교수가 이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재유의 행방을 묻는 고문 중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잡혀서 고문당하면서 '정신이 맑아진 후' 에 진술서를 쓰겠다고 하여 그 사이 이재유가 도망칠 시간을 벌었던 것....[7] 당시 감옥에 갇혔던 정치범들은 풀려나고 싶으면 총독부 당국에서 일괄적으로 요구하는 '전향서'를 쓰게 했다. '전향서'를 안쓰면 절대 내보내주지 않았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등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출옥하고자 전향서를 많이 썻던 시기로 암흑기 그자체였다.(심지어 일본의 대표 공산주의자인 사노 마나부 같은 유명인사조차도 전향했던 그런 광기시대였으니..)[8] 이재유의 마지막 수형자 카드 기록 뒷면을 보면 '1945 공주교도소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부분은 다시한번 구체적 확인이 필요한것으로 보인다[9] 공산주의자로 동시에 한글학자, 대학교수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많았다. 경성콤에 연루되어 구속수감되었는데 그 사이에 어머니와 아내와 막내아들이 차례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