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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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nous
'안티누스'라고도 한다.
기원후 111년 11월 27일에 태어나 130년 10월 30일에 사망.
고대 그리스의 비티니아(현 터키의 서북부지방) 출신의 청년으로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의 총신이자 애인.
클라우디오폴리스(현 터키의 볼루) 출신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노예출신이였다고 글을 쓰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특히 그가 사후 종교화되었다는 점을 참고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의 가족이 가난한 소상인이나 농부였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그는 어려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 읽고 쓰고 셈을 할 줄 알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즉위 후 지방 곳곳의 행정과 군제 재편을 위해 제국 순회를 하고 있었는데, 123년 7월 클라우디오폴리스를 방문하던 차 안티노우스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이 때부터 연인 관계가 되었던건 아니고, 소년들 중 특출한 자들이 황제에게 선택돼 이탈리아로 보내져 로마 제국식 교육을 받게 된다. 황제는 125년이 돼서야 제국 순방을 마치고 로마의 자기 저택으로 돌아온다. 그후로 부터 약 1년 사이에 안티우노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총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127년부터는 안티노우스도 하드리아누스와 제국 순방에 동행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하드리아누스는 지병에 걸리게 되어 폐허가 된 신전들을 복구하며 신들에게 쾌차를 빌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아시아 지방을 순회할 땐 유태교에 대한 적대감도 점점 강해졌는데, 아무레도 동성애를 죄악시 하는 유대교인들의 태도가 아니꼬왔던 것일 수도 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돌면서 할례를 금지하기도 했다.[1] 130년 8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을 때 안티노우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연인 관계가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 가십이 되기도 하였다. 리비아를 방문 중에는 둘이 함께 사자 사냥을 하기도 했다. 사냥 중 사자에게 끔살 당할뻔한 안티노우스를 하드리아누스가 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사건을 아예 청동메달로 만들어 대중에게 퍼트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130년 10월 오시리스 축제 기간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 헤르모폴리스로 이동하던 중 안티노우스가 나일강에 빠져 사망했음을 황제가 공식 발표했다. 황제가 발표한 공식 사인은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게 물려 익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나일강에서 악어에 물려 죽으면 신이 된다는 이집트 지방의 신앙을 참고해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노우스를 신으로 추대하기로 결정, 안티노우스가 사망한 나일강가에 도시(안티노폴리스)와 신전을 세우고 안티노우스 신앙을 퍼트린다. 아예 안티노우스를 위한 별자리까지 만들었다.[2] 이 신앙은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권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얼마나 열렬히 숭배되었는지, 하드리아누스 치세가 끝나고 100년이 지나서도 안티노우스 종교가 있었다.[3] 안티노우스는 반신반인, 신격화된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온전한 신으로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레도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신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였다. 죽음을 정복한 영웅으로 상징화 되기도 했다는 듯. 다만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는 정말로 신이 되었다'고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치 않다.
또한 안티노우스 컬트 덕분에 로마 전역에 안티노우스 석상이 만들어져서 세워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본인대로 제국 순회 중에 어디서나 안티노우스를 볼 수 있게 되었고, 후대 인류인 우리는 과연 안티노우스가 얼마나 미소년이였는가 증언해볼 수 있고.. 지금도 세계 유명 고전 석상 박물관에 가보면 안티노우스 석상은 하나씩은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은근히 흔하다. 찾기가 별로 힘든 것도 아닌 것이, 거의 십중팔구 하드리아누스 석상과 함께 커플로 놔둔다.
안티노우스의 죽음에 대한 발표는 거의 절대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발표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학계의 음모론의 중심이 되어 안티노우스의 타살설과 자살설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와 너무 친밀하게 지내는 걸 시셈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설, 영원히 젊어지고 싶어 거세시술을 받다 사고로 죽었다는 설, 지병에 걸린 하드리아누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 사랑하는 이를 구할 수 있다는 이집트 현지 믿음대로 자살했다는 설 등등... 다만 당시 하드리아누스가 인신공양과 할례/거세를 매우 반대했다는 점과 안티노우스의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미비했다는 것을 보아 신빙성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
Antinous
'안티누스'라고도 한다.
기원후 111년 11월 27일에 태어나 130년 10월 30일에 사망.
고대 그리스의 비티니아(현 터키의 서북부지방) 출신의 청년으로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의 총신이자 애인.
클라우디오폴리스(현 터키의 볼루) 출신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노예출신이였다고 글을 쓰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특히 그가 사후 종교화되었다는 점을 참고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의 가족이 가난한 소상인이나 농부였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그는 어려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 읽고 쓰고 셈을 할 줄 알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즉위 후 지방 곳곳의 행정과 군제 재편을 위해 제국 순회를 하고 있었는데, 123년 7월 클라우디오폴리스를 방문하던 차 안티노우스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이 때부터 연인 관계가 되었던건 아니고, 소년들 중 특출한 자들이 황제에게 선택돼 이탈리아로 보내져 로마 제국식 교육을 받게 된다. 황제는 125년이 돼서야 제국 순방을 마치고 로마의 자기 저택으로 돌아온다. 그후로 부터 약 1년 사이에 안티우노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총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127년부터는 안티노우스도 하드리아누스와 제국 순방에 동행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하드리아누스는 지병에 걸리게 되어 폐허가 된 신전들을 복구하며 신들에게 쾌차를 빌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아시아 지방을 순회할 땐 유태교에 대한 적대감도 점점 강해졌는데, 아무레도 동성애를 죄악시 하는 유대교인들의 태도가 아니꼬왔던 것일 수도 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돌면서 할례를 금지하기도 했다.[1] 130년 8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을 때 안티노우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연인 관계가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 가십이 되기도 하였다. 리비아를 방문 중에는 둘이 함께 사자 사냥을 하기도 했다. 사냥 중 사자에게 끔살 당할뻔한 안티노우스를 하드리아누스가 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사건을 아예 청동메달로 만들어 대중에게 퍼트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130년 10월 오시리스 축제 기간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 헤르모폴리스로 이동하던 중 안티노우스가 나일강에 빠져 사망했음을 황제가 공식 발표했다. 황제가 발표한 공식 사인은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게 물려 익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나일강에서 악어에 물려 죽으면 신이 된다는 이집트 지방의 신앙을 참고해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노우스를 신으로 추대하기로 결정, 안티노우스가 사망한 나일강가에 도시(안티노폴리스)와 신전을 세우고 안티노우스 신앙을 퍼트린다. 아예 안티노우스를 위한 별자리까지 만들었다.[2] 이 신앙은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권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얼마나 열렬히 숭배되었는지, 하드리아누스 치세가 끝나고 100년이 지나서도 안티노우스 종교가 있었다.[3] 안티노우스는 반신반인, 신격화된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온전한 신으로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레도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신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였다. 죽음을 정복한 영웅으로 상징화 되기도 했다는 듯. 다만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는 정말로 신이 되었다'고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치 않다.
또한 안티노우스 컬트 덕분에 로마 전역에 안티노우스 석상이 만들어져서 세워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본인대로 제국 순회 중에 어디서나 안티노우스를 볼 수 있게 되었고, 후대 인류인 우리는 과연 안티노우스가 얼마나 미소년이였는가 증언해볼 수 있고.. 지금도 세계 유명 고전 석상 박물관에 가보면 안티노우스 석상은 하나씩은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은근히 흔하다. 찾기가 별로 힘든 것도 아닌 것이, 거의 십중팔구 하드리아누스 석상과 함께 커플로 놔둔다.
안티노우스의 죽음에 대한 발표는 거의 절대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발표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학계의 음모론의 중심이 되어 안티노우스의 타살설과 자살설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와 너무 친밀하게 지내는 걸 시셈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설, 영원히 젊어지고 싶어 거세시술을 받다 사고로 죽었다는 설, 지병에 걸린 하드리아누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 사랑하는 이를 구할 수 있다는 이집트 현지 믿음대로 자살했다는 설 등등... 다만 당시 하드리아누스가 인신공양과 할례/거세를 매우 반대했다는 점과 안티노우스의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미비했다는 것을 보아 신빙성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