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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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최전성기로 알려진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ii, 팍스 로마나 에트 아이테르니타스 임페리 )'''시대 중 세 번째 황제이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이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였다.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로마제국 사람들에게는 전쟁보다는 교양과 예술에 뛰어난 황제로 인식됐다. 하지만 오늘날 금석문, 기록 등을 통해 가능한 전쟁을 피하고 제국의 내정 개선에 힘을 기울인 실용적인 명군으로 평가되며, 트라야누스가 최대로 확장한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이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열렬히 심취[1] 해 있었고, 양성애자였으며,[2] 까탈스럽고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트라야누스에 비해 하드리아누스는 한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늘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2. 생애
2.1. 즉위 전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76년 1월 24일생으로 로마 관보에 따르면 로마 태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친척 트라야누스처럼 속주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의 도시 이탈리'''카'''[3] 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임 황제이자 양부 트라야누스와 동향이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외사촌관계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촌수 기준으로 따지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촌수는 5촌이며, 6촌 관계까지를 같은 가문 사람으로 본 로마 기준으로도 같은 집안 친척이었다.
출신 가문을 살펴보면 3세기 이전 히스파니아의 로마인 식민도시 이탈리카에 정착한 본국 이탈리아계인데다, 오랜 세월 동안[4] 히스파니아에 정착한 집안이었다. 또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법무관이었고,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귀족 신분을 얻게 된 트라야누스와 외사촌 형제였다. 그래서 본가가 속주에 더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상당한 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또래의 부유한 귀족 자제들처럼 유년 시절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86년 불과 10살의 나이에 아버지 하드리아누스 아페르가 사망했다.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대대장이었던 사촌 트라야누스와 로마 기사계급에 속한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명했는데,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하드리아누스는 10살때부터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게 됐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부잣집 도련님답게 오락이나 사냥같은 취미생활을 더 좋아했고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당숙뻘인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15살이 되었을 때 군에 복무시키려고 했는데, 이런 시도는 하드리아누스의 사냥 취미 탓에 무산됐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의 매부가 될 예정이었던 세르비아누스가 참다못해 하드리아누스의 무절제한 생활을 보호자 트라야누스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화가 크게 난 나머지 이탈리카에서 사냥에 열중하던 하드리아누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엄중하게 감시했고 그가 로마시 상속 법정 중 한곳의 판사가 되는데 힘을 썼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이탈리카에서 로마로 불러들였고, 하드리아누스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트라야누스 시대와 하드리아누스 시대동안 이탈리카 출신들이 제국 요직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5]
로마로 돌아온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일에 열중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오히려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군복무를 시켰다.
하드리아누스가 배속된 군단은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였고 그의 직위는 군단장이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군복무를 하면서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2군단장을 한 이후, 도나우 강에 주둔 중인 제5군단 마케도니카 군단장을 역임했는데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가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 후 병사했다. 그리고 97년 당숙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었던 해에는 라인 일대 사령관 트라야누스가 새로운 제위 계승자가 된 의미에서 군대 축하 메시지 전달 사절에 뽑히는 영예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 로마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 사망 소식을 전달하는 첫 주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자신을 질투하면서 방해한 다른 사절들을 제끼고 그들이 놓은 여러 장애물들을 다 헤친 뒤 걸어간 노력 끝에 트라야누스에게 제위 등극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친밀한 사이 이상이 됐고 최측근 중 한 명이 되게 되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동안 친족이 몇 없는 황제 밑에서 승승장구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2차 다키아 전쟁이 벌어진 105년에서 10년 기간동안 제1군단 미네르비아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다키아 전쟁을 지휘했고, 전후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106년도 법무관이 됐다. 그리고 107년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하 판노니아 총독을 지냈고 이듬해 집정관까지 지냈다. 이후 그는 114년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진할 당시, 황제가 출정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될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2.2. 황제
2.2.1. 의문스러운 즉위 과정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5촌 관계였고, 트라야누스 시대동안 황제의 최측근이었던데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승진과 공적, 혈연관게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이야기나 확실한 징후는 전혀 없었다. 아울러 그는 트라야누스 시대의 정복전쟁들 과정에서 수 많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확장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확장정책을 주도했던 측근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6] 이 결과, 결국 트라야누스 치세 후반에 일어난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것도 트라야누스의 아내이자 황후로, 하드리아누스에겐 어머니나 다름없던 당숙모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 서기 117년 8월 9일에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한다. 죽기 직전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된다.
양자 지명과 즉위 당시, 하드리아누스의 제국 내 위치는 소년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어머니 역할을 해준 황후 플로티나의 지지 외에는 상당히 확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 당시, 그 옆에 있던 이는 플로디나였고 뚜렷한 유언장 같이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것도 전무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드리아누스의 공식적인 입장에 의하면 트라야누스가 죽기 이틀 전 하드리아누스가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의 제위 등극에 대해 당대부터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어 왔다.
트라야누스의 재위 기간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정식 집정관직을 얻지 못하고 보결 집정관 1회(108년) 역임에 그치는 등 원로원 내의 다른 유력자, 차기 제위 경쟁자들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티베리우스, 티투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 받았던 지위조차[7] 받지 못했으며 그의 공직 생활도 후원자인 당숙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역할이 컸던 걸로 보인다. 즉,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남자혈족임에도 양자가 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또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사이에 반감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측근들과 대립했음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생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왕조를 열겠다라고 연상시킬 수 있는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고 트라야누스는 죽을 때까지 아들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랬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L. Neratius Priscus)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게 아니냐는 루머도 돌았다. 마지막으로,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동석했던 인물들이 다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좋은 황제이든 나쁜 황제이든 즉위 과정이 불분명한 건 사실이며 트라야누스 본인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논란이 없을 수는 없다.
이에 대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통치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8] 는 베일에 쌓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입적과 황제등극에 대해 합리적 이유로 인한 계승 음모를 거론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는 그럴듯한 이야기였다고 하는데, "트라야누스는 실제로 하드리아누스를 입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등극과 양자 입적은 당숙모 플로티나 황후가 꾀한 일이고, 며칠 동안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아울러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플로티나 황후는 그 동안 하드리아누스의 입양을 알리는 편지들을 로마 원로원에 보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당대 로마인들조차 의문점을 제기한 증거는 황후가 보낸 '트라야누스의 편지'에 "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서명 대신 황후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등극 직전 플로티나 황후는 이에 대해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을 할 수 없었다"는 구실을 댔을 것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서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플로티나 황후가 트라야누스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이 확실해진 순간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베일에 쌓인 과정에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시라아 총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트라야누스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총독으로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셀레우키아로 향한 뒤 양자 자격으로 황제의 시신을 셀레우키아로 운반해 화장 후 선박을 이용해 황제의 유골을 로마로 보내고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 기단에 안치하도록 했다. 이후 그는 로마를 향해 먼 길을 갔는데, 그 동안 자신이 복무했던 도나우 방어선의 도나우 강 하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적 위기 순간을 해결했고 102년 트라야누스가 병합한 영토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만큼 뛰어난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고, 이를 자신의 국정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즉위에 대해 의문점도 많았고, 그의 정통성은 처음부터 의문부호가 붙었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4명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국가 전복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처형된 이들은 모두 최고 고위직(집정관)을 지낸 사람들이어서 로마인들에게 이 사건은 "네 명의 집정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네 명의 집정관 사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내세운 명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며, 하드리아누스가 네 명의 국가 원로를 숙청한 이유는 그들의 부와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가 이때 이들의 처형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사건의 전체 흐름이 꼴사나워졌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고대 로마 전승 기록들에 따르면 지금은 사라진 하드리아누스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이 나온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자서전을 통해 "원로원이 자신의 승인도 받지 않고 그들의 처형을 명했다"고 한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는 등극 당시부터 다소 암울하게 시작됐는데, 그는 로마 도착 이후 자신이 사건에 책임이 없다는 서약을 해야 했고,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앞으로는 적절한 재판 절차 없이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에 대해 원로원은 공개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양새를 취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2.2. 즉위 이후
죽을때까지 하드리아누스는 절반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속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 상태를 점검하고, 공공 건축물을 새로 세웠다. 하드리아누스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부분[9] 에까지 손을 댄 선견지명이 있는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예방 조치 덕분에 로마는 흔들리던 시기에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
즉위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확장정책을 중단하고 방위 우선 정책으로 제국의 기본기조를 변동시킨다.[10] 그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수도 로마에 머무르지 않고 곳곳을 돌아 다니며 제국의 방위체제와 행정체계를 재정비했다. 121년부터 시작된 그의 순행은 제국 곳곳에 발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들 수 있다. 트라야누스가 시행한 확장정책은 제국의 판도를 상승시키는 데 큰 공헌은 하였으나, 공격 위주의 정책 시행으로 말미암아 제국 내부의 이완과 균열이 가시화 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제국 곳곳을 순행했고, 행정을 바로잡고 군단을 시찰하며 문제점을 바로잡아 나갔다. 이러한 그의 공적은 당대에는 별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강화된 군단과 잘 정비된 행정 체계로 인해 제국의 위기를 어느 정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대단한 선견지명과 넓은 시야로, 군주로서의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평가를 잘 받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제국 전역을 순행하면서(경비, 하사금, 건축자금) 엄청나게 돈을 써버려서 유대전쟁으로 인한 지출과 함께 제국 재정을 악화시켰다. 그로 인해서 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때 은화 함유량을 줄이면서 긴축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또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브리타니아(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정복했으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자주 남하하자 그 경계에 거대한 장성, 즉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2년 브리타니아 시찰 도중 내린 명령에 따라 5년여의 공사 끝에 완성한 폭 3m, 높이 5m의 장대한 성벽이다. 섬의 동쪽 끝인 뉴캐슬에서 서쪽 끝인 칼라일까지 장장 118km를 거의 일직선으로 건축했다. 장성에는 모두 15개의 요새를 설치했고, 요새마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00∼100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 북방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또 성벽 바깥으로는 폭 8m, 깊이 2.5m의 해자까지 둘러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오해하면 안되는게 성벽에는 문이 있고 북부 지역에 로마식 도로가 깔려 있었으며 로마 도시도 있었다. (괜히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안토니누스 방벽을 만든게 아니다.)
로마 제국 쇠퇴 후에는 잉글랜드가 이 장성을 1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정치적 독립을 향유했고 전통 문화도 지켜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장성은 그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있어 로마시대의 축성술과 군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군에서 카타프락토이가 처음 도입되었으며 (ala I Gallorum et Pannoniorum catafractata) 알란족 기병의 돌격을 막기위해서 창을들고 팔랑크스 형태의 방진을 짜는 군단병이 기록에 등장했다. [11]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있지 않아도 충분히 제국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의 치세에서 이탈리아는 다른 속주와 다를바 없는 위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랜 시찰과 여행은 그의 체력을 빼앗아 갔다. 40대의 한참 나이에 즉위했고 사자 사냥을 취미로 여길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자랑했으나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제국 변경 시찰에 쏟다 보니 자연히 가혹한 자연 환경에 노출되었고[12] , 그것은 그의 체력을 확실히 약화시켰다. 결국 재위 기간 발생한 유대 분쟁 직후 티볼리의 황제 별장으로 돌아왔고, 138년 후계자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지명하고 티볼리에서 병사했다.
2.2.3. 유대인 문제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전임자인 트라야누스 시절 일어난 유대인 반란을 해결해야 했다.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있을 때 뒷통수를 친 것인지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무척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3]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이를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이는 로마 입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대인들 특유의 디아스포라 성향은 그 전에도 강했으며,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로마인으로 동화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한편, 역으로 유대교로 개종해서 유대인 집단에 합류하는 기존 로마인들도 많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이후 로마 제국이 계속 엄수하진 않았고, 이후에도 예루살렘엔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긴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대 문제를 하드리아누스에게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 일명 '바르 코크바의 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의 링크를 참조할 것.링크
3. 성격 및 기행
그의 언행을 기록한 황제 실록에 따르면 '성격은 복잡하고 변덕스럽다'했다고 한다. 나중에 늙었을 때는 '노친네 성격 한번 드럽게 까칠하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14] 가까이 하기 어려운 성격임에는 분명한 듯. 사실 젊었을 때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던 것도 그의 까칠한 성격이 한 원인이었다. 이런 성격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엄청난 실력이 기반이 되어있었다. 문학, 수학, 기하학, 회화, 악기 등에서 초일류였고 무예에 굉장히 능했다. 로마 황제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은 매우 드물다.[15]
건축가로도 뛰어났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은 판테온은 그가 착안해 설계한 것이며[16][17] 티볼리에 지은 광대한 별장에도 그의 취미나 미적 감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뒤에서 설명하듯 하드리아누스는 엄청난 그리스광이었는데, 황제 권력을 이용해서 아테네에 도시 하나를 지어서 바쳐버렸다. 이후 자기가 지은 신도시와 원래 도시를 구별하는 지점에 여기까지는 테세우스의 도시,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도시라는 개선문을 만드는데, 허영심이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18][19] 이 신도시 지역은 오늘날에도 아테네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플라카 지역으로, 이곳에 그가 만든 개선문과 아고라의 유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와 가까워서 사람들은 이곳도 그냥 고대 그리스 때 도시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안습... '아드리아노플'로도 불리는 '하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도 그가 지어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로마 엘리트 중에서 가장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었으며, 덕분에 그리스 철학에도 꽤 뛰어난 학문적 식견이 있었다.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20] 네로처럼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황제였지만, 네로는 취미에 매몰되어 국정을 소홀히 한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21] 굳이 흠을 잡자면 티볼리에 엄청난 돈을 들이 부어 별장을 지은 정도. 다만 그가 평소에 제국 운영에 쏟아부은 열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애교라고 봐줘도 될 듯하다. 이후 로마 황제들은 수염을 기르는 황제들이 많아지게 된다.[22] 한마디로 엄친아.
단, 제국 내 최고 대학인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에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벌여 그들을 제압했다는 일화에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매우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이는 오히려 하드리아누스 특유의 성격적 결함을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거기 있던 학자 중 하나는 "토론이란 등 뒤에 30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있는 남자가 늘 이기는 거라고" 훗날 진지하게 언급했었는데, 이는 단순한 볼멘 언급이 아니다. 철학 부분에서 당대 지식인 평균을 웃돌긴 했으나 석학급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만심과 허영심이 대단히 강한 하드리아누스가 권력으로 토론회를 열어 학자들을 찍어눌러 잘난 척 했던 것이 진실이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12사도와 동등하다고 생각했던 말년의 콘스탄티누스조차도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자기 학식을 전문가 집단에게 과시하진 않았었다.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고 양성애자였다고 한다.[23] 당장 영문위키에만 가도 대놓고 그리스적 사랑[24] 같은 말이 가득. 그는 123년 클라우디오폴리스(현 터키의 볼루)를 여행하던 중 안티노우스(안티누스)라는 청년과 만난 후 연인 관계가 된다. 제국은 순회할 때에도 안티노우스를 늘 동행하고 다녔다고. 그러다 130년 이집트에서 그가 죽었을 때 이집트에 안토니오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워줬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안티노우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 물려 죽었는데, 마침 이집트에선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라는 믿음이 있는 걸 안 하드리아누스는 즉시 안티노우스를 신으로 삼아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안티노우스 신앙은 그리스 문화권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거기에 더해 안티노우스를 조각한 석상은 제국 전역에 뿌렸다. 제국 전역을 시찰할 때마다 보기 위해서였던 듯? 정확히 말해 황제가 명령했을 수도 있지만 안티노우스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가 죽고 나서 냉혹하고 까탈스럽고 땡강이 심한 것도 큰 원인일지도. 지금도 세계의 아무 고전 석상 박물관에 가보면 하드리아누스 석상과 안티노우스 석상은 늘 함께 둔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가 연인 관계였고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를 진심으로 아꼈다는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많지만, 정작 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나 연인 관계가 되었고 그 후 관계가 어떠했고 등에 대한 내용은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안티노우스의 죽음도 사실 미스테리다. 하드리아누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게 끌려가 질식사했다는 식으로 결론내고 안티노우스 신앙을 퍼트렸지만, 안티노우스가 타살되거나 자살했다는 의혹도 많다. 가령 황제와 안티노우스의 친밀한 관계를 질투한 궁중 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식.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는 오시리스 축제기간이었는데, 하드리아누스가 큰 병에 걸리자 자신의 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현지 믿음을 듣고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안티노우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하드리아누스 본인이 인신공양을 증오해 제국내에서 완전히 금지했다는 것들을 보면 둘 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5] 안티노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많이 남지 않은 이유는 하드리아누스 본인이 제거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무래도 종교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인간 내력은 별 도움이 안 되는 데다, 안티노우스와의 사생활은 자신의 기억과 추억만으로 충분하다고 봤을 수도.
자신은 비비아 사비나(Vibia Sabina)[26] 라는 여자와 결혼하고 자식을 2명이나 입양했으나 친자식은 없었으며, '자식 새끼 있어봤자 머리만 아파'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황후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위에 언급된 안티노우스보다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비중이나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황제는 그래도 역시 당대 로마인답게, 말년 어느날 괴로움을 더는 참지 못해 호신용 단검으로 자살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었다. 로마인들은 늙어 심신이 다 소모되면 추하게 사느니 자살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고 그도 그러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단검을 빼앗아 막자 그 다음엔 자신을 존경해 온 그리스 출신 주치의 헤르모게네스[27] 에게 독약 제조를 명령했다. 명령을 안 따를 수도, 그렇다고 존경하는 황제를 죽일 약을 만들 수도 없었던 이 불쌍한 의사는 결국 조제한 독약을 자기가 먹고 자살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사건에 충격받아 그 후 다시는 자살 시도를 안 했지만, 대신 땡깡이 한층 더 심해져서 주변 사람들을 더욱 괴롭게 하고 만다.[28]
어느 날 공중목욕탕에 갔는데 과거 자기 휘하의 백인대장으로 있었던 노인이 벽에 등을 문지르고 있어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 때밀 돈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을 듣고 때밀이 노예를 두 명이나 하사하고 유지비까지 대줬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목욕탕에 가보니 온 사람들이 죄다 벽에다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걸 본 하드리아누스가 사람들에게 서로의 등을 밀어주라고 했다고.
4. 창작물에서의 등장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하드리아누스의 생애를 그린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지었는데 이 책 한 방으로 그녀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5년 세계사에서 출판된 1권짜리였으나 현재는 절판되었고, 지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간행된 2권짜리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또 그만큼 과감하면서도 불문학 특유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니 시간이 있으면 일독을 권한다.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 등장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바로 이 사람이다. 테르마이 로마이의 주인공, 루시우스 퀸투스 모데스투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며,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만화가 막을 내린다. 위에 언급된 건축가로서의 자질, 동성애를 즐기는 것 모두 가감없이 나온다. 성우는 오오츠카 아키오.
PSP 게임 로스트 레그넘에서는 최종보스로 등장. 이미 죽었으나 영혼만이 남아 악령이 되었다.
사실은 로리라고 하더라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키르슈타리아 보다임이 그의 팬이라고 한다.
[1] 당시 로마에서는 별종으로 여겼다. 하드리아누스 이후 더이상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2] 그 유명한 상대가 바로 안티노우스이다. 줄인 말로 안티노. 그는 13세 혹은 15세 때 그리스 이타카 지방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만난 뒤로 전쟁터나 순방시에도 따라 다녔고 23세 때 이집트 나일강에서 갑작스럽게 사망(자살 또는 타살)하게 된다.[3] 지금의 세비야 근처의 마을로, 지금까지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존재한다. 전형적인 로마 식민도시의 예를 잘 보여주는 유적. 이탈리카는 당연히 이탈리아에서 나온 이름이고, '하드리아누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이 빼도박도 못하는 이탈리아 출신임을 보여주는 것.[4]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를 정복할 때 정착했다.[5] 아직도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들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을 때니 조심스러웠겠지만 말이다.[6] 심지어 하드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 지방조차 포기하려 했었다. 반대가 심해서 결국 그만두긴 했지만, 이 황제가 얼마나 확장정책에 부정적이었는지를 가늠하는 초석은 될 수 있다.[7] 카이사르 칭호, 황제와의 공동 정규 집정관직[8] 디오 카시우스의 부친도 원로원 의원이었고, 이 집안 자체가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그리스계 세습 원로원 가문인 것을 생각하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다.[9]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히스파니아 원정, 동방 순방, 칼리굴라의 갈리아 방문,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원정 정도이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 역시 속주 방문을 자주 한 편은 아니었다.[10] 로마제국은 확장정책을 중단한 적이 없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직접통치 기회를 포기한 의도는 알 수 없고 아우구스투스 방식으로 돌아간 것 뿐이며(동맹 왕국, 지도자를 통한 간접통치) 다만 자신의 치세에는 제국의 재정비가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인데 죽을 때까지 하고도 부족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11] 이러한 로마군의 변화는 3세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후기 로마의 많은 부분이 로마의 전성기라고 하는 오현제 시대때 태동하고 있었다.[12] 로마는 위로는 독일, 아래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서로 정반대의 기후대에 놓인 거대한 나라였다. 거기에 더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막중한 결정을 계속해서 내려야 했음으로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드리아누스는 군단 점검 중에 마차에 앉아 지켜보기는 커녕 완전군장을 직접 짊어지고 병사들과 같이 행군하면서 직접 상태를 파악하는 일도 많았다. 거기에 더해 여행 중 그의 심신을 위로하던 동성의 애인도 잃었으니...[13] 이때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들의 수가 무려 40만 명에 달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 제국은 모든 군사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약 12만 명의 군대를 유대로 보내야했다. 유대인들이나 로마나 모두 전력을 다해 싸웠던 셈.[14] 이건 젊어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심신을 혹사시킨 탓에 말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렸고 게다가 후계자까지 지명해 둘 정도로 할 일도 다 해놓아서 뒷 일 걱정할 필요도 없어 더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탓도 컸다.[15] 후세에 또 한 번 등장하긴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로 갈리에누스다. 학식도 대단했고 군대 지휘 능력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 사후 체제 전반에 걸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을 실천했던 오랜만에 등장한 개혁 군주였다. [16] 구체적인 실무야 건축가들에게 맡겼겠지만, 어쨌든 돔형 지붕이라는 아이디어는 그가 냈다. 판테온은 원래 아그리파가 지은 건축물이지만, 불탄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설계해 재건했으므로 그가 지은 건물이라 봐야 한다.[17] 여담이지만, 트라야누스 시절에 도나우 강에 트라야누스 대교를 놓은 로마의 대 건축가 아폴로도루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설계한 '베누스와 로마여신 신전'을 보고는 '신들이 일어서면 지붕이 뻥 뚫리겠군.'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세간에 퍼져서 하드리아누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이후 '''아폴로도루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처형당한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로마를 미화하는 작가의 성향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주도하는 건축 사업에서 모조리 배제됐다고만 왜곡 기술되었다.[18] 이는 아테네의 학자들과 아가리 파이팅을 하다가 권력으로 찍어누른 유명한 일화에서 또 드러난다.[19] "30개 군단을 지휘하는 인물에게 어떻게 반항한다는 말이냐?"라는 투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이 남아 있다.[20] 정확히는 네로가 턱수염을 슬쩍 기르려고 시도한 적이 있긴 하다. 평이 안 좋아서 그만뒀지만. 거기다 현재 보존된 네로의 두상을 보면 턱수염이라기보단 구레나룻을 상당히 길러 목까지 뻗어 있는 정도이지 실제 턱 부분은 깔끔하게 면도했다.[21] 하지만 과도하게 그리스 출신을 원로원 의원으로 많이 임명하였다.[22]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가 딱히 반헬레니즘적이었던 건 아니며 기독교적 전통과 구레나룻 사이에는 별반 상관 관계도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수염을 길렀다. 기독교도 로마 황제들 중에도 수염 기른 사람은 많다. 사소한 데 너무 큰 의미를 두진 말도록 하자. 더욱이 앞에 소개된 황제들보다 훨씬 과거의 인물인 군인 황제 시대의 고르디아누스 3세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23] 후술하듯, 황후가 존재는 했으나 대개의 로마 황족들이 그렇듯 정치적 목적의 결혼이었다. 황제가 그녀(이성)와 관계를 가지는 것조차 기피한 것인지 그저 생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둘 사이에는 친자가 없었다.[24] Greek love. 보통은 그리스 시대에 흔했던 남성 간의 동성애 관계, 특히 소년애 관계를 지칭하곤 한다.[25] 더 나아가 안티노우스가 더 이상 늙기 싫어 거세 시술을 받아 사고로 죽었다는 주장까지 있는데... 이미 20살이 넘어간 사람에겐 거세 시술을 한다고 카스트로가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로마 시대에도 알던 거고, 고대 로마에선 거세는커녕 포경수술조차 금기시해 종교적 죄악으로 보고 있었다.(유대인 탄압이라는 말도 있다.) 게다가 당시 포경=할례 였는데... 그걸 범죄자를 골라서 해버리는 시대였고 그렇게 명령을 내려서 시행을 한 게 하드리아누스 본인이다.[26] 트라야누스황제의 친척이었다고 한다. 모친이 그의 조카딸이었다고.[27] 심지어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순방에도 함께 할 정도로 황제를 존경했으며, 하드리아누스도 그를 매우 신뢰했다.[28] 다만, 나중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안토니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적은 자서전에서는 "그런 소동을 일으켜서 미안하다" 라는 투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적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