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타와킬
1. 개요
على الله المتوكل
알 무타와킬 알라 일라[1]
재위 847년 8월 10일 ~ 861년 12월 10일
생몰 822년 3월 ~ 861년 12월 11일
아바스 왕조의 10대 칼리파. 와티크의 친동생인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대의 재상[2] 과 사마라의 군사령관을 처형하였고, 튀르크 용병대의 활약으로 850년대에 일어난 4번의 반란[3] 을 진압하였다. 그의 치세에 사마라의 대모스크가 건립되었고, 마문 치세 말부터 설치되었던 종교 재판 (미흐나)를 20여년 만에 폐지하였다. 무타와킬은, 튀르크 군 사령관들의 세력을 견제하여 몇명을 처형하였는데, 이에 장남 문타시르와 튀르크 경호원들이 합심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861년 12월)
그는 와지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정을 운영한 몇 안되는 아바스 조의 칼리파이다. 또한, 아바스 조의 전성기를 누린 마지막 군주이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를 두고 장남 알 문타시르 대신 차남 알 무타즈를 지원하다가 문타시르를 지지하던 튀르크 대신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사후 사마라는 혼란에 빠지며, 사마라의 무정부 상태 (861 ~ 870년) 시대가 도래하며, 지역 에미르들에 대한 통제가 약해진다. 861년을 기점으로, 이슬람 사에서는 본격적인 중세 혼란기가 시작된다.
2. 종교 정책
무타와킬은 선대 칼리파들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페기하였고 동시에 이성을 강조하였던 무으타질라 파에 대한 지원도 자제하였다. 그는 무타질라에 대한 비판으로 알 마문에 의해 투옥된 한발리 파의 개창자 아흐마드 이븐 한발을 석방하였고 850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은 무슬림들과 구별되는 노란 의상을 입을 것을 명하였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동에서 무슬림은 다수가 아니던 때라 제대로 시행된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스스로 예언자임을 칭하던 무함마드 이븐 알 파라즈를 같은해 6월 18일에 처형하였다. 시아파에 대한 탄압도 재개되어 열두이맘파의 10번째인 알리 알 하디를 사마라로 소환하여 가택 연금을 시켰다. 무타와킬의 치세에 압바스 조는 수니 이슬람으로 확실히 돌아섰다.[4]
3. 건설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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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사마라의 마스지드 유적과 말위야 미나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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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모스크 일대. 시내 남부에도 발굴 조사가 한창이다.
사마라 시내 북쪽의 궁전 유적
무타와킬은 15년의 치세 동안 수도인 사마라 일대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그중 대표작은 848 ~ 852년에 걸쳐 완성된 대 모스크 (마스지드)인데, 무려 17개의 회랑을 갖춘 당대 최대 규모의 사원이었다. 또한 나선형의 말위야 (ملوية)[5] 미나렛은 52m의 높이를 자랑하며 당대 서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외에도 무타와킬은 사마라에 20여개의 궁전을 세웠고 도시를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9세기 중반 무렵 사마라는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 장안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마라의 유적지구 넓이만 1만 5천 헥타르가 넘는데 그 대부분이 무타와킬 시대에 지어졌다. 그의 치세동안 사마라 일대의 건축에 들어간 예산만 무려 2억 디르함을 넘었다 한다.
859년부터 무타와킬은 사마라 시내에서 북쪽으로 15 km 가량 떨어진 옛 아시리아 ~ 페르시아 도시 유적 인근에 알 자파리야[6] 라는 신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우선적으로 세워진 아부 둘라프 모스크 (جامع أبو دلف)는 사마라 대모스크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한다. 두 사원의 넓이는 각각 5만 제곱미터에 이른다. 또한 둘다 높은 나선형의 미나렛이 특징인데 둘라프의 미나렛은 33m 로 말위야의 축소판이다. 자파리야의 운하 건설은 유대계 기술자인 신드 이븐 알리가 맡았다. 860년경 무타와킬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신성히 여기는 천년이 넘은 측백나무를 베어 자신의 궁전 기둥으로 쓰이게 하였다. 다만 무타와킬은 해당 목재가 사마라에 도착하기 전에 암살당하며 조로아스터의 저주가 내린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 영어 Al-Mutawakkil, 알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라는 뜻. 이건 왕호이고 원래 이름은 ابوالفض جعفر بن محمد المعتصم بالله (아불 파들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알 무으타심 빌라)이다. 따라서 본 이름은 자파르.[2] 특히 젊은 시절 칼리파 앞에서 자주 그를 모욕하던 알 자이야트. (847년 9월 22일 체포, 곧 고문사). 이후 자이야트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우며 권력이 커진 튀르크 장군 이크타는 848년에 그가 핫지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때에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이크타의 집에선 금화 디나르 백만 닢이 발견되었고 그는 849년 12월에 옥에서 굶어죽었다.[3] 아르메니아 총독의 반란 (851 ~ 852년), 1차 & 2차 홈스 반란 (854, 855년), 상 이집트 베자 인들의 반란 (856년)[4] 그외에 키릴 문자를 만들어 유명한 수사 키릴이 동로마 사절로 사마라에 파견되어 그와 면담하였다고 한다.[5] 아랍어로 뱀의 똬리 혹은 뒤틀린 이란 뜻이다[6] 무타와킬의 본명은 자파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