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
'''ٱلْخِلافَةُ ٱلْعَبَّاسِيَّة‎'''
''al-Khilāfatu al-ʿAbbāsiyyah''
[image]
아바스 조의 깃발[1]
[image]
서기 9세기경의 최대 강역
749년 ~ 1258년 (바그다드, 이슬람 제국)
1261년 ~ 1517년 (카이로, 맘루크 왕조의 꼭두각시)
수도
쿠파 (749년 ~ 752년)
안바르 (752년 ~ 762년)
바그다드 (762년 ~ 796년)
락까 (796년 ~ 809년)
바그다드 (809년 ~ 836년)
사마라 (836년 ~ 892년)
바그다드 (892년 ~ 1258년)
카이로 (1261년 ~ 1517년)
언어
아랍어(공용어)
페르시아어
아람어
쿠르드어
콥트어
베르베르어
소그드어
종족구성
아랍인
페르시아인
베르베르인
아람인
이집트인
소그드인
튀르크인
쿠르드인
유대인
정부형태
군주제(칼리파)
주요 칼리파
아불 아바스 앗 사파(750~754)
하룬 알 라시드(786~809)
알 마문(813~833)
면적
8,386,283km² (계산값)
인구
64,000,000명 ~ 71,000,000명 (추정치)
국교
이슬람(수니파)
통화
디나르
이전국가
우마이야 왕조
다부이 왕조[2]
이후국가
바그다드 이후
몽골 제국
맘루크 왕조
카이로 이후
오스만 제국
1. 개요
2. 역사
2.1. 아바스 왕조의 성립
2.2. 전성기
2.3. 꼭두각시로 전락한 칼리파
2.4. 셀주크 왕조(1037 ~ 1194)
2.5. 중흥기
2.6. 1258, 몽골에 의한 멸망
3. 영토 관련 오류
4. 아바스 왕조의 계보도
5. 역대 칼리파
5.1.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5.2. 카이로 아바스 왕조
6. 역사보기 틀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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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알 다울라 알 압바시야),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 (알 칼리파 알 압바시야), العباسيون (알 압바시야둔)
영어: Abbasid Caliphate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 압바스 왕조라고도 부른다. '''중세 이슬람의 황금시대'''이다. 우마이야 왕조에 이은 이슬람의 2번째 세습 제국이며 이라크 일대가 중심지였다. 이 시기부터 페르시아 인들이 이슬람 세계의 핵심 계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 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워졌기때문에 그들의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10세기부터 튀르크 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9세기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하나피, 무타질라 학파가 득세하며 이른바 이슬람 황금기라 불리는 문화적 번영기를 구가했으나 10세기부터는 시아파 제국들의 융성과 지방 왕조들의 독립과 함께 쇠퇴하였다.
이후 부와이, 셀주크 왕조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치적 실권을 상실했으며 12~13세기에 이라크 일대의 지배력을 회복하며 부흥하는 듯하였으나 1258년, 몽골 제국군에게 바그다드가 함락되며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그 친척을 옹립하여 칼리파 계보가 이어졌지만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했으며 1521년에 카이로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 셀림 1세가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선양을 받아 완전히 종말을 고하였다.
한국사에서는 '''신라, 고려와 교류했던 왕조'''로도 유명하다.

2. 역사



2.1. 아바스 왕조의 성립


감사, 감사,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며, 알라께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적을 멸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언자 무함마드 (알라의 축복이 있기를) 를 계승하도록 인도하신 알라께 찬양을 드립니다. 오! 백성들이여, 이제 비로소 세상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장막이 걷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세상에 빛이 나오고, 태양이 낮의 근원에서 솟구치고 달이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앉았습니다. 활을 만든 자가 그것을 집어들자, 화살은 그것을 쏜 자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권리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언자, 그분의 가문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을 동정하고 자비와 호의로 대하는 분들입니다. (중략) 알라께선 당신들 앞에서 하심 가문 출신의 칼리파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은 여러분의 얼굴을 밝게 만드셨고 여러분이 시리아 군대에 승리할 수 있게 도우셨습니다. 알라께선 이슬람의 주권과 영광을 여러분들께 주셨습니다. (중략) 알라의 사도의 후계자들 중 믿는 자들의 왕 되시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립과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 외에 그 누가 이 설교단에 오른 적 있습니까?[3]

아부 알 아바스의 동생 다우드가 쿠파의 사원에서

우마이야 왕조는 부패와 내전으로 국가 체제가 붕괴 위기에 처해있었으며, 말기에 이르면 지방 영주들도 더이상 중앙 정부를 따르지 않을 정도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예멘인들은 이슬람 창제 이전에는 에티오피아와 상업로를 틔우며 본격적인 무역 활동에 나섰고,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호라산 지역[4]에 진출하여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한다. 이들은 국고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아랍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안사르나 하심 계열[5] 역시 우마이야 가문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표해왔다. 한편 시아파는 카르발라 참극[6]의 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7]
이에 호라산을 근거지로 둔 아바스 가문과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 가문이 손을 잡았다. 아바스 가문은 튀르크계 유목민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며 국경을 확장해왔던 터라, 숙련된 대량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하심 가문은 혈통의 지위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제국 내부에서 동조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이들은 747년 무함마드의 삼촌(백부)인 알 아바스의 고손자 아불 알 아바스를 옹립해 거병한다. 748년 2월, 혁명군 사령관 아부 무슬림메르브를 함락하였고 메카의 하심 가문이 파견해 온 카흐타바 이븐 샤비브와 합세하여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카흐타바는 이란 북부의 라이에서 1만의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라크로 진군, 시아파의 성지인 쿠파를 포위하였다. 비록 포위전 도중에 그는 전사하였지만 아들인 알 하산 이븐 카흐타바가 이어받아 749년 9월 2일, 도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50년 대(大) 자브 강(江)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를 처형한 후 아바스가 새로운 칼리프로 등극하였다. 그 후 아바스는 친교를 맺는다는 핑계로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을 모두 초대한 후, 그들을 몰살시켰다. 이때 초대에 응하지 않고 미리 도망쳐 살아남은 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쳤고,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알안달루스에 도착해 그곳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했다.
기존의 서구 역사가들은 아바스의 반란을 아랍인 주도 왕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반발이라고 해석했으나, 실제로는 시아파 페르시아인뿐만 아니라 수니파 비 아랍인, 수니파 아랍인, 비무슬림까지 가담한 초종파, 초종교적인 반발이었다. 당시 비무슬림은 공직 진출에 제한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아야 했다. 비무슬림을 구성하던 콥트교인, 앗시리아인, 정교회 신자들은 이슬람 성립 이전부터 로마 제국과 교류하여 부와 지식을 축적한 계층이었는데, 이들의 지원은 아바스 가문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 내 무슬림 비율은 10%가 되지 못했으며, 지배층인 아랍인으로 한정하면 이 비율은 극도로 줄어든다.''' 그 때문에 신민들은 우마이야 가문이 이슬람의 정통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그들의 귀족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허점을 파고든 아바스 가문은 종교, 민족을 초월한 평등함을 내세우며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마드의 친지들을 내세워 종말론적, 구세주론적인 선전을 체계적으로 펼쳐 환심을 샀다. 당시 적이라면 무조건 때려부수고 보는 아랍인의 관점에서 벗어나 체계적으로 선전 센터를 두고 별도로 담당자를 두었다.
또한 이들은 반란시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다. 우마이야 왕조 기간 내내 일어났던 반란은 왕조의 모순을 지적하며 인기를 얻어온 대중 운동가와 이와 영합한 지방 영주의 반란이 다수로 이들이 세력화되기 전부터 왕조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고, 이는 반란의 실패로 이어졌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아바스 가문은 처음부터 모든 일을 철저한 비밀에 부쳤다. 우마이야 왕조는 하심 가문과 아바스 가문의 야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바스 초대 칼리프가 되는 아부 아바스도 호라산과 아랍의 대다수 지방을 정복하기 전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아부 무슬림 알 투르크마니의 경우도 신원이 철저히 비밀에 있어 현재까지도 실존인물 여부가 논란이 될 정도이다.
2대 칼리프 알 만수르는 알리의 수도 쿠파로 천도하였다가 후에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를 세웠다. 이후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에서 그 영욕을 겪게 된다.
이후 알 만수르는 비아랍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고 이것은 아랍과 페르시아의 문화를 통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우마이야 왕조와의 전투에서 그들을 지지했던 수많은 아랍인들을 소외시키게 되었다.

2.2. 전성기


아바스 왕조 시기에 제국은 우마이야 왕조 때 지중해에 주의를 집중했던 것과 달리 동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인 바그다드로 수도를 옮기고 페르시아와 트란스옥시니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면밀히 주시했다.
750 ~ 833년 아바스 왕조는 제국의 명성을 높이고 세력을 강화했다. 특히 실질적 권한을 지닌 셀주크 왕조 이전의 22대의 칼리파 중 5대째 칼리파인 하룬 알 라시드와 같은 현제[8]가 등장하여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서쪽의 북아프리카아시나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는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맞붙어 대승리한 탈라스 전투가 유명하다.또한 정복과 영토 확장에만 골몰했던 우마이야 시대와는 달리 정복사업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라 문화, 예술, 과학, 종교 분야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인 8~9세기를 '이슬람의 황금시대' 라 할 정도. 특히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 시대부터 남아 있었던 그리스, 로마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수혜를 톡톡히 받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서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중세 말 유럽 대학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고전을 다시 번역해서 교재로 쓸 정도었다.
건축양식이나 의복 및 생활양식이나 궁정의례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바그다드의 궁전은 근처 크테시폰 궁전의 영향을 받았고, 미술양식에서도 동로마와 오리엔트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궁정 의식에서도 장엄한 의식이 강화되고, 고급 직물의 수여와 같은 사산조의 풍습이 수용되었다. 또한 행정체계에서도 수백 년 동안 거대한 국가를 운영해본 페르시아인들은 아랍인들보다 능력면에서 우월했다.[9] 우마이야 왕조의 미숙한 귀족정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페르시아식 관료체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들도 활발해지면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동서양의 교역지로 그 이름을 떨쳤다. 특히 바다 건너 해상무역도 활발히 했는데 동쪽의 고려까지 이어졌다. 당시 아바스 왕조는 수은, 향신료, 상아를 수출했고 고려는 금과 은을 수출하며 교역했다.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성립된 국가인 만큼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공평히 등용되고 대우받았다. 특히 종교에 대해 굉장히 이성적이고 관대하여 제국의 백성들은 종교에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였고, 심지어 '''이슬람을 배교하고 무신론을 선언해도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었다.'''[10] 제국 내의 이슬람과 타 종교는 서로 비난하거나 치열한 논변으로 싸울지언정 '''사적 제재로 살해당하거나 법에 의해 처벌받을 우려가 없었던 시기였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들과 신자들이 타 종교와 이슬람 비판가, 무신론자들을 대상으로 악명높은 탄압과 공적, 사적 제재, 증오 범죄를 일삼는 것이 흔한 것을 감안하면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되고 수많은 무슬림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교리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이슬람이 아랍 민족종교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을 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전의 이슬람 교리는 '그냥 알라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믿으면 됨'의 성격이 강했지만, 학자들은 각종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 교리에 대한 근거를 만들었다. 아바스 왕조 이후에도 수많은 타프씨르[11]가 만들어져 왔지만 아바스 왕조 때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이슬람에 접근하려 한 타프씨르를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로 현대의 이슬람 개혁가들의 주장도 아바스 왕조 때의 문헌에 기초한다.

2.3. 꼭두각시로 전락한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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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경의 압바스 조.[12]
하지만 한 세기의 전성기를 구가한 뒤에는 기나긴 몰락과 쇠퇴의 시기가 찾아왔다. 지방에 있던 5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들은 내전을 일으켰고, 내전에서 승리한 7대 칼리파 알 마문 또한 타히르 조와 같은 지방 왕조의 대두를 막지 못했다.
8대 칼리파, '알 무타심'이 도입했던 외국인 용병 - 특히 투르크 용병들은 이후 자신들의 세를 키워 권력을 휘둘렀고, 이때의 칼리파는 이들의 칼 끝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들은 결국 칼리파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했다. 10대 칼리파 알 무타왁킬은 노예에게 참수당한 뒤 시신이 거리에 버려졌고, 11대 칼리파, 알 문타시르는 음식과 물을 주지 않고 땡볕에 며칠 방치했다가 나중에 억지로 물을 많이 먹여 탈수증으로 죽였다는 야사가 있다. 13대 칼리파 알 무타즈암살자로 고용한 노예에게 암살당했으며, 19대 칼리파 알 카히르 때 까지 거의 대부분의 칼리파들은 독살 등으로 대부분 비명횡사했다. 이후에도 20대 칼리파 알 라디는 눈을 찔려 실명당한 뒤 감옥에 갇혀 죽었고 21대 칼리파 알 무타키는 추방되어 거지가 되어 죽었다.
이런 와중에 북아프리카에서는 시아파 세력[13]이 봉기하여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빼앗아 파티마 왕조를 세우고 칼리파를 칭했다.
이란에서도 시아파 세력이 부상하여 지방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고, 마침내 이란계 시아파부와이 왕조에게 바그다드를 점령당하기까지 하나 (945년) 적절한 호칭을 부여하면서 관계를 정립하여 멸망당하지 않았다. 결국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한 것을 계기로 아바스 칼리파는 자신의 '찬탈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꼭두각시로 전락하였고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현지의 세속왕조들이 다스리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시대는 12세기까지 지속된다.

2.4. 셀주크 왕조(1037 ~ 1194)


이후 동방에서 투르크인들이 세운 셀주크 왕조(1037 ~ 1194)가 물밀듯이 쳐들어와 중동 전체를 석권하면서 칼리파는 종교적인 권위만 겨우 유지하고 세속 권력은 셀주크 왕조의 술탄에게 모조리 내주게 되었다 .(1055년) 셀주크 제국의 간섭을 받던 칼리파들은 12세기 초반부터 실권 회복에 나섰다. 29대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는 1125년에 모술의 아타베그 아미드 앗 딘 장기와 연대하여 반 셀주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1133년에 재차 봉기하였다가 1135년에 예배 중 암살되었다.

2.5. 중흥기


마침내 셀주크 왕조가 백 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산산히 분열되며 결국 1157년 해체되자, 칼리파는 겨우 힘을 되찾았다.이후 아바스 왕조는 모술을 제외한 이라크 전체를 되찾았다.[14] 1195년에는 후제스탄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러나......'''

2.6. 1258, 몽골에 의한 멸망


호라즘 왕조의 침입도 어찌어찌 잘 넘기고 한숨 돌렸는데 37대 칼리파이자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이 지배한 지 16년차인 1258년 '''몽골 제국이 쳐들어왔다.'''
이미 몽골군은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고려, 북중국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을 싹 쓸었고 몽케 칸의 시대에 들어서 이전에 잠시 지지부진했던 세계정복을 막 재개한 상태였다. 몽골군의 지휘관 훌라구는 항복을 요구했지만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은 처음에는 "마그리브[15]에서 이라크까지 모든 무슬림들이 날 구하러 올 것이다." 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도와줄 생각을 안 했기에 결국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훌라구에게 몸소 찾아가 부하들과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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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공방전
그래서 바그다드는 항복했지만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은 적군에 대한 몽골군의 조치는 늘 그렇듯이 대량학살파괴로 끝났다. 그래도 알 무스타심 본인은 "군주는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관례에 따라 자루에 넣고[16] '''달리는 말들의 말발굽에 밟혀 압사시켰다.'''[17]
이렇게 1258년 알 무스타심이 죽으면서 아바스 왕조는 일단 멸망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용병으로 일하던 맘루크들이 몽골의 침입을 저지하고 아이유브 술탄을 쫓아내 맘루크 왕조를 창건했는데, 정통성이 취약한 이들은 아바스 칼리파의 후예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261년 알 무스타심의 먼 친척[18] 알 무시탄시르 2세를 카이로로 초빙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배려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계보는 부활했다. 이때부터를 카이로 아바스 왕조[19]라고 하고 이전을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라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술탄에게 있었고 칼리파는 종교적 권위만 있었다. 1517년 카이로 아바스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알 무타와키 3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에게 칼리파 칭호를 넘기면서[20] 공식적으로 왕조가 소멸하였다. 이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공식적으로 칼리프를 겸하게 된다.[21]
고대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유명했지만 이미 수천 년에 걸친 관개와 집약적 농업으로 인해 아바스 시대에만 해도 토양의 염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다. 하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은 염도가 높은 편이었고 고온지대라 물의 증발량이 많아 염화가 촉진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현대의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다.[22]
여담으로 대식국(大食國)은 이슬람 제국을 이르는 말인데, 기록은 적으나 색상을 기준으로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었다. 검은 군기를 사용햐 아바스 왕조는 흑의대식이라 불렸으며 제일 유명한 '대식국'이기도 하다. 또 아라비아 전체 혹은 한때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 일부,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했던 우마이야 왕조는 흰 군기를 사용해 백의대식이라 불렸다. 또한 이집트를 지배하던 파티마 왕조는 녹의대식이라 불렀다. 대식국이란 중국 당나라 때 표기된 말인데 다양한 유래가 전한다. 하나는 대식의 중국어 음역 ‘Tashi’가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무역상의 뜻을 가진 ‘Taij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650년 이후 이슬람 세력이 중국의 서부 변방에서 급속하게 영토확장을 해나가자 이를 군사야욕이라 규정한 중국인들이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영토 먹기에 환장한 놈)’라는 모멸감 섞인 말인 대식으로 불렀다는 설, 또다른 하나는 풍족하게 살아서 식사량이 많아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3. 영토 관련 오류


교과서나 참고서 등에서 나오는 아바스 왕조의 영토는 우마이야 왕조의 강역에서 알안달루스만 뺀 마그레브 (모로코, 알제리) 에서 트란스옥시아나 (우즈벡)까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국의 전성기였던 알 만수르나 하룬 알 라시드 시대의 제국은 이프리키야 (튀니지, 리비아)에서 이란까지였고 제국의 최전성기 (일명 이슬람 황금기)인 알 마문의 시대에는 이집트에서 이라크까지민 칼리파의 직접적인 권력이 미쳤다. 또한, 크레타나 시칠리아 일대는 아바스 왕조의 영토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시칠리아는 아바스 조의 속국 아글라브 조가 점령해서 연관성이라도 있지만 크레타는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추방된 안달루스 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바스 왕조 군에게 격퇴된 일단이 점령한 것이라 더더욱 연관이 없다.[출처_필요]

4. 아바스 왕조의 계보도


[image]

5. 역대 칼리파




5.1.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대수
이름
재위기간
비고
1대
아부 알 아바스
750~754
아바스 왕조가 개창 되었다.탈라스 전투가 일어났다.
2대
'''알 만수르'''
754~775
수도를 쿠파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아바스 칼리파의 권력이 강해졌다.
3대
알 마하디
775~785
바그다드가 번영하였다.
4대
알 하디
785~786

5대
'''하룬 알 라시드'''
786~809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고,칼리파의 권력이 더더욱 강화되었다.아바스 왕조와 이슬람의 황금기가 열렸다.북아프리카를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했다.
6대
알 아민
809~813
알 아민과 알 마문의 내전이 벌어졌다.
7대
'''알 마문'''
813~833
알 아민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였다.제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다.이슬람의 황금기가 지속되었다.
8대
알 무타심
833~842
튀르크계 용병이 중용되기 시작하였다.
9대
알 와시크
842~847
마우로포타모스 전투가 일어났다.
10대
'''알 무타와킬'''
847~861
많은 건설사업이 벌어졌다.이슬람과 아바스 왕조의 황금기가 종결되었다.
11대
알 문타시르
861~862
이슬람의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12대
알 무스타인
862~866
튀르크계 장군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지방 분권화가 가속화 되었다.
13대
알 무타즈
866~869
아바스 왕조의 지방통제력이 무너져 내렸다.
14대
알 무흐타디
869~870
이븐 와시프와 무사 이븐 부가 간의 대립 끝에 이븐 부가가 승리하였다.
15대
알 무타미드
870~892
사마라의 혼란기가 종식되었다.잔즈 반란사파르 왕조의 침입을 막아내어 아바스 왕조가 중흥기를 맞았다.
16대
알 무타디드
892~902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북부,이란 서부 등을 직접 지배령으로 수복하고 툴룬 왕조사파르 왕조로부터 형식적인 충성을 받아내었다.
17대
알 무크타피
902~908
툴룬 왕조를 정복하였다.와지르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그의 사후 아바스 왕조의 중흥기가 끝났다.
18대
알 무크타디르
908~932

19대
알 카히르
932~934

20대
알 라디
934~940

21대
알 무타키
940~944

22대
알 무스탁피
944~946
알 무크타디르 사후 다시 칼리파를 좌지우지하던 튀르크 용병들을 격파하고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이후 아바스 칼리파는 부와이 왕조,그다음에는 셀주크에 굴복하여 종교적인 권위만 행사할 수 있게되었다.
23대
알 무티
946~974

24대
알 타이
974~991

25대
알 카디르
991~1031

26대
알 카임
1031~1075

27대
알 무크타디
1075~1094

28대
알 무스타지르
1094~1118

29대
알 무스타르시드
1118~1135

30대
알 라시드
1135~1136

31대
알 무크타피
1136~1160
아바스 왕조의 2차 중흥기가 시작되었다.
32대
알 무스탄지드
1160~1170

33대
알 무스타디
1170~1180

34대
알 나시르
1180~1225
후제스탄을 점령했다.
35대
앗 자히르
1225~1226
36대
알 무스탄시르
1226~1242
아바스 왕조가 모술을 제외한 이라크 전체를 회복하였다.
37대
알 무스타심
1242~1258
바그다드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아바스 왕조가 사실상 멸망하였다.

5.2. 카이로 아바스 왕조


대수
이름
재위기간
38대
알 무스탄시르 2세
1261~1262
39대
알 하킴 1세
1262~1302
40대
알 무스탁피 1세
1302~1340
41대
알 와티크 1세
1340~1341
42대
알 하킴 2세
1341~1352
43대
알 무타디드 1세
1352~1362
44대
알 무타와킬 1세
1362~1383
45대
알 무스타심
1377
복위
알 무타와킬 1세
1377~1383
46대
알 와티크 2세
1383~1386
복위
알 무스타심
1386~1389
복위
알 무타와킬 1세
1389~1406
47대
알 무스타인
1406~1414
48대
알 무타디드 2세
1414~1441
49대
알 무스탁피 2세
1441~1451
50대
알 카임
1451~1455
51대
알 무스탄지드
1455~1479
52대
알 무타와킬 2세
1479~1497
53대
알 무스탐식
1497~1508
54대
알 무타와킬 3세
1508~1516
복위
알 무스탐식
1516~1517
복위
알 무타와킬 3세
1517
'''셀림 1세에게 선양'''

6. 역사보기 틀






















7. 둘러보기





[1] 검은색 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당나라 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구당서신당서에도 흑의대식(黑衣大食)이라고 언급되었다.[2] 가우바리드 라고도 부렸다.[3] 그러곤 손가락으로 아불 압바스를 가리켰다.[4] 현재의 이란-아프간에 해당한다.[5] 안사르는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를 도운 메디나 주민들, 하심은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이다.[6] 680년 우마이야 가문이 무함마드의 손자였던 후세인 빈 알리를 참살한 사건.[7] 어느 정도냐면 참극이 발생한 지 1400년 가까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시아파는 이 사건을 공공연히 언급하며 수니를 비난하며, 아슈라의 날이 되면 후세인 빈 알리가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거나 칼집을 내어 얼굴 등을 자해하는 행사가 공공연히 열리기도 한다.[8] 그의 개인적 능력은 평범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들들에게 나라를 분할 통치하도록 하여 끝내 내전이 일어나게 된 것을 봐도... 그의 시대가 황금기로 부각된 이유는 문학작품의 영향과 함께, 그의 아들 대에서 벌어진 내전 시기와 대비되어 그러하였다는 설명이 존재.[9] 이는 당연한 것이 페르시아가 문명을 건설할 때 아랍인들은 일개 유목민족에 불과했다. 그러니 문화가 발달할 턱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현재 이란에서도 아랍인들을 우리가 문명을 건설할 때 얘네들은 야만인이었다며 멸시한다.[10] 이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이슬람 비판가로는 아부 이싸 알 와라끄, 이븐 라완디를 꼽을 수 있다.[11] 꾸란의 주석서를 말한다.[12] 그나마 이때는 중흥기라 평가할 만한 16대 칼리파, 알 무타디드의 치세(892 ~ 902)였다. 툴룬 조로부터 시리아 북부, 자지라 일대 회복.[13] 정확히는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14] 애초에 이라크란 용어 자체가 20세기 이전에는 현재 이라크 남부, 즉 아랍인이 주로 거주하는 티크리트 ~ 바스라 까지만 지칭하는 것이었다.[15] 지금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말한다.[16] 혹은 양탄자에 말았다고도 한다.[17] 하지만 이렇게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은 영혼이 피속에 있다고 믿는 몽골인들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사형방식이라고 한다. 만약 오고타이 칸이 죽지 않고 바투의 원정대가 서유럽을 정복했다면 당시 교황도 이렇게 죽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18] 알 무스타심과는 10촌 사이로 항렬로는 알 무스타심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28대 알 무스타지르의 장남이자 29대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증손자가 알 무시탄시르 2세이고 차남이자 31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의 6대손(고손자의 손자)이 알 무스타심이다. 아래에 나오는 계보도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19] 또는 후아바스 왕조.[20] 오스만 제국은 3대째 술탄인 무라트 1세 이래 계속 칼리프를 자칭하기는 했다. 다만 어느 나라에서나 일개 반란군 수령이 왕을 칭했다고 해서 역사서에 그를 왕으로 기록해주지 않는 것처럼, 셀림 1세 이전까지의 칼리프는 칼리프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아바스 왕조가 몰락한 이후 힘을 좀 키웠다 싶은 이슬람 군주들이 으레 하던 행사(?)가, 칼리프 자칭이었다. [21] 간혹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해 '술탄-칼리프제 성립' 이라는 식의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사실 술탄이 곧 칼리프가 되었다는 말을 어떻게든 간지나게(?) 써본 것일 뿐 별뜻 없다.[22] 사실 이라크의 관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15세기의 일이다.[출처_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