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마문
1. 개요
재위 813년 9월 27일 ~ 833년 8월 7일أبو العباس المأمون
아부 알 압바스 알 마아문 [1]
생몰 786년 ~ 833년
아바스 왕조의 7번째 칼리파. 이복 동생인 알 아민과의 내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메르브에서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정벌하고 지혜의 집을 통해 학문을 진흥시켜 황금기를 열었다.
2. 동생 (알 아민) 과의 내전
하룬의 나이가 들어가며, 두 아들의 대립은 가시화 되었고, 이에 하룬은 자신의 사후에도 이복 형제간의 우애를 지킬 것을 약속하는 문서에 각자 서명하게 하였다.
그 맹세에는, 적자이지만 동생인 아민이 먼저 즉위하되, 서자이지만 형인 마문이 그의 후계자로서 호라산 총독 직을 수행한 후 즉위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하룬이 사망한 후 아민이 자신의 혈육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형제 간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내전의 상세한 설명은 알 아민 문서 참고.
3. 연이은 반란
4차 피트나 (811 ~ 813년) 이후 마문이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칼리파가 되었지만 서아시아는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시아파의 일파인 자이디 (다섯 이맘파)를 이끌던 시리가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815년 초) 이라크 총독 핫산은 진압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마문의 두 와지르 중 하나인 하르타마가 진압하였고, 그는 반란의 원인으로 다른 와지르인 이븐 사을의 동생이자 당시 이라크 총독이던 핫산의 착취를 지적하였다. 처벌을 두려워 하던 핫산은 형 사을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사을은 마문에게 하르타마를 모함하였다. 마문은 사을의 모함에 넘어가 공신 하르타마를 처형하였다. (816년)
한편, 알리의 차남이자 카르발라에서 살해된 3대 이맘 후세인의 아들 알리에게는 바키르와 자이드가 있었다. 다섯 이맘파인 자이디는 차남인 자이드를 지지했고 그는 쿠파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히샴에게 저항했다가 죽었다. 나머지 일곱 이맘파와 열두 이맘파는 장남 바키르를 지지했는데 그의 아들이자 6번째 이맘 자파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이스마일은 일곱 이맘파, 즉 이스마일리의 마지막 이맘이 되었고 둘째 무사는 열두 이맘파의 7번째 이맘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열두 이맘파의 8~12번째 이맘이 되었다. 남은 셋째 아들 무함마드는 행동파인 자이드를 존경하였고 자이디의 반란에 자극을 받아 메카에서 스스로 마흐디 (구세주)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815년 11월) 하지만 무함마드 이븐 자파르의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고 그는 대중 앞에서 공개 사과를 한 후 메카에서 추방되었다.
3.1. 시아파와의 화해 시도
한편, 마문은 아민이 죽은 813년 이후에도 근거지인 호라산의 메르프에 머물렀는데 시아파의 반란이 지속되지 8번째 이맘 레자 (알리 이븐 무사) 를 메르프로 초청하여 그들을 달래려 하였다. 마문은 압바스 가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시아파 상징의 초록 깃발로 바꾸고 동전에 레자의 이름을 새기며, 자신의 딸들과 그들 부자를 정략결혼 시키는 등의 정성으로, 817년에 레자는 마문에게 후계자 자리를 수락하였다.[2] 하지만 51세 레자가 31세 마문의 후계자가 되자 쉬아 무슬림들이 누그러지기는 커녕 예언자의 후손을 보려는 인파가 메르브에 몰려들었다. 그에 위협을 느낀 마문이 내로라 하는 학자들을 시켜 그와 토론을 시켰지만 모두들 레자의 경건함과 지혜에 굴복하였다고 한다.
4. 바그다드 입성 (819년)
한편, 바그다드에서는 아민 사후 하룬 알 라시드의 이복동생 이브라힘이 칼리프로 추대되었으나, (815년) 연이은 반란과 시아파 문제로 마문은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 상태로 3년째가 흐르자 민간에서는 마문의 와지르 이븐 사을이 이브라힘을 봐주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메르브에서 레자 샤의 위치가 높아지는 와중에 그런 소문까지 돌자 마문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818년 봄) 그해 4월, 바그다드로 향하던 마문은 이란의 투스에 있는 부친 하룬의 영묘를 참배했는데 레자도 따라왔다.
기도를 드리던 마문은 갑자기 명령을 내려 레자를 독살했고 메르브로 사자를 보내 이븐 사을을 처형하였다. 그러곤 바그다드의 이브라힘을 폐위시키기 위해 진군하였다. 마문의 바그다드 입성과 함께 이브라힘은 마문에게 바로 항복하였다. (819년 8월) 입성 직후 마문은 신하들과 함께 압바스 가문을 상징하는 검은 도포 대신 쉬아 무슬림을 상징하는 초록 도포를 입어 생색을 내었는데 결국 일주일 후에 다시 검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이븐 사을의 동생 핫산을 와지르로 임명하는 충격적인 인사를 벌였는데, 그는 병을 핑계로 은퇴해버렸다.
5. 여전히 계속되는 반란
마문이 수도에 입성하였음에도 이슬람 제국의 동부는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특히 이맘 레자를 죽인 것은 64년 전, 알 만수르가 개국공신인 아부 무슬림을 토사구팽하여 죽였을 때처럼 페르시아 민중들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이란 쿰에서의 반란 (825 ~ 826년), 바그다드 봉기 (826 ~ 827년), 예멘에서의 반란 (827년)
5.1. 타히르 왕조
아민과의 내전과 이후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이란 계 장수 타히르가 선전하며 마문의 승리에 1등 공신이 되었고, 이후 요직이자 부왕 격인 호라산 총독직을 맡으며, 반 독립 왕조인 타히르 왕조의 건립자가 된다. (다만 금요 예배 쿠트바에서 마문의 이름을 뺏다가 곧 마문의 자객에게 암살되었으나, 아들이 총독직을 승계하며, 왕조가 이어진다.)
한편, 마문이 호라산을 떠난 819년,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사만 왕조가 건립된다. 이 왕조는 이란 르네상스를 주도하게 되고, 후대의 칼리파 알 무타심에게 있어서는 튀르크 용병 공급처로 인정받게 된다.ㄴ
6. 이슬람 황금기
마문은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이슬람의 학문적 성과를 이야기 할 때에 빠질 수 없는 지혜의 집이 그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곳에서 학문적, 종교적 토론이 이루어지며, 논증의 근거 확보를 위해 고대 그리스의 웅변술과 철학이 아랍어로 번역이 이루어지고 연구된 것은 유명하다. 또한, 연금술 시도도 이루어져 근대 화학적 진보의 밑거름이 되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중동 이슬람 세계에 들어온 종이는 지식과 정보 전달에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고 바그다드에는 수십개의 종이 공장이 생겨났다. 이러한 기류를 바탕으로 마문은 이슬람 세계의 학문 탐구를 자극하고자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책의 무게에 따라 번역가에게 금화를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9세기 바그다드와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미친듯이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이 마주하던 시칠리아와 스페인 등을 통해 유럽 세계로 전해져 재번역 되었고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다.
6.1. 종교 정책
827년 쿠란 창조설
833년 종교재판소 (미흐나)
16년 후 알 무타와킬이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