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1. 개요
2. 상세
3. 유럽의 중세
3.1. 시대적 구분
3.2. 시대상
3.2.1. 배경
3.2.2. 농업
3.2.3. 경제
3.2.4. 문화
3.2.4.1. 문학
3.2.4.2. 건축
3.2.4.3. 유희
3.2.4.4. 음악
3.2.5. 교육 및 학문
3.2.6. 식문화
3.2.7. 사회
3.2.8. 의학
3.2.9. 위생
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
3.4. 참조 자료
3.5.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3.5.1. 문학
3.5.2. 영화
3.5.3. 게임
3.5.4. 애니메이션
3.6. 중세 판타지?
3.7. 관련 문서
4. 유럽 밖의 중세


1. 개요


/ Middle Ages, Medieval Period
유럽사에서 고대근대의 사이의 시기. 중세의 다음 시기를 지칭하는데 근대 초기를 대체하여 근세가 쓰이기도 한다.
중세는 다시 중세 전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2. 상세


흔히 알려진 'Medieval Age(Era)' 혹은 'Middle Age'는 18세기 무렵부터 유럽의 지식인층이 역사 구분을 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이들에게 회고가 가능한 가장 오래된 시기이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시기는 그리스-로마가 존재했던 시대(특히 고전시대)였고, 반대편의 끝에 있는 것은 르네상스 혹은 17세기 이후 근대 국가가 성립하면서 나타난 'Modern Age'(지금은 '근대'로 번역하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현대')[1]였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시대를 '고대', 르네상스 혹은 17세기 이후를 '근대'라고 지칭하고, 그 나머지 '''가운데'''를 '중세'로 뭉뚱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멈췄으면 '고대', '중세', '근대'는 매우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남았겠지만, 18세기는 근대인, 특히 계몽주의 지식인이 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미신적 요소와 비합리적 관행이 아직 남아 있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러한 미신과 비합리성의 기원이라고 믿어졌던 중세를 멸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런 시각은 현재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2] 후술하겠지만 이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도 많으므로 비판적 수용이 필요한 관점이며, 단순히 기계적인 구분을 위한 '중세' 용어의 사용과 시대상을 평가하려는 가치를 담은 '중세'라는 용어가 혼재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대', '중세', '근대'의 구분은 서구권에서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종속시키면서 보편적인 역사 구분으로 퍼져 나갔고, 특히 칼 마르크스의 5시대 발전론(원시 공산주의 시대-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자본주의-현대 혹은 근미래의 공산주의 사회)과 사회진화론(그것이 계몽주의적인 형태이든, 제국주의적인 형태이든)이 퍼져 나가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중국사 등, 비유럽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 혹은 그에 비견할 만한 집권 세력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럽의 '고대'와 '근대'에 비견할 만한 시대가 합의되지 못한 채 강제된 서구식의 근대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고대'-'중세'-'근대'의 개념에 대해서는 탈근대 움직임이 대두하는 1970~1990년대까지도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현재 그러한 시대 구분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시되면서 시대 구분 자체에 염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학자도 늘어났지만, 반대로 세계사적인 관점의 설명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고전후 시대라는 표현이 제안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편의상''' 중세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한국중세사학회의 구분을 본다면 통일신라, 고려, 조선 전기까지를 중세사로 다루고 있다.[3] 반면에 좁은 의미에서는 고려만 중세로 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에서 시작되는 통일제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위진남북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오호십육국·남북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수당 제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당말송초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등등 수많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현재 사학계에서 유럽식의 중세(Medieval Age/Era)와 비유럽 지역의 편의상의 '중세'가 마르크스 등의 주장처럼 같은 사회문화사적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점은 대체로 합의가 되어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Medioevo라고 한다.

3. 유럽의 중세


[image]
엄밀히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지만, 일반적인 중세 유럽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 게르만족의 유입 이후 이슬람 세력, 마자르족 등으로 대표되는 이민족이 침입해 온다.
  • 이로 인한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에 따라 상업과 교통이 붕괴하면서, 통일적이었던 서유럽의 고대사회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자급자족 체제로 전환된다.
  • 이민족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춘 기사 등이 영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상위의 계층에 대해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이라는 자급자족적 단위를 거느리면서 유럽 내에서 분권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 장원의 아래에 고대의 노예나 소농 등이 특정 지역에 묶이면서 만들어진 농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질서 아래에서 모든 학문이 포괄되어 움직이면서, 고대의 인본주의가 쇠퇴하는 한편 형이상학적인 신학이 발달한다. 이것은 후에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 교황권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게르만족들을 포교함으로써 결국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이 직접 서유럽의 황제를 임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게 되었고 서방교회의 수장인 로마 총대주교(교황)과 동방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그 결과로 동서 교회 대분열이 일어나 서유럽은 교황중심의 가톨릭과 동유럽은 정교회로 분리되게 된다.
  •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도시의 등장, 서유럽의 국가들은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의 확립 등으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이 되는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아비뇽 유수로 교황권도 서서히 몰락하고, 마침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비해 인본주의가 싹튼 선진문화인 비잔틴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를 꽃피움으로써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
  •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위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이미지이긴 하나, 중세 1000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 중 몇몇 사건들만을 추려낸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중세를 이해하거나 특징을 추려내는 건 힘들다. 예를 들어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 중 일부분에 불과하며, 유명한 십자군 전쟁조차 200년에 걸쳐 10차례 벌어졌고 그 양상도 제각각 달랐다. 중세 초기인 400년대의 유럽과 비교해서 말기인 1400년까지 갈 것도 없이 중세 중기인 1000년대까지만 와도 아예 시대 상황이 딴판이 되는지라, 이 시기를 뭉퉁그려 중세라 칭하는 것에 대한 회의도 생겨나는 판이다.
비교하자면, 유럽의 중세 초기에 백제신라가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는 여말선초 시대와 대략적으로 겹친다. 이렇게 광범위한 시대를 '중세'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고대 역시 굉장히 광범위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고대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를 따로 인식하는 편이다. 이와 비교할 시 중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3.1. 시대적 구분


유럽 중세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대체로 476년부터 1453년이나 1492년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담론이 등장하면서는 중세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세의 성격과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략적으로 중세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다만, 요즈음의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은 시대구분이 상당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에 의해 시대구분을 역사가의 소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중세를 정확히 어느 시점이 시작점이고 어느 시점이 끝나는 지점인지에 대한 담론은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
  • 시작
    • 고대 로마에서 '유일한 황제' 개념이 붕괴되고, 사실상 그리스 지역으로 힘이 많이 기운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 313년 밀라노 칙령
    •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375년
    • 기독교의 로마가 시작된, 최후의 동서 로마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395년 1월 17일
    • 게르만족, 훈족 등이 난입해 국가가 난립하던 5세기 전반
    •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4]
    •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온전한 재건을 시도했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간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 이슬람 세력이 크게 성장했으며, 서유럽 카톨릭권이 동로마에서 독립하고 프랑크 왕국의 주도 아래 형성되기 시작한 8세기[5]
    • 기독교의 교리가 통일된, 즉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6]
    •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 이베리아 반도의 수복이 완료되고 신대륙이 발견된 1492년
    • 사코 디 로마,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등으로 교황권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을 정도로 몰락하게 된 16세기 초반
    • '중세의 전성기'였던 르네상스가 끝나고 30년 전쟁이 끝난 17세기 초중반
    •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유럽 사회의 봉건적 생산 구조가 완전히 붕괴한 19세기[7]
이처럼 사실 '중세' 담론이 가장 뚜렷한 유럽 역사에서도 중세의 시작과 끝을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전부터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의 문화는 뒤섞이고 있었고, 중세에 게르만족에 의해 나타났다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주로 프랑스 아날 학파 사학자들의) 최근 연구로 고대 로마에도 존재했었고 그것이 게르만족만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굳이 시작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를 몰아내고 동로마에 서로마 황제의 휘장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본다.
중세는 1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라 요즘에는 중세를 다시 구분해 크게 초기, 중기(전성기), 말기로 보고 있다. 이는 중세라는 시대가 변화하지 않았던 고정의 시대라는 관념을 타파하고, 역사상의 변화라는 것이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하여 시대가 어느 순간 바뀌기 시작한다는 기존의 관념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 일반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5세기부터 10세기 후반까지를 일컫는다. 중세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긴 기간으로, 이 시기의 주요한 사건으로는 이슬람의 대두,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원정,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과 베르됭 조약으로 서, 중, 동으로 분열, 바이킹 침략 등이 있다. 이 시기는 잦은 전란으로 온갖 것이 파괴되는 일이 빈발하던 시절이라, 흔히 암흑시대로 알려진 중세의 이미지는 이때에 가깝다. 실제로도 남아있는 사료의 양이 워낙 적어서, 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연구하기 힘들다며 암흑시대라 부르는 것이다. 이 시기는 기독교켈트 신화, 북구 신화가 혼재되어 있던 시대로, 널리 알려진 아서 왕성배 전설, 디트리히 폰 베른, 베오울프, 시구르드성 조지 등 신화적인 중세 서사시는 모두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중세 중기만 되어도 현실적인 정치, 사회상에 밀려 신화적인 이야기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 중세 중기 혹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 보통 11세기(서기 1000년)부터 13세기 후반까지를 말한다. 1000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중기를 나누는 것은 1000년이라는 상징적인 숫자 외에도, 이 시기부터는 바이킹마자르족 등 야만족의 침입이 줄어들어 남아있는 사료가 전기에 비해 크게 늘어나 현실적인 중세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며 그 밖에 윌리엄 1세잉글랜드 정복으로 노르만 왕조 성립, 기사도의 성립, 동서 교회 대분열,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전유럽에 기독교 전파, 몽골의 침략, 헝가리폴란드 왕국의 성립, 고딕 양식의 등장 등을 들 수 있다. 현재까지 내려오는 주요한 유럽의 국가들이 대체로 나타난 시기이며 널리 알려져 있는 중세의 이미지는 중세 중기에 가장 가깝다.
  • 중세 말기(Late Middle Ages) - 보통 14세기 초부터 15세기 말~16세기 초까지를 말한다. 중세 중기와 말기를 나누는 기준은 흑사병소빙하기, 십자군 전쟁의 쇠퇴 등으로 인한 유럽 사회의 변화를 일반적으로 꼽는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백년전쟁이며, 오스만 제국의 대두, 아비뇽 유수로 대표되는 교황권 약화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멸망, 대항해시대, 레콘키스타, 종교 개혁 등의 사건이 일어나는 서기 1500년 전후를 기준으로 중세와 근세를 나누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구분법이다.

3.2. 시대상



3.2.1. 배경


기원후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에 두 세기를 지켜온 안정과 평화는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이로 인한 경제파탄에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250년경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공격과 침입은 또다른 위험이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도 전반적으로 열악해졌다. 상류계급의 생활수준은 특히 현저하게 낮아졌다. 경제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노예노동의 부적절한 공급과 역병, 전쟁, 출산율 하락에 기인하는 전반적인 인구감소였다. 경제상황의 악화는 진지한 학문연구에 절대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아버렸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부의 학문과 동부의 학문 사이에 교류가 점차 감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세기 말과 4세기에 로마제국은 행정적으로 동부와 서부로 양분되었으며, 두 지역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서부의 라틴 세계는 더이상 예전처럼 활기차게 동부의 그리스 세계와 교류 할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때의 이러한 위기로 말미암아 로마 서부 지역은 급격히 황폐화되었다. 이미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는 동부의 그리스, 오리엔트였으며 이들 지역을 속주로 보유한 동로마 제국은 풍요로운 경제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비교적 수월하게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서로마 제국은 경제파탄, 내전, 야만족의 침략 등으로 인해 완전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동서제국 분열 이후의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이 와중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것은 야만족들의 침략이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대부터 시작된 야만족들의 침략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전부터 끊임없이 제국의 국경선을 침략하던 게르만족은 말할 것도 없고 훈족까지 침략해 제국 내부를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의 지원을 얻기도 하고 야만족들과 연합하기도 하는 등 이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이미 흘러간 대세를 다시 바꾸기는 어려웠다. 급기야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토를 차지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5세기 초 서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지방에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수에비족, 고트족, 앵글로색슨족, 반달족 등이 잇달아 침략해 정착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일대만을 다스리는 미약한 정권으로 몰락했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켰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 세계에는 여러 게르만족 국가들이 들어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3.2.2. 농업


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 제국 때 이룩한 농경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1000년경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이 부활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8]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9]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중세 시대에 곡물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2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인해 각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농지개량법을 연구하여 보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 이후 2번째로 급격한 기온상승이 일어나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재배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아예 그린란드에서는 무려 7세기 초까지 밀을 길렀다.
하지만 후기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극단적 기근이 찾아온다. 페스트와 더불어서 당시 유럽 인구의 태반을 날려버린 계기가 되는데, 전반적으로 남부와 중남부가 페스트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 위로는 대기근의 영향이 더 강했다. 심지어 영국 왕이 걱정을 할 정도까지 간다. 르네상스 시대에 생산량이 줄어드는 2가지 이유는, 온도 하락과 함께 인구 격감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앞서 언급된 농업 기술력 발달이다. 그래서 중세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1~13세기 사이 유럽인들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중세 후반인 14세기 이후의 사람들보다 영양상태와 체격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3.2.3. 경제


상업적인 측면에선 로마 제국 말기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경우 아예 이민족들에 의해 영토가 점차 점령당하다가 결국 망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동로마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혼란기를 넘길 찰나에 이슬람의 발호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이 파급은 서유럽에까지 미쳐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나중엔 바이킹 같은 해적들 때문에 더 막장이 되었다.[10]
더구나 서유럽의 경우 별로 좋을 게 없었다. 단적으로, 지방 영주들은 지방 간 무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무역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경쟁자를 자신의 영토의 특산으로 부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11], 지방 간 이동할 통로에 관문을 빽빽히 설치해서 세금을 장난 아니게 때렸다. 이로써 지방 간 무역이 수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도 한몫했다.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도 있지만 로마시대 때부터 꾸준히 사용되어 온 데나리(denarii)의 은 함유량이 점차적으로 떨어지다가 13세기에 들어서는 구리화폐가 되어버렸다. 화폐의 은함유량은 해당 화폐의 신뢰성을 뜻하는 것인데 로마시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신뢰할 만했던 것이 종래에는 도저히 은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결국 상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때문에 이 화폐도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교역이나 급료 지불 등 제한적이게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역이나 상업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흔히 무시되던 중세 초기에도 지중해 지역 내의 무역망은 소멸하지는 않았다. 주교구를 중심으로 대도시 자치 공동체가 생성된 이탈리아 지역은 도시로써 기능을 유지한 곳이 많았고, 이들은 이슬람과의 지중해 무역을 지속하여 미약하게나마 수출로 유럽으로 금을 유입시키거나 반대로 이슬람의 사치품을 수입해왔다.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이 있던 아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잠시 교류하기도 했다. 파피루스도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재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세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이르면 자치 공동체인 코뮌들이 들어선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업이 화려하게 부활한다. 특히 저지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목류는 북유럽,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 수출되면서 북유럽의 원자재, 이슬람의 금과 사치품을 서유럽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신성로마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 과정에서 알프스를 넘나드는 도로가 개척되어서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 지역의 무역로인 소금길과 상파뉴 무역로가 생겨난다. 이를 통해 도시의 실권을 장악한 상공 엘리트가 '부르주아'로 성장하였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시문화와 학문을 꽃피웠다. 이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12세기 르네상스'. 소금길, 길드의 탄생, 원격지 무역의 발달이 대두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은 12세기 이후 유럽의 경제발전을 '상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북이탈리아, 보르도, 플랑드르 등 상업이 극히 발달한 지역은 이미 지역 내 자체 생산되는 식량으로는 도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해서 국제 교역망의 식량 수입에 의존해야했다. 보르도의 경우 포도주 제조를 위한 포도 플렌테이션이 생겨 자체 식량 생산은 거의 없었다.
14세기 초 흑사병 대유행을 지나 중세 말기가 되자, 유럽의 상업은 더욱 발전한다. 농업용 토지의 개발과 경영도 소유자와 경영자가 분리되는 기업형 영농이 출현했고, 광업과 제조업 분야 역시 기업형 조직에 의해 관리된다.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 경제가 살아나자 세금도 부활했다. 봉건주의의 관습 아래에서 세금은 토지세보다는 간접세 위주로 발전했는데, 그 덕분에 창문, 화로, 문짝, '''신발''', 술, '''꿀''', '''우물''', 결혼 등 세금을 때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12] 대개 평민들은 수입의 절반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금으로 걷혔다. 그중 가장 타격이 컸던 것은 가장이 죽었을 때 영주가 돈을 떼가고, 교회에서 집의 가장 좋은 가축을 한 마리 가져갔다고 하니('''사망세'''), 쟁기끌 소가 없어지거나 하는 사태로 인해 몇년 안 있어 집안이 망하여 소작농이 되곤 하니, 평민 전체가 결국 소작농이 되는 경제학적으로 봐서 결코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평상시에 세금을 안 냈는데, 여기엔 봉건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정작 중세 동안에는 귀족에 대한 면세 특권 자체는 없었다. 게르만의 관습 상 토지를 보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세금이란 토지세가 아니라 병역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만이 아니라 자유민들도 토지 보유에 대한 직접적인 세금은 없고, 병역과 노동력을 통한 부역이 직접적인 의무였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유력자들에게 의탁한 농노들이나 현물이나 공조를 통한 세금이 존재했다. 따라서 귀족이 세금을 안냈다고 말하기보다는, 애초에 유럽에서는 토지에 대한 직접세 개념이 희박했으며, 귀족이 담당한 의무는 참전의 의무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봉건제가 철저히 유지된 시절 동안에는 왕이나 황제조차도 다른 유력 영주 제후보다 특별히 경제적 우위를 가지긴 어려웠고, 직할령의 농노들에서 걷은 세금이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보유(혹은 보호)한 교회에서 걷은 십일조를 자신의 금고에 넣어서(...) 돈을 확보했다.
교회의 경우는 영주나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위에 서술했다시피 오히려 자신들이 따로 거뒀는데, 빈민 구제를 비롯한 요즘의 사회 복지 부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되어 정부가 세금을 거두고 분배까지 담당하는 현대국가와 달리 이 시기는 정부의 기능이 궁정과 영주, 교회 사이에 분권되어있던 시대였다. 이 역할은 일부 지방에선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레고어 멘델 브루노 수도원장이 교회 세금 징수안에 세금이 너무 무겁다며 땡깡을 부린것은 욕심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 수도회에서 학교에 교사를 파견하고,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이 밖에도 많은 복지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것도 화폐 유통이 극히 부족했던 11세기까지 일이고, 중세 성기를 거치며 화폐 유통이 늘고 상업이 발전하자 군주들은 금전의 필요성이 커졌고, 그에 따라 점점 여러 목적의 특수세나 간접세가 신설되었다가 그것이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생겨난 직접세 중에 제일 대표적인 예시는 타유taille 라는 세금이었는데, 이것은 원래 '공조, 부조, 헌납' 정도의 의미로 주군이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할 때 봉신들이 주군을 위해 부조하는 개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주로 왕이 사로잡혀 몸값을 낼 때, 주군의 자식이 결혼을 할 때 등에 메겨지는 것이었으나 어느새 그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또 상기한 창문세, 화로세, 우물세 등은 도시에게 자치 특권 계약을 할 때 도시 공동체에게서 세금을 걷기 위한 계약이었으며, 귀족들에게서는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의 세금인 방패세가 매겨진다.

3.2.4. 문화



3.2.4.1. 문학

문화의 부흥에 대해서는 암흑기다 아니다 하는 이견이 많은데, 일단 한가지 확실한 건 중세시대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문화 사이에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전수한''' 전수자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가 시대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라틴어문학 보존작업인 '''카롤링거 르네상스''' 덕분이었다. 인쇄술이 전무했던 탓에 손수 그 많은 책을 베껴가며 보존했는데, 초기에는 카롤링거 왕가에서, 후기에는 수도원들이 이 일을 해냈다. 때문에 중간에 좀 첨삭이 있기도 하였고, 결국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 저본 논쟁도 조금씩 벌어지게 된다.
다만 라틴 문학을 보존하긴 했으나 그리스어 문화는 보존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나중에 레콩키스타를 통해 정복한 톨레툼의 도서관에 있는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적 《번역은 반역인가》를 참고할 것.
또한 이 시기에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 구전설화인 롤랑의 노래등 다양한 지식계층을 위한 문학이 발전했으며, 다성음악이 발명되고, 사라질 뻔했던 연극이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연극의 경우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글도 못 읽고 교회에서 얘기해줘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는 우민들을 교육하기 이보다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유랑 연극단들이 지방 곳곳에 퍼져 교리를 전하였고, 실제로 이는 교회의 입지기반을 튼튼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3.2.4.2. 건축

로마네스크 양식 및 고딕 양식도 이때의 산물. 고딕 양식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건축학에선 고트족과 상관이 없는 작명. "전통적인 건축학 입장에서 보면 꽤 파격적이다."라는 의미에서 "야만인" 고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이때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하게 되어 일시 건축학이 퇴보 되기도 했다. 10~11세기 고딕 양식이 서서히 들어오기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돌만 좀 쌓아올리다가 얼굴 내밀만한 창문 하나 정도 만들고 지붕은 기둥이나 그런 게 지탱해서, 벽의 구성이 자유로워진 게 아닌 두껍고 투박한 벽이 모든 것을 지탱해야 했으니. 또한 로마 건축물이 남은 곳에서 사람들이 돌을 마구마구 빼와서 건축자재로 써서 유적이 많이 소실되기도 했다.[13]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축은 성당이나 일부 성이나 궁전, 공공 건물에만 반영되었고 앞서 상술되듯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했고, 특히 알프스 이북의 경우 아예 제반 기술이 붕괴되었기에 벽돌 만드는 방법마저 실전되었다. 초기 알프스 이북의 경우 사회 인프라 시설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대부분 목재로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성마저 11세기까지는 목재로 지어졌다. 이때 가옥은 나무로 된 틀, 욋가지에 흙을 바른 벽, 그리고 짚 등으로 이어진 지붕으로 2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하나는 길이 20~50피트(6.1~15.24m), 폭은 15피트(4.572m)의 가옥과 길이 6m, 폭이 3m인 원형 오두막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은 썩 튼튼한 건물들이 아니었기에 도둑들이 간단하게 벽을 부수고 들어오기도 했고, 단칸방이라 한 가족들이 한방에서 모여서 생활했고, 대체적으로 축사까지 겹쳐있는 형식이라 기르던 가축들과 함께 살기까지 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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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정집.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 내에서 '''하프 팀버'''라는 목조골조 사이에 진흙이나 벽돌로 채우는 반목조 양식의 건축술이 등장해 서유럽중유럽 등지에서의 가옥양식으로 크게 유행했다. 한편 알프스 이남의 경우 벽돌조의 가옥이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데 북유럽과 중부 유럽의 경우 주로 박공 지붕이 주류였고, 남유럽은 평지붕이 주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러시아 지역을 제외하곤 유럽 각지의 도시 주택은 건물 폭이 좁으면서 대신 길이가 긴 이른바 세장형 주택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처럼 일층엔 상업이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층 이후로 전부 생활 공간으로 오늘날의 타운하우스처럼 수직형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각박한 시대인지라 탑처럼 생긴 주택도 유행했는데 탑상 주택, 또는 탑주택이라 불렸고, 서유럽 전반에도 널리 퍼져 있었지만 동유럽의 코카서스 지방에도 탑상 주택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에 이러한 탑상 주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도시로 이주한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과장을 보텐다면 한 도시에 평균 100여 개의 탑상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전부 다른 귀족들에게 질세라 경쟁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탑상 주택이 나타날 때가 12세기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 내부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기에 같은 도시, 같은 도시내의 구역을 차지한, 각기 이해관계가 일치한 귀족들이 모여 계약을 맺은 콘소르테리아를 중심으로 한 블록 전체를 둘려싸는 형상으로 크고 작은 탑상 주택을 철책을 두르듯이 집합시켜 방어의 효과를 높였고, 각 탑상주택은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어 발코니에서 공동체의 적에 대한 감시와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중정을 두었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중정 쪽으로 돌출된 회랑을 통해 피신했고, 이밖에도 우무르 부뚜막, 땔감 창고 등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높은 탑을 세워 꼭대기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궁수들을 배치했다.
대체로 탑상 주택의 벽은 두텁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일층은 보통 아치로 된 한두 개 정도의 출입구가 있었고, 각 층마다, 작은 개구부를 한두 개 정도 설치되어 있어 폐쇄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배열고 불규칙한 경우가 많았다. 일층은 금고와 무기를 보관하는 방이 있었고, 이층은 거실 및 식당이 그 상층부에는 침실이 있었다. 부엌은 보통 맨 위층에 자리했는데, 굴둑도 없는 화덕이 설치되어서 요리를 할 때면 온 실내에 연기가 가득 차였다고 한다. 지하에는 와인 창고와 조명용 기름을 만드는 작업장을 두었다. 그 외에도 외부에는 상점을 세놓았고, 내부에는 고용인의 주거 공간과 작업장 등을 설치했다.
하지만 탑상 주택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13세기 말 도시 내부가 안정을 되찾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귀족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정치의 참여를 제한시키면서, 사적으로 짓는 탑이나 탑상주택의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지나치게 높아진 이들의 탑을 일정한 높이까지 줄여버렸다. 현대의 탑상주택의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곳으로 블로냐와 산 지니마노다. 탑상 주택의 높이는 최대 90m에 이르렸다고 한다.

3.2.4.3. 유희

유흥여가에 있어 귀족들은 마상창시합이나 매 사냥, 파티를 즐겼던 반면 하층민들은 가끔 가다 있는 순회극단이나 광대들의 공연을 관람하거나 축제에서 놀고 마시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물론 교회에서는 모두 다 방탕하다고 실컷 까댔다.
도박의 경우에도 교회에서는 성직자들로 하여금 제제했지만 일반 도시민들의 욕구까지는 막질 못했다. 주사위 놀이는 기본이요, 경주견 달리기 등과 같은 다양한 도박들이 유행했으며 훗날 카지노라는 단어도 귀족들이 도박을 즐기는 유흥장에서 비롯된 단어다.[15]
에 있어서도 억압이 심했다는 선입견과 달리 매춘이 묵인되는 등 할 건 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덕성에서의 경직은 실제로는 종교개혁기에 심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장 칼뱅이나 올리버 크롬웰 같은 16세기의 인물들의 행적이 중세에 고스란히 덮어씌워졌다는 것.

3.2.4.4. 음악

중세 음악 항목 참조.

3.2.5. 교육 및 학문


모든 엘리트들이 교회로 몰린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신학 이외의 학문이 탄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정도 과장된 이야기이다. 중세 교회는 지금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관대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문들이 신학 위주로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스콜라 학파가 있다.[16] 고대 그리스 철학의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권장되었으나 에피쿠로스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철학자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종종 폄하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의 입장과는 별개로 당시 지식인들의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인 면도 있었다.
한편 일부 교수의 경우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다르다는 이른바 '이중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충돌을 일으키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탄압받게 된다.[17]
서기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구수도원에 '''초등학교'''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등이 생긴 것도 바로 중세의 일이다.''' 특히 파리에서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마침 당대 최고라고 평가받던 논리학자이자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가 교수진의 일원이었기에, 당시 파리 대학의 학구열은 엄청났다.

"파리 대학은 전 세계를 위하여 빵을 굽는 오븐과 같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300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60여 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1350년에는 독일에만 25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며, 15세기 중반에는 빈, 하이델부르크, 쾰른 등지의 대학에 등록한 학생 수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대학생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본적으로 3학4과를 배웠으며 그 외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국가가 정립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왕실 내외의 복잡한 법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인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 [18]
당시 대학교에서 그 외에 메이저 학과로 소문난 분야들은 라틴어, 고전문학, 유클리드 등의 그리스 수학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기 위한 커트라인은 최소 12세(!) 이상이었으며, '''농민 출신이라 해도 다 받아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의 기회 자체가 상당히 균등하게 주어졌던 것. 다만, 이때의 대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교사/학생 길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서 교수는 장인, 학생의 경우 도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사립 학원.
중세의 대학교는 어두운 면도 갖고 있었는데 바로 학생들 상당수가 '''개망나니'''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항목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학생이나 교수나 꽤 막장이었다. 그 외에도 학생들의 개망나니짓으로 대학이 위치하던 도시의 시민들과 분쟁이 일어나자 대학과 도시의 행정이 분리되었다.
중세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으며 지구 구형설을 조롱했다는 뿌리깊은 편견 및 고정관념도 있는데, 사실 '''중세인들은 지구가 명백히 둥글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알리기에리, 로저 베이컨 등 수많은 중세 지식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들의 저술 속에 명백하게 남겨 놓았다. 최초로 플랫 에러를 퍼뜨린 주범(?)은 도리어 19세기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 그가 1828년에 저술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삶과 항해》에서 지구 평면설을 신봉하는 중세인의 이미지가 최초로 그려졌고, "과학의 발전을 탄압하는 반지성적 시대" 로서의 중세의 프레임을 원했던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것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것.
또한 연속성 논쟁 문서에서 보듯이 일부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들은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제로는 중세시대의 연구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기도 한다. 중세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뛰쳐나와 새로 과학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3.2.6. 식문화


식문화에 있어서는 변변치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상당한 양의 요리책들이 저술되기도 했고 영주들도 놀고 먹는 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19] 요리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종류의 향신료가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후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향신료 열풍의 기폭제가 된다. 다만 술 마시고 깽판 부렸다는 기록이 상당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테이블 매너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프 같은 걸 먹을 땐 아예 그릇을 돌려가며 들이켰다고 한다.막걸리 마시듯 사발을 양손으로 들고 먹었다. 그것도 귀족들이. "포크 같은 식기류를 왜 안 쓰냐"고 궁금해할지도 모르는데, 이 당시에는 포크가 없었고, "하느님이 내려준 음식을 도구를 써서 먹는 건 불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 손으로 먹었고 식기를 써도 숟가락이나 썼다.[20]
물론 서민(농노)들은 그런 거 없고 단지 얼마 안 되는 고기[21]를 양배추나 순무 같은 채소들과 함께 수프스튜형태로 푹 끓여먹어야만 했다.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국물요리를 좋게 말해서 서민적, 나쁘게 말해서 상놈들이나 먹는 요리로 취급(특히 프랑스에서)하는 이유가 바로 중세시대의 영향이란 설이 있다.# 요리인류에서 참고할 만한 주장이 나오는데, 이 시기 귀족들은 불 냄새 밴 고기는 평민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이유로 직화구이 고기를 피했다고 한다. 변변한 조리도구가 없는 평민층이 고기를 구워 먹게 되면 불로 바로 익혀 먹는 반면 귀족층은 다양한 조리도구를 이용해 여러 방식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귀족층은 고기를 구울 때에는 불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 쇠꼬챙이에 꿴 고기를 두어 그 열로 간접적으로 굽는 방식을 이용했다. [22]

3.2.7. 사회


  • 마녀사냥
많은 사람들이 중세하면 마녀사냥을 상상하는데, 정작 '흔히 아는' 마녀사냥은 근세에 벌어진 일이다. [23] 종교재판에 대한 가장 잔혹한 안내서인 크라머와 슈프렝커의 '마녀의 망치' 또는 '마녀의 추'는 말기인 1486년에 나왔고 르네상스 시기부터 화형과 더불어 마녀들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박해가 이루어졌다. 각종 중세시대 고문 도구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고문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도리어 비교해서 보면 현대 냉전 시대에 더 정교해지고 야만스러워진 면이 없지 않다.[24]
  • 여성의 인권
로마 제국 시대에 탄압받았던 독신주의 여성 신자들이 수녀회를 결성하여 제도화되었고, 여성에 대한 종교적 보호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등 여성 인권은 오히려 로마시대보다 진보했다. 또한 은퇴한 매춘부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구휼 정책들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시작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 보호하는 켈트나 게르만의 전통에 따라 영주의 아내로서 과부가 된 사람은 일부 영주영지 지배권이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25] 물론 현대에 비하면 여전히 비참하긴 했지만, 영주 부재시 저택과 장원책임을 도맡을 정도로 사생활은 남녀가 비슷했다. 하층민의 경우 영주는 자신의 허가를 받으라고 주장했지만, 교회의 보호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결혼이 가능했다.
  • 사회구조
대체적으로 도시가 아닌 농촌사회가 태반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농노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봉건제도와 농노제도는 분명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였지만, 사실 로마시대나 그 이후 근대까지 노예들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과연 중세가 유달리 민주적으로 퇴보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되려 중세시대는 산업 혁명 시기와 비교했을 때 노동시간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산업시대부터 가스등이나 전구가 사용되면서 야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중세시대에 양초 같은 조명은 비싼 물품이었고, 해 지면 일 못 하기는 동서양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대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 먹고 날이 충분히 밝아지자마자 일을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했지만, 일요일 휴일은 항상 보장되었고 휴가도 일요일을 제외하고도 1년에 8주 정도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교회법, 관습법 등이 농노를 가혹한 노동에서 지켜줬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산업 혁명 때는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학대를 눈뜨고 당해야 했었다.
또 중세 때는 공휴일 개념으로 기독교의 축일(주님부활대축일, 주님성탄대축일) 때도 쉬었다고 한다.
  • 교회
사회에서 교회가 가지는 위상이 현대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기에,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상당히 부당한 비판이다. 우선 중세의 교회는 현대의 교회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걸 알아둬야 한다. 현대의 교회는 순수하게 종교 집단의 의미를 지니며,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활동 수도회 소속이 아닌 다음에야 종교 이외의 분야에 관여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광경이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넘어서 교육, 행정, 학문, 사회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에 가까웠다. 따라서 중세의 교회가 교무금(십일조)을 걷는 것은 세금을 거두어서 공공 사업에 쓴다는 의미로 이해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 신부 놈들이 돈을 뜯어가네라고 이해 해서는 안 된다.[26]
같은 원리로 '중세의 교회에서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쳤다'는 명제는 '교과서에 천동설이 정설로 적혀있었다.' 정도 의미로 봐야지, '교리적 차원에서 천동설을 진실이라 가르쳤다.'로 봐서도 안된다. 국가가 현대와 비슷하게 각종 공공사업 대부분을 떠맡는 모습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모습이다. 물론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재판을 받은 갈릴레이의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판한 것도 우르바노 8세교황이라 출판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교황청에서 허가까지 받았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27]기는 해도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피해를 본건 사실이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1992년에 인정하기는 했다.
비록 교황권이 강하던 시기였던건 맞지만 그 교황권도 교황이 세속적인 간섭을 너무 행한 나머지 줄어들었으며, 줄어든 교황권과 중앙집권화의 약화가 단적으로 나타난 사태가 바로 아비뇽 유수대립교황의 발생이다. 교황은 분명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중세세계의 질서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의 대영주이기도 했다. 즉 중세에 교황권이 무작정 우위에 섰다는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 법률
법률 쪽으로는 이탈리아 반도를 제외한 서유럽에선 신학과 연관된 교회법과 게르만족의 관습법으로 결투 재판으로 알려진 게르만법이 서유럽 사회를 지배했고 반대로 동유럽과 이탈리아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을 기반으로 법률체계가 우수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간단하지만 불안전하고 분산되어 있던 기본의 교회법과 게르만법을 대신해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볼로냐를 중심으로 이르네리우스와 같은 법학자의 주도하에 로마법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볼로냐 대학의 법학과 커리큘럼은 크게 교회법과 로마법인 시민법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또한 상업 및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에 관한 관례와 규칙이 생겨났고, 이를 종합한 상법과 해상법이 등장해 상인들 사이의 국제법을 정착한다. 당시 상법의 내용은 정기시장의 교역날짜, 교역절차, 시장관리, 화폐유통, 도량형 표준, 시장 법원관리, 시장 중의 은행법규, 상인조직, 계약, 치안관리, 등을 담고 있었고, 해상법은 선박관리, 화물적재, 사고보장, 해운 보험 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편 11세기 이후의 영국에서는 현대의 법률 제도인 배심원제와 영장 기소제와 보통법과 형평법이 등장했다. 배심제도는 본래 프랑크 왕국의 것으로 본래 신명재판을 통해 판경을 내리는 방식과 달리 왕실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을 조살 할 때는 선서의 방법을 쓰지 않고 법관의 주도하로 지식인들을 모아 그들에게 진상을 설명하게 하는 방식을 고안했는데, 나중에 신분이나 조세에 관련된 개인 재판에도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재판 당사자의 이웃 중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이웃조사단이란 임시 조직을 구성하게 했다.
이후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해 영국왕에 취임하면서 프랑스의 이웃조사단 제도를 이용해 영국 전역의 토지상황을 제대로 조사했고, 이후 1164년 헨리 2세가 클라랜든 칙령을 통해 법정 내에서의 배심단 제도를 확립해 순회재판 때 현지 주민 12명을 배심단으로 구성하게끔 하였다.
아울러 영장 기소제 역시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가 영국 내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지방법원을 보존하고 지방관습법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국왕의 명의로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해 원고가 법원에 기소를 할 때 반드시 국왕의 대법관에게 영장을 신청하면서 성립되었다. 보통법 또한 법관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순회재판을 하느라 각지의 재판에 참여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에 관해 잘 알게 되어, 런던으로 돌아와서 다른 지법에 파견된 법관들과 함께 사건에 대해 토론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을 소개해 전국의 법을 조금씩 통일해 나간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12~13세 양모업과 상업무역이 왕성해지면서 재산에 얽힌 갈등이 빈번해 점차 보통법의 한계가 드러나 다시 관습법으로 회귀하지만, 14세기 대법관의 양심과 정의에 기초한 형평법이 등장하고 이후 15세기에 대법관과 그 조수가 함께 정식으로 형평법원을 구성하게 된다.
  • 도시의 확대
>구 로마의 변경 도시인 을 제외하면 독일 도시들은 인구 성장률이 낮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식민지 개척 운동이나 도시화 과정에서 기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4세기 동안 2,500개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그때 정립된 도시정부 체제는 실질적으로 19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본래 도시 경계는 변경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
>『역사 속의 도시』 1권 中. 루이스멈퍼드 저.
상업의 발달로 인해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 도시들은 각자 영주와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운영되었다. 또한 인구 또한 늘어남에 따라 대규모 개척사업등이 이루어 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이 있다.

3.2.8. 의학


요약
위의 글에서 잘려나간 뒷내용
중세 의학에서 가장 흔한 형식의 치료는 약물요법이었다. 적절한 약물을 결정하고 약을 짓는 능력은 약효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부분 의료행위자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단일 약재가 처방될 때도 있었고 여러 약재가 혼합 처방될 때도 있었다. 약재의 성분은 대부분이 약초였지만 동물이나 광물이 이용되기도 했다.
10세기경 고대 영어로 작성된 잉글랜드의 의학서 ''Bald's Leechbook''에는 창자가 비어져 나온 상처를 수술하기 전 약초를 우려낸 물에 손을 담그라든가, 비단실로 수술 부위를 봉합한 다음 계란 흰자로 만든 연고를 바르는 등 체계적인 외과수술 방법이 정리돼 있다.

3.2.9. 위생


근세(근대 초기, 17~18세기 초)와 비교하면 위생면에서 조금 나았다. 목욕하는 것이 미덕이자 부의 상징이기도 했고,[28] 로마 시절부터 이어져온 목욕탕과 목욕문화가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근세보다는 자주 씻었다. 다만, 귀족이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목욕을 즐긴다거나 하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깔끔하기로는 오히려 근대 무렵의 사람들보다 더했다. 문제는 중세 후반에 목욕탕이 성매매 장소로 문란하게 변하면서 교회의 비난을 받고, 목욕탕 성매매를 통해 매독 등의 성병이 확산되자 중간에 낀 목욕이 전염병을 퍼트린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풍습이 사라져버렸다. 근대의 사람들이 잘 씻지 않은 점은 이 믿음이 근대까지도 지속되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주변 환경의 경우 진짜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다. 위에 언급된 초기 중세시대의 가옥에서의 언급대로 단칸방에 온가족들이 모여사는 것도 문제였지만 기르는 가축들까지 같이 안에다 들여놓고 생활했기에 위생상으로 최악이었고 로마시대 당시 자랑하던 상·하수도의 체계마저 실전된 상태였다. 그나마 건축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건축자재의 발견으로 집과 축사가 개별화 되었으나 상·하수도는 여전히 전무한 상태로 심지어 도시의 경우 더 심각한 도시 안에서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키웠고 오물은 길거리에다가 버렸다.[29] 이 때문에 도로는 가축의 변이나 사람들이 버린 온갖 오물로 넘쳐났고 이러한 오물들은 실제로 흑사병이 일어날 때 흑사병을 더욱 만연하게 만들었다.
다만 오물을 길거리에 버리는 관습 자체는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Missiles of Mirth(기쁨의 투척물)'라는 완곡법으로 이러한 악습이 묘사된 바가 있으며 아파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로마시대에는 '인술라'라는 공동주택이 있었는데 당시에도 위층까지 상하수도를 끌어올리는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인술라 상층부엔 당연히 하수도가 없었고, 이미 이때부터 오물 투척은 심각한 문제였으므로 'Dejecti Effusive Actio'라는 법으로 통제해야 할 지경이었다. (출처1, 출처2)
참고: 중세~근대 초기까지 쓰던 요강, 중세인들은 얼마나 더러웠을까[30] 또한 중세에는 상하수도 개념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 역시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수도원이 상하수도 시설을 관리하고는 했다. 참고

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



JTBC 차이나는 클라스 - "암흑시대는 독일과 일본에 의해 씌워진 프레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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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초 로마네스크 건축 (제르미니 데 프레)
12세기 고딕 건축 (샤르트르 대성당)
9세기 교회 건축과 12세기 교회 건축. '''다사다난했던 중세 시대에도 문명은 분명하게 진보했고, 그 원동력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그리고 르네상스를 탄생시켰다.'''
대다수의 판타지물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31]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경우도 많고, 서양에서는 판타지 팬이 아니라도 기사, 갑옷, 공성전 등을 좋아하는 밀덕, 역사덕후들이 갖는 중세 로망도 많다.
오히려 이와 대비되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오해가 강하게 자리잡혔다. 그리고 픽션이라도 그런 중세의 현시창 분위기를 더 크게 어필하면 다크 판타지물이 된다. 즉 중세시대와 중세시대 픽션은 환상적인 이미지와 어두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셈인데, 어느 방향이든 인기와 인지도는 많고 논란도 많은 메이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암흑시대의 의미는 '교회의 억압에 의해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둠의 중세시대'로 통용되는데, 여기서 2가지 논의점이 발생한다.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시대인가?
2) 퇴보되었다면, 그게 종교(기독교) 때문인가?
일단 결론을 내리자면 '''둘 다 아니다.'''[32] 모든 것이 퇴보된 시대도 아니었고,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서로마 멸망 후 혼돈의 카오스인 시대상황에서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중들에게 중세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박혀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라는 역사학적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중세의 이미지는 14~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존중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 힘이 발흥되어 문화가 만개했던 행복의 시대를 그리스·로마시대라고 생각했으며, 그 유산인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해 그러한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중세를 '중간시대, 쓰레기인 추악한 시대'라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고전과 당대라는 2개의 참된 시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기는 그에 의하면 소거되어야할 쓰레기였다. 이렇듯 중세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까기 위한 목적으로 페트라르카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중세라는 용어는 그 후에도 여러 인문주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때까지는 중세라는 표현은 물론 어떤 특정한 시대를 지칭한다거나 명확한 시대구분 없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편의적 사용이었다. 이러한 편의적 사용을 주교이자 교황청의 사서였던 죠반니 안드레아가 고대-중세-근현대라는 3시대 구분법에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시대구분 형태로 자리잡았다. 1469년 교황청 사서 조반니 안드레아는 중세란 표현이 '낡은 사람'들과 '우리시대의 근대인'들의 구분을 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했다.
스위스 출신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부터 중세를 폄하하는 경향이 더 번성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조르조 바사리 같은 르네상스 운동의 주역들로부터 사용된 것이지만, 그 용어를 '시대' 개념으로 정립한 것은 부르크하르트였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를 고대문화의 부활이자 근현대의 출발점이요, 중세와의 급격한 단절로 해석했다. 이런 주장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의 추종자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존 시몬즈는 두 시대를 다음과 같이 확연히 대조시켰다.

'''중세 시대의 정신 상태는 교의(敎義), 권위, 스콜라주의와 같은 교회의 우상들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침내 인간의 노력을 위한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며, 그 이래로 인간이 여전히 참여하는 진보가 계속되었다. 르네상스의 역사는 인간 정신이 쟁취한 의식적 자유의 역사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까이고 또 까이던 중세는 19세기 말에 몇몇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를 시작했고, 20세기 초부턴 역사학계에도 본격적으로 재평가의 바람이 불었다.
게르만계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도 있었음을 밝혔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는 연구도 나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33]
현재에 와서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여기는 견해가 많다. '암흑시대'라는 부정적 의견은, 중립을 선호하는 전문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중립 견해에 따르면 중세는 서양사의 한 시대에 붙인 이름일 뿐이고, 이 시대는 서구문화에 독특하고도 중요한 공헌을 추가했으며, 그 공헌은 공정하고도 편견 없는 연구&평가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를 서술한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일반 대중들이 종교의 생활규범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secularization)는 19세기의 일이었으며, 공중 차원에서의 세속윤리(secular ethics) 담론의 본격적인 진행은 사실상 현대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사료가 부족하여 시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제한적 의미의 암흑시대는 여전히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으며, 중세 초기(476~1050년경)의 경우에는 여기에 해당하므로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이 시기는 비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과 경제망의 붕괴 등, 냉정하게 말해 좋게 보는 것이 힘든 시기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은 가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수준으로, 인류 멸망 시나리오를 방불케 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비유하면 외계생명체가 뉴욕과 LA를 점령하고 서구 문명이 붕괴한 수준의 충격이었다. 중세 초기의 신학만 보더라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동로마는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하느님은 어느 분이신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등에 주목하여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켰다. 반면 서방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로마가 붕괴되고 난세가 펼쳐진 세계를 보면서 그 자신도 시련을 겪어야 했고, '인류의 문명은 영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죄악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등의 사유를 발전시켰다.[34] 서로마 멸망은 당시 서유럽의 모든 것이 붕괴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기술, 문화, 교류의 붕괴, 군벌 형성, 해적 창궐, 실전된 상/하수도, 무역, 건축, 의료, 교육 등.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유럽인들은 조금씩 발전을 추구하려 하였다. 그리고 질서를 바로 잡은 곳이 서유럽에선 교황청이었으며, 8세기까지는 종말론을 체감할 만했던 서유럽에서도 9~10세기에는 지역별로 비교적 안정적인 정권이 수립되어, 11세기 무렵부터는 대부분의 외침을 단절시키고 오히려 정치·문화적인 권역을 확장시키면서 '문명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당대 기준으로는 꽤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였다. 물론 이렇게 일괄하는 것 또한 너무 단순한 것이지만, 특히 11세기 이후를 '암흑시대'로 지칭하는 것은 해당 시대의 보편적인 문명 발전 정도를 고려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라고 할 만하다.
요한 하위징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와는 비교하면서 중세 후기(14-15세기) 프랑스어권을 연구하여 이 시대 프랑스어권은 재생의 시대라기보다 비관주의와 데카당스의 시대를 거쳤다고 보았다.

중세시대는 겨울이 아니다. 중세는 마치 분명 저물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붉은 석양을 남기는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대였다.

'''호이징아 '중세의 가을' 中'''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세계 사학계에서의 대세는 중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세가 정말 좋은 시기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전까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던 시기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근대로 넘어간다고 하여 중세보다 확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종합하면 중세는 이전의 판단에서 암흑기로 간주했던 것보다는 나은 시대였고 근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마냥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지만, 문명과 문화는 그때에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신의 저서 <중국통사>에서 작금의 중세 재평가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분명히 어느 문명에서도 중세는 중세 나름대로 인간 지혜의 진보, 발달을 볼 수 있으며 그 점에 한해선 중세가 고대보다 우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세가 암흑시대라는 설을 일방적으로 미망(迷妄)이라고 팽개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중세에 들어서부터 고대에 육성되었던 수많은 진화 현상이 정체되고 퇴화, 역행하는 경우가 나타난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고대에 융성해지려 했던 화폐경제의 쇠퇴, 자연경제의 재생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더욱이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고대에 비교적 자유로워지려 했던 인간관계가 중세에 들어서자 귀천貴賤의 계급이 고정되어 신분제 사회의 출현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생긴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중세란 시대는 결코 무한정 예찬할 수 있는 진보적인 시대가 아니고, 명암이 교차된 복잡한 성격을 지닌 시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세 재평가 사학자들은 로마 붕괴 이후 정체, 퇴보 현상까지 부정한 적이 없으며, 암흑시대가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두운 시대'로 쓰여왔으며 이는 부당하다고 주장했을 뿐, 상기했던 대로 역사적 연구를 통해 명암을 확실히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상술했듯 아무리 퇴보가 있었다 해도 무려 천 년이 넘는 중세 시기가 싸잡혀 암흑시대로 규정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35]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유럽 사학자들이 주장한 적 없는 걸 들고 와 비판하는 감이 있다. [36]
더욱이 기존의 중세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자정하는 것이 비판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미 고대 시대부터 신분제는 고착되었고 노예와 약탈 경제가 주축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외면하고 있다. 누군가는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중세 예찬론자들의 논리 헛점들을 자신의 학설[37]로 지적했을 뿐이라고 반론하는데, 그렇다면 위의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견해는 서술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다. '중세 예찬론'과 학계의 '중세 재평가론'은 엄연히 다르니까. '작금의 중세 예찬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여담으로 중세 예찬론에 대한 비판이라면 요한 호이징가 등의 사학자들 역시 한 적이 있다.

3.4. 참조 자료


이 문서는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위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공신력 있는 자료들을 몇가지 소개한다. 서적의 경우 도서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네이버 지식 사전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 요한 하위징어 『중세의 가을』
  • 자크 르 고프 『중세를 찾아서』, 『서양 중세 문명』 등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 주디스 코핀, 로버트 스테이시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 마시모 피글라우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中 미신에서 자연철학으로, 자연철학에서 현대과학으로
  •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
  • 페리 앤더슨 『고대에서 봉건제 국가로의 이행』,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38]
  • 『자연과학의 이해』
  • 움베르토 에코(기획) 『중세』 시리즈[39]
  • 서양 중세사
  •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서양의 장원제』,『기적을 행하는 왕』

3.5.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3.5.1. 문학



3.5.2. 영화



3.5.3. 게임



3.5.4. 애니메이션


  • 원탁의 기사 타올라라 아서
  • 리틀 엘 시드의 모험
  • 로빈 후드의 대모험

3.6. 중세 판타지?


양판소를 비롯해서 검과 마법 판타지물은 대부분 중세 유럽 배경 비슷한 모습을 갖추곤 한다. 이 경우 십중팔구 기사마법이 등장하고 엘프, 드워프, 오크 등 갖가지 이종족과 몬스터가 범람한다.
이러한 전통은 톨킨보다도 이전, 19세기 낭만주의 사조에서 유래했다. 톨킨과 C. S. 루이스는 그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해서 하이 판타지 장르를 성립시켰고, 그 전통은 이후 미국에서 TRPG, D&D 등을 통해 재정립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또 다시 수많은 JRPG만화들을 거쳐서 현재의 장르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상을 만들었다. 양판소이세계물은 그 결과물인 셈이다.
이런 장르화된 판타지 세계관의 모티브가 '중세'인 것임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오락성 중시의 판타지 창작물은 오히려 근세 베이스에 오등작기사 같은 중세의 로망같은 요소만 대충 차용한 중세+근세 혼합이 대부분이다. 어떤 때는 중세 시늉도 안하고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나 프랑스 혁명기 시대, 빅토리아 시대 복식을 해놓고서 '중세 판타지'라고 불리는 일도 흔하다. 이런 상황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거슬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고는 한다.[42]
물론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판타지 창작물에서 반드시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락성은 현실도피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지, 논리성과 고증이 좌우하진 않기 때문. 게다가 중세라는 이름의 프레임을 씌운 중세+근세 배경을 차용했다고 해도 실제로는 현실 세계가 아닌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다. '중세적 분위기의 하이 판타지'의 시초격인 반지의 제왕도, 작중 설정상으로는 초고대 문명에 해당한다. 그 유명한 D&D도 마찬가지. 아예 던전 마스터 가이드북에 이것은 게임이며 현실적 고증보다 로망을 중시한다고 써놨다.
즉, 양판소를 비롯한 오락물 창작자들은 칼싸움, 영주, 기사, 성채 같은 중세 요소가 판타지 장르의 로망이자, 소비자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써먹는 것 뿐이다. 그게 잘 먹히니까 소재로 쓰는 것이지, 실제 역사의 중세 유럽에 열정을 가지고 창작에 임한 건 아니라는 말. 판타지 창작물에 흔히 나오는 마법이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중세 세계관에 폭넓게 섞이면 상식적으로 그 세계 문명이 중세 수준에 머무르기도 힘들며, 어떻게든 짜맞춰도 배경 설정이 복잡해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많이 오해하는 대표적 사례 몇 개를 들자면 자기그릇, 즉 우리가 서양식 자기로 인식하는 본차이나대항해시대 이후 세계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유럽에 전파된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에 등장한 것이며, 우리가 아는 화사한 드레스 또한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들어서야 등장했다. 코트 복식 또한 바로크, 로코코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 즈음에 입던 것으로, 아직 튜닉이 일반적이었던 중세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심지어 중세 기사 하면 흔히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는 판금 갑옷조차 중세가 끝나는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났다.
이렇게 동아시아와 서구쪽의 '중세'에 대한 심상이 상당히 차이나기 때문에, 서구에서 만든 '중세 판타지'와 동아시아에서 만든 '중세 판타지'를 비교하면 차이가 크게 난다. 하지만 동양인 중에 유럽의 중세와 근세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서양인이 많은 것 만큼 당연하다. 요즘은 유튜브만 돌려봐도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워볼 수 있는 시대지만, 한국에서는 불과 10년전까지만해도 서양 중세에 대한 이해하기 쉽게 가공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다. 반면 서양인들에게는 중세 유럽이 더 친숙하기에 더 현실성 있게 고증할 수 있는 여건도 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반대로 서양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 동아시아의 역사 시대에 대한 이해나 이미지가 부족한 서양 측에서는, '전통 동아시아 판타지'를 만들 때 중국, 일본의 여러 시대를 마구 뒤섞은 고증 개판의 세계관을 만들곤 한다. 거기에 동남아시아 풍의 불교 건축물까지 섞이면 금상첨화. 디즈니의 뮬란이 이러한 논란에 휩싸인 바 있으며, 역사를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경우 동아시아 문명의 건물이나 유닛을 죄다 일본성과 사무라이 디자인으로 퉁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물을 무작정 "중세 판타지"로 퉁쳐버리는 것도 문제, 서양 중세에 대한 몰이해도 문제지만, 어차피 서양의 동양 판타지도 동양 역사에 대한 고증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건 마찬가지이며,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는 장르화된 판타지 오락물을 무작정 중세 유럽과 이어보는 관점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3.7. 관련 문서


30년 전쟁의 경우 에누리 없이 근세에 일어난 사건이다.[43]

4. 유럽 밖의 중세


'중세'의 비유럽사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유럽이 아닌 지역에 '중세'가 존재하였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는 애초에 시대구분론이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가 형성된 탓이 크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발전한 농노제도라는 경제시스템은 전세계 보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럽이라는 특수한 지역의 특수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하지만 제국주의 진영에서 사회진화론을 밀고,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마르크스의 5단계 발전설을 밀면서 엄청나게 긴 시간동안 이러한 설[44]이 퍼지게 된다.
대체적으로, 유럽 외부의 중세를 설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단,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와 같은 단계를 설정한 경우에만 해당. 그게 아니라면 얄짤 없이 근대 산업 혁명 이전[45]까지 중세에 포함시키기는 하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부터는 '근세' 등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에 집약적 산업의 발전으로 청나라대 이후에는 "동양 발 근대도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며 근대도 재정의하려는 시도도 있다. 어디까지나 시도까지만의 영역이지만.)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까지 고대, 남북국시대부터 중세로 보거나, 혹은 남북국시대까지 고대, 고려시대부터 중세로 보는 두 설로 나뉜다. 과거에는 고려시대부터 중세라는 것이 다수설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 남북국시대를 중세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학설이 많아지고 있다.[46] 새로운 학설에 보수적인[47] 고등학교 교과서 차원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중세라고 가르치는 중이다.
한국사에서도 중세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떡밥이다. 중세의 시작점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의 내용으로 보아 통일신라는 한 지역에서 노비가 전체 인구의 4%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대 노예제 사회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삼국통일부터는 중세로 봐야 한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중세가 끝나는 시점은 근세를 제외한 3분법의 경우 고려와 개화기 이전의 조선을 합쳐 중세라고 일컫는 것이 우세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에 의한 암묵적 합의. 고려를 중세로 보는 시각은 대체로 동일하나 조선을 중세로 볼 것인지 근세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떡밥이었으며, 마르크스 사관에 기반한 민중사학에서는 중세의 기원을 신라의 삼국통일과 신문왕의 개혁으로, 심하게는 562년 가야 멸망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48]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하거나 가야 멸망을 중세의 기점으로 볼 경우 유럽의 중세 시기와 잘 일치된다는 것도 중세의 기원을 끌어올리는 여론이 세를 얻어가는 원인이다. 메이저인 서울대학교 쪽에서는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로 보는 경향이고 이에 대항하는 고려대학교 쪽에서는 한국사에서의 중세, 근세 개념을 아예 부정하고 왕조구분법으로 쓴다. 혹은 근세를 임진왜란 이후로 보기도 한다. 연세대학교는 중세를 중세Ⅰ, 중세Ⅱ로 나눠서 중세Ⅰ을 고려 시대, 중세Ⅱ를 조선 전기(임진왜란 전)로 보고 조선 후기(임진왜란 후)를 근대로 구분한다.
(러시아가 유럽이냐 아시아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신나게 싸우는 논쟁거리지만) 러시아의 경우, 중세란 표현 자체를 쓰지 않는다. 표트르 대제를 기준으로 그 전을 고대 러시아라고 부른다.
인도의 경우, 굽타 왕조에프탈의 침입으로 붕괴된 시기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아 무굴 제국에 의한 통합을 중세의 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중동의 경우 이슬람교의 등장 자체가 워낙 큰 전환점이다보니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9세기경부터 분권적 질서가 나타났다가, 오스만 제국이 다시 한번 통일 제국을 재건하게 되며 중세는 대체적으로 끝났다고 본다.
아시아권을 통합해서 등장한 것은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이다. 주로 사회주의[49] 쪽에서 주로 시작한 이 논쟁은 아시아의 특수성과 역사발전 단계이론이라는 단선적 발전사가 조화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다. 여기에 바르가, 칸토르비치, 비트포겔 등의 특수성 긍정론과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론에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단선적 발전론이 충돌하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후 전개와 자세한 것은 외부 참고.
중국은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고, 서민 문화가 성장한 북송은 근세로 보고 당나라 말기까지(보다 현대적인 시각) 혹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가 재건된 명나라대까지를 중세의 끝으로 보고 있다.
일본헤이안 시대후기 11세기에 등장한 장원공령제의 모습이 유럽의 장원제와 상당 부분 흡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시기부터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시대 이전까지를 중세로 파악하는 시각이 강하다.
결국 동아시아의 중세란 '근세적' 요소(과거제, 세련된 정치 문화)가 성숙되어가는 시기로 어렴풋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사실 이는 서유럽 식으로 보면 다 이상한 방식이기는 하다. 근세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에서 에도 막부 시대를 설명하려고 '근대적 요소는 있는데 근대는 아니고, 그니까 근대의 근에 중세의 세 합해서 근세' 해서 나온 개념이고, 왕조별 구별에 대해서는 현재 부정적인 것이 일반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리 방법을 못찾았는지 근대 이전의 경우에는 고대와 중세라는 표현을 사실상[50] 배제하고 왕조구분론으로 교과서가 구성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사의 경우에는 고조선, 초기 삼국의 발전, 삼국시대, 통일신라발해, 고려, 조선 이런 형식으로 단락이 구성된다.

[1] 사실 '현대'라는 용어가 정착한 것은 정말 얼마되지 않았다. 1980년대 정도까지는 '최근세'라고 하여 '근대'이기는 하지만 가장 최근의 지엽적인 시기를 지칭하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지금도 '현대'를 편의상의 용어로 볼 뿐 학술 용어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고.[2] 애초에 이런 구분을 한 르네상스시기가 '''과거 찬란했던 문화의 부활'''이라는 인식이었으며, 그 과거문화가 사라진 중간 시대는 '''미개한 문화'''로 폄하하여 구분하게 되면서 찬란한 과거, 미개한 중간, 찬란한 과거의 부활로 구분한것이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면밀히 따진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느정도 계몽주의자들의 목적에 따른 왜곡이 첨가되어 있는부분으로 마치 공자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포장했으나, 실제 주나라가 공자의 묘사대로라기 보다는 그냥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활용한 편집된 이미지의 국가 같은 것처럼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고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3] 다만 이 경우는 현실적인 요인도 고려를 해야 한다. 학회의 입장에서는 여러 학문의 교류를 위해 자신들의 전문 분야보다 조금 더 넓게 논문을 투고받는 경우가 많고, 또 말 그대로 거시적으로 편의상 쓰는 시대 구분과 달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등 학문 분야에 따라 좁은 의미의 '중세'보다 더 넓은 시간대에 연구가 걸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4] 통념적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구분법 중 하나이기는 하나, 로마 제국의 몰락, 기독교의 성행, 봉건 제도의 부상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사건을 가지고 시대를 구분시킬 수 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5] 앙리 피렌느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앙리 피렌느는 중세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중세의 시작점을 476년보다 뒤로 설정했다는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부적절하다. 8세기까지도 도시, 상업, 시장경제 등에서 고대적 요소가 잔존했다고 하나 로마 말기에 이미 도시와 상업과 시장경제는 쇠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 세력의 팽창이 유럽 전체를 농업 문명 사회로 바꾸었다는 그의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6] 그러나 이것은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가 더 의미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약간 퇴색된다.[7] 다만, 19세기까지 중세로 잡는 것은 대단히 극단적인 관점으로 이는 지극히 극소수의 견해다. 무엇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근세와 근대가 완전히 없어지고 중세->현대로 바로 이행된다. 물론 이는 정말 중세 자체가 19세기까지 이어졌다는 관점이라기 보다는, 주로 (대중의 통념과는 달리) 유럽 사회의 중세적(봉건적) 요소의 잔재가 근대 말까지도 끈질기게 남아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에 방점을 찍고 제기되는 관점이다.[8]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커진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 때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중세에는 그런 거대 제국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 물론 실제로 커지기도 했지만.[9]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이 로마 시대에 어떤 취급을 받던 곳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로마 시대에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이집트 등은 중세에도 멀쩡히 부유한 지역으로 살아남아 막강한 국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10] 다만 항해술에 뛰어난 바이킹은 약탈뿐만 아니라 무역에도 종사했으니 무역 활동이 아예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11]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무역의 이상은 Win-Win이다. 자신과 상대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 함께 부유해지는 것. 여기서 '''상대도 부유해진다'''부분을 용납하지 못한 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서로가 양보해서 각자 조금씩의 이익을 얻자는 쪽과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자는 쪽 중 단기적인 선택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는 명확하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상대도 하고 있다는 점과 상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하니 그냥 무역을 안 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결국 내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보호무역이다.[12] 물론 이건 유럽 전역에서 다 때린 게 아니고, 화로는 러시아나 프랑스가 유명했고, 창문은 영국 등 각자 특유한 세금이 있었다. 그렇다고 평민들한테 매기는 징세과목은 결코 적다는 것은 아니다.[13] 그런데 이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까지도 만리장성 등의 유적의 석재 등을 빼와 주변 주민의 주택을 짓는 일이 흔했다. 피라미드 역시 표면의 석재를 빼가서 현재의 계단형 모습이 형성된 것이고 콜로세움도 성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빼간 석재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14]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시골집들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도 고려시대까지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런 집에서 살았다. 장 자크 상페의 풍자 만화[15] casino는 이탈리아어로 집을 뜻하는 "까사(Casa)"와 작다, 귀엽다를 뜻하는 "이노(Ino)"를 합쳐 만든 단어로 귀족들의 간이 놀이방을 의미했다.[16] 물론,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에 의거한 관점이었다.[17] 물론 여기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과학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18] M.H.Shank 저작 참조.[19]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티는 단순한 유흥을 떠나 권력 확인의 수단이었다.[20] 이 부분에 대한 고증묘사가 잘 된 영화로는 킹덤 오브 헤븐이 있다. 해당 항목 참조.[21] 그것도 귀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장이나 다리 같은 잡다한 부위들.[22] 이 문서에 몇번 언급되었다시피 귀족들의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은 귀족이 실용적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도 여유와 돈이 남아도는, 서민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23]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죽은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중세에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 일이 없진 않았을 테지만, 근세에 벌어진 마녀사냥은 사람들이 단체로 마녀를 집중적으로 죽이는, 즉 학살에 가까운 마녀사냥이다. 일반적으로 마녀사냥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잔혹하게 치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근세 한정으로 잔혹하게 치러졌다.[24] 중국의 포로 세뇌, 소련 KGB의 각종 고문 기법, 미국 CIA의 MK울트라 프로젝트 같은 예가 그것.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는 요도에 볼펜 심을 쑤셔넣는 고문까지 있었다.[25] 이런 귀족 여성의 통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남자다움을 지닌 여성'이란 변호가 생겨났다. 여기서 남자다움은 현재 통용되는 의미와 좀 많이 다르다.[26] 참고로 말하자면 교무금 자체는 현대 가톨릭교회에도 존재하며, 신자의 의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내지 않는다고 강요하거나 닦달하지는 않고, 신자 개개인의 자율에 맡긴다. 액수도 꼭 10분의 1을 내는 것은 아니고,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 낸다.[27]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가톨릭교회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한건 그가 지동설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부터 지동설을 온갖 궤변을 써가며 옹호해서 중립적으로 다루지 못한 데다가, 교황을 모티브로 한 듯한 캐릭터가 멍청하고 헛소리만 내뱉는 역할로 나왔기 때문이다.[28]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과 수도자 제외[29] 정확히는 길거리 아무데나 버린건 아니고 그 근처에 패인 도랑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반드시 버리기 전에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규칙도 있었다. 그래봐야 길에 오물이 가득차는 건 그거나 그거.[30] 해당 링크 덧글 중에 똥오줌의 역사 같은 책을 들며 본문글이 틀렸고 무식이 전파된다는 식의 내용이 있는데 해당 서적은 사학자가 쓴 것이 아니며 전공사학 서적과 내용이 틀리다. 창조과학자 책을 보고 진화론을 부정하는 꼴. 중세 관련 책을 참조할 때 주의할 점은 한국에도 사이비 지식인이 있듯이 유럽에도 편향된 자료로 편향된 글을 쓰는 사이비가 있다. 중세가 워낙 편견이 많은 시대인 만큼 전문 사학자들의 견해를 먼저 살펴봐야 맞는다.[31] 사실 배경보다는 모티브가 많다. 판타지는 무협물처럼 실제 역사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모티브를 따온 가상세계가 클리셰고, 역사물이 아닌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의 중세가 배경인 경우는 중세기반 가상의 세계보다 꽤 적은 편. 그래도 많은 판타지물이나 기사 얘기가 중세를 모델로 삼은 사실은 유명해서 중세하면 판타지를 떠올리긴 충분하다. 이 경우 서로마가 붕괴되어 개막장 난세가 펼쳐진 중세 초기보다는, 체제가 안정되고 상업이 융성하던 중세 말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온다.[32] 심지어 당시를 살아가던 농노나 평민들도 자기네 시대가 암흑과 같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중세시대 때 농노들이 불행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현대인 중심적인 관점이자 편견 및 고정관념이다.[33] 중세와 르네상스를 칼같이 나누고, 안 좋은 것은 전부 중세로 떠넘긴 다음 르네상스를 숭상하는 태도는 18세기의 소위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맹목적 반기독교 정서에서 처음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식이다. 중세의 전유물이라고 흔히 간주되는 마녀사냥, 혹은 이단심문 또한 그 전에는 암암리에 산발적으로 벌어지다가 르네상스의 절정기인 15세기경부터 본격화된 측면이 있다.[34] 이로 인해 <신국론>이라는 명저가 저술되었고, 원죄에 대한 신학도 발전했다.[35] 일본 역사를 예로 들자면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가 똑같은 시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당연히 너무 단순한 구분이고 그래서 사학에서 중세 개념의 폐기까지 고려하는 것.[36] 사실 중세 연구는 2000년대 넘어서 큰 진보가 있었기에, 미야자키 이치사다(1901~1995)가 생존했을 당시와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37] 해당 학설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들어서 중세 유럽 연구는 계속 발전하고. 새로운 발견 역시 무수히 있기 때문.[38]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이 짙게 녹아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서유럽 외에 곧이 곧대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등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참고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서로 국내에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형이 바로 이 사람이다.[39] 총 4권의 시리즈로 되어있다.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만큼 백과사전 식으로 빽빽히 구성되어 있으며 가격이 비싼 게 아쉬운 점이다.[40] 기사/바이킹 진영 한정. 사무라이 진영은 근세에 더 가깝다[41] 중세 끝무렵인 르네상스 이탈리아이기에 이견의 여지는 있다.[42] 하지만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는 "정통 판타지" 라면 몰라도 "중세 판타지" 라는 장르명은 쓰지 않는다. 최근에는 현대 판타지게임 판타지가 대세다보니, 중세 유럽과 비슷한 배경이 나오는 판타지물도 거의 사라진 상황. 정통 판타지 장르 작품을 별 생각없이 중세 배경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중세 판타지라고 부르는 일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43]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분류법을 쓸 경우 중세에 편입되기는 하는데, 현재 고대-중세-근세-근대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44]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대립은커녕 양립했고, 지금은 통합되었다고 봐야한다. 현대의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경제체제적 구분에서 '공산주의는 현대'라는 부분을 뺀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설이 된 몇 가지 예 중 하나이다.[45] 현대 역사학에서 근대의 기점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발달이다.[46] 한국사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 참관기,전덕재[47] 당연히 어느 학설이 새로 나오고 대세가 된다고 해서 교과서가 막 바뀌고 예전과 답이 달라지면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교과서는 대체로 가장 늦게 바뀐다.[48] 이것의 시초는 일본의 정체성론에 대항하려는 백남운 등 사회경제학파의 담론이다. 김석형 등의 학자는 아예 외거 노비농노와 유사한 단계로 파악해 중세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는데, 현재에는 많이 기가 죽은 이론이기는 하나 일본의 게닌(下人, 사무라이 계층에 딸린 예속적 농민)에 대한 재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49] 애초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표현 자체가 마르크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 때문에 역사를 잘게 쪼개서 억지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되느냐 아니면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가도 되느냐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50] 여기서 사실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시대구분론으로서 '고대', '중세'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고대국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 단어가 시대구분으로서 고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대충 얼버무린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