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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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a Maria Mahler Gropius Werfel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이자 건축가 그로피우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등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과의 관계로도 유명한 인물.
선배(?)격인 루 살로메와 함께 근현대 예술계의 대표적인 뮤즈로 불리는 인물이다.
1879년 8월 31일 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알마 마그레타 마리아 쉰들러(Alma Margaretha Maria Schindler). 친아버지 에밀은 당대 유럽의 유명한 풍경화가였는데, 이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예술 분야를 친숙하게 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에밀은 알마가 13세일 때 세상을 떠났고, 3년 후 어머니는 에밀의 제자이자 비엔나 화단의 거물인 카를 몰과 재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알마는 미술과는 거리가 멀어져 음악에 몰두했고, 10대 나이에 이미 작곡을 할 정도의 재능을 발휘했다.
친아버지와 의붓 아버지의 활동 영역 덕분에 그녀의 주변에는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이 드나들었고, 그 가운데는 화가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음악가로서 자신의 스승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알마의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미모에도 주목했고, 알마는 이들과 연인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1] 다시 말해서 첫 남편인 말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깊이 사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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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23세 나이의 알마는 자신보다 20년 연상이었던 말러와 결혼한다.[2] 그러나 말러는 아내가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 내조에만 전념하기를 요구했고, 알마는 작곡 활동을 포함한 자신의 개인적 경력을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슬하에 두 딸을 얻었는데, 장녀인 마리아는 어린 시절 병으로 죽었고, 둘째 딸인 안나가 잘 성장해 조각가로 활동했다.
장녀 마리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남편 말러의 독선적인 성격에 지쳐가던 알마는 4살 연하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교제를 시작했고, 곧바로 연인이 되었다.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관계는 얼마 안되어 빈의 사교계에 알려졌으며,[3] 말러는 그 유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상담을 구하기에 이른다. 이런 불편한 관계는 1910년 말러가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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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사후, 알마는 의붓 아버지 카를의 지인이었던 화가 오슈가 코코슈카와 한때 사귀기도 했지만, 그가 1차대전에 종군하면서 헤어진다.[4] 이를 계기로 그로피우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1915년 결혼하여 딸 마농을 얻는다. 그러나 그로피우스가 전쟁 동안 전선, 집을 오가는 틈을 타서, 알마는 10살 이상 어린 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외도를 한다. 이에 지친 그로피우스는 알마와 이혼했고, 바우하우스를 설립하는 등 본업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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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50세의 나이로 베르펠과 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결혼한 알마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미국으로 이주했다. 남편 베르펠은 미국에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을 거두지만, 1945년 타계했다. 어느덧 60대가 되었지만 알마는 여전히 예술계의 명사였고, 이제 그녀는 대작곡가로 재조명된 첫 남편 말러의 미망인으로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만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교류하며 말러의 작품들이 대중화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알마는 1965년, 향년 85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빈으로 옮겨져 말러의 묘지에서 가까이 위치한, 그로피우스와 함께 얻었던 딸 마농(18세의 나이로 죽음)과 함께 묻혔다.
Alma Maria Mahler Gropius Werfel
1. 개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이자 건축가 그로피우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등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과의 관계로도 유명한 인물.
선배(?)격인 루 살로메와 함께 근현대 예술계의 대표적인 뮤즈로 불리는 인물이다.
2. 생애
1879년 8월 31일 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알마 마그레타 마리아 쉰들러(Alma Margaretha Maria Schindler). 친아버지 에밀은 당대 유럽의 유명한 풍경화가였는데, 이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예술 분야를 친숙하게 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에밀은 알마가 13세일 때 세상을 떠났고, 3년 후 어머니는 에밀의 제자이자 비엔나 화단의 거물인 카를 몰과 재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알마는 미술과는 거리가 멀어져 음악에 몰두했고, 10대 나이에 이미 작곡을 할 정도의 재능을 발휘했다.
친아버지와 의붓 아버지의 활동 영역 덕분에 그녀의 주변에는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이 드나들었고, 그 가운데는 화가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음악가로서 자신의 스승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알마의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미모에도 주목했고, 알마는 이들과 연인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1] 다시 말해서 첫 남편인 말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깊이 사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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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23세 나이의 알마는 자신보다 20년 연상이었던 말러와 결혼한다.[2] 그러나 말러는 아내가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 내조에만 전념하기를 요구했고, 알마는 작곡 활동을 포함한 자신의 개인적 경력을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슬하에 두 딸을 얻었는데, 장녀인 마리아는 어린 시절 병으로 죽었고, 둘째 딸인 안나가 잘 성장해 조각가로 활동했다.
장녀 마리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남편 말러의 독선적인 성격에 지쳐가던 알마는 4살 연하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교제를 시작했고, 곧바로 연인이 되었다.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관계는 얼마 안되어 빈의 사교계에 알려졌으며,[3] 말러는 그 유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상담을 구하기에 이른다. 이런 불편한 관계는 1910년 말러가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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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사후, 알마는 의붓 아버지 카를의 지인이었던 화가 오슈가 코코슈카와 한때 사귀기도 했지만, 그가 1차대전에 종군하면서 헤어진다.[4] 이를 계기로 그로피우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1915년 결혼하여 딸 마농을 얻는다. 그러나 그로피우스가 전쟁 동안 전선, 집을 오가는 틈을 타서, 알마는 10살 이상 어린 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외도를 한다. 이에 지친 그로피우스는 알마와 이혼했고, 바우하우스를 설립하는 등 본업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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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50세의 나이로 베르펠과 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결혼한 알마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미국으로 이주했다. 남편 베르펠은 미국에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을 거두지만, 1945년 타계했다. 어느덧 60대가 되었지만 알마는 여전히 예술계의 명사였고, 이제 그녀는 대작곡가로 재조명된 첫 남편 말러의 미망인으로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만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교류하며 말러의 작품들이 대중화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알마는 1965년, 향년 85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빈으로 옮겨져 말러의 묘지에서 가까이 위치한, 그로피우스와 함께 얻었던 딸 마농(18세의 나이로 죽음)과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