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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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수도. 독일어식 명칭인 빈 대신 흔히 영어식 명칭인 비엔나(Vienna, /viːˈɛnə/ 비에너)로도 불린다.
면적은 414.9 제곱킬로미터로 605 제곱킬로미터인 서울보다 작으며, 공원과 같은 녹지가 50%나 된다. 2020년 1월 기준 인구는 191만명. 서울 주위의 수도권처럼 주변권역까지 다 합하면 인구 260만명 정도이며, 오스트리아의 종주도시이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타 연방주에서 분리되어 독자적 연방주를 형성했을 정도로 인구가 많으며, EU에서 5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과거부터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도시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하에 오스트리아가 주요 국가였을 때는 많은 인구를 품은 세계적 대도시로 성장하여 번영했으며, 전성기 시절엔 인구 200만을 넘나들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제국해체[5] 와 전간기 대공황 동안 인구가 급감했던 것이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지금도 전성기 인구보단 적다. 시에서는 2028년이 되면 인구가 다시 200만을 넘어설것으로 전망하고 있다.[6]
빈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7] 온난한 기후와 뛰어난 치안, 울창한 가로수가 잘 가꾸어진 깨끗한 거리 환경을 자랑하며, 거리 곳곳에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답게 각종 문화 시설이 즐비하여 시민들의 문화적 수준을 높여주고 있다. 도시 구획과 도로 정비도 굉장히 깔끔하여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으며, 대중교통 특히 트램의 노선망이 우수하여 굳이 자차가 없어도 도시의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실제 2019년 빈 도시통계에 따르면 이동수단 이용률은 Walking (도보) 30%. Public transport (대중교통) 38%, Cycling 7% 에 비해 Driving은 25%에 그쳤으며, 주민 100명당 자동차 소유대수는 37대로, Klagenfurt주 (62대), Burgenland주 (68대)에 비해 현저히 낮다.
도시 소득 수준도 높다. 2018년 기준 오스트리아 총 GDP 3860억 유로 중 비엔나의 GDP는 960억 유로, 비엔나의 1인당 GDP는 51,000유로에 달했다. 주력산업인 Finance and consulting과 더불어 도나우 강변을 중심으로 펼쳐진 오스트리아 유수의 공업지대에서 활발한 제조업 활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중동부유럽 최대에너지기업이자 오스트리아 최대 상장기업인 OMV[8][9] , 세계 최대 벽돌 제조 업체인 Wienerberger[10] , A1 Telekom Austria[11] 를 비롯한 대기업과 대다수 은행이 빈에 본사 또는 사무소를 두고 있다. 또한 빈은 오스트리아의 ICT 센터이며, 6,200 개 기업, 약 56,660 명의 직원, 총 부가가치 66억 유로, 2017년 매출액 약 206억 유로를 기록한 바 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런던와 같은 다른 대도시와 비교하여 높지 않아[13][14] 여러 기관의 통계에서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후보군에서 수위권을 다툰다고. 매년 TOP 1,2위를 놓치지 않을 정도.[15]
유엔의 유럽 거점 도시로 지정되어 있어 유엔기구 도시(UNO City)[16] 가 있으며, IAEA(국제 원자력 기구)의 본부도 빈에 있다. 1955년 모스크바 각서로 영세중립국이 된 오스트리아가 더이상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유치를 한 결과다. 국제 기구가 많은 만큼 스위스 제네바와 함께 스파이가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에서 외국인 정보 기관원의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다.[17] 빈 체제, 비엔나 협약으로도 유명하며, 2015년 7월 독일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5개상임이사국 (미영프러중)이 경제제재를 받고 있던 이란과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18] 에 최종 합의한 곳이기도 하다.
2. 역사
도시 명칭은 고대 로마의 전선 기지인 빈도보나(Vindobona)[19] 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지며, 12세기 들어 바벤베르크가(家)의 소유가 되었다. 도나우강에 의한 교역발달에 따라 점차 번영하였고 1221년 상업독점권의 인정으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278년 보헤미아의 오토 카르 2세 (Ottokar II)[20] 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1세[21] 의 승리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점이 되었지만,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수도를 서쪽의 인스브루크로 옮기면서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기도 했다.
1529년과 168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는데[22] 모두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1683년에 이미 인구가 110,000명에 달해 신성 로마 제국 핵심 도시였고 1803년 인구는 230,000명으로 당시 주변 주요 도시들이 인구 수만명에 불과할 때 독보적 위상을 가졌다. 1805년과 180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두 차례나 굴복하였으나 곧 나폴레옹은 몰락하였고, 1814~1815년에 빈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뒤 메테르니히 체제[23] 하에서 유럽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1848년까지 30여 년 동안 빈 체제가 유지되었다. 1848년 3월과 5월에는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소시민·학생·노동자 등의 폭동이 일어났으나 같은해 10월에 진압되었다.[24]
그 후 자유주의시대(1860∼1895)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 때에는 세계적인 문화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해체하고 현재의 링슈트라세[25] 를 조성하는 프로젝트가 1857년경부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건축가 Theophil Hansen[26] 등이 참여하였다. 이 도로를 따라 국회 의사당, 증권 거래소, 콘서트 홀 (Musikverein[27] ), 국립 오페라 하우스 (Staatsoper[28] ),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29] , 각종 관청 등이 조성되었다. 발전을 거듭한 빈은 1913년경엔 세계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인물들이 대거 거주했을 정도로[30][31] 도시의 명성과 영향력을 굳히게 된다.[32]
이후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면 오스트리아는 부상병사의 귀환, 제국 해체와 분할에 따른 급격한 인구 이동 등으로 혼란스러워지게 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없어진 뒤인 1920년대에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거점 도시가 되어 '붉은 빈(Rotes Wien)'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승리한 건 우파인 기독교사회당[33] 이었는데, 오직 빈에서만 좌파인 사회주의 정당이 이긴 것이다.
빈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바뀐 법에 따라 얻게 된 조세자치권을 바탕으로 빈의 주택과 상가의 임대수입에 세금을 크게 부과하였고 이런 식으로 얻은 세수를 바탕으로 저렴한 임대료를 받는 공공임대주택을 꾸준히 만들었다. 임대수입에 세금을 급격히 올리는 등 지주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재산권 행사를 막는 시 정부의 압박에 지쳐 땅을 팔고 빈을 떠나버리는 지경이 된다. 시장성이 떨어진 땅을 빈 시정부는 싸게 사들여 이 부지에 또 영구공공임대주택을 지었다. 나치 지배를 벗어난 이후에도 이런 정책은 다시 계속되었다. 서민주거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들을 열심히 지은 도시들 중 많은 도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재정문제로 자금확보를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공공주택을 일반분양해버려 결국 임대주택의 수량이 충분하지 못한 예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빈은 기존의 공공임대주택을 오래되었다고 쉽게 부수거나 일반인에게 팔아버리는 대신 고쳐서 계속 임대주택으로 공급한다. 기존 공공임대주택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영구공공임대주택을 계속 지어오고 있기 때문에 빈은 세계적으로 영구공공임대주택의 비중이 매우 높은 도시이다. 근 100년을 이어온 이런 역사적 배경과 노력의 결과 오늘날 빈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낮은 주택가격상승률과 소득 대비 저렴한 임대료를 자랑한다.##
1938~1945년에는 나치 독일에 합병당해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가 일개 지방 도시로 전락하는 일을 겪기도 했고, 대전 말기에 소련군과 독일군간 빈 공세 등의 전투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
1945~1955년에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승전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군정의 공동 통치를 받았고, 1955년에 영세 중립국을 선언하면서 통치에서 해방되어 지금까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국제적 외교거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덕분에 현대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헝가리인들이 대거 빈을 찾았고, 1961년에는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가 빈의 임페리얼 호텔에서 미소 정상 회담을 가졌다. 1968년에 프라하의 봄이 강압적으로 진압된 이후에는 수많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빈으로 모여들었으며,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빈에서 만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에 서명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UN의 청사를 갖게 되었고, 국제회의와 분쟁조정의 도시로 마침내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3. 인구
2020년 1월 기준 '''비엔나 인구의 69.2%가 오스트리아 자국 국적'''이며, EU 국적은 13.4%, 그외 국적은 17.4%로 조사되었다.
상위 5개 외국 국적은 세르비아 4.1%, 독일 2.6%,터키 2.4%, 폴란드 2.3%, 루마니아 1.9% 순이었다.
시민의 평균 나이는 41세였으며, 0-14세 인구는 278,397명, 15-64세 인구는 1,317,304명, 65세 이상은 315,490명이었다.[34]
4. 교통
빈과 세계를 연결하는 주요 관문으로는 '''빈 국제공항''' ('''Flughafen Wien'''- 공식홈 공항-도심간 교통정보), '''빈 국제버스터미널''' ('''Vienna International Busterminal'''- 공식홈), '''빈 중앙역''' ('''Hauptbahnhof Wien'''), '''빈 서역''' ('''Wien Westbahnhof''') 등이 있다. 도시 철도는 빈 지하철 (U-Bahn : 지하철을 뜻하는 독일어 '''U'''ntergrundbahn의 줄임말), 광역철도 (S-Bahn- 공식홈), 노면전차 (Straßenbahn, 슈트라센반) 가 있으며, 그중 U-Bahn은 '''U1''','''U2''','''U3''','''U4''','''U6'''의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관광지가 밀집해있는 '''인네레 슈타트''' ('''Innere Stadt'''-구시가=제1구)를 기준으로 한 U-Bahn 주요역은, '''U1'''-'''U2'''-'''U4''' 노선이 지나는 남쪽 '''칼츠플라츠''' ('''Karlsplatz''')'''역''', '''U2'''-'''U3''' 노선이 지나는 서쪽 '''폭스씨어터''' ('''Volkstheater''')'''역''', '''U1'''-'''U3'''노선이 지나는 중앙 '''슈테판플라츠''' ('''Stephansplatz''')'''역''' , '''U1'''-'''U4''' 노선이 지나는 북쪽 '''슈베덴플라츠''' ('''Schwedenplatz''')'''역''' 등이며, '''위 지점들'''을 숙소선정과 도시내 활동계획의 기준으로 활용하면 편리하다. Vienna-metro-map 교통권 정보 (wiener linien 공식홈)
오스트리아 연방 철도(ÖBB) 및 체코 철도(ČD)에서 운행하는 고속철도인 레일젯 (ÖBB Railjet- 공식홈)으로는 오스트리아 주요 도시를 비롯해 부다페스트, 프라하, 뮌헨 등과 연결된다. 또한 동유럽, 서유럽 주요 도시로 가는 열차가 많아 유레일 패스로 여행하는 이들이 많이 들르는 도시이다. 주변국 수도들인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와 모두 자동차로 약 2~3시간 거리에 있어 동유럽 여행의 시작지로 삼기도 한다. Twin City Liner라는 크루즈선을 통해서도 브라티슬라바와 연결된다.[35]
도로 운전 시 유의사항 실시간 도로교통상황 (비엔나시 공식홈)
5. 관광
오스트리아 빈 여행 (네이버 지식백과)[36][37]
빈에서 만난 운명적 사랑, 영화 비포 선라이즈 [38]
오스트리아 관광청 한국어 공식사이트
오래 전 신성 로마 제국 시대부터의 중요한 역사적 유물과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호프부르크 궁전[39] , 쇤브룬 궁전[40][41] , 슈테판(성 스테파노) 대성당[42][43][44] , 성 베드로 성당[45] , 성 카를 성당[46] ,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건축된 국회 의사당, 시청사(라트하우스)[47] , 빈 대학교, 국립 오페라 극장[48]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빈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49] , 궁정극장 (부르크극장[50] ), 사부아 공자 외젠의 거처였던 벨베데레 궁전[51] , 합스부르크 황족의 묘소 카푸친 성당[52][53] ,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가 황제의 안위를 신께 감사하기 위하여 지은 보티프 교회[54] 등이 있다. 시내에 있는 빈 중앙 묘지 (Zentralfriedhof)는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이며, 빈에서 활동한 유명 음악가들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55]
런던이나 파리 못지않게 유적과 문화 유산이 넘쳐나기 때문에 도시의 중심부인 구시가지(Innere Stadt[56] )는 전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탈리아처럼 절대로 외관을 바꾸는 건축 허가는 내지 않아서 리모델링만 해서 사용중이다. 20세기 초반 아르누보와 분리파 미술의 중심지였던 덕분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에곤 실레, 아돌프 로스 등 이 사조와 운동에 참가했던 미술가와 건축가들의 제체시온(secession), 로스 하우스 같은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루브르처럼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들도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이 모여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57][58] 과 귀중한 화석, 광물 컬렉션과 박제들이 가득한 빈 자연사 박물관[59][60] , 합스부르크 왕궁에 들어선 알베르티나 미술관[61] , 황실 가구 박물관 (Imperiar Furniture Museum), 약 60개의 문화 기관이 밀집해 있는 박물관 지구 (MuseumsQuartier) [62] 의 레오폴트 미술관[63] (구스타프 클림트[64] 의 명작 'Death and Life'[65] 와 에곤 실레의 '자화상'[66] 'House Wall on the River'[67] 등의 다양한 작품을 소장중), 훈데르트 바서[68] 의 건축물을 개조하여 만든 훈데르트 바서 박물관, 군사역사 박물관 (Heeresgeschichtliches Museum) 등 볼거리가 많다. 다만 빈에서 이러한 박물관과 전시관을 관람할 때는, 박물관, 전시관 내에서 플래시를 포함한 사진 촬영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궁전의 경우 벨베데레 궁전을 제외한 호프부르크, 쇤브룬 궁전의 내부는 대부분 촬영 금지구역이다.
<비엔나 워킹투어>라는 책을 보면 빈의 오래된 거리, 건축물, 전설들에 대해 더욱 상세히 알 수 있다. 어지간한 여행 전문 서적을 능가하는 수준.
6. 음악∙문화∙학문의 도시
언제쯤 당신은 깨닫게 될까요, 비엔나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 Ariana Grande 'Vienna' 中 (Original Billy Joel [69][70] )
독일어권 유명 작곡가들이 생애의 상당 기간을 빈에서 보내며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기 때문에, 음악도나 음악 애호가들에게 중요한 지역이다.[71]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약 35년동안 빈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베토벤의 제2의 고향이라 알려져 있다.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72] ,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도 빈에 머물며 짧은 생애를 대표하는 수많은 대작들을 남겼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왈츠의 왕으로 칭송받는데 슈트라우스 가족들도 빈을 본거지로 활동했고, 이들이 남긴 수백여 곡의 춤곡은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전통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음악이자 중요한 관광 상품으로 많은 곳에서 연주되고 있다.[73]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교류했던[74] 독일 함부르크 출신 요하네스 브람스는, 1862년 가을 비엔나를 처음 방문하였다. 1863년에 Wiener Singakademie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빈 생활을 시작했으며, 빈 교외의 Lichtental[75] 과 Karlsgasse 4에 위치한 아파트[76] 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비엔나에서 음악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으며, 베토벤'''∙'''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와 함께 악성(樂聖)들의 안식처인 빈 중앙 묘지 (Vienna Central Cemetery) 32A구역에 안장되었다.[77]
안톤 브루크너는 린츠 근교의 시골에서 태어나서 중년기에 빈으로 이주한 뒤 교향곡 작곡가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막내딸 발레리 공주의 도움으로 벨베데레 궁전에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을 역임한 구스타프 말러, 그와 빈 음악원 동급생이었던 휴고 볼프[78] , 신 빈 악파로 불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도 빈에서 파격적인 음악들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프란츠 레하르는 헝가리계 작곡가로,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The Merry Widow)을 1905년 빈의 극장에서 초연하여, 몇 주 되지 않아 가장 사랑 받는 오페라로 등극시켰다.[79][80]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또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음악사의 한 획을 그었다.
음악도시라는 명성답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들이 매우 자주 와서 공연하며[81][82]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83] 를 비롯해 빈 교향악단, 빈 방송 교향악단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현악단들의 연주회나 양대 오페라단인 국립 오페라단(Staatsoper)과 국민 오페라단(Volksoper)의 오페라 공연, 세계적인 합창단인 빈 소년 합창단 공연 등을 현지에서 즐길 수 있다. 특히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저렴한 비용의 입석으로 얼마든지 오페라를 감상하게 해주고 있다. 입석으로 보통 3유로에서 비싸봤자 6유로 이내로 볼 수 있다. 다만 늦게 가면 별로인 자리를 배정받아 오페라 소리밖에 듣지 못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차지하면 오히려 좌석보다 더 괜찮은 시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84] 좌석값은 상당히 비싼 편이다.
위대한 음악가들뿐 아니라, 빈 대학교 철학교수 Moritz Schlick를 중심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활동한 '''논리실증주의''' 경향의 철학자·과학자 그룹 '비엔나 학파 (Wiener Kreis)'''',''' 그들과 교류한 빈 출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칼 포퍼 등이 활약한 고장이기도 하며, 이성 만능주의와 물질문명이 초래한 인간소외를 반성하고 미래의 새로운 자유와 질서를 모색한 예술 및 철학 사상인 빈 모더니즘 (Wiener Moderne)의 탄생지[85] 이기도 하다. 불교논리학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빈 대학교 교수 프라우발너 (Erich Frauwallner)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도철학자로 활동하면서 불교논리학의 연구에 많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그 전통을 이어받은 슈타인켈너 (Steinkellner)는 다르마키르티[86][87] 연구를 진척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88][89]
비옥한 지적토양 덕분에, 독일어 사용권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연구의 산실 빈 대학교[90] 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에르빈 슈뢰딩거,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프리데 옐리네크[91] 를 비롯한 2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92] , 심리학의 대가인 정신분석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빈 대학교 의학부[93] 졸업생이다. 그는 1859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한 뒤 나치의 탄압으로 1938년 6월에 영국 런던으로 망명할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빈에서 보냈으며[94] , 빈 대학교 의학부 동문이자 대문호(大文豪)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교류하며 많은 지적 영감을 주고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95][96]
6.1. 요리'''∙'''음료
인근 동유럽 국가들이나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소박하면서도 이국적인 향취를 내는 메뉴가 많은 것이 빈 요리문화의 특색이다.[97] 돈까스와 매우 유사한 고기 튀김인 비너 슈니첼(Wiener Schnitzel)[98] 이나 비엔나 소시지라는 영어식 명칭으로 흔히 불리는 비너 뷰어스트헨 (Wiener Würstchen)[99] , 쇠고기를 각종 채소와 함께 육수에 삶아내는 타펠스피츠 (Tafelspitz), 헝가리에서 전해진 매콤한 전골식 요리 굴라쉬 (Gulasch) 등이 유명하다. 한국인 입맛에도 대체로 잘 맞는 숯불 돼지갈비구이인 립(rib) 전문 레스토랑들도 상당히 유명하며, 립 요리에 맥주와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다.[100]
나슈마르크트 (Naschmarkt) 재래시장[101] 등에서는 한국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중동음식, 인도식 커리 등의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으며, 시내 곳곳에 훌륭한 고급한식당들도 자리하고 있어서 외국 음식에 지친 한국 여행자들의 오아시스가 되기도 한다.
그 외에 유명한 먹을거리는 빈에서 최초로 개발된 페이스트리인 아펠슈트루델, 빈의 카페 자허[102] 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던 오리지널 초콜릿 케이크인 자허토르테, 대포알처럼 둥근 모양의 초콜릿을 모차르트 초상화가 그려진 포장지로 포장한 모차르트 쿠겔 등이 있다. 특히 자허토르테는 꼭 먹어봐야 할 명물 중 하나로 꼽힌다.[103] 여기서 판매하는 초코라떼도 정말로 초콜릿을 녹여 타주는 경우가 많아서 차원이 다른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초콜릿을 좋아한다면 Prater 놀이공원 [104][105] 내 마담투소 박물관[106] 근처에 빈 초콜릿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니 방문해보는것도 좋다.[107][108]
빈은 유럽에 커피를 전파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1683년 빈을 침공했던 오스만투르크 군대가 철수하면서 버린 물품 중에는 커피원두 자루가 있었고, 콜쉬츠키(G.F. Kolschitzky)라는 통역사가 왕의 허락을 받아 빈 최초의 카페를 열게 되었다. 이후 '아인슈패너 커피(일명 비엔나 커피)’를 비롯, 30여 종의 커피가 개발됐으며, 1910년에는 1,200곳의 카페가 영업을 할 정도로 카페가 많아졌다.[109] 현재도 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카페(커피숍)가 굉장히 많고, 빈 시민들은 카페를 거의 집안 거실처럼 친숙하게 드나들곤 한다. 덕분에 2011년에는 빈 카페하우스 문화(Wiener Kaffeehauskultur)가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110] 커피 뿐 아니라 '''비엔나산 와인''' 또한 다뉴브강과 수많은 나무로 우거진 비엔나 숲이 최고의 포도와 와인이 생산되기에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어 뛰어난 품질과 맛으로 정평이 나있다.[111][112]
비엔나 요리 추가정보 (독일어 위키백과)
6.2. 스포츠
축구의 경우, 빈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으로 FK 아우스트리아 빈과 SK 라피트 빈이 있다. 퍼스트 비엔나 FC 등 다른 팀들도 있지만 보통 이 둘이 유럽에서 알려진 오스트리아 구단이며 리그 우승 횟수도 1~2위를 다투고 있다. 2008년 6월 29일 빈의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에서는 UEFA 유로 2008 독일 對 스페인의 결승전이 열린 역사가 있다.
또한 비엔나 산에는 사이클리스트가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산악 자전거 트레일이 있어, 산악 자전거 라이딩이 비엔나의 인기있는 대중스포츠로 자리잡혀 있으며[113] , 다뉴브 섬 경로를 비롯한 아름다운 러닝코스가 많아 러닝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이들을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마라톤인 비엔나 시티 마라톤[114] 이 1984 년부터 매년 봄 비엔나에서 개최되고 있다.
7. 공공임대주택의 천국
빈은 항상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타 유럽 도시보다 집값 상승률이 높지 않고 주거비용도 비교적 저렴하여, 심각해져가는 주거 문제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먼저 빈의 집값은 2000년을 100으로 잡았을 때 2019년에 250 정도인데 이는 20년 동안 2.5배 정도 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암스테르담, 파리, 런던 등의 유럽의 다른 도시들이 같은 기간 400, 450까지 오른 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 상승률이다. 또한, 주거비용의 경우 런던에서는 한 달 벌어 세금 제하고 손에 쥔 돈 중에 50% 이상을 주거비로 내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유럽 대다수 도시가 40% 내외이지만 빈은 15~18%에 그치고 있다. 즉 같은 월급을 받으면 빈에서는 훨씬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빈에 사회주택(social housing)이라고 불리는 공공임대주택의 비율이 전체주택의 26%가량이나 되는 덕분이다. (한국은 2018년 기준 7.2%)[115]
이처럼 공공 임대주택이 많은데다 원가에만 얽매이기 보다는 수요자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 임대료를 정하다 보니, 민간임대주택 주인들도 다수의 공공임대주택과 경쟁하기 위해서 세를 비싸게 매기지 못하는 편이다. 덕분에 민간임대주택도 임대료 통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임대료 규제가 이루어지는 민간임대주택까지 합하면 임대주택은 전체주택의 60% 정도에 이른다. 즉 시민들의 60%가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으며, 내 집에 사는 사람은 40%도 안 된다는 것.
즉 공공임대주택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일단 물량이 많아야 한다. 원하는 사람이 쉽게 언제든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어야 민간임대주택도 임대료 통제가 쉽게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빈 시 정부는 공공주택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많이 짓고 있다. 2016년은 난민이라든지, 외부의 유입이 많아서 3만 명 정도 시 인구가 증가했는데[116] 이 당시에 1만 가구를 신규로 공급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또 만3천 가구 공급하는 식으로, 180만 명 정도 되는 도시가 연평균 만 가구 이상의 주택들을 계속 공급하고 있다. 즉 수요에 맞춰서, 분양하는 주택도 있지만, 임대주택도 연간 6~7천 채 정도를 꾸준히 새로 짓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직접 건설했지만, 지금은 보조금 지급 형태로 민간한테 임대주택을 짓도록 하는 형태도 많다. 또한 외곽보다는 수요가 많은 도심에 주로 건설하고 있으며 평균면적은 약 70㎡ 정도이다. 한국의 59㎡와 비교해도 꽤 넓은 편이다.
여타 도시들과 빈과의 결정적 차이는 임대주택의 재고를 유지하는 것이다. 즉 한 번 지어진 공공임대주택을 팔지 않는다. 통일 이후의 베를린을 비롯한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돈이 필요하면 갖고 있던 공공임대주택을 분양으로 넘겼다. 돈이 많이 들어와야 도로를 짓거나 시청을 새로 짓거나 혹은 복지 수당을 주거나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공공임대주택을 차곡차곡 쌓다가 때 되면 처분하는 것을 반복했고 결국 주택난이 최근 들어 심해졌다. 반면 빈의 경우는 80년 동안 계속 임대주택 재고를 축적해왔다. 덕분에 현재에는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빈은 기존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재생, 관리에도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2017년의 경우 신규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8천억 원을 썼는데 기존 임대주택을 최첨단 고에너지효율 주택인 패시브 주택(passive house)으로 만드는데 3천억 원을 투입했다. 즉 꾸준하게 임대주택을 새로 짓고 오래된 임대주택은 계속 최신형으로 새롭게 개보수하고 있다.
유럽은 행정절차가 느리다고들 하지만 빈 시 정부는 주택을 빨리 공급하기 위해서 각종 관련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는데도 열심이다. 시 정부의 우선순위 업무 중 하나가 안정된 주거환경 공급이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실용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보통 유럽의 멋있는 도시들을 가보면 아파트는 별로 없고 단독주택이나 2~3층 정도의 저층 주택이 많지만, 빈은 단독주택이 전체의 9% 정도밖에 안 되고 대부분 공동주택이다. 문화재 보호나 스카이라인 보호라든지 여러 고려 대상들이 생길 수 있지만, 빈의 경우 정말 문화적 가치가 있는 대저택이라든지, 소유가 잘 유지되었던 집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를 공공임대주택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도시 계획상으로 봐도 단독주택 구역을 따로 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고밀도 지역이다. 고밀도라고 해서 초고층 빌딩은 아니지만 계속 6층에서 8층 정도의 빌딩들이 죽 늘어서 있기 때문에 전체 용적률로 보면 그렇게 낮은 지역이 아니다. 역사성이 있을 수 있는 오래된 집을 부순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나, 공공임대주택을 상당히 아름답게 잘 지었기 때문에 모던함과 예술성을 다 갖춘 아름다운 임대주택이 아주 많아진 도시이기도 하다.
보통 오래된 도시는 토지공급이 없어서 공공임대주택을 못 짓는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빈은 과감하다. 예를 들어 예전에 쓰던 공업지역이나 장사가 잘 안되는 지역이 생기면 시 정부에 넘기도록 하여 주거지역으로 바꾼 뒤 임대주택을 짓고 있다. 과거 공항이었던 곳도 필요 없는 공항이면 바로 주택지역으로 바꾸고 있다. [117]
한국도 행복주택, 청년 주택을 짓는다고 하면 주위에서 반대가 거세다. 근처 월세 받는 사람들은 방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인근 주민들은 집값 내려간다고 반대한다. 이런 상황의 원인은 임대주택이 질이 낮다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면이 있다. 아무래도 저렴하게 짓다 보니 임대주택이면 멋이 없고 전체적인 동네 분위기를 낮춘다는 생각이 있는데 빈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공공주택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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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데르트바서 하우스'''
20세기 초반부터 임대주택사업에 세계적 건축가들이 다수 참여했으며, 고품질 고밀도를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주택을 건설해왔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참여시키는 비용은 비쌀 수밖에 없는데 이를 빈 시는 공모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단순하게 디자인만 보는 게 아니고 경제성, 건축미, 생태적 고려, 소셜믹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식이면 여전히 비싸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여기에 다음과 같은 역설이 있다.
즉 공정하게 경쟁을 하다 보니 제곱미터당 건설비가 1,100유로(euro)(한화 약 150만 원)으로 의외로 낮다. 평당 5백만 원이 안 되는 비용이다. 한국도 정부에서 표준건축비를 매년 물가인상률을 고려해서 공시하는데 표준건축비가 2018년 기준 제곱미터 당 185만 원으로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더 비싸다. 그리고 이렇게 싼 추가적 이유는, 오스트리아 인건비가 비싸므로 사람을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건축가들이 특별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집을 지을 때 전부 현장에서 만든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대부분 다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온다. 그래서 더 싸고 품질도 균질하게 만들 수 있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가지고 온 자재들을 조립만 한다. 조립하여 바로바로 얹는 식의 공법이므로 시간도 단축되고 인건비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빈은 근 80년 동안 이런 표준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고 좋은 주택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관리비도 매우 낮아져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관리비 부담도 줄었다. [118]
결국 빈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격이다. 충분히 주거요구 충족을 시키면서 디자인이 나쁘지도 않아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를 이루고 있다. 런던이나 파리를 가보면 첫 느낌이 생각보다 너무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반면, 빈은 비교적 깨끗하다. 빈이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후술할 역사적 배경도 있다. [119]
7.1. 빈 공공임대주택의 탄생과 역사
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수도이다 보니 원래 인구가 많았고, 19세기 말에는 20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결국 과거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기여한 빈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을 19세기에 철거해야만 했다. 도시가 더 커져야 하는데 성벽이 차량 흐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거한 자리에 링 슈트라세라고 하는 순환형 도로망을 설치했다. 한국으로 치면 지금 서울의 내부순환로쯤 된다. 이후 주변 지역에서 난민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주거 환경이 크게 악화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기록을 보면 임대계약이 한 달 단위로 매우 짧았고, 95%의 주택이 상수도와 화장실이 없었다. 왕궁과 달리 일반 시민들의 삶은 상당히 열악했던 것이다. 작은 주택 한 채에 10명씩 거주했고 보건이나 위생이 열악해, 유럽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최악의 주거환경이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변화를 계기로 크게 바뀌게 된다. 1914년에 사회주의세력인 사회민주당이 투표를 통해서 빈 시(市) 정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시 정부는 다음 3가지 목표를 세운다. (1) 공공주택을 시(市)가 짓겠다. (2) 이를 위한 세금을 걷겠다. (3) 이를 위한 토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하겠다.
이런 목표 설정이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당시 1차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남편이 전쟁에 나가 있는데 집주인이 빈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마음대로 내쫓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군인들은 전선에서 마음 편하게 싸울 수가 없으니, 주택 퇴거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하고 임대료 인상 금지 조처를 한 것이다. 즉 시대적 상황 때문에 시 정부의 주택 정책이 부담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게 된다. 그리고 곧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찾아온다. 그러다 보니 공공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제국이 붕괴한 뒤 많은 피난민이 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집이 없고 먹을 것도 없어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려있는 참상이 빈에서 벌어진다. 다들 먹고살기 급급하다 보니 이전의 제국 시대에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무단점거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고 잘 갖춰져 있던 수많은 잔디밭이 텃밭으로 변했다. 이러한 무단 경작은 식량난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한편 당시 빈 시 정부는 사회주의 정부이다 보니 노동시간을 8시간 이내로 제한을 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그전에는 공장에서 하루에 12시간, 15시간 일하던 사람들이 내 집 주변 어딘가의 텃밭을 일굴 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빈 서민들이 점차 이 텃밭 주위에 오두막이나 판잣집을 짓게 되었는데 이것이 확대되다 보니 점차 대규모 건축 활동처럼 번져갔다. 슬럼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 빈 시 정부가 효과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오두막 판잣집을 단속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체계적인 조언을 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실업자 신세였던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이나 건축가들이 이 과정에 투입되었다. 또한 시 정부는 필요한 건축 자재들도 일부 공급을 해주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정신이 넘쳐흘렀기 때문에, 1918~1934년 동안의 빈은 '레드 비엔나(Red Vienna)'[120] 와 같은 표현으로 불렸으며, ‘네가 혼자 짓는 집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같이 사는 주거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도 수용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블록 단위로 집을 짓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간다. 이리하여 시민들이 직접 삽을 들고 만들기 시작했던 풀뿌리 건축 사업으로 10만 호를 건설하게 된다. 내 집 마련의 이기심만 나타났다면 판자촌, 슬럼화가 진행되었을 상황을 시 정부가 효과적으로 개입을 해 가면서 방향을 잘 잡았고, 사람들의 내 집을 갖겠다는 욕구를 나의 이기주의가 아닌 공동체주의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 집 하나씩 짓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자, 내 집을 짓고 나면 같이 운동할 운동 공간도 필요하고 영화를 볼 극장도 있어야 하고 학교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공시설들은 나라가 공급해야 할 것들이지만 전쟁에서 패한 상황이라 예산이 없었으므로 이런 시설들 역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자는 혁명정신이 나왔다. 이때의 협동주택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집만 짓는 것이 아니고 단지(團地, complex) 개념의 주거였다. 그래서 회의장, 운동공간, 극장, 연주회장, 성인교육센터, 이런 것들을 포함한 주거단지를 만들자는 쪽으로 설득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와 비슷한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121]
[image]'''칼 마르크스 호프'''[122]
실제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이런 단지에 이런 집을 짓겠다고 하면 건축가들이 와서 설계도 해주고 빈 시 정부에서 여러 가지 행정지원도 해주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내 집을 먼저 지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은 2,000시간 이상의 노력 봉사를 해야 했는데 커뮤니티 시설부터 먼저 지어야 했다. 그런 후에 내 집을 지을 수 있는 순번이 주어졌다. 이것은 자재나 기타 필요 물품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어 가능했다. 원래 오스트리아는 문화 중심지이다 보니 세계적으로 뛰어난 건축가들이 많았고 이들을 거의 무보수로 약간의 돈을 주고 활용하였으니 이 역시 사회주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벌써 빌트인 형태의 부엌이 포함된 모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지어진 집에 빌트인 부엌이 있고 실내 화장실이 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이다.
그러면 빈에는 공공임대주택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확보되고 지어지고 사람들은 다른 가치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며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을까? 사실 임대주택 건설 문제의 핵심은 돈이다. 아무리 자발적으로 짓는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도와줘야 하는 것도 있고 땅도 구매해야 하니 결국 돈이 매우 중요했다.
재정 확보의 역사를 살펴보자. 1차세계대전 에서 지고 1919년에 다시 선거를 했는데 완벽하게 사회민주당이 빈 시(市) 정부를 장악하게 된다. 단순하게 시 정부를 장악했다는 수준이 아니고 중앙정부에 재정 독립을 요구한다. “빈에서 걷는 세금은 모두 빈이 쓸 것이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따로 독립하겠다”는 식으로 위협했고 결국 조세 주권을 획득한다. 그러다 보니 빈 시의 재정 요건이 개선되었고 빈 시 정부는 별도의 세금도 새로 만들었다. 신 토지세, 부가가치세, 주택세…. 한국으로 치면 종부세 같은 이런 세금을 신설했다. “이것은 목적세이기 때문에 전부 집 짓는 데 쓴다”라고 했고 이렇게 새로 거두어들인 세금이 전체 세금의 1/3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돈으로 짓기 시작한 것이다.
건설된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료는 건축 비용의 4% 수준으로 연간 임대료를 징수하다 보니 매우 낮은 임대료가 가능해졌다. 즉 실제 땅값을 제외하고 건축비를 25년간 나눠 내는 셈이다. 공공임대주택을 지을 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시 정부가 돈 주고 산 땅이라면 원가를 생각하면 그렇게 싸게 임대를 하면 계속 손해겠다는 계산이 나왔을 건데도 감수하고 밀고 나간 요인이 궁금해질 것이다. 여기서 마술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살 땅의 가격을 낮출 필요가 있었기에, 빈 시 정부는 각종 규제를 땅을 가진 사람들한테 퍼붓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목적으로 땅 활용을 못 하도록 하여 헐값에 팔 수밖에 없게 한 것이다. 즉 토지 가격을 하락시키도록 한 것이다. 시 정부의 그런 규제와 요구에 시장에는 헐값에 내놓은 토지들이 매물로 넘쳐나게 되었고 시 정부는 필요한 땅을 선택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세입자 보호를 위해서 임대료 상한을 정하다 보니 임대수익률이 안 나오는 집은 지을 필요가 없었고, 매우 저렴한 임대주택을 계속 짓다 보니 비싼 돈을 지불하고 개인 임대주택에 입주하려는 이들은 사라져갔다. 당시 토지소유자들은 대부분 옛 귀족들이었는데 결국 이들은 “이렇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이 땅을 팔고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하겠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시유지 면적이 급속히 늘어났다. 1918년에는 시유지가 총면적의 17% 정도였는데 13년이 지난 1931년에는 33%가 되어 거의 두 배가 된다.
집 지을 땅들을 규제하고 땅 주인들을 압박하는 그 기간 동안은 시장성이 없어 땅 주인들이 주택을 짓지 않게 되자 주택공급이 줄어들어 임대료 폭등이 일어났는데, 시 정부는 임대료 상한이라는 제도로 누르며 도시 외곽에 임대주택을 새로 건설하여 대응했다. 불편하게 외곽에서 출퇴근하거나 한 집에서 열 명이 사는 시절을 견뎌야 했지만, 결국 무엇이든 계속 지어지고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에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시 정부는 이런 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하게 된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당시의 빈은 거의 혁명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40여 곳의 토지[123] 를 바탕으로 시 자체 주택 프로그램을 시작하였고 시 정부는 협동조합을 구성해서 공공임대주택을 짓도록 하였다.
즉 단순하게 법률이나 정책에 의해서 추진되었다기보다는, 오랜 역사적 변화와 강력한 독재적인 사회주의 정부가 힘을 발휘하며 공공성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도 유사한 정책을 쓰려고 하고 있다. 즉 다주택자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매기면 매물들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그 매물이 많아지면 집값이 내려가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이 실제 작동하는 것을 보면 다주택자들은 “2, 3년 후에 정권이 바뀌면 이 정책이 사라지는데 왜 매물로 내놓나? 좀 기다리지”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매물이 잠기게 되어 그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빈의 분위기는 2, 3년 버틴 뒤에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이 시기는 너무나도 혁명정부, 사회주의 시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가 10년, 20년 가리라는 것을 다들 알았다. 결국 주택, 토지 소유주들은 가진 것을 빨리 팔고 차라리 자신이 영국이나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이런 정책이 가능하도록 하려면 그 정책을 펴는 정부가 오래가거나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도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이 [124] 향후 계속되는 정책이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겠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제국은 무너지고 도시는 폐허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125]
비엔나가 비싸지 않은 공공 주택 천국이 된 이유 :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좋은 집이 이렇게 싸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한다.”
8. 현지 언론사
비엔나 현지에 대한 심층적 정보가 필요할 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언론 개황 (2006, 주오스트리아대사관)
Die Presse (오스트리아 최고의 권위지)
Der Standard (경제와 외신에 큰 관심을 갖고 보도하는 고급지)
Wiener Zeitung (1703년부터 발행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100% 소유한 관보이기도 함.)
Kronen Zeitung (오스트리아 최대 발행부수급 신문)
Kurier (오스트리아 최대 대중지)
APA (Austria Presse Agentur) (오스트리아 뉴스통신사)
ORF (Österreichischer Rundfunk)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ATV (오스트리아 민영방송)
9. 기타
2020년 11월 2일 빈 테러 사건이 발생해 시민 4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다쳤다.
[1]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타국민이 된 사람들이 대거 떠났다.[6]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908017134Y[7] 빈은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살기 좋은 도시에 뽑혔다. #[8] (카드뉴스) 세계의 석유회사 4화. OMV[9] OMV (위키백과 영어문서)[10] Wienerberger (위키백과 영어문서)[11] A1_Telekom_Austria_Group (위키백과 영어문서)[12] https://www.wien.gv.at/forschung/staerkefelder/ikt.html#b[13] Mercer’s 2020 Cost of Living Survey에서 비엔나는 54위를 기록했다. 서울은 11위였다.[14] 뉴욕의 소비재 가격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빈은 49에 그치고 있으며, 이는 코펜하겐 (66), 파리 (67), 암스테르담 (67) 보다 낮다. Business Location 2020 (Series "Vienna in Figures") (4 MB PDF) 문서 53/64 page 참조. [15] 호주의 멜버른, 캐나다의 밴쿠버와 항상 수위를 다툰다. 그마저도 멜버른은 너무 더운 기후, 밴쿠버는 다소 부실한 대중교통과 비싼 집값 때문에 점수가 차감되어 빈이 거의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16] Vienna International Centre (위키백과 영어문서)[17]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3&aid=0003581332[18]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위키백과 한국어판)[19] Vindobona(위키백과 영어문서)[20] Ottokar II (네이버 지식백과)[21] 루돌프 1세 (네이버 지식백과)[22] 제1차 빈 공방전'''∙'''제2차 빈 공방전[23] 메테르니히 체제 (네이버 지식백과)[24] 3월 혁명과 메테르니히의 실각 (네이버 지식백과)[25] https://www.wien.info/en/sightseeing/ringstrasse[26] Theophil Hansen (위키백과 영어문서)[27] https://www.musikverein.at/en/history-of-the-building[28]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네이버 지식백과)[29] https://www.akbild.ac.at/portal_en/university/about-us/history[30] 아돌프 히틀러, 레온 트로츠키, 요시프 티토,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오시프 스탈린, 프란츠 요제프,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31] 서울신문 (2016.12.30) : 히틀러 트로츠키 티토 프로이드 스탈린이 함께 머물렀던 도시는?[32] 이미 19세기 말부터 빈은 신흥 부르주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질서가 충돌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 당시 테오도르 헤르츨 등이 주창)이 들끓던, 유럽 사회의 계급적, 민족적, 인종적 모순의 집결지이자 모더니즘 탄생기의 꿈의 도시, 천재들의 놀이터였다.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스티븐 툴민, 앨런 재닉 지음 ; 석기용 옮김) 책 소개 중에서.[33] 오스트리아기독교사회당 (네이버 지식백과)[34] 도시통계[35] Twin City Liner (공식홈)[36] What to Do in Vienna, Austria [37] Vienna in 4K (비엔나 풍경 감상하기)[38] https://bucketlist.austria.info/kr/bucketlist/74/[39] Wien Hofburg (네이버 지식백과) 공식홈 (hofburg-wien)[40] Schönbrunn Palace (네이버 지식백과) 공식홈 (Schloss Schönbrunn)[41] 쇤브룬 궁전 근처에는 쇤브룬 동물원도 있다. 유럽 최고의 동물원으로 5회 연속 선정. 쇤브룬동물원 (네이버 지식백과) 공식홈 (Schönbrunn Zoo)[42] 슈테판 대성당 (두산백과)[43] St. Stephen's Cathedral - VIENNA/NOW Sights[44] 공식홈페이지 (영어) : https://www.stephanskirche.at/index.php[45] Peterskirche Vienna (위키백과 영어문서)[46] Karlskirche (위키백과 영어문서)[47] Vienna City Hall (위키백과 영어문서)[48] Vienna State Opera (위키백과 영어문서)[49] 메인 홀은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금빛 기조의 도색 때문에 황금홀(Goldener Saal)이라고 불리며( The Musikverein’s concert hall (영어문서)), 클래식 공연장 중 최상의 음향 조건을 갖춘 곳으로 손꼽힌다. 그 화려한 면모는 매년 1월 1일에 거행되는 신년음악회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0 New Year Concert Vienna) [50] 부르크극장 (네이버 지식백과)[51] 벨베데레 궁전 (네이버 지식백과) 클림트와 만나는 벨베데레 궁전 (오스트리아 관광청) 구글맵스로 감상 (벨베데레 궁전 내부 모습 : 작품 '키스' 앞)[52] Kapuzinergruft (위키백과 영어문서)[53] 카푸친성당에 영면한 합스부르크 황족소개 (KAPUZINERGRUFT 공식홈)[54] 보티프 교회 (위키백과 한국어판)[55] 중앙묘지 (네이버 지식백과)[56] Innere Stadt (위키백과 영어문서)[57] 구글맵스로 감상 (빈 미술사 박물관 내부 모습 : 작품 'The miracles of St. Francis Xavier' 앞)[58] 구글맵스로 감상 (빈 미술사 박물관 내부 모습 : 중앙홀)[59] 구글맵스로 감상 (빈 자연사 박물관 내부 모습 : 공룡화석 앞)[60]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은 둘 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구글맵스 : Maria-Theresien-Platz)에 위치하며 서로 마주보고 있다.[61] https://www.albertina.at/lang/ko/[62] 공식홈페이지 : https://www.mqw.at/en/about-us/[63] Leopold Museum (네이버 지식백과)[64] Gustav Klimt (네이버 캐스트)[65] 구글맵스로 감상 (레오폴트 미술관 내부 모습 : 작품 'Death and Life' 앞)[66] Nude, Self-portrait 1910 (네이버 캐스트)[67] 구글맵스로 감상 (레오폴트 미술관 내부 모습 : 작품 'House Wall on the River' 앞)[68] 공식홈페이지 : https://www.hundertwasser.com/en[69] Billy Joel - Vienna (Audio) [70] Billy Joel - Vienna (위키백과 한국어판)[71] 세계테마기행-봄의 왈츠, 오스트리아 3부-음악을 사랑한 도시, 빈_#001 #002 #003[72] 왕궁정원(Burggarten)에 모차르트 동상이 있다.[73] stadtpark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금도금된 동상과 기념비가 있다.[74] Smithsonian : Johann Strauss II and Johannes Brahms[75] Brahms_House (Baden-Baden) (위키백과 영어문서)[76] http://www.viennatouristguide.at/Gedenktafeln/pers/B/brahms_4.htm[77] 뉴시스 (2015.05.25.) : ‘음악의 성지’ 빈 중앙묘지[78] 휴고 볼프 (네이버 지식백과)[79] 프란츠 레하르 (두산백과)[80] The Merry Widow (네이버 지식백과)[81] All Ears on: Vienna [82] Hans Zimmer performs INCEPTION "Time") - [[http://hollywoodinvienna.com/en/programme/hollywood-in-vienna-2018[83] John Williams & Wiener Philharmoniker – "Main Title" from "Star Wars: A New Hope") [84] 오페라 시작 80분 전부터 입석 좌석을 판매하는데, 40등까지는 1층 좌석의 바로 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유명한 성악가가 나오는 날에는 이른 시간부터 아예 접이식 의자까지 준비해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85] Wiener Moderne (위키백과 영어문서)[86] 다르마키르티 (두산백과)[87] Dharmakirti (위키백과 영어문서)[88] ''인식론과 논리학'' (가츠라 쇼류 외 저 ; 박기열 역) 책 소개 중에서.[89] On the History of South Asian, Tibetan and Buddhist Studies in Vienna[90] University Of Vienna - Image Video 2014 (Corporate Video, English)) [91] 엘프리데 옐리네크 (두산백과)[92] 빈 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93] 현재 Medical University of Vienna (빈의과대학교)[94] 공식홈페이지 : 프로이트 박물관 (비엔나) / 프로이트 박물관 (런던) [95] 중앙SUNDAY (2020.08.08.) : 슈니츨러·프로이트…지식인 융합 모임, 비엔나 이끌다[96] 프로이트의 대표저서로는 1900년작《 꿈의 해석》이 있으며, 슈니츨러는 1926년 《 꿈의 노벨레》를 집필했다.[97] 오스트리아의 음식 문화 (네이버 지식백과)[98] 대부분 소스는 없고 레몬과 감자가 함께 나오는 음식. 소금을 곁들인다. 크랜베리 소스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Crispy, Juicy and Tender - The Secrets of the Genuine Wiener Schnitzel [99] 다만 이 소시지는 모양도 작지 않고, 맛도 좀 다른 편이다.[100] MICHELIN Guide Austria[101] Naschmarkt (네이버 지식백과)[102] cafe sacher wien (공식홈)[103] https://bucketlist.austria.info/kr/bucketlist/69/[104]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명장면 중 하나인 대관람차 키스신이 프라터 놀이공원 대관람차에서 촬영되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 따라 오스트리아 빈 산책하기 [105] https://www.praterwien.com/en/prater/fun-in-vienna/history/[106] Madame Tussauds Wien (공식홈)[107] https://www.wien.info/en/vienna-for/families/museums/chocolate-museum-vienna[108] Chocolate Museum Wien (공식홈)[109] https://www.natgeotraveler.co.kr/article.php?type=h&idx=28[110] 빈 카페하우스 (위키백과 한국어판)[111]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02/2017080200995.html[112] https://www.wien.info/en/shopping-wining-dining/wine[113] https://www.wien.info/en/vienna-for/sports/cycling/mountainbiking[114] Vienna City Marathon (공식홈)[115] 서울의 임대주택은 대부분 민간임대주택이다.[116] 대부분이 일인 가구로 밝혀졌다.[117] 베를린의 경우 과거 공항에다가 임대주택을 지으려다가 여러 반대로 인해서 못 짓게 되어 난리가 났었다.[118] 물론 한국에서도 1980년대, 1990년대에 상계동 아파트라든지 1기 신도시를 건설할 때 몇 차례 시도했었다. 처음 하면 물이 샌다든지, 어딘가 불편한 부분이 생긴다든지, 층간 소음이 있다든지 하는 하자나 실수, 문제점이 당연히 생길 수 있지만 그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문제가 있으니 더 시도하지 말라는 쪽이 돼버려 그 이후에 주목할만한 관련 기술 개발이 사실상 거의 없다. 주택 품질을 높인다는 것이 주로 인테리어라든지 여러 가지 정보 통신 시설 위주이며, 타 분야의 비용 절감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외국인 노동자를 이용해서 인건비를 낮추는 식으로 간 데 비해 빈의 경우는 표준화, 공업화로 나아갔다. 즉 집을 공산품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표준화된 창문, 표준화된 자재들을 사용해 효율성을 높였으며, 그러한 표준화된 자재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표준품이 충분히 쓰일 수 있을 만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해야 하는데 빈의 사회시스템은 그러한 것들을 지원하는데 충분히 맞춤화되어있는 상태이다.[119] 출처:mbc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 2019.9.12 오스트리아 빈, 깨끗하고 집값까지 싸다? 최준영 전문위원[120] Red Vienna (위키백과 영어문서)[121] 빈의 역사와 비교해서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혁명 정신이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한국의 최고 아파트에서 구현이 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122] Karl Marx Hof (위키백과 영어문서)[123] 한국으로 치면 택지개발지구[124] 물론 불만은 있을 수 있어도….[125] 출처: MBC 라디오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 2019.10.5. 공공주택의 천국, 오스트리아 빈(2), 최준영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