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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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3년부터[9] 1945년까지 유럽에 존재했던 독일의 국가 체제이다. 명목상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 따른 통치를 하였으므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없앤 독재 국가였다.
1933년 수권법을 통과시켜 독재의 기반을 만들고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하게 되고 완전한 독재를 성립하게 된다.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치 독일은 독일어권 지역을 독일의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목적으로 1938년 안슐루스를 시작으로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획득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켰다. [10]
또한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이후 노르웨이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처음으로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한다. 그 후 북아프리카[11] 와 발칸 반도를 침공하다가 1941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해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소련의 반격으로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데다 동맹국인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시전하였고 이에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미국까지 적국이 되자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1942년과 1943년에 걸처 동부전선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로 결국 수세에 들어섰고 북아프리카 전역은 횃불 작전으로 완전히 패배했으며 시칠리아에 상륙을 허용했고 이탈리아가 항복, 연합국으로 전환하여 이탈리아 전선이 생기고 만다. 1944년 서부전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완전히 양면전쟁을 맞이하게 되고 동부전선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이 궤멸되고 동유럽 대부분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1945년 베를린 전투로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베를린이 함락되며 완전히 소멸했다. 패전의 결과로 독일 본토 전체와 오스트리아 또한 점령을 겪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집권할 때 제3제국이 천년 동안 지속하리라고 호기롭게 떠벌렸으나 12년 만에 패망했다.
연합국의 식민지였거나 적대적이었던 국가들은 적의 적은 아군 논리로 나치 독일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연합국에 대항할 국가로써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것 뿐이다. 독일군이 소련에 진군했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의 압제와 피우스트스키 치하의 폴란드의 침공을 받았던 과거가 있던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등을 비롯한 동유럽 소수민족들은 독일군이 해방자라고 환영했으나 독소전쟁을 벌이면서 학살 또한 일어났고 결국 사람들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
2. 상징
그로스도이체스 라이히(Großdeutsches Reich)의 상징으로 라이히스아들러(Reichsadler, 독수리 모양)과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를 들 수 있다.
2.1. 국호
공식 국호은 이전 제2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때와 마찬가지로 '''Deutsches Reich'''(도이체스 라이히, 독일국)이었고 1943년에 '''Großdeutsches Reich'''(그로스도이체스 라이히, 대독일국)로 국호를 바꾸었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 독일이라는 명칭도 쓰길 바랐다고 한다.
나치라는 표현은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의 약칭으로, 당대에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을 이르는 멸칭으로 쓰였다. 나치가 절대악 정도로 취급되는 현대에 와서는 공식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냥 "나치 독일"(Nazi Deutschland) 또는 "나치 정권"(Nazi Regime)으로 통칭된다. 나치 독일이 존재했던 시기를 부를 때는 "나치즘 시대"(Zeit des Nationalsozialismus)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파쑈도이췰란드라고 한다.(대한민국 표준어로 풀이하면 '파시스트 독일'이라는 뜻)
"라이히(Reich)"는 흔히 제국이라 번역하지만, '''독일어 단어 Reich는 한국어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뜻의 제국이 아니다'''. 차라리 "나라", "영토"의 뜻에 가깝다.[12] 심지어 현재 오스트리아의 원어 명칭도 'Österreich(외스터라이히)'이다. 그래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도 독일 제국 시대의 "도이체스 라이히"라는 국호를 그냥 뒀다. 나치 독일은 명목상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장한 공화제 국가였다.
'''제3제국'''(Drittes Reich)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제3'이란 의미는 신성로마제국과 독일 제국에 이은 3번째 단일국가(라이히)라는 의미다. 이 명칭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수권법을 만든 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망 이후 총통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1939년까지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던 명칭이다. 흔히 히틀러나 나치당이 "제3제국"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연합군의 선동 등을 방지하기 위해 1939년부터 독일 안에서 금지한 명칭이었다.# 하지만 나치도 초기에는 엄연히 쓰던 명칭이고, 역시 연합군도 같은 뜻에서 나치 독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써서 현재 역사서나 전기(戰記), 다큐멘터리 등에서 공식 명칭이 아님에도 널리 쓴다.
제3제국은 영어권에서도 'The Third Reich'라고 하며, Reich라는 독일어를 번역 없이 그냥 쓰고 있다. 나치 집권 과정을 직접 겪고 쓴 미국 저널리스트의 윌리엄 샤이러의 명서 '제3제국의 흥망'도 원제는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이다. 그런 뜻에서 국어의 "제3제국"이란 표현 역시 "제3라이히"라는 표현이 지지를 받지 않는 한 타당할 수는 있다.
2006년 국내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다룬 다큐를 방영했다. 그런데 나레이터가 '히틀러의 Third Reich가 어쩌구...' 하고 말하는 걸 '히틀러의 써드 라이는'이라고 개판으로 자막 처리해 많은 이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차라리 "제3라이히"로 되었으면 맞는 표현이 될 수 있다. 다만 NGC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NGC 작품을 번역하는 아이앤키 미디어의 과실로 보인다.
동서독 통일 뒤 민족주의적인 일부 독일인들은 이것을 "제4제국의 시작"이라 불렀고, 궁극적으로 독일 민족에 속하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여기에 참여시켜 독일인의 진정한 제4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제정세를 볼 때 주변 어떤 나라도 이런 "제4제국"을 용인 못할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재출범 당시 조건이 독일과 절대로 통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독일은 통일 독일이나 현대 독일로 불리고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인 이원복에 따르면 나치라는 단어 자체가 현재 독일에서는 모멸적인 단어로 통한다고 한다.
2.2. 국기 및 국장
나치독일은 초기에는 독일 제국의 흑백적국기[13] 를 부활시켜 썼다가 하켄크로이츠를 국기로 채택했다.
당시 독일에선 이 상징을 아리아 인종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기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툴레 협회의 상징을 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형법 86조와 86a조에 의거해 나치를 연상시키는 사물을 소지하고 내보이는 것은 학술연구나 당시를 반영하는 영화촬영 등의 특수한 상황을 빼면 불법이므로 하켄크로이츠를 들고 다니다간 경찰이 체포한다. 이런 까닭에 네오 나치조차 저 깃발을 사용하지 못한다. 다른 서구권에서도 불법으로 지정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혐오 문장 취급한다. 서구의 불교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불교 상징물로 만(卍)자 대신 오해를 살 여지가 없는 법륜을 쓴다. 만자는 세계적으로도 거부감 없이 쓰여지던 심볼이며, 전간기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에서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져 새해연하장에 자주 쓰이던 문자였다.
2.3. 국가
국가는 독일의 노래였으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도 국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법으로 청취를 금지하고 있다.
3. 행정구역
본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독일은 주(Land / Staat)와 같은 행정 명칭을 사용했지만, 나치가 집권한 이후 가우(Gau)라는 명칭을 도입[14] 하여 행정 구역을 재편성했다. 이러한 행정 구역 재편성에는 크게 2가지 목적이 존재했다. 하나는 신성 로마 제국 시기에 사용됐던 행정 명칭을 재도입하여 과거의 향수를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자극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무부 관할의 행정구역과 나치당 휘하의 당 관구를 일치시켜 당의 업무를 좀 더 손쉽게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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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이 여러 차례에 걸쳐 침략 전쟁을 통해 팽창해갔으므로, 가우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갔다. 위의 지도에서 보라색 영역은 폴란드 총독부(General Government)를 제외한 1937년까지 독일의 영토였으며, 녹색 영역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폴란드를 합병한 이후에 새로 추가된 구역이다. 이외에도 프랑스 침공 이후 획득한 알자스-로렌 영역 및 기존 가우에서 새로운 가우를 신설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실현되지 못한 경우도 존재한다.
3.1. 1937년까지의 행정 구역
3.2. 안슐루스 이후 추가된 구역
3.3. 뮌헨 협정 이후 추가된 지역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독일에 의해 점령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는 가우가 아니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과 괴뢰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된다.
3.4.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가된 지역
3.5. 그 외의 지역
이 외에도 레벤스라움의 확보를 위해서 덴마크, 네덜란드, 세르비아, 폴란드 곳곳에 가우를 신설할 계획이었으나 2차 대전으로 인해 무산됐다. 해외 영토로는 남극의 노이슈바벤란트가 있었으나, 실제로 영유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3.6. 게르마니아
4. 경제
나치는 대공황을 해결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대공황의 여파부터 해결해야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업률이 30% 수준으로 경제가 최악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수 백만의 고용인력이 창출되었고 독일의 실업률은 매우 낮아졌다. 그리고 독일 국가 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는 메포 어음(Mefo-Wechsel)을 발행해 재정 적자를 해결해가났다. 나치 정부가 기업에 상품을 발주하게 되면 나치 정부는 기업에 화폐 대신 이 메포어음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독일 국가 은행은 화폐를 추가로 발행함으로써 감내해야 하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었다. 독일 기업들도 이자가 좋은 메포 어음을 신뢰하고 받아들였고 전간기 기간 동안 무려 204억 마르크의 메포 어음이 발행되었다.#
한편, 나치는 기업과 정경유착을 단행했고 기업들과 노조간의 단체교섭을 중단하고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동결하고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막대한 편의와 혜택을 부여했다. 그 결과 수 많은 공공기업들이 민영화되었고 재벌들이 형성된다. 특히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에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독일 기업들은 나치의 군비 증강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이 금융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고 이에 따라 독일 증권 거래소는 폐쇄되고 독일인의 외국 주식 거래를 금지하는 법을 선포하기도 했다.
나치 정부의 이러한 노력 덕에 독일은 단숨에 서유럽 1위이자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자재가 부족한 것이 약점이었고 또한 민간 노동 시장 창출을 위한 지출의 3배 이상, 독일 국민 소득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군사비 때문에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내하고서라도 추가적인 화폐 발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국가 예산을 훨씬 상회하는 정부 지출이 발생해 나치는 막대한 부채에 당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나치는 경제 약빨이 다 떨어진 셈이다.
얄마르 샤흐트는 군사비를 줄이는 것이 경제를 회생시킬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지만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을 통한 전시경제-약탈경제로 자국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제2차 세계대전이 벌여진 뒤로 독일은 점령한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국부와 자원, 노동력을 몽땅 약탈해가 경제력에 투입했으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업 지대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유대인, 반체제주의자, 전쟁포로 등을 강제수용소나 기업들에 배치해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해버렸다.
그러나 독일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면서 독일의 경제도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1942년 이후 전시경제로 전환되고 생산력도 급속도로 증가되긴 했으나 1944년 기준으로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국민 소득의 75%까지 오르게 되며 그 부담은 날로 커지고 있었다. 주요 산업 단지와 도시들은 연합군의 전략폭격과 소련군의 공세로 인해 초토화되었다. 거기다가 특히 취약한 원유 수입을 비롯한 원자재는 루마니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 두 나라들이 소련군의 공격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면서 독일의 생산능력은 극도로 급감했다.
1945년, 독일의 주요 도시는 전략폭격에 더해 연합군과 소련군의 진격 아래에 철저히 파괴되었고 수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면서 독일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유럽의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결국 나치 독일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침략 전쟁을 결정했으나 그 전쟁 때문에 오히려 경제가 철저히 파괴당한 꼴이 되었다.
5. 국방
독일 국방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역사
6.1. 히틀러의 집권과 일인독재 수립
제1차 세계 대전 패한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한 긍정적인 체제였으나, 군국주의에 길들여졌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승전국들에 의해 강요된 체제라고 생각하며 거부하였다. 그나마 바이마르 정부와 집권 사회민주당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지만, 그때마다 대공황의 여파와 베르사유 조약의 독소 조항을 들먹이며 정부를 흔드는 좌우파의 극단세력에게 시달렸다.
베르사유 조약의 경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너무 과하다고 여겨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많은 금액을 탕감해주거나 해서 그렇게까지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초인플레이션이 독일 국민에게 많은 고통을 안기긴 했으나, 그 고통에 가린 중요한 이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런 초인플레 때문에 1차대전 당시의 빚을 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정부가 망해버려 대금을 한 푼도 못 받게 되어 부채에 허덕이던 많은 독일 기업들은 부채를 사실상 탕감받으면서 되살아났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초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자 독일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이미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공업 규모를 다시 보유했다. 문제라면 당대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발전은 미국의 도움이 강했는데, 세계 대공황이 미국에서 터지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를 뒷받침해주던 미국의 달러가 대거 이탈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이것은 (소련 등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였는데, 상당한 독일 국민들은 이런 위기는 극우나 극좌에 의해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 탓으로 돌렸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강력한 정치세력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 때까지만 해도 맥주홀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지대로 데이는 바람에 숨죽이고 지내던 나치당과, 그 나치당을 이끌던 아돌프 히틀러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대공황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데다가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경제적으로 긴축정책을 지속하여 지지율이 폭락해버렸고, 기준 좌우파 정당에 실망한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할 만한 대안으로 인식되어 1932년 7월 선거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그 후 1932년 대선에서 다 늙어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이 되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포섭하여 1933년 힌덴부르크가 의회를 해산하게 만들고, 프란츠 폰 파펜과 연정을 통해 수상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가 제정한 법은 바로 수권법(授權法).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나치당 외 정당을 해산하고 정당 신설을 금지하여 나치당은 국가 유일의 독재정당이 된다.
1933년 3월 총선의 결과로 나치당이 득표율 44%, 의석수 45%를 차지해서 1당이 되었고 히틀러가 수상자리에 올랐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과반수의 국민들은 나치당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반년후인 11월 총선때는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금지돼서 의석수 100%를 달성한다.
사실 집권 초기나 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인식이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 학생들도 무솔리니, 히틀러 등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몇년후 완전히 주적이 되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인해 처칠이 완전히 싫어하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6.2. 사회 분위기
6.2.1. 전통적 인식: 전체주의론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설로, 나치 독일 수권 당시부터,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와 같은 소수의 나치 수뇌부들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군국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되는 사회이다. 당장 이전 버전 역시 이러한 역사 인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치 정권의 입장에 반하는 세력들, 대표적으로 공산주의와 사민주의를 망라한 좌파 계열[33] 에게는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위시하여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다. 이러한 탄압을 두려워 한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체념한 채 나치 정권에게 순응하는 길을 택하였고, 그 결과 2차대전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이러한 전체주의론의 골자이다.총통 신앙은 계급과 직위를 망라하여 '''철두철미한 확신에 가까웠다.''' 이와 관련된 많은 발언은 마치 화자가 히틀러와 '''개인적 관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대중 스타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있고 남다른 특징을 지니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프로파간다에서 철저한 계산을 통해 총통을 디자인하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모든 자기 연출과 마찬가지로 실상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다. 처칠이 히틀러처럼 연서를 수천 통 받는다거나 괴링처럼 딸이 태어났을 때 전보를 10만 통 이상 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제3제국의 지도자들은, 아니, 적어도 이 두 인물은 대중 매체의 전문적 연출로 나타나는 대중문화 현상을 매우 뚜렷하게 미리 보여 준다.
소박하고 선량하면서도 신비롭고 전능한 느낌을 주는 총통의 아우라는 '''대중 스타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퍼뜨린 무수한 일화들을 통해서 늘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함을 유지한다.''' 가령 연설 중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히틀러의 다소 특이한 습성, 금욕적인 식습관, 그리고 분을 못 참아 양탄자를 물어뜯었다는 저 유명한 일화[30]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총통과 아주 가깝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총통 옆에 앉았다거나 (장군들에게는 드물고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총통과 군사적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일화는 언제나 자세하게 이야기되고 이야기 중에는 언제나 히틀러의 특별한 점들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총통과 친밀하게 알고 지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건 거짓이건) 총통을 직접 만났다는 사람에게 총통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총통의 매혹이라는 토포스는 되풀이되어 등장한다. 히틀러는 말 그대로 사람을 마취시키는 것처럼 자신의 매력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총통과 진짜 만난 사람은 다른 인상도 받았다. 가령 루트비히 크뤼벨(Ludwig Crüwell) 기갑대장은 이야기에 홀딱 빠져 귀를 기울이는 영국 측 첩자 폰 발데크(von Waldeck) 중위에게 이렇게 말한다.크뤼벨: 확신합니다. 총통이 당을 지휘하면서 거둔 상당 부분은 그가 대중에게 암시를 거는 것 같은 절대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최면과도 같지요.''' 그는 이런 최면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걸었죠. '''솔직히 말해서,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지적으로는 히틀러보다 우월하면서도 이런 마력에 홀딱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왜 저는 안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남자가 짊어진 책임이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는 사실은 저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그가 제게 아프리카에 대해 한 말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고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특이한 건 손이에요. 아름다운 손이지요. 사진으로 보면 눈에 안 띄죠. 진짜 예술가의 손이라니까요. 저는 그 손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지요. 아주 아름답고 예사롭지가 않은 손이었어요. 섬세한 손이었지요. 손의 종류 자체가 달랐어요. 소시민의 손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특히 놀랐던 건, 그는 독수리처럼 사람을 응시하면서도 긴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이 곡엽 훈장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이에요. 이해하겠어요? 사실 그 전에는 완전 다르게 상상했거든요.[31]
히틀러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크뤼벨은 총통을 개인적으로 만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친밀하고 가까운 거리에서만 알 수 있는 세부 사항들을 내세운다. 총통은 "아름답고" "섬세한" 손을 가졌다. 아주 특이한 손이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크뤼벨이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러니까 총통을 그처럼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총통보다 한결 매력적이다. 크뤼벨의 설명에는 우스꽝스러운 점도 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히틀러의 마력에 홀딱 빠지지 않았다고 강조하지만,'''("왜 저는 안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다음에는 마치 구세주를 눈앞에서 영접하듯이 총통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가 이 만남에 대해 지녔던 커다란 기대는 충분히 실현되었다. 총통은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상상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오락적인 요소도 깃드는데, 화자는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자신이 총통 가까이 있던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자는 다소 냉랭하게 대답한다.
폰 발데크: 그의 모든 행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크뤼벨은 이 말을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곧바로 반박한다.
크뤼벨: 그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려 한다면 그냥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면 됩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생각한다면 벌써 잘못되어 버리지요. 제 말은 이런 뜻입니다. 어떤 군인들은 아주 훌륭한 군인인데도 늘 어떤 사람을 골라서 그를 모방하려 합니다. 그런 건 모두 잘못입니다. 총통은 유연하게 걷습니다. 옷을 아주 잘 입지요. 아주 소박하게요. 검은 바지에 외투를 입습니다. 이것보다 좀 더 회색인데 국방색은 아니지요.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괴링처럼 훈장을 주렁주렁 달지 않아요![32]
'''크뤼벨은 히틀러의 감정에 사로잡힌 행동을 오히려 진정성의 증거로, 그가 지닌 개인적 설득력의 일부로 평가한다.''' 그다음에 총통의 두드러진 소박함과 겸손함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지식을 계속 늘어놓는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또 다른 사실은, 이런 만남 이전부터 가지고 있는 총통의 위대함과 카리스마에 대한 기대를 실제 만남을 통해 충족하여 그 후에는 다시 새로운 일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총통과의 만남은 이런 식으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다. 즉 총통 신앙은 일종의 '정서적 영구기관'이 되는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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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민음사. p320 ~ p323 에서 발췌
6.2.2. 새로운 해석 :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연이어서 전체주의론에 대해 반박이 가해졌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역사 인식의 포문을 연 것은 마르틴 브로샤트였다. 독일 역사학계를 뒤흔든 저서 <히틀러 국가(Der Staat Hitlers)>에서 마틴 브로샤트는 나치 정권이 결코 하나의 단일한 목표를 바탕으로 결집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냈다. 나치당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을 지적하며서 브로샤트는 나치 정권이 전체주의적인 정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다극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34]
한편 브로샤트의 뒤를 이은 알프 뤼트케, 데틀레프 포이커트를 필두로 한 일련의 소장 역사학자들 역시 브로샤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인류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을 기치로 내걸고 나치 정권 시기에 실제 청~장년기를 보낸 노동자 계층[35] 들과의 인터뷰 및 그들이 남긴 무수한 회고록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나치 시대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먼저, "숨도 못쉴 만큼 억압적인" 나치 정권 시기라는 기존의 통념이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1933년 집권 이전에는 나치 정권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조차도, 전쟁 발발 이전이었던 1933년부터 1939년까지의 시기의 나치 정권에 대한 기억은 지극히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서 초기 나치 정권 시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과 궁핍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수 해소되었던 기간이었다. 나치 정권은 (공공연하지는 않지만 내심) 자신들을 적대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이들을 달래고자 노력했다. 게다가 나치 정권이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젊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억제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성들에게 많은 일자리가 돌아갔으며, 노동자들은 다시 사회적 지위 상승(중산층으로의 계층 상승이 아니라, 노동자 계층 내에서의 지위 상승 - 예를 들어 숙련공 대우- )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나치 정권이 도입한 복지 정책인 기쁨을 통한 힘(KdF, Kraft durch Freude)을 통하여서 노동자들에게는 이전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여가 생활(가령 인근 영국/프랑스로의 해외 여행이라던가,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클래식 청취)을 향유할 수 있었다.
두번째로, 수많은 당대 독일인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결코 정권의 일방적인 통제에 의해 돌아가는 국가가 아니었다.''' 나치 정권의 통제력은 오로지 국가 차원의 정책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이해관계와 수렴할 때에만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36년 이후 나치 정권이 대외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4개년 계획(Der Vierjahreplan)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의 근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노동생산성이 급락하는 한편 불량품 발생률이 치솟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의도적으로 사보타주를 펼쳤던 것이다. 도시 노동자들 의외에도 다양한 세력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반하는 정부 정책에 대항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은 자신의 농작물을 군수물자로 공출하려는 정권의 움직임에 대해 암시장 반출과 같은 지하 경제 행위로 저항하였고, 도시의 청년들 역시 획일적인 히틀러 유겐트 문화에 반발하여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모이텐과 같은 조직을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히틀러 유겐트 간부들에 대항[36] 하였다.
다시 말해서 나치정권독일사회는 부분적인 일탈과 저항[37] 이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알프 뤼트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치 정권에 대한 대다수 독일인들의 입장은 (자신의 이익이 보존되는 한에서 암묵적으로 정권을 인정하는) 유보적 수용(Abwartendes Hinnehmen)에 가까웠던 것이다. 요컨대, 나치독일시대는 결코 침묵/순응하는 대다수 국민 對 처절히 저항하는 소수의 영웅[38] 이라는 이분법 구도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적당히 순응하면서도, 부분적인 일탈과 저항 역시 만연한 회색 지대(Grauzone)'''가 당대 독일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39]
아울러서 이러한 일상사의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독일의 역사관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기존의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나치정권 그 자체를 철저한 악이자 입막이로 묘사해왔다. 그로써 많은 독일국민들에게 ("악마적인 정권이 폭압을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의)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과해왔지만, 일상사가들에게 이러한 도식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나찌당이 탄압했던 정치적 반대세력,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독일인들이 똑같이 경계시하고 미워했고[40] 근대화로 인한 사회의 원자화에 있는만큼, 나치독일이란 결코 역사상의 일탈[41] 이 아니라, 현대서구사회에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소수자에 대한 또다른 박해와 몰이를 막기 위한 철저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3. 팽창주의
케인즈적 경제 회생정책을 통해 국내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치독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첫번째 목표는 국제 연맹이 관할하던 라인강연안의 공업도시 루르를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이곳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비무장지대가 된 곳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빈약한 무장[42] 의 독일국방군을 진주시키는 도박을 한다. 이는 조약의 위반사항이었으나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묵인속에 이곳을 피없이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선동하여 혼란을 조장, 오스트리아정부를 무력화시켰다. 이후 독일국방군을 진주시켜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피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오스트리아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독일의 한 주로 병합하였다. 이를 안슐루스라고 한다.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이 다수였던 수데텐란트를 독일령으로 할양하라고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협박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영토였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게 떼어주며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는 뮌헨 협정을 맺었다. 이로서 히틀러는 다시 협상에서 승리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 '더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라 했고, 그 서약서까지 영국과 프랑스에 제출했으나, 실제로는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의 인내력은 이것으로 한계에 달했고 더 이상 독일이 협박을 이으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여론이 우세하게 되었다. 서약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39년 여름, 히틀러는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과 독일본국을 잇는 (역시 독일계가 99프로나 되는)단치히회랑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뮌헨협정당시의 수테텐란트를 독일에게 내줬던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달랐고 전쟁을 염두에 두며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독일의 단치히회랑요구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또 방관할 것[43] 이라는 생각을 했고, 폴란드와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맺고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더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개막되었다.
6.3.1. 전성기
1939년 9월 시작된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군은 고작 1달만에 육군력이 강력했던 폴란드를 철저히 격파하고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는 했으나 독일에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44]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4월에는 하루만에 덴마크를 점령하고 전광석화처럼 바다를 넘어 노르웨이도 침공, 점령했다. 이로써 발트해에 갇혀 있었던 독일 해군은 이제 대서양으로 나갈 출구를 확보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출구는 확보했는데 독일 해군의 전력을 거의 상실했다.
마침내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마찬가지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낫질 작전으로 독일군은 단 6주만에 프랑스군을 패퇴시켜 항복을 받아냈고, 이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쯤에서 히틀러는 영국과 종전협상을 맺으려고 했으나 영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독일은 공군을 동원하여 영국을 폭격하지만(영국 본토 항공전)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공군을 늘리기보다는 먼저 소련을 정복하기로 결심했고 몇 달간 부대들을 동부로 이동시켜 소련 침략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이탈리아는 히틀러를 본따서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거꾸로 지면서 도리어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알바니아가 위험해 독일에 구원을 청했다. 히틀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동맹인 이탈리아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1941년 4월에는 다시 발칸 침공을 벌여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그리스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300만명을 동원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45] 소련군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래 최초의 참패를 겪었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나치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46][47]
6.3.2.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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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8일 항복 시점에 독일군이 통제하고 있던 지역)[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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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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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42년 봄과 여름에 독일은 다시 전세를 회복했다. 소련의 남부를 공략하여 석유와 기타 지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블라우 작전(청색 작전)이 진격 속도를 높이며 성공을 거두었지만 무난히 점령할 것이라 생각했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붙들리고 말았다. 결국 여기서 소련군의 역포위에 걸려 수십만의 인명 손실이 발생했고 장비의 손실도 막대했다.[49] 이로써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파견한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도 영국군과 미군에게 섬멸당해 버렸기 때문에 독일군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19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으로 잠시 소련군의 예봉을 꺾기도 했으나, 히틀러는 이걸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가져온 것으로 오판하고 역으로 공세를 벌였다가 1943년 7월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하고 8월에 소련군이 역으로 벌인 드네프르 강 공세로 인해 전선이 드네프르 강까지 밀려버린다. 이후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는 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게 된다.
전세가 한 번 기울기 시작하자 전황은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서방연합군은 독일군이 쿠르스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이탈리아에 상륙했고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져 버렸다.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자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를 재빨리 점령하고 방어 태세에 나섰으나 1943년 겨울 소련군의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로 인해 남부집단군이 격파당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빼앗겨버렸고 1944년 6월 6일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방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출했고 6월 22일에는 동부에서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펼쳐 독일 중부 집단군을 분쇄해 버렸다. 나치 독일의 영토는 독소전쟁 이전의 영토로 크기가 축소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 1943년과 1944년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핀란드는 독일과의 동맹 조약을 파기하고 연합국에 항복하여 연합국의 편에 서서 총부리를 독일 쪽으로 돌렸고[50] 독일의 편은 헝가리, 일본 제국만 남게 되었다. 이들 동맹국들을 잃게 되자 독일 공군과 육군 기갑부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헝가리군은 부다페스트 공방전으로 소련군에게 점령당하고 일본 제국은 애초에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를 서부전선으로 차출하여 병력을 모은 뒤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 구멍이 나 버렸고 이에 소련군은 쉽게 독일 영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은 비스와 강을 건너 독일 본토로 진격했고 1945년 5월 2일 베를린을 함락시켜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4월 30일 지하실 벙커에서 자살했으며 1945년 5월 8일에 카를 되니츠가 수반으로 있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6.4.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립과 멸망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으로 나치 독일은 사실상 멸망했으나 그 껍데기는 며칠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4월 20일,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맞고, 4월 29일 자살 하루 전에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에 히틀러는 자신의 총통 자리를 총리와 대통령으로 나누어 총리직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대통령직은 카를 되니츠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에바 브라운과 자살했다. 곧 괴벨스가 히틀러의 뒤를 따라 자살하면서 얼떨결에 나치 독일의 수장이 된 되니츠는 자신의 사령부가 있는 덴마크 인근의 발트해 군항 플렌스부르크에서 정부를 구성했다. 다른 나치 고관들과 마찬가지로 되니츠는 서방과 단독 강화를 맺고 소련군과는 계속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은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얄타 회담에서 다 결정해 버린 상태였기에 이는 되니츠의 망상에 불과했다.
5월 4일 되니츠는 자신의 부하인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랭스에 있는 아이젠하워 사령부로 보내 항복협상을 개시했으나,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협상을 질질 끌었다. 다만 이것은 독일이 무슨 협상력이 남아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강화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독일군 장병이나 독일 민간인들이 소련군이 아니라 서방연합국 관할지역으로 도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서로 이 문제에 대해 협의까지 했던 연합국 측에서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서방 측으로 도망 오는 독일군은 발포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그리하여 5월 7일 랭스에서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다만 서명이 랭스 현지 시각으로 새벽 2시 30분에 이루어지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는데, 이게 모스크바 기준으로는 새벽 4시 30분의 일이라 소련 본국에서 훈령을 보내줄 만한 수뇌부들이 모두 자고 있었던 것. 사인을 안 하면 소련이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렇다고 스탈린의 허가 없이 사인하면 서방연합국 주도의 항복 조인식을 인정한 셈이니 어느 쪽으로 결정하건 매끄러운 해결책은 아니었다. 만약 스탈린이 이것 때문에 분노할 경우 최소 굴라그 행이요, 재수 없으면 처형까지도 갈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사령부에 파견 나왔던 소련군 연락장교 이반 수슬로파로프 대장은 고민 끝에 결국 서명에 참여했다. 다행히 모스크바에 있던 친구들이 잘 무마해 별 다른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일단은 이것으로 소련 역시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사인을 한 것이 되었으나, 이를 뒤늦게 안 스탈린이 '''"항복은 적국의 수도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하며 베를린에서 다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다음 날 독일의 수도이자 주코프의 사령부가 위치한 베를린에서 다시 동일한 항복 문서에 대한 조인식이 열렸다. 이번에는 빌헬름 카이텔이 독일을 대표하고 주코프가 소련을 대표하여 조인하였고 이것으로 항복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런 결과는 소련을 배제하고 서방연합국만을 상대로 항복 협상을 진행하려던 독일측의 계획[51] 에 소련 측이 문제를 제기했고, 서방연합국 역시 독일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플렌스부르크에는 서방 연합국이 들어왔고, 당시 서방측은 되니츠 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한 동안은 SS 대원이 미군 트럭의 교통정리를 하고, 독일군과 미군이 함께 정부청사의 경비를 서는 기묘한 광경이 10일 남짓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3,000만 명이나 사망해서 전범들을 철저히 처벌하려고 이를 갈던 소련은 이런 행태를 참지 못하고 서방연합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방연합국과 소련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기로 합의하고 5월 23일 각료들을 체포하였다. 이것으로 나치 독일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7. 역사적 손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벌인 것까지 합치면 당시 5,000만명이 사망했다.[52]
체코 또한 특유의 공업 때문에 무기 생산 기지용으로 노예 수준의 취급을 받긴 했으나 절멸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독일 민족의 역사적 진출 방향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레벤스라움의 중심지로 설정했던 동유럽이야 말로 본격적인 강제 추방, 집단 학살, 노예화 삼박자의 제노사이드 정책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외적으로 크로아티아나 발트3국처럼 어쩌다 히틀러 눈에 들어서 피해를 면하고 우등국민 취급을 받거나 헝가리처럼 대전 전부터 최우방인 국가도 있었다. 역설적인 점은 이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제정 러시아가 분할하고 있었던 중동부 유럽은 실제로 중세 이후로 독일계 이주민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지속적인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따라 2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독일어가 인텔리 계층의 보편 언어로 대접 받을 정도로 독일의 문화적 영향력은 깊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의 시발점이 된 단치히만 하더라도 전후 재건 과정에서 일부러 '독일색'이 나는 건물들은 다 싸그리 밀어 버리고 죄다 '폴란드 민족 전통적'이라고 판단된 디자인으로 구시가지를 다시 지었을 정도이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독자적인 종교개혁 역사를 갖고 있는 체코 정도를 제외하면 아일랜드 공화국과 비슷하게 종교개혁[53] 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전후 독일인들은 심지어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수백년 전의 프로이센의 역사마저도 군국주의의 색채가 짙으며,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54] 제대로 역사 교육을 시키는 걸 학교에서 주저할 만큼 철저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거세되어 버렸다.
나치 독일은 고대의 게르만족의 서진, 중세 독일 기사단의 동진 이래 독일 민족국가의 숙원이었던 영토 확장 및 유럽의 패권 쟁취를 내세우며 거대하게 판을 벌였으나 끝내 거대하게 망해버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7.1. 독일인이 입은 손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른 나라들의 피해 이상으로 독일은 거대한 손실을 입었다.[55] 나라가 연합국에 의해 분단된 것은 물론이요, 근대 독일의 기원이라고 할 프로이센이나 포메른, 슐레지엔 지방, 그리고 쾨니히스베르크는 폴란드나 소련에게 할양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과학 기술은 미국에 뒤처지게 되었다. 인명 피해도 심각해서, 직접적인 인명피해만 수백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패전 이후 폴란드와 체코 등 동유럽 각국에서 박해당해 본국으로 쫓겨난 독일인도 수백만에 달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대부분 서독에 정착하여 전쟁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메꾸고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되긴 했으나 전후 초기에는 오히려 부양부담이 증가하여 사회 혼란이 더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도 다시는 합칠 수 없어진 것은 덤이다. 괜히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와 히틀러하면 치를 떠는게 아니다.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독일은 중세와 근세에 걸쳐서 독일인들이 꾸준히 넓혀왔던 국토를 다 잃었다.''' 게다가 체코, 폴란드 등 외부 영토에 있던 독일계 주민들이 해당 영토에서 완전히 쫓겨나면서 '''동유럽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던 독일어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수십개의 국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유럽, 그 중에서 중앙 부분에 위치한 독일이 주변의 독일어권을 잃은 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손실이다. 1914년의 독일 제국의 영토와 지금 현재의 독일 영토를 비교해보면 자그만치 절반 가량이 크게 줄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독일도 제2차 대전 패전, 나치 패망 이후에도 동프로이센이나 포메른, 슐레지엔 등 이전 영토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1990년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과거 제2차 대전 당시의 연합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설정된 독일-폴란드 국경선인 오데르-나이세 선과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된 구 독일령 지역을 폴란드, 소련 영토로 승인하지 않으면 독일의 통일을 허락해주지 않겠다며 압박했고 결국 독일은 통일을 조건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고, 이들 지역에 대해서 정부 차원의 영유권 행사는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돌프 히틀러는 영웅이다!'란 주장도 있다. 물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다소나마 만회한 것도 사실이고, 대공황으로 발생된 빈곤문제도 해결되어가고 있었으며 윈스턴 처칠조차 히틀러 집권 초기에는 국가 안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전쟁 이전에만 하더라도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력을 과시하고 사람들의 선망을 얻었고 심지어 노벨평화상 후보였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와 국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팽창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이어졌고, 초기 승리에 취한 히틀러 등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결국 패배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예정된 파멸로 끌려갔다. 결과적으로 중후반부의 실정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이 전반부에 이룩한 약간의 성취로는 도저히 덮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보니, 현대 독일에서 나치는 금기어이자 가장 모욕적인 욕설 중 하나로 여겨진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이나 로마니인들 뿐 아니라 제국 내의 반체제인사들도 가차없이 숙청했다. 전술적으로는 동부전선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 고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들을 내림으로써 피해를 가속화했으며, 막판에는 노약자들까지 포함한 전 국민 징병제를 실시했다.[56] 이런 형국이니 일반 군인들로서는 목숨 걸고 조국에 반하여 싸우든가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나치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돌프 히틀러의 광기가 저지른 죄악이 전황이 역전됨에 따라 아무 잘못 없는 민간인들에게 돌아왔으니 소련군과 현지인에 의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57][58] 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질질 끌다가 결국에는 패전하여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독일 민족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독일의 정치적 위상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독일인은 최소 500만에서 많게는 700만 명 정도이며, 해외 동포들이 추방당해 독일로 오는 바람에 겨우 인구 부족을 메울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해외의 정착 기반이 없어진 채로 맨몸으로 와서 라인강의 기적으로 일자리가 대거 생기기 전까진 독일 사회에 부담만 되었으니 누가 봐도 명백한 손해였다.[59] 45년 동안 국토가 두 쪽이 나는 바람에 국력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동서 분단 이외에도 독일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현재 독일의 영토는 근대 독일 국가가 형성된 이래 가장 작다. 특히 근대 독일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은 영구적으로 폴란드(바르미아-마주리, 포모제 주), 러시아(칼리닌그라드), 리투아니아(메멜)에 넘어갔다. 독일이 상실한 영토 대부분은 기존에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과 나눠먹었던 폴란드 동부 지역을 점령한 소련이 점령 지역을 돌려주기는 싫어서 폴란드를 달래주기 위해 넘겨줬으며, 기존에 거주중이던 독일인은 모조리 동독으로 쫓겨났다.[60] 게다가 현대 독일은 전후 역사청산과 통일 과정에서 독일의 역사적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영구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유럽연합을 통해 '''과거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61] 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정세가 급변하지 않는 이상 독일이 실지를 회복하거나 회복을 시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실 '과거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원래 외교에서 약속이란 공허한 것이라, 미래에 정말 그 땅이 필요하고 그럴 역량도 충분하다면 과거의 조약 따윈 엎어버리면 그만이다. '만국(萬國)에 대한 만국의 투쟁' 상태인 국제사회에 무슨 대법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대 독일이 영토 회복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옛 독일이 군사적 팽창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대전략 목표 대다수를 유럽연합 체제 하에서 실질적으로 성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연합이나 NATO의 동방 경계는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보장받았던 수준에 필적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강압적인 통치로 온갖 파르티잔들에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협조적인 현지 정부와의 교섭이 가능하다. 레벤스라움은 좁은 의미에서는 유럽연합 내 이동의 자유로, 경제적 영토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는 유럽의 경제적 통합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보호무역주의가 판치던 당대와는 달리 자유무역이 대세가 되면서 주변국을 무력으로 압박하지 않고도 물건을 팔아먹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역내 다른 열강들이 죄다 적성국이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 독일은 프랑스의 혈맹이고 영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외교적 지형도 훨씬 유리하다. 유럽연합을 두고 제4제국 소리도 나오는 판에, 독일이 미치지 않은 이상 이제와서 실지 회복을 외칠 이유는 없다. 역으로 말해 서방연합국들은 독일과 독일의 범죄에 보복하고 압박하고 모욕하는 것으로는 결코 미래의 전쟁을 막을 수 없으며, 독일은 물론 역내 모든 주요국들에게 ''''전쟁보다 더 나은 평화''''라는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영속적인 평화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7.2. 학문과 문화의 손실
나치 독일 기간 독일은 학문적으로도 큰 손실을 겪었는데, 전쟁 전에는 나치당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유대인 탄압을 피해, 전쟁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이득을 입은 국가가 미국으로 미국이 전후 과학계의 중심이 되는데는 독일계 과학자들의 공적도 컸다. 그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중립국인 스위스에서조차 위험함을 느껴 미국으로 가지 않았는가. 미국의 로켓 기술은 독일의 V2를 개발한 폰 브라운이 밑천을 닦고. 물론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속담처럼 독일도 완전히 밑천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여전히 과학 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이기는 하지만, 세계 과학계의 중심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특히 수학에서 이런 경향이 심한데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수학의 중심이었던 괴팅겐 대학이 나치로 인해 몰락하고 학자들은 모두 타국으로 가게 된다. 힐베르트는 이런 상황을 보고 괴팅겐에 더이상 수학은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그래도 현재는 순수 과학분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응용과학분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서로 경쟁하며 독일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음악을 듣는데 사용하는 MP3도 알고 보면 독일 '프라운호퍼'의 기술이기도 하다.[62] 말인 즉슨 옛날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의 변방은 아니라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과학기술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퍼붓는 '''미국'''이 버티고 있는 한 옛날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켓기술 분야는 개발진이 미국과 소련, 영국으로 넘어가버렸고 각종 규제도 가해지면서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63]
아인슈타인은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박해받았으며, 결국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히틀러가 핵물리학을 '유태인 물리학' 드립치면서 폄훼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자의 본산이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도 멤버들이 유대계 출신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 끝에 폐쇄되었다. 소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스위스로 도망쳤으며 다른 멤버들도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으로 피신했다. 이 멤버들 중에는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사회과학계의 거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단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유대인의 허접쓰레기 학문'''이라는 규정을 받았고, 나치 집권 이후 처음 열린 심리학 대회에서는 정신분석학 학자들의 참가가 금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된 후 프로이트는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되자[64] 프로이트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오스트리아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문화계로 보면 나치당의 문화 탄압 때문에 독일의 문화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후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출판, 영화, 연극 분야에 활동을 많이 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 영화 산업은 1920년대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 내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 두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 집권 후 괴벨스가 영화 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회사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내게 된다. 독일 영화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견디다 못한 프리츠 랑이나 빌리 와일더 같은 내로라하는 독일 영화 인재들이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으로 망명해버렸다. 후폭풍도 엄청나게 심해서 뉴 저먼 시네마로 대표되는 독일 전후 영화는 나치 독일 영화의 철저한 안티테제를 내세울 정도였다.
연극계는 우익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역시 직격탄을 맞았고, 문학계에서도 <서부전선 이상없다>로 국가공인 좌빨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선고 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좌파 예술인들이 탄압받다 망명했으며, 망명하지 않은 케테 콜비츠는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당했다.[65] 2차대전 시기에는 러시아, 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당한다.
다른 예술 분야에도 나치당의 잣대로 '유대적인 요소'가 들어갔다 선언하면 탄압을 면치 못했다. 히틀러는 자기가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현대 예술을 매우 증오했으며,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 출신 예술가,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공부를 게을리 한 화가 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리고 이것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미술로 분류하고 탄압한 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해석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는 우대했다. 이에 나치는 또한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낙인찍고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주를 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히틀러가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다. 유네스코 문화유산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박살났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도 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학교가 폐쇄되었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도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을 거쳐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은 비록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걸 불쾌하게 여기긴 했어도 이들을 받아들이고 구해내서 제2의 터전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수십만의 유대인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대학 교수급 석학들도 800명이나 빠져나갔는데 이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었다고 한다.[66] 물론 그들이 미국의 과학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67][68] , 실제로 이 당시 미국으로 옮겨간 수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전세계 최고의 8개의 수학연구소 중 3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다.
8. 대외 인식
유일하게 나치 독일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면 다른 국가라면 잊을만 하면 기어나오는 전체주의, 극단주의가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국민들 스스로 깨닫게 해줬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6년간이나 처절하게 한 끝에 독일 본토가 쑥대밭이 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누가 봐도 확실한 패전을 한 덕분에 독일인들은 극단주의 및 전체주의를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는 이상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증거가 네오나치 세력들 뿐만 아니라 극좌파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도 가차없이 조직화되어 사회에 위협을 주는 족족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냉전 시기 극좌파 공산주의 세력들을 가장 철저하게 때려잡은 나라는 프랑스도 미국도 영국도 아닌 서독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의 독일은 '막대한 영토 손실 + 전후 복구 + 승전국의 지나친 배상청구'로 말 그대로 절망의 구렁텅이였다.[69]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죽어가던 나라를 살린 것은 사실이며, 재무장을 하고 라인란트 점령 등으로 독일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라인란트 점령 후 3주 뒤의 총선에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지지율은 '''98.8%'''였다. 그 시점까지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합병 등에서 보여준 강한 모습은 다른 나라들에도 큰 충격을 줘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혼돈이 멈추고 안정되어 보이는 '듯한' 독일을 본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 이쯤에서 평화롭게 해결했다면 오늘날의 비판은 없었고 독재자이지만 혼란을 잘 수습한 유능한 지도자, 제2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독일 제일의 정치가 정도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보다 더 나가서 프랑스 전역 종결 직후, 아니면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후 어떻게든 평화조약을 체결시키고 내치에 힘썼다면 최소 공칠과삼의 지도자로 평가 받았을것이다.
다만 이 단계에서도 경제 회복이란게 빚잔치와 삥뜯기, 이중장부 등으로 만들어낸 마법의 시간에 불과했고, 몇 년 있으면 결국 전부 갚아야 할 운명이었다. 빚내서 키운 군수공업과 돈 잡아먹는 군대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막대한 부를 약속했는데 견실한 경제성장 없이 그 돈을 주려면 결국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부를 빼앗는 방법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침략전쟁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또 다른 해결책은 전부 다 사기였다고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지만, 히틀러가 그럴 리 만무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과 독선으로 이루어진 독재는 개인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을 전세계로 확대시켰으며,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없는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것도 독일 뿐 아니라 전세계의. '히틀러 비판은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 히틀러가 승리했더라면 인권 말살과 인종주의, 그리고 세계적 레벨의 민간인 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물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등 추축국이 연합국에 승리해서 온 세상이 나치와 일제의 지배 하에 떨어졌다면 충분히 권력자에 오른 나치나 일제는 자기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고 찬양하게 강조시키고 모든 국가적 교육에서 자기들 찬양만 해댈 것이 뻔하고 반대는 무조건 숙청 탄압 사형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히틀러 비판이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즉 객관적인 윤리적 도덕적 지표에서 본다면야 히틀러가 설령 승리했다고 쳐도 많은 억압받는 세계 사람들은 겉으로야 처벌과 보복이 두려워 말 못할 뿐 속으로는 히틀러 개새끼 라는걸 다 알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객관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정당화가 아니라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정당화라면 만약 나치가 세계를 지배했을 때 자기네들이 강제적으로 "야 우리가 한게 옳아 아니야?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옳다 라고 얘기해!"라고 강요하면서 억지로 정당화 시킬 수는 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이란 말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이 행위의 결과에 따라 판명될 뿐이란 말이다. 무력이나 협박에 의한 억지 정당화가 결과론적 정당화와 같은 뜻인양 써서는 올바른 논의가 될 수 없다. 차라리 결과론적이란 표현 대신 나치가 이겼었다면 나치에 대한 평가도 역사는 승자의 논리로 쓰여진다는 관점에서 달라졌을 수 있다는 식으로 썼으면 한다.
물론 나치 독일은 국력상 독일의 최전성기 시대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 제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소련 등을 비롯한 막강한 제국들 역시 과대한 군비 지출, 스스로의 모순, 피지배층의 항쟁 등으로 결국 몰락했는데 하물며 앞서 소개한 국가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정신나간 이념과 학살, 테러등을 저지른[70] 대독일제국이 오래 유지될리도 없을 것이고, 전쟁이 벌어지지 않거나 설사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도 그동안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수많은 피지배국 민중의 저항이나, 나치당과 기업간의 정경유착에 의한 각종 부정부패 및 과도한 군비지출 등으로 스스로 몰락했을 것이다.
물론 독일에도 히틀러가 전성기를 열었다는 의견에 동조하는 네오 나치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주장이다. 히틀러가 다스렸던 나치 독일은 그나마 독일 국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을지는 몰라도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국력을 소모한 데다가 많은 국가들을 적으로 돌려 포위되어 수도까지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항복은 하지 않았고 그 대가는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거기다 전쟁 후에는 독일은 연합국에 따라 분할되었고 홀로코스트라는 비인륜적인 짓을 저질러서 한 동안 많은 국가에게 눈초리를 당해야 했던 것과 동시에 독일 국민들 스스로 반성의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는 통일도 꿈도 꿀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의 독일이 더 전성기라고 봐도 좋은데 이들의 주장은 그저 히틀러의 매력에 심취해서 현실을 왜곡한 주장 밖에 들리지 않는다.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학살과 세계적 전범이라는 원죄는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도 독일 전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독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있는 애국심 교육 자체가 없다. 아무래도 자국의 역사를 가르칠 때는 어느 나라나 애국심 보정으로 약간씩이라도 화려하게 치장하기 마련인데, 독일 역사교육 시간에는 감성적인 측면은 철저히 배제하고 진짜 있었던 일 위주로만 가르친다. 심지어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 배울 때는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우리는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면 안된다고 교육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것도 전혀 없다. 국사적인 행사에 무조건 들어가는 국가 합창도 없다(그냥 노래만 틀어주고 따라 부르지는 않는다). 심지어 국제경기에서 독일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행동이 옳은가에 대한 국민적 토론이 벌어질 정도로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국가와 민족, 애국이라는 단어를 교육에서 아예 배제시켰다. 미르야 말레츠키는 국방일보에서 연재 중인 병영 칼럼에서 나는 독일인이라 애국심이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을 정도. '''거의 국민성 자체를 포맷'''한 수준이다.
유럽 재앙의 근본이던 민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요소[71] 를 국민성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고, 이를 자유주의적이며 평화주의적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이었던 동독 체제는 밑에서부터의 반발로 자발적으로 서독에 흡수·합병되었다. 그리고 현재 독일은 전쟁 피해를 받은 국가들의 이의제기 없이, 유럽연합의 지도국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이런 변화는 매우 긍정적이고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민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없애버렸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봉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교육으로 심어진게 아니라 진짜로 자기 나라가 좋아서 애국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인위적인 감정일지언정 그것이 내셔널리즘과는 다른 건전한 방향의 애국주의일수도 있는데[72] , 그런것들을 지나치게 억압하다보니 오히려 그 반발로 닥치고 위대한 독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네오 나치나 네오 파시스트들이 등장한다는 것. 즉 어떤 형태로든 국가나 공동체를 강조하기만 하면 싸잡아서 나치니 전체주의니 하며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이것이 정말 옳은 방향인가'라는 반론들이 꽤 있다.
독일 제3제국이나 히틀러에 대한 현대 독일인의 인식에 대한 관련 기사(이코노미스트) 원본
파괴당할 뻔했던 나치 포스터들이 미국의 대학교에 보존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기사
8.1. 다른 시각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제3세계 국가들이나 칠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나 이란, 아랍 등 중동 몇몇 국가들은 반미나 반서방, 반유대주의라는 관점에서[73]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는 아예 대놓고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여겨 그를 옹호하기도 한다.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지배로 수탈당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국가들 중 독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와 착취에 심하게 시달렸던 국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에 말려들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한 덕분에 이게 이후의 독립에 도움이 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 등 몇몇 중남미 국가들과 이슬람 문화권,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들은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의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자신들에게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했던 모양이다. 이스라엘, 유대인을 증오하는 감정이 강한 곳에서도 히틀러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 반유대주의 문서 참조.
인도에는 아돌프 루 히틀러 마락이라는 정치인도 있다. 부모가 히틀러를 존경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사상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사회이다 보니 각종 독재자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일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인도의 관점에서 영국이 적이면 나치 독일은 적의 적이었다.
유럽의 핀란드(계속전쟁 당시 나치와 동맹을 맺고 협력했다.), 아이슬란드, 발트 3국 같은 국가도 마찬가지. 핀란드, 발트 3국 등은 나치독일의 후원자였고[74]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히틀러가 독립시켜줬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에 시달렸던 발트3국에서도 가끔씩 나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아예 에스토니아 쪽에서 대놓고 나치 친위대를 자유의 전사로 성역화하려 하기도... 그러나 이 나라들은 (발트 3국을 제외하면) 현재 중립적으로 보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대놓고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인 정치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적의 적을 동맹 비슷하게 맺고 공공의 적을 견제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고, 겨울전쟁 당시의 핀란드도 적(소련)의 적(독일)과 손잡고 같이 소련을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핀란드는 제 2차대전 전기 때나 독일과 손잡았지 이후 전쟁 후기에 가면서 전세가 연합국에게 유리해지자 독일과 관계를 끊고 소련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독일군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리고 일본과 손 잡고 인도를 독립시키려던 찬드라 보세만 해도 나치와 손 잡을 준비도 얼마든지 했다. 이들에게 나치나 히틀러는 나쁜 놈이라고 해봐야 우리에겐 영국이 나치이며 윈스턴 처칠이 히틀러와 같다고. 나치에 묻혀서 그렇지, 처칠 또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라크에서 쿠르드인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독가스를 사용하여 학살한 바 있다.
그런데 히틀러도 간디의 비저항 운동에 대해서 '''저항을 멈출때까지 처형하라'''는 막장 해답을 외무장관인 헬리팩스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다. 나치 독일이 비난 받는 이유는 자국민들까지 탄압하고 억압했으며 산업적인 방법으로 체계적인 학살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을 비롯한 식민제국들의 폭압적 지배가 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앞장서서 쌍수를 들고 남의 나라를 침공하던 누구씨들과는 다르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나치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던 국가가 있다는 사실은 전세계적 측면으로 봤을 때 나치의 만행이 더 큰 탓에 묻혔다. 핀란드는 소련에게 먼저 선빵을 맞고 영토를 잃었는데 영국, 미국은 소련과 동맹이어서 독일과 손잡아야 했고 불가리아는 사실상 독일에 종속되다시피 하여 히틀러의 추축국 참전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나라에 따라서는 역사를 얼마나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준 예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제3세계라도 에티오피아 등 추축국에게 제대로 깨강정 된 나라들은 당연히 히틀러, 나치가 악의 축이라고 인정한다.
아프리카에서도 독일 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나 탄자니아같은 경우 독일 식민지 시대에 헤레로족 학살, 마지마지 반란 등 독일군에게 자국 흑인들이 학살당하기도 했었고 나치가 흑인-독일인 혼혈아들을 라인란트 사생아(Rheinlandbastard)라 부르며 박멸 대상으로 삼은 데다, 홀로코스트 문제와 달리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식민지 사과나 보상을 안 해서 이 나라들도 독일과는 사이가 몹시 나쁘다. 심지어 독일 정부가 "나미비아와 탄자니아에서 독일 군대가 직접 안 죽이고 칼라하리 사막에서 굶어죽었다, 현지 흑인들끼리 서로 싸움질하다 공멸해 죽은 사망자들이다"라는 식의 망언들을 하자 나미비아와 탄자니아에서는 나치 시대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꺼내며 "유대인과 집시도 직접 독가스로 안 죽이고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보내서 거기서 죽었냐?"라고 맹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중남미에서도 독재 정권이 나치와 연계되었다는 점 때문에 8~90년대 민주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나치를 혐오한다.
반서방 국가이고 추축국으로부처 피해를 받지 않아 나치를 그리 부정적으로 볼 필요기 없는 나라도 각국 정부 차원에서 반서방이면서 반추축국 진영인 (예 : 중화민국[75] )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흑역사로 취급하며 오히려 눈치를 보아서라도 나치 관련 인사를 처벌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서 괜히 러시아 눈치를 안 보고 나치를 옹호했다가는 상임이사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서 외교적으로 매우 곤란해지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놀랍게도 현존하는 네오 나치들 가운데 '''상당수가 러시아에 있다.''' 이들 신 나치주의자는 사실 아리안민족의 추종보단 일종의 백인우월주의자에 가깝지만, '''정작 그들이 추종하는 히틀러는 러시아 민족인 슬라브족을 말살하려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국영신문인 이타르타스에서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가득 받은 노병이 승리의 날 행사에 참여하며 우는 사진과 같이 나치식 경례를 하는 러시아인 네오 나치를 같이 싣으며 '''조상의 무덤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신 나치들이 한국 교민 등 여러 유학생과 투자가를 공격하고 더군다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는 누구의 집인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아파트를 공격하여 황인종 처녀를 신성한 백인의 씨를 밭에 뿌려준다며 윤간하여 임신시키기도 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들이 우익집단이란 이유로 못본 척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투자가나 관광객 등이 중요해지자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현장에서 네오 나치를 신나게 패주고 연행하는 강압책을 보여주며 제재할 필요성을 느낀 듯 하다.
자동차계 에서는 히틀러가 은근 옹호를 받고있는데, 그 이유가 폭스바겐의 전설 '''폭스바겐 비틀'''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기 때문(...) 그로 인해 당시 독일의 국민차는 비틀이였으며 그때 당시 차에는 앞에 엔진이 있고 후륜구동이였는데 뒤에 엔진이 있고 후륜구동을 최초로 채택한 자동차이기도 하다.
9. 정치
9.1.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
9.2. 일당 독재
나치 독일은 바이마르 체제를 외견상 유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와해했다. 나치당은 독일을 일당 독재 국가로 만들었으며, 아무리 사소한 단체라도 나치당 이외의 정치 결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우선 독일 사민당, 독일 공산당 등의 '''라이벌 정당들은 나치의 집권 즉시 해산되었다.''' 이는 우익 정당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였는데, 철모단 같이 나치와 비슷한 성향이고 공투도 했던 극우 정당, 툴레 협회와 같이 초창기 나치에 큰 도움을 주었던 우익 비밀 결사도 존속하지 못했다. 기존의 모든 정당을 해산한 후에 나치당 이외의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원제 의회는 해산되어 단원제 의회로 개편되었고, 선거는 나치당이 국회의원 후보 명단을 제출하면 찬반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치러져 찬성률 90%로 전석을 나치당이 채울 수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정작 나치당의 지위는 모호했다. 초기에는 나치당의 지위를 공법인으로 하여 법률적으로 국가 사상의 담당자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942년 12월 12일 명령에 따라서 나치당의 지위를 정의한 모든 법률을 삭제했다. 당과 국가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이후에도 종종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최후까지 나치당은 모호한 상태로 남았다.
나치당의 세계관에서 당은 국가와 같이 지도자 원리를 구현하는 조직이었으나, 동시에 국가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겼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관청과 관료 정치를 이용하여 나치당에 주어진 사명을 경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0. 대외 관계
11. 대중매체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함께 대중 매체의 주적을 도맡는 5대 필수요소로 활동한다. 가끔 나치 좀비 같이 두 막장 요소를 섞어놓은 때도 있다.
거의 모든 작품에선 현실과의 큰 차이가 없이 세계정복을 꾀하고, 가끔씩은 오컬트에 심취해있는 모습[76] 으로 대부분 '''나치 독일을 최대한 부정적으로, 온 세계의 악이란 악은 죄다 모아둔 이미지로 묘사'''하는 등, 환타지 집단이다. 위의 나머지 4대 악의 세력들이 그나마 몇 작품이나 잠시라도 주인공을 맡을 여력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치 독일은 주인공이 되는 일이 거의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개판인 역사를 그대로 따라간다.''' 나치 독일은 대체역사물을 빼면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어떤 작품에서든 절대 못 이기고, 그 대체역사물에서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패배하게 되거나 패배의 운명이 기다린단 암시를 맞이한다.
가끔 대체역사물이나 판타지 세계관에서 현재진행형인 강대한 세력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도 '언젠가는 멸망시켜야 할 악의 제국', '비정상적인 광기의 제국'등의 모습으로 묘사되지 '정의의 우리편'으로는 결코 묘사되지 않는다. 가끔 나치 독일의 후예나 후신을 자처하는 존재(네오 나치라든가)도 나오는데 이 역시도 절대 좋은 대접을 못 받는다. 다만 레드 오케스트라나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히어로즈 & 제너럴, 세계 정복자2, 3와 같은 게임에서는 밸런스와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나치 독일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문명 5는 지도자가 비스마르크로 나오고 종특은 야만인을 흡수하고 지상군 유지비가 감소하는 것으로 대놓고 나치 느낌이 나진 않지만 산업/현대시대에 이념중 독재를 선택하면 간접적으로 나치 흉내를 낼 수는 있다.
'''당사국인 독일에서 나치 독일 관련 매체는 엄청난 검열을 거쳐 출시된다.''' 애초에 독일의 매체의 폭력성에 대한 검열 기준이 빡세지만 나치 독일 관련 매체는 더 그렇다. 애초에 매체에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에 알레르기처럼 반응하는 것이 나치 시절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마저도 은근히 나치 독일과 관련된 것들은 최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아예 삭제해 버리거나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하켄크로이츠를 평범한 철십자로 바꾼다거나.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의 특성상 사실상 '주인공 국가'인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도 독일어판은 나치 관련 인사들은 개명되었고 사진은 삭제되었고[77] 4편에서는 이름은 그대로 나오는 대신 A급 전범들의 사진이 검열되었다.[78] 그나마 제작사인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하켄크로이츠 대신 제2제국 국기와 철십자를 쓰는 등 최대한 나치색을 빼려 노력했음에도 이놈들이 그 동안 벌인 짓거리가 워낙에 엄청나서...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이상하게도 피해국인 듯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덕분에 렐릭 엔터테인먼트가 나치가 아니냐는 말도 나올 정도였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또 레드 오케스트라 시리즈,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 히어로즈 & 제너럴, 데이 오브 디피트, 세계정복자 시리즈, Hearts of Iron 시리즈 등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마음대로 나치 독일을 선택해 플레이가 가능하다. 이것은 나치 독일을 병적으로 혐오하는 독일을 비롯한 온갖 서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게임 플레이어들은 나치 독일을 플레이할 수 있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아인슈타인이 과거로 가서 히틀러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소련이 나치 독일 역할을 맡아 미국&유럽을 침공한다.
마블 코믹스에서는 나치의 초과학 수준이 40~50년대는 커녕 2099년에서도 OP로 보일 정도로(스파이더맨 2099의 반응) 굉장한 초과학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까지 세계 곳곳에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조직이자 아직까지 활동 중이다. 문제는 이런 슈퍼 오버 테크놀로지를 지니고도 어벤저스, 특히 캡틴 아메리카에게 심심하면 털린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파놓은 기지만 수만 개로 추정 중.
코믹스 헬보이에서도 전쟁 전부터 수많은 유물들을 긁어 모았고 오컬트 집단, 흡혈귀, 외우주의 존재를 끌어들였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의 훈테 성에서 외우주의 존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로켓을 발사하는가 하면, 히틀러는 화염 계열 능력자인 블랙 플레임을 포섭하였다. 또한 전쟁에서 패하기 직전 흡혈귀들의 뒤통수를 치고 복제 흡혈귀를 모스크바와 워싱턴에 쏘아 보내는 흡혈귀 폭풍(Vampirstrum)작전을 기획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묵시록의 붉은 용으로 비유되는 오그드루 자하드를 소환해서 세계 자체를 멸망시킬 뻔 했다.[79] 독일이 패망한 이후 잔당들은 남미로 도망갔다. 다만 세계 곳곳에 비밀 연구소를 마련해두어 심심할 때마다 연구소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
강철의 왈츠에서는 D국으로 등장하며(글로벌 서버를 제외한 중국, 국내, 태국, 일본 서버), 전차야수에게 털렸다. 물론 F국인 프랑스는 독일에게 점령 당하지 않은 상태. 단, 서독군에서 운용했던 장비까지 나오는걸 보면 나치독일과 그 이후 서독까지 포함된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머신게임즈가 개발을 맡은 울펜슈타인 시리즈[80] 에서는 데스헤드가 역설계한 오버 테크놀로지 덕분에 1946년에 전쟁에서 승리, 세계 정복[81] 에 성공했지만 1960년에 14년 동안 코마 상태에 있던 나치 백정이 깨어나면서 연구 시설이 박살 나고 기껏 달에 건설한 기지도 전멸해 무인화되고 영국에서 공포정치를 할때 운용하던 '런던 감시자'가 개박살나는것으로 모자라서, 데스헤드마저 목숨을 잃게되는 대참사를 겪는다. 그걸로 모자라서 후속작에서는 금성의 나치 기지가 개박살나는데다가 미국 로스웰에 있던 핵 기지는 완전히 파괴되고, 나치가 자랑하던 공중전함인 아우스메르처를 주인공 일당에게 빼앗기는것도 모자라서 프라우 엥겔 장군은 생방송에서 처참하게 난자당하는 꼬라지까지 보여주는등 엄청난 악재를 계속 겪게된다. 기어이 전세계에서 저항운동이 거세지면서 외전작인 울펜슈타인 영블러드에서는 본토가 있는 서유럽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가 나치독일의 세력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을정도로 골골대는중.
만화 블리치에선 반덴라이히의 모티브가 나치 독일이라고 한다.
소설 유녀전기에서 주인공이 속한 국가인 라이히의 모티브는 나치 독일이라 '''추정'''하는 자들이 있다. 작가 본인은 세계 1차 대전의 독일 제국이 모티브라고 주장한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가끔씩 등장. 과거 회상이나 역사 비디오 등에서 나오는데 물론 항상 사악한 이미지로 나온다. 그런데 번즈사장은 나치부역자여서...[82] 극중극 이치 앤 스크래치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2차세계대전당시 대독 선전용으로 이치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히틀러의 목을 잘라서 축구를 하거나, 루즈벨트의 연설을 하는 스크래치를 이치가 죽이자 탱크를 탄 히틀러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는 등 심슨 답게 우스꽝스럽게 나온다.그래도 메기가 TV에서 나온대로 나치식 경레를 하자 웃다가 바로 정색하며 메기의 팔을 내린다.
일본 극우물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집단으로, 일본 극우물의 공통적 특징인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위해 나치에게 모두 전쟁범죄를 뒤집어씌우기 때문이다.
대중매체 속의 나치 독일 캐릭터들을 더 알아보고 싶다면 Deutsche Soldaten Wiki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게임, 영화, 만화 가릴 것 없이 나치 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제국 관련 캐릭터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적지만 네오나치 캐릭터 항목들도 있다. 해당 위키는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을 신봉하는 위키가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 것. 다만 단순히 나치풍이거나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는 등재 대상이 아니다.[83]
실제 나치 독일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Plague Inc.에선 독일이 덴마크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같이 묶여 나왔다. 이로 인해 몇몇 뉴저들이 나치 독일을 연상케 한다고 한다는 말이 있었다.
소녀전선, 벽람항로, 전함소녀 등의 의인화 게임으로 나치 독일군의 장비들을 모에화[84] 까지 하였다. 특히 소녀전선의 MP40과 MP41은 SS 복장을 하고 있다.[85]
11.1. 창작 매체
- 가밀라스 - 우주전함 야마토
- 검은 토끼부대 - 인피니트 스트라토스
- 게르마니아(가르트란트) - 세이버 마리오넷
- 게르마니아 제국 - 종말의 이제타
- 게젤샤프트 - 아카츠키 전광전기
- 겔러트 그린델왈드 - 해리포터 시리즈
- 고양이 -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86]
- 나치 좀비 - 콜 오브 듀티 시리즈, 스나이퍼 엘리트 시리즈, 사우스 파크: 진리의 막대, 울펜슈타인 시리즈, 데드 스노우
- 노스파이어 - 브이 포 벤데타
- 달 나치 - 아이언 스카이
- 달렉 - 닥터후
- 도쿠츠 제3제국 - 대제국
- 데크토니우스[87] - 은하!
- 독이츠 3제국 - 절대가련 칠드런
- [88]
- 동유럽 연합제국 - 전장의 발큐리아 시리즈[89]
- 디 벨레 - 디 벨레[90]
- 라스트 바탈리온#s-3.4 - 페르소나 2
- 라이히-5 - 겁스 무한세계
- 렙틸리언 - V
- 로젠크로이츠 올덴 - 트리니티 블러드
- 루돌 폰 슈트로하임 -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 전투조류
- 리브리아 - 이퀼리브리엄
- 리처드 3세의 군대 - 리처드 3세(영화)
- 마레 - 진격의 거인[91]
- 망치제국 - The Wall, Pink Floyd - The Wall
- - 메카니아: 초국가[92]
- 미국 - 폴아웃 시리즈[93]
- 미테란트 공화국 - 강철의 누이들
- 메탈 블러드(철혈) - 벽람항로[94]
- 모덴군 - 메탈슬러그 시리즈
- 모르도르 - 반지의 제왕
- 바르베르데 공화국 - 전희절창 심포기어 시리즈
- 반덴라이히 - 블리치
- 배틀 노트 - GALZOO 아일랜드
- 백귀 제국 - 겟타로보G
- 범 독일 연합(Pan-German Union)[95] - 젠틀맨 리그
- 벨카, 에루지아 - 에이스 컴뱃 시리즈
- 블랙윙 - 메이플스토리
- 블랙홀 군, 아이언 리전 - 패미컴 워즈
- 비밀결사 참새의 눈물 - 크레용 신짱(액션가면)
- 사이코 커맨더 - 유희왕/OCG
- 성창 13 기사단 - Dies irae
- 세계연합정부 - 하우스키퍼
- 쇼커, 바단 - 가면라이더 시리즈
- 아마겟돈 스틸 리전[96] - Warhammer 40,000
- 아메스트리스 - 강철의 연금술사[97]
- 아르투로 우이의 갱단 -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할 수 있는 출세[98]
- 오르테 제국 - 드리프터즈
- 오세아니아 - 1984[99]
- 우주혁명군 - 기동신세기 건담 X
- 은하제국, 퍼스트 오더 - 스타워즈 시리즈[100]
- 은하제국 - 은하영웅전설
- 제4제국 - 메트로 유니버스
- - 유녀전기[101]
- 제르마 왕국, 임펠 다운, 신 어인 해적단, 갈츠버그 - 원피스
- 제정 카를스란트[102] - 스트라이크 위치스
- 지구 집정 연합 - 스타크래프트 시리즈[103]
- 지온 공국, 네오지온 -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 철십자 군단, 미케네 제국 - 마징가Z, 그레이트 마징가
- 최후의 대대 밀레니엄 - 헬싱
- 추축군 - DUST
- 캐노피 왕국 - 스컬걸즈
- 쿠로모리미네 여학원 - 걸즈 앤 판처[104]
- 타산·엘페고트 - 에빌리오스 시리즈
- 토메니아(쌍십자당) - 위대한 독재자
- 툴레(Lass) - 3days, 11eyes
- 판도라즈 액터 - 오버로드(소설)
- 프럴린 제국 - 아키 블레이드
- 프레더릭 농장 - 동물농장
- 하코넨 가문 - 듄 시리즈
- 헬가스트 - 킬존 시리즈
- 라스트 바탈리온 - 페르소나 2
- SCP-1678 - SCP 재단
- 혼노지 학원 - 킬라킬
- 흑십자군 - 비밀전대 고레인저
- Be Prepared - 라이온 킹 시리즈[105]
- D국 - 강철의 왈츠
- HYDRA - 마블 코믹스
- 아넨에르베 암흑군단, 초상존재특별사령부(SKP) - SCP 재단
11.2. 나치 전문(?) 배우
- 토마스 크레취만: <스탈린그라드(1993)>, <스탈린그라드(2013)>, <아이히만>, <인 트레짓>, <U-571>, <인 에너미 핸드>, <몰락>, <피아니스트>, <작전명 발키리>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다. 심지어 <어벤져스 에이지 울트론>에서 하이드라의 수장 역을 맡는데 이 하이드라라는 가공의 조직이 나치를 따르는 집단이다.
- 브루노 간츠: 영화 몰락에서 아돌프 히틀러 역을 맡았다. 말 그대로 짧고 굵은 히틀러 하면 생각나는 배우.
- 크리스티안 베르켈: <몰락>, <블랙북>, <안나 성당의 기적>, <작전명 발키리>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다.
- 마티아스 하비히: <에너미 엣 더 게이트>, <몰락>에서 각각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히틀러의 주치의를 맡았다.
- 막시밀리안 셸: <젊은 사자들>에서 매사 의욕 있게 행동하는 보병장교인 하르덴베르크 대위를, <철십자 훈장>에서 무능하고 오만한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머나먼 다리>에서 SS 기갑군단장 빌리 비트리히 SS 대장을 연기했다.
- 발데마르 코부스: <슈타우펜베르크>, <블랙북>, <더 캡틴>에서 나치 장교를, <작전명 발키리>에서 베를린 경찰청장 헬도르프 백작을 맡았다.
- 볼프강 프라이스: <지상 최대의 작전>, <대열차 작전>,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안지오의 영웅들>, <머나먼 다리>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다. <롬멜 습격 작전>에서는 에르빈 롬멜 원수를 연기했다.
-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몰락>, <안나 성당의 기적>, <작전명 발키리> 등에서 히틀러의 속기사, 나치의 선전 아나운서, 나치 타자수를 맡았다.
- 제바스티안 코흐: <블랙북>, <슈타우펜베르크>에서 나치 장교를, TV영화인 <슈페어와 그>에서 알베르트 슈페어를 연기했다.
- 제임스 메이슨: <사막의 여우 롬멜>에서 에르빈 롬멜 원수를, <철십자 훈장>에서 주인공 슈타이너 원사의 상관인 브란트 연대장을 연기했다.
- 카를 오토 알베르티: <대탈주>,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에서 SS 장교, <벌지 대전투>에서 마틴 헤슬러 대령의 부하인 디펠 소령, <공군 대전략>에서 공군 참모총장 한스 예쇼넥 상급대장, <켈리의 영웅들>에서 SS 전차장을 연기했다. <롬멜 습격 작전>에서는 롬멜의 부하인 아프리카 군단의 대위 역을 맡았다.
- 쿠르트 위르겐스: <상과 하>, <악마의 장군>, <지상 최대의 작전>, <철십자 훈장 2>에서 모두 나치 장교를 맡았고, <공군 대전략>에서는 나치 외교관 리히터 남작을 연기했다.
- 하르티 크루거 (Hardy Krüger) : 1928년 베를린 출생으로, 전쟁 당시 강제 가입이던 히틀러 유겐트 단원이었다. <산타 비토리아의 비밀>, <머나먼 다리> 등 여러 영화에서 나치 장교 역할을 했다.
- 한스 크리스티안 블레흐: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독일군 제352보병사단 소속 베르너 플루스카트 소령을, <벌지 대전투>에서 마르틴 헤슬러 대령의 당번 부사관인 콘라트 상사를 연기했다. <레마겐의 철교>에서는 마을 초등학교 교장 출신의 카를 슈미트 대위 역을 맡았다.
12. 관련 인물
13. 용어 및 사건
- 1936 베를린 올림픽
- 고트글로이비히: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일종의 이신론 운동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국가판무관부
-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 군정청
- 게르마니아
- 게슈타포
- 나치
- 나치 독일의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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