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1. 소개
르네상스 시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로 "독일 미술의 아버지",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로 존경을 받는 인물로 특히 그의 자화상과 판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알브레히트 뒤러와 금세공사의 딸인 바바라 뒤러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그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딩시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중요한 교역도시로 그의 아버지 및에서 금세공기술과 그리는 실력을 배운 그는 당시 관습에 따라 미하엘 볼케무트에서 수년 동안 견습한 후 1490년에서 1494년에 라인강 지대를 여행하게 되고 거기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과 그 모사본을 목격하게 된다. 결혼 후 그는 다시 배움에 대한 욕구에 가득차게 되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2] 뒤러는 여행 후 게속해서 명성을 쌓아서 이탈리아에서 처럼 귀족가 동등한 예술적 창작자라는 이념을 독일에 퍼뜨렸고 이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가 후원을 받았다. 그 후 중년 시기 네덜란드를 여행해 카를 5세가 모은 신대륙의 보물들을 보고 기적보다 아름다웠다고 평가 받았지만 당시 신대륙에서 온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평생동안 그 병을 앓다고 1528년 사망하게 되었다.
3.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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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기도하는 손이다. 이 작품은 잘못된 알려진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가난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뒤러와 그의 친구 한스 나이스타인은 왕립 미술학교 입학금을 사기꾼에서 사기 당해서 입학금을 내기 위해 일과 그림을 병행하여야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먼저 그림을 공부하고 그 후 남은 사람이 그 후를 미술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뒤러가 먼저 그림을 배우고 한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묵묵히 뒤러에게 지원금을 보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채석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그의 손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널리 명성이 알려진 뒤러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스를 찾아간다. 거기서 자신이 온 지 모른 체 기도하는 한스를 보았다. 한스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의 손은 노동으로 인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친구 뒤러가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를 본 뒤러는 눈물을 흘리고 감명을 받아 그의 손을 그린 작품이 이 기도하는 손이다.
4. 여담
그의 사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뒤러의 고향에서 개최하게 되는 데 후베르트 란칭어는 뒤러의 작품 기사,죽음,악마를 모티브로 해서 히틀러를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만들었고 그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독일 정신의 정신적 지주라는 평을 더욱더 확산 시키게 되었다.
나치이미지가 많이 박힌 뉘른베르크는 히틀러 대신 뒤러라는 캠페인을 벌여서 나치의 도시가 아닌 뒤러의 도시로 기억되기를 원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소재 기업인 파버카스텔의 고급 수성 색연필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이름을 따서 팔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