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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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 기마상, 안토니 판다이크, 1620년
갑옷을 입은 카를 5세, 산 후안 데라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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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군주로서의 이미지[76] 참고로 합스부르크 왕가주걱턱이 집안 내력.[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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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 시절 최전성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럽 내 강역(16세기 중엽)[78]
'''노란색''':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에게서 상속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영토. 카를 5세는 1521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 통치를 맡기면서 오스트리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카를 5세의 직접 영지였던 시기는 2년 정도에 불과하다. 1526년에 제국의 경계 바깥의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포함되었는데 이 합병은 카를 5세 치하에서 이루어졌으나 합병의 주체는 카를 5세가 아닌 페르디난트 1세였다. 때문에 위의 지도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주황색''':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79]에게서 상속받은 베네룩스 저지대(플란데런) 및 로트링겐(부르고뉴) 영토.
'''빨간색''':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에게서 상속받은 아라곤, 발렌시아,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사르데냐 영토.
'''자주색''': 외할머니 이사벨 1세에게서 상속받은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영토 및 카를 5세 당대에 정복한 북아프리카 전진기지.
'''검은선 안쪽''':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명목상의 영토. 그러나 본인의 직접 상속 영지를 제외한 연한 노란색 지역에서 실질적인 통치권은 없었다.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 중 일부는 신교도가 되어 종교전쟁에서 카를 5세와 전쟁을 치른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연한 노란색 영토는 그의 간접적인 영토라고 하기도 민망한 지역이 되어 버렸다.
검은 점들: 당시 유럽아프리카 정복지의 주요 도시들이다. 다만 포르투갈아내 덕분에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같이 본다. 이게 생각보다 작은 거 아닌가 싶을 수 있겠지만, 당시 유럽중국을 제외한 어느 지역보다 인구밀도와 개발도가 높았고 저지대의 도시 하나가 금, 은이 쏟아지던 남미 전체 수입과 맞먹는다 할 정도였으니,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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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카를 5세 (Karl V)[1]
'''출생'''
1500년 2월 24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헨트
'''사망'''
1558년 9월 21일 (58세)
스페인 유스테
'''재위'''
신성 로마 황제, 독일왕, 이탈리아 국왕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1516년 1월 23일 ~ 1556년 1월 16일
오스트리아 대공
1519년 1월 12일 ~ 1521년 4월 28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군주, (명목상의) 부르고뉴 공작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배우자'''
포르투갈이사벨라
(1526년 결혼 / 1539년 사망)
'''자녀'''
펠리페 2세
마리아
후아나
마르가리타
돈 후안(사생아)
'''아버지'''
펠리페
'''어머니'''
후아나
'''형제자매'''
레오노르
이사벨
페르디난트 1세#s-1
마리아
카탈리나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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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그의 타이틀
3. 유년 시절
4. 스페인 왕위 계승
5. 스페인 통치
6. 아메리카, 필리핀 정복과 착취
7.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8. 신성 로마 제국 통치 -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리 통치
9. 이탈리아 정복과 대프랑스 전쟁
10.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10.1. 보름스 회의
10.2. 슈파이어 항의와 슈말칼덴 동맹
10.3. 소강기
10.5. 개신교 동맹의 역습 (Fürstenaufstand)
10.6. 카를 5세의 좌절과 평화의 도래
12. 카롤리나 법전 공포
13.1. 티치아노와의 인연
14. 후계자 문제 및 퇴위
15. 평가
15.1. 종교적 측면
15.2. 군사적 측면
15.3. 경제적 측면
15.4. 종합적 평가
16. 언어
17. 부인과 가족관계
18.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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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LUS ULTRA(보다 먼 곳으로)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2], 이탈리아의 군주 등 국경을 초월한 여러 직함을 갖고 있는,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이다.(자세한 것은 아래 본문 참조)
군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모와 조상의 덕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받은 '대단한 상속자'로 기록되는 인물. 친가와 외가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아 카롤루스 대제나폴레옹 사이 약 1,000년 동안의 기간 중에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어머니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후아나 공주, 아버지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3]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이던 필리프 공(펠리페 1세)[4]이다. 이처럼 화려한 친외조부모님 덕분에 카를 5세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상속받는 행운아가 되었다. 훗날 대영제국이 표방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인 셈[5].
약 40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재위에 있었던 카를 5세는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곡점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유럽 곳곳에 산재한 워낙 방대한 면적의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16세기 전반기의 유럽사를 얘기할 때 그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종교개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신대륙 정복,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의 한 복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영지에 따라서 칭호는 카럴 1세(플란더런, 네덜란드), 카를로스 1세(카스티야-레온), 카를레스 1세(아라곤-시칠리아)[6], 카를로 4세(나폴리), 카를 1세(오스트리아), 샤를 2세(부르고뉴) 등등 저마다 제각각이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그의 대표작위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불린다. 과거 다른 명칭으로 불렸던 현지에서도 최근에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카를의 현지 표현 +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5세(Carlos V)'[7][8]라 표기하는 식이다. 스페인의 관광지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본 항목에서도 카를 5세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2. 그의 타이틀


카를이 보유했던 공식 타이틀은 아래와 같다.
Charles, by the grace of God elected Holy Roman Emperor, forever August, King in Germany, King of Italy, Castile, Aragon, Leon, both Sicilies, Jerusalem, Navarra, Grenada, Toledo, Valencia, Galicia, Majorca, Sevilla, Sardinia, Cordova, Corsica, Murcia, Jaen, the Algarves, Algeciras, Gibraltar, the Canary Islands, the Western and Eastern Indies, the Islands and Mainland of the Ocean Sea, etc. etc. Archduke of Austria, Duke of Burgundy, Brabant, Lorraine, Styria, Carinthia, Carniola, Limburg, Luxembourg, Gelderland, Athens, Neopatria, Württemberg, Landgrave of Alsace, Prince of Swabia, Asturia and Catalonia, Count of Flanders, Habsburg, Tyrol, Gorizia, Barcelona, Artois, Burgundy Palatine, Hainaut, Holland, Seeland, Ferrette, Kyburg, Namur, Roussillon, Cerdagne, Zutphen, Margrave of the Holy Roman Empire, Burgau, Oristano and Gociano, Lord of Frisia, the Wendish March, Pordenone, Biscay, Molin, Salins, Tripoli and Mechelen, etc. etc.
'''카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임명된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독일, 이탈리아의 왕,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시칠리아 열도, 예루살렘,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마요르카,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하엔, 알가르베,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카나리아, 서인도와 동인도, 섬들과 대양의 메인랜드의 왕, 기타 등등등. 오스트리아대공, 부르고뉴, 브라방, 로트링겐[9], 슈타이어마르크, 캐른텐, 크라인, 림부르크, 룩셈부르크, 겔데른, 아테네, 네오파트리아, 뷔르템베르크공작, 슈바벤, 아스투리아카탈루니아의 공[10], 알자스의 영주[11] 플란데, 합스부르크, 티롤, 고리치아, 바르셀로나, 아르투와, 부르고뉴[12], 에노, 홀란드, 제일란트, 페레테, 키부르크, 나무르, 로씨용, 세르다뉴, 저트펀의 백작, 부르가우, 오르시타노와 고르치아노의 신성 로마 제국의 후작, 프리지아, 벤디세 마르크, 포르데노네, 바스크, 몰린, 살랭, 트리폴리, 메헬렌의 군주, 기타 등'''[13]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image]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문장과 타이틀 목록 '''
문장
타이틀
즉위
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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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다뉴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8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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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반트 공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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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부르크 공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로트링엔 공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나무르 후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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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아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에노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제일란트 백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부르고뉴 궁중백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6년 2월 5일
[image]
부르고뉴 공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6년 1월 16일
[image]
홀란드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룩셈부르크 공작
카를 3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플란데런 백작
샤를 3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겔데른 공작
카를 3세
1543년 9월 12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저트펀 백작
카를 2세
1543년 9월 12일
1555년 10월 25일
[image]
카스티야,레온의 왕
카를로스 1세
1516년 3월 24일
1556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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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시칠리아의 왕
카를레스 1세
1516년 3월 24일
1556년 1월 16일
[image]
바르셀로나 백작
카를레스 1세
1516년 3월 24일
1556년 1월 16일
[image]
나폴리 왕
카를로 4세
1516년 3월 24일
1554년 7월 25일
[image]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1세
1519년 1월 12일
'''1521년 1월 12일'''[14]
[image]
로마 왕
카를 5세
1519년 6월 28일
1530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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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1519년 6월 28일
1558년 2월 24일
사실 어마어마해보이는 문장이지만 뜯어보면 생각보단 간단하다. 일단 공작급 이상의 작위(공작~왕)만 문장에 포함되어있다. 또한 대각선 대칭으로 같은 문장들이 배치되어있어 시각적으로는 뻥튀기 기법이다(...). 좌우 기둥 문양은 지브롤터 해협, PLVS VLTRA는 "더 멀리 나아간다" 즉 당시 유럽의 서쪽 끝을 상징하는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더 나아간다 라는 의미. 카를 5세 때 도안하고 현재 스페인 국장에도 계속 쓰이고 있는 문장이다.
그의 이름은 다양하게 발음되었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인 명칭이 카를 5세와 카를로스 1세인데, 스페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로 황제로서의 직함인 카를 5세(Karl V)라 부른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도 외국인 관광객 등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3. 유년 시절


카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 미남왕 필리프 대공과 스페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공주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미남왕 필리프 대공은 어머니(카를의 할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죽은 후 그 영지를 물려받아 부르고뉴 대공이 되었고, 막시밀리안 1세의 뒤를 이어 장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카를의 어머니 후아나 공주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및 나폴리 등의 국왕인 이사벨라 1세의 딸이었다.
카를은 아버지인 미남왕 필리프 대공이 부르고뉴 공국을 다스리고 있던 시절인 1500년 부르고뉴 공국의 영지인 플란데런의 헨트(겐트, Ghent)에서 태어났다. 카를이 네 살 때인 1504년 외할머니인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1세가 사망하자 카를의 부모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러나 후아나의 광기가 심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과 그의 누나 레오노르, 여동생인 이사벨라 3남매를 부모와 함께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고 플란데런에 남겨 고모인 마르가레테(마르가레타, 마가렛; 독일어 Margarete von Österreich, 네덜란드어 Margaretha van Oostenrijk, 영어 Margaret of Austria)[15]가 양육하도록 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의 부모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동왕이 되었지만 아버지 필리프(=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은 카스티야의 왕이 된 지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고, 카를의 모친인 후아나 역시 정신병이 악화되어 외할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스페인 현지에 유폐되고 말았다. 때문에 카를은 어렸을 때 양친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이 자랐다. 그러나 카를은 플란데런에서 고모 마르가레테의 보살핌 속에 친남매 및 사촌들과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부족함 없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1506년 아버지인 미남왕 필리프(=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가 스페인에서 급서[16]하자 카를은 아버지의 영지인 부르고뉴(부르군트) 공국을 물려받아 부르고뉴 대공이 되었다.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영토인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 지역 외에도 비옥한 저지대 베네룩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지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이 아직 성년이 아니었으므로 부르고뉴 의회는 그의 고모 마르가레테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그리하여 카를이 15세가 될 때까지는 마르가레테가 섭정으로 부르고뉴를 다스렸다. 카를은 그 지역 관행으로 성년이 된 1515년 마침내 성년이 되어 직접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2년 후 스페인을 다스리기 위해 떠나게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마르가레테가 계속 대리 통치하게 된다. 마르가레테는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도발에도 당당히 대응했다. 물론 배후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507년에는 브뤼셀 교외에 새로 지어진 메헬렌 궁전(Palace of Mechelen)으로 친남매 및 고모 가족들과 함께 이주했다. 17세 때 스페인 국왕이 되어 떠날 때까지 카를은 메헬렌 궁전에서 살았다.
고모 마르가레테는 카를에게 사실상 부모와 같은 존재였고 그의 인격과 장차 제국을 다스릴 지도력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마르가레테는 장차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될 카를의 양육에 각별한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카를에게 직접 읽기, 쓰기, 역사, 통치학, 종교, 언어를 가르쳤으며, 당대의 대석학인 에라스무스와 아드리안 주교 등을 가정교사로 들여 카를이 착실하게 제왕학 수업을 받도록 했다.
마르가레테는 카를에게 현실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술을 전수해 주는 역할도 했다. 그 한 단면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나갔을 때였다. 프랑수아 1세와 경합을 하고 있던 카를은 독일의 대상인인 푸거 가문을 통해 거액의 자금을 융통하여 선제후들을 매수해 황제가 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실제로 카를의 배후에서 이러한 전략을 획책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바로 고모 마르가레테였다. 그녀가 직접 푸거 가문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융자해와서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렸던 것이다. 사실 전쟁이나 선거 등 큰 일이 있을때마다 푸거 가문에서 자금을 융통하여 통치에 활용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카를의 선조들이 이용했던 방법이었다. 또 마르가레테는 카를이 스페인 왕위에 오를 때도 큰 역할을 했다. 레콩키스타를 거치며 유럽의 그 어느 지역 보다도 민족 의식이 높았던 스페인에서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디난트 1세(페르난도)를 차기 왕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고 스페인의 왕위가 비었을 때, 마르가레테는 가문의 힘을 동원하여 발빠르게 움직여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페르난도 2세가 죽었고 후계자 문제로 잠시 혼란을 겪을 때 합스부르크 가문이 재빨리 개입하지 않았다면 스페인 왕위는 페르디난트에게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4. 스페인 왕위 계승


카를의 외조부모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라 1세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면서 두 나라는 동군연합이 되었으나, 두 나라는 기존의 정치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역시 두 나라 별도로 이루어졌다.
1504년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 1세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유일한 딸인 후아나 공주가 카스티야 왕국의 유일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아나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인 부르고뉴 대공 미남왕 필리프가 공동왕의 지위를 주장했고, 한편으로 그동안 사실상 아내 이사벨라 여왕과 함께 카스티야를 공동 지배해온 페르난도 2세 역시 후아나의 정신 이상을 명분으로 자신이 섭정 통치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의회는 오랜 논의 끝에 1506년 후아나의 남편 미남왕 필리프 대공을 공동왕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필리프 대공은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에 즉위하였다. 후아나는 명목상 공동왕이었지만 통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펠리페1세가 사실상 단독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펠리페1세는 즉위한 지 2달 만에 갑작스레 사망하게 되었고, 통치 능력이 없는 후아나가 단독 여왕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에도 페르난도 2세가 독살했다는 소문도 파다했고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다. 그리고 필리프 사후 그를 매우 사랑했던 후아나의 정신이상 증세가 극도로 악화된다.
1506년 펠리페 1세가 사망하자 합스부르크 가문 측에서는 펠리페 1세의 계승권을 가진 장남 카를이 왕위를 물려받아 후아나와 함께 공동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아나 여왕이 정신이상으로 통치 능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카를도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왕이 되더라도 어차피 직접 통치를 할 수 없고 섭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명목상 국왕인 후아나 여왕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왕위가 비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카를의 조기 왕위 계승은 실패하고, 페르난도 2세가 통치 능력이 없는 카스티야의 단독 여왕인 딸 후아나의 섭정이 되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포괄한 전 스페인을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이사벨라 여왕 사후 새로 재혼한 후 아들을 낳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후사가 생기지 않게 되었고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 점차 유력해졌다. 페르난도 2세는 두 외손자 중 플란데런에서 나고 자란 첫째 카를보다, 스페인에서 자신이 직접 키운 페르난도(훗날 페르디난트 1세)[17]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스페인의 현지 민심 역시 이방인 카를보다 자국 출신의 페르난도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계승 1순위는 카를이었기 때문에 페르난도 2세로서도 어떻게 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만년에 카를에게로 왕위 계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1516년 카를 5세의 외조부인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사망했다.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는 카를이었지만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레콩키스타를 막 완수한 스페인은 유럽 그 어느 지역보다 민족 의식이 강했고 이방인에게 배타적이었다. 대다수의 스페인 국민들과 귀족들은 외국 출신에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이가 새로운 국왕이 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저항감을 표출했다.
게다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각각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연합국가를 이루고 있던 스페인의 상황 때문에 왕위 계승 절차는 매우 복잡했다. 더군다나 카를의 모친인 후아나 여왕이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카를의 왕위 계승이 완전히 확정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때문에 카스티야는 일종의 공위 시대를 맞게 되었고, 왕위를 노리는 다른 세력이 출현했다. 당시 스페인 귀족 세력들은 합스부르크 출신이라 하더라도 플란데런 출신인 카를보다 스페인 출신의 페르난도를 옹립하려는 여론이 컸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카를보다 계승 서열이 밀렸을 뿐만 아니라 아직 성년이 아니었다.
카를의 배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부르고뉴 공국,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 등 막강한 세력이 후원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완전히 통합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를의 스페인 왕위 계승도 아라곤과 카스티야에서 별도로 이루어졌다. 또한 스페인 현지인들의 저항감이 여전했기 때문에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당시 아라곤의 경우 남자만 왕위 계승권을 갖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카를의 외조부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와의 동군연합 형성 과정에서 카스티야 여왕인 이사벨라 1세와 결혼해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따라서 이사벨라도 형식적이지만 아라곤 여왕을 겸직했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죽은 후 10여 년간은 딸 후아나가 이사벨라의 뒤를 이어 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공동 통치자' 위치로서 아라곤 왕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계승구도는 흔들리게 되었고, 공동 통치자라는 명분을 잃은 데다 실권이 없던 후아나는 아라곤 왕국에서의 왕위를 잃을 위기에 놓여 통합 스페인은 다시 분열 국면에 처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말년의 페르난도가 재혼 상태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18] 몇 년 전부터 후아나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카를에게 왕위를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아라곤령의 지배권 확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강력한 배후 세력을 등에 업은 카를은 스페인을 압박하여 페르난도 2세의 장례식 때 아라곤 뿐만 아니라 카스티야에서도 후아나와 함께 공동왕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후술되어 있듯이 카스티야에서의 왕위 계승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카를은 스페인 국왕으로 지명되고 나서도 1년 반이나 스페인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고향 플란데런에 머물렀다. 아직 스페인에서의 상황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선 스승 아드리안 주교를 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스페인에 파견해 현지 상황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도록 했다.

5. 스페인 통치


1517년 9월 외조부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한 지 1년 반이 지나서야 카를은 드디어 네덜란드 저지대를 떠나 스페인을 통치하기 위해 스페인에 입국했다. 페르난도 2세를 이어 그 때까지 후아나를 대신해서 섭정을 해오던 프란시스코 추기경은 새 왕을 맞으러 나가는 도중에 병사했다. 여담으로 카를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스페인에 올 때는 배를 타고 북부 스페인으로 왔는데, 선단이 풍랑으로 인해 표류해서 목적지와 좀 떨어진 마을에 상륙했다고 한다. 워낙 벽촌이라 왕이 오는 건 기대도 안 하는 지역이었는데 뜬금없이 임금님이 오셨다고 해서 마을 주민들은 기뻐했다고.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경우,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도 후아나는 정당하게 계승한 국왕이기에, 공동 통치자 형태라도 그녀가 공식적으로 양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아들인 카를이 스페인 국왕이 된다는 것은 현지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바야돌리드의 카스티야 왕국 의회에는 이 문제를 들어 그의 왕위 승계를 계류시켰다.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은 의회와 교섭하여 '카스티야어를 배우고, 외국인을 국정에 끌어들이지 않으며, 카스티야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어머니를 존중한다'는 조건 하에 공동 통치자로 승인을 받았다.[19]
이렇게 어렵게 카를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왜냐면 그가 프랑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별 관련이 없는 스페인에 큰 과세를 부과했고, 고향의 플란데런인에게 여러 이권을 나눠준 것에 거부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는 곧장 납세 거부 운동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급 귀족과 도시민들의 꼬뮤네로스 반란이 터졌다. 그 뒤에는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궁정 귀족들은 처음에 이들의 반란을 어느 정도 방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나 반란이 예상보다 급진적 기류로 흘러가자 군대를 편성해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 및 뒤이은 대관식, 제국 회의 소집(보름스 국회) 등으로 계속 독일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상황이 악화 일로에 있었지만 당장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리인을 통해 반란진압을 명령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나중에 보름스 국회가 끝나고 나서야 스페인으로 돌아온 카를 5세는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1521년 4월 비야리르 전투에서 반군의 주력이 궤멸당했고 1522년에는 반란의 수도인 톨레도까지 협상으로 항복을 받아 스페인을 상속 받자마자 까먹히는 사태는 면했다.[20] 그러나 꼬뮤네로스 봉기로 인해 1. 외국인에 의한 2. 같은 외국인 출신 섭정을 통해 3. 일방적인 통치를 하는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확실하게 깨달았던 카를, 아니 카스티야의 왕 카를로스는 이후 카톨릭 공동왕 시절 현격히 약해졌던 전국 의회(꼬르떼스 헤네랄레스)도 3년마다 꼭 주기적으로 열리게 했고, 반란도 주동자 50명 내외로만 처형, 감금한 뒤 나머지는 일괄사면했으며, 이후 자기가 나라를 비워도 섭정이나 행정 요직은 꼭 현지인을 기용하고, 도시 자치권도 일정 부분만 건드리고 나머지는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후론 이베리아 반도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이룰 수 있었다.

6. 아메리카, 필리핀 정복과 착취


본국의 사정과는 별개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사업은 쾌조로 이루어졌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신대륙에서의 영토 확장이 가톨릭을 세계에 전하는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스페인은 콩키스타도르(정복자)들의 활약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방대한 영토를 빠르게 획득해 나갔다. 1520년 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일대를 장악했다. 1533년에는 콩키스타도르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쿠스코를 함략시켜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콩키스타도르들은 몰락한 제국의 옛 수도 대신 연안에 신도시 리마를 건설해 남아메리카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21]
카를 5세는 정복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자 식민지에서 실질적인 노릇을 하던 기존 콩키스타도르들을 파면하고 자신이 임명한 총독으로 속속 교체했다.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켜 멕시코를 건설한 성과를 거둔 에르난 코르테스조차도 파면했으며, 곧 다시 복직시키긴 했지만 행정권을 박탈했고 이후 1540년 영지를 떠나 고국에 돌아온 코르테스를 줄곧 냉대했다.[22] 아메리카에선 무소불위의 정복자 대접을 받았어도 유럽의 왕좌를 석권한 먼치킨적 왕에게 항명할 능력이 없던 코르테스는 실의에 젖어 살다 북아프리카 공략에 진력했고 1547년 쓸쓸하게 죽었다.
카를 5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콜럼버스나 코르테스 등 콩키스타도르들이 벌인 잔혹한 만행과 대규모 학살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했다. 스페인 국내와 유럽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만행을 규탄했지만, 카를 5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년인 1550년에 이르러서야 바야돌리드 회의를 열어 식민지에서 인디오를 무차별 살육하는 것을 억제하려 했는데, 이는 인디오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존중 때문이 아니라 무차별 학살로 인해 스페인 제국의 자산인 인디오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마구 들여오는 으로 가격 혁명이 일어났고, 동방과의 교역도 순조로워, 스페인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 가는 부국이 되었다. 카를 5세는 신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금, 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여겼다.
한편으로는 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1529년 필리핀도 손에 넣었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이 발견하고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후 포르투갈이 영유 중인 섬이었다. 본래는 그 전 세기의 토르데시야스 조약 때문에 아시아의 포르투갈령을 건드릴 수 없었지만 이 조약을 거쳐 중국 가까이에 발을 걸치게 됐다. 대신 몰루카 제도를 포르투갈에게 양도했으나, 위약금까지 챙겨 결과적으로 훨씬 남는 장사였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 거점이 되어 명나라와도 교역을 트게 된 것이다. 이 때 신대륙의 무진장한 은이 중국으로 흘러갔다. 다만 필리핀 자체의 개발은 비교적 늦어, 1565년에 가서야 본격적인 식민 지배가 시작된다. 이후 필리핀은 1898년까지 근 4세기에 걸쳐 스페인의 통치를 받는다.

7.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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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1월 21일 카를의 조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했다. 곧 다음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제국에서는 제후들이 소집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계승자이자 부르고뉴 대공이며 스페인의 왕인 카를이 계승 후보로 참가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사실상 독점적으로 상속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카를이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그것은 이전에 오스트리아와 그 주변 공국들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선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 정책을 거치면서 부르고뉴, 네덜란드,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에 이르는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이렇게 넓은 영토를 차지한 자는 서유럽 역사에서 카롤루스 대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카를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힘이 너무 막강해질 것을 우려해서 카를의 황제 당선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스페인 국왕 때는 카를을 밀었지만, 황제 선거에서는 태도를 바꾸어 카를을 견제하고 다른 후보들을 차례로 지원했다. 레오 10세는 처음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밀었으나, 선출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고 있던 프리드리히 3세는 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출마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남은 다른 후보는 프랑스의 젊은 야심가 프랑수아 1세였다. 과거 플란데런 영지 문제로도 충돌을 빚은 바 있었고 훗날 일생의 라이벌이 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경쟁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로서는 마침내 기존의 강대국인 신성 로마 제국에 발을 들이밀어 잘 나가는 스페인을 견제하고 유럽을 제패할 절호의 기회였다.
초반엔 프랑수아 1세가 유리했다. 교황 레오 10세의 의견대로 성직 선제후 3인(마인츠, 쾰른, 트리어)이 프랑수아 1세를 밀었고, 팔츠 선제후마저 프랑스에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카를의 고모이자 후견인이었던 부르고뉴 공국의 섭정인 브뤼셀의 마르가레테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랜 거래를 해왔던 독일의 금융 거부인 푸거 가문[23](Fuggers)및 벨저 가문(Welsers)에게 85만 두카트의 자금을 빌려와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덕분에 30만 두카트에 그친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선제후들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24] 사실 역사상 프랑스, 영국처럼 신성 로마 제국의 회원국이 아닌 국가의 군주가 황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 선거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은 그만큼 카를 5세에 대한 견제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519년 6월 28일 선제후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황제에 당선되었으며 1520년 10월 23일 쾰른 대주교에게 대관을 받았다. 원래는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아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타이틀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독일왕이라는 타이틀을 쓸 수밖에 없었으나, 카를의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는 이러한 관례를 바꾸어 교황 대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여 이를 명문화했다. 때문에 카를 5세 역시 굳이 교황 대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26] 그러나 카를 5세는 황제로 선출된지 10년도 더 지난 1530년 2월 24일에 기어코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았다. 물론 이 때는 2차례에 걸친 프랑스와의 전쟁과 사코 디 로마로 프랑스 편을 든 교황을 거의 포로로 잡다시피해서 누워서 절받기 수준이었기에 큰 의미는 없지만. 덕분에 그는 막시밀리안 1세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할 때까지 교황에게 대관을 받은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단, 이때 카를은 황제가 되기 위해 수많은 공약을 내걸었다가 정작 황제가 된 이후엔 멋대로 파기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 선제후들 사이에선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으며, 이것은 나중에 그에게 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8. 신성 로마 제국 통치 -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리 통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를 5세의 업적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업적은 사실 상당부분이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519년 황제 선거에 당선된 카를 5세는 1521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간판 작위인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물려주고, 그를 황제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여 그에게 독일 통치를 위임한다. 1521년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는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카를 5세의 드넓은 영토는 단일화된 영토가 아니었고 유럽 곳곳에 군데군데 산재해 있었다. 특히 당시의 교통 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그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처음 플랑드르를 떠나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그가 했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이처럼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각 영토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서로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어 각각 따로 놀았다.
특히 카를 5세가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독일로 떠났을 때, 이방인 출신 왕인 그에게 곱지 않았던 스페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카를 5세는 독일에서 황제 선거와 대관식, 그리고 제국 회의(보름스 국회) 일정을 연이어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직접 스페인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리인을 통해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이때 카를 5세는 떨어져 있는 영토들을 한 사람이 원격으로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결국 보름스 국회가 끝나고 1521년이 되어서야 황제는 직접 스페인으로 돌아가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카를 5세는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독일을 비우게 되면 독일에서 권력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동생 페르디난트를 자신의 대리자로서 독일을 통치하게 했다. 그는 페르디난트를 황제의 대리인이자 제국의회평의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가 제국 내에서 다른 제후들과 최소한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문의 본령이자 또한 황제직의 근거이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대공직까지도 동생에게 물려 주었다.
동생 페르디난트와는 태어나서 계속 떨어져 자랐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랐다. 두 형제는 장성할 때까지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동생 페르디난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은 이방인 카를 5세보다 자국 출신의 페르난도가 왕이 되길 원했다. 때문에 스페인 왕위에서 페르디난트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카를 5세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스페인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처음 한 일이 유폐된 명목상의 공동 스페인 국왕인 어머니를 찾아가 동생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앉히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받은 것이었다. 때문에 카를이 황제가 된 후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독일 통치를 맡긴 것은 당시 정세가 불안했던 스페인과 독일을 동시에 통치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말고도 스페인에서 자신보다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동생 페르디난트를 스페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독일에서 황제의 대리인으로 통치권을 위임받은 페르디난트는 그곳에서 성실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완전한 스페인 사람이었던 그는 독일에 도착하자 빠르게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는 독일을 통치하면서 큰 흐름은 철저하게 형의 의중을 따랐지만 구체적인 통치 방식에서는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수행했다. 그는 융통성 있는 통치를 하였는데 형이 내린 지시를 현지 사정에 맞게 완화시키거나, 유보시킨 경우도 많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도 그가 직접 제후들을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었으며, 황제는 배후에서 군사나 지휘관을 보내는, 이른바 스폰서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혼인정책을 통해 형과는 별도로 아내의 가문과 연결된 슐레지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물려받았다.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토착 세력의 반발 세력이 있었지만 페르디난트는 몇차례의 전쟁을 통해 이 영토들을 합스부르크의 확고한 영토로 만들었다.
1520년대 중후반에 카를 5세가 이탈리아 등지에서 프랑스, 교황청 등과 싸우느라 바쁜 시기를 보내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독일에서 종교전쟁과 농민전쟁, 헝가리와의 전쟁,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의 큰 전쟁을 치루었다. 이들 독일과 동유럽에서의 전쟁은 모두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하에 진행된 것으며, 카를 5세는 빈 포위 당시 지원군을 보낸 것 말고는 독일 내외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두 형제가 분할 통치를 한지 10년 가량이 지났을 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상황은 이제 안정되어 가고 있었지만, 독일의 종교 문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526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카를 5세는 개신교 세력을 인정했지만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직후 1529년에 다시 열린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카를 5세가 이를 다시 뒤집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개신교 제후들은 적극적으로 저항 의사를 표출했고 그리하여 개신교들은 '''프로테스탄트'''라 불리게 되었다. 개신교 제후들은 결집하여 1531년 군사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제국이 분할된 것이다.
이처럼 독일에서 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닫자, 카를은 독일에서 페르디난트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마침내 그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1530년 미리 치러진 차기 황제 선거에 단독 출마한 페르디난트는 선거에 당선되어 차기 황제로서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황제직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하게 되면서 황제 재위 기간 중에 차기 황제 선거를 실시하여 아들을 독일왕에 임명하는 전통이 이어지게 된다. 때문에 이후 독일왕은 제국의 황태자를 뜻하게 되었다.[27]
1555년 카를 5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화의 역시 카를이 아닌 페르디난트 1세가 주도한 것이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끝까지 화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오랜 종교전쟁을 치렀던 페르디난트 1세는 현실적인 견지에서 화의를 적극추진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체결 당사자는 황제 카를 5세가 아닌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였다. 카를 5세는 화의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이미 독일에서 모든 실권은 페르디난트 1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를 5세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화의가 체결된 후 분노와 회의를 느낀 카를 5세는 스스로 퇴위를 선언하게 된다.

9. 이탈리아 정복과 대프랑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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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가 그린 판화. 카를 5세가 중앙 옥좌에 올라앉아 자신이 예전에 군사를 이끌고 패퇴시킨 정적들을 조소하는 그림인데, 그의 주위 인물들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 교황 클레멘스 7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 클레베 공 빌헬름,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이다. 당시 유럽의 패자로서 군림했던 카를 5세의 위엄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의 정적들이 많고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1520년 약관의 나이에 선제후로 선출되어 부르고뉴(+ 베네룩스 저지대), 스페인(+식민지 아메리카북아프리카일부), 독일을 지배하게 된 카를의 다음 관심사는 이탈리아였다.
이에 그렇잖아도 선대 막시밀리안 1세 때부터 제국과 앙금이 있었던 데다 선제후 선거에서 카를에게 패배하여 앙심이 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당시 지중해에서 마지막 끗발을 부리던 베네치아와 손잡고 공동 대항 전선을 폈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전쟁은 1521년부터 시작되었고, 카를은 스페인 본국의 내전과 프랑스와의 전쟁 모두를 신경쓰게 되었다. 이에 카를은 친분이 있던 교황 및 프랑스에 반감이 있던 잉글랜드를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국면 전환은 1525년의 파비아 전투였다. 여기서 대승을 거둔 카를은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심지어 국왕 프랑수아 1세포로로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기사왕으로 불리던 프랑수아 1세는 감옥 안에서 옥살이를 하면 했지 영토만은 내줄 수 없다며 1년 가까이 버텼지만 결국 막대한 배상금 지불 및 전 이탈리아와 부르군디를 넘기겠다는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에 조인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결국 이탈리아 북부마저 카를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는 곧 조약을 파기하고 복수하겠다며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카를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으며, 1523년 카를과 친분이 돈독하던 교황 레오 10세의 선종 후 하드리아노 6세를 거쳐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7세[28] 막강한 카를의 권력에 경계심을 가졌다. 이들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카를에게 대항하는 코냑 동맹이 결성되었다.
1527년 2번째 전쟁에서 카를은 적대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었다. 로마가 황제의 군대에게 초토화되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7개월간 사실상 구금당했다. 쓴맛을 본 교황도 결국 항복하여 황제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다.
같은 해, 헨리 8세는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에게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배신하고 프랑스가 결성한 코냑 동맹에 참가한 상태였고, 캐서린은 카를의 이모이기 때문에 카를은 크게 분노해 불허하도록 교황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교황에게 등을 돌리고 국교로 성공회를 내세운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혼 문제 때문에 고생해야 했던 메리 공주는 여러 차례 도움을 준 사촌오빠 카를을 아버지처럼 의지하게 되며, 나중에 왕으로 즉위한 후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와 결혼해 잉글랜드는 다시 국교를 가톨릭으로 바꿨다. 이게 다 유럽의 패권자인 카를이 알게 모르게 끼친 영향이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메리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훗날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으니, 실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할 수 있다.
1529년 카를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테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모후 사이에 비밀 교섭이 성사되어 부르고뉴와 밀라노, 나폴리가 맞교환되는 캉브레 조약을 통해 가까스로 전쟁은 수습되었다. 역사적으로 꾸준히 독립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부르고뉴는 비로소 프랑스령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된 이 조약에 승인하고서야 볼모로 잡혀간 아들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은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는데, 이때 프랑스 전체가 비탄에 잠겼고 심지어 카를 5세가 은밀히 독살했다는 음모론까지 파다했다고 한다.
1536년에는 카를 5세가 먼저 선수를 쳐 로마에서 선전포고를 한 후 프랑스의 프로방스를 침공했다. 전황 자체는 카를 5세한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프랑스군이 워낙 강하다보니 프로방스를 점령도 못해서 작전 경과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북쪽 플랑드르에서 봉기 조짐이 있어 양국은 전쟁 2년 만에 교황의 중재로 강화 협상에 들어갔다.
1542년 다시 전쟁이 터졌다. 밀라노 공작이 직계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자 카를은 자신의 어린 아들인 펠리페(훗날의 펠리페 2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프랑스는 즉각 이것을 구실로 재차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자존심을 접고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아 니스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에 발끈한 카를 5세는 잉글랜드와 다시 손을 잡고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프랑스 북부를 공략하고 밀라노 역시 사수했다. 다만 사보이는 내줘야 했다. 전쟁은 크레피 강화를 통해 3년만에 종식되었다.
이후 긴 시간 프랑스와의 국경 문제는 안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1547년 슈말칼덴 전쟁이 종결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카를 5세가 승리하면서 이제 유럽에서 황제에게 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소멸했다. 이 승리에 도취된 카를 5세는 그때까지 이어오던 최소한의 이성적인 정신줄을 놓아가며 막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을 위협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안도감과 자만감으로 그 스스로 망가지기 시작한 것.
작센의 모리츠는 개신교도였지만 슈말칼덴 전쟁 초기에 중립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카를 5세가 자신을 도와주면 나중에 각종 영토로 보답하겠다는 감언이설로 그를 꼬드겼다. 황제의 말을 믿은 모리츠는 개신교도들로부터 배신자로 불리는 것을 감수하고서 황제의 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황제가 입을 딱 씻어버린 것. 물론 황제는 작센 영토의 일부를 모리츠에게 주었으나, 이것은 애초에 황제가 약속했던 영토의 1/n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더이상 황제를 거역할 자는 없다는 생각에 황제는 자신이 했던 말과 약속들을 종이장처럼 뒤집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시작했다. 영토 보상 문제는 돈 드는 문제라 그렇게 짜게 나온다 쳐도, 모리츠의 장인어른인 헤센 방백 필리프 대공을 석방시켜 주겠다던 약속조차도 무턱대고 씹고 있는 카를 5세의 모습에 모리츠는 완전히 빡돌아 버리고 말았다. 모리츠 뿐만 아니라 과거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었던 여러 가톨릭 제후들도 차츰 황제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끼고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견제 세력이 없어진 황제가 이제 고삐 풀린 듯 스스로 이랬다 저랬다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으며 막나가는 모습을 보이자 독일의 제후들은 차츰 황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모리츠는 프랑스의 젊은 왕 앙리 2세와 접촉해 그의 지원을 이끌어냈고 모리츠가 프랑스로부터 자금을 얻게 되자 한때 완전히 패망한 것처럼 보였던 개신교 세력은 빠른 속도로 복구되었다. 브란덴부르크의 제후 알키비아데스 등도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동맹에 가담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마지막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앙리 2세는 독일의 내분 국면을 교묘히 활용해 다른 독일 제후들도 교사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부추겼다. 때를 맞춰 제국의 서쪽이자 프랑스의 동쪽 국경인 로렌에서도 교전이 있었다. 1552년 앙리 2세는 프랑스-독일 접경 지역인 로렌(로트링겐)을 대규모로 침공했고, 앙리 2세의 지원을 받은 모리츠의 개신교 동맹군은 황제가 웅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 은밀히 접근하여 황제를 급습했다. 급습을 당한 카를 5세는 인스부르크에서 하마터면 포로로 잡힐 뻔 하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는 간신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도망가는 데 성공했다.
황제가 급습을 당하고 굴욕적인 도주를 했지만, 아무도 나서서 황제를 도와주지 않고 팔짱만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과거 가톨릭 동맹의 가장 핵심 국가였던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조차도 가만히 있었다.
피신한 카를 5세는 보복전을 위해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지만, 독일 제후들은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더이상 황제가 일으키는 명분 없는 전쟁에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도 보복전을 준비하는 황제의 의사에 반해 개신교 동맹과 파사우 조약을 맺고 휴전해 버렸고, 이로써 독일에서 종교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제후들이 모두 등을 돌린 이상 황제의 권위는 더이상 독일에서 먹혀들지 않았고 이로써 설욕전을 꿈꾸던 황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독일에서의 사정과 달리 남쪽 이탈리아 전선에서 카를 5세는 계속 선전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2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치하로 편입되었다. 반면 프랑스의 앙리 2세는 합스부르크에 참패하여 결국 부왕의 한을 설욕하는 데 실패하고 1559년 스페인과 카토-캉브레지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같은 해 궁정에서 마창시합 도중 사고로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후 프랑스는 자신들이 독일을 분열시킨 것 이상으로 격심한 분열 국면에 빠져들어 위그노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한다.

10.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세계사에서 카를 5세가 가장 주요하게 언급되는 분야는 바로 종교개혁과 관련된 부분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며 전 유럽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한복판에 카를 5세가 있었으니 그는 종교개혁을 저지하는 세력의 가장 선봉에 있었다.
카를 5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어린 시절 가톨릭 개혁파에 해당하는 아드리안 데달 신부(훗날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에게 교육을 받았기에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신앙과는 별개로 카를 5세는 교황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다. 교황 레오 10세는 카를이 스페인 국왕 제위에 오를 때는 지지를 보냈지만, 황제 선거에서는 카를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경쟁자인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와 프랑수아 1세를 차례로 밀어 줬다. 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 때는 교황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는데,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코냑 동맹을 결성했을 때 황제는 그때까지 생애에서 최고로 격분했다.
카를 5세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종교 문제는 그의 생애에 일어난 그 어떤 문제보다 오래 지속된 문제였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종교 문제는 결국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좌절을 안겨주었다. 이전까지 그를 향한 모든 도전들은 타고난 막강한 부와 권력에 의해 모두 비교적 손쉽게 해결되었지만, 개인의 신념과 관련된 종교 문제만큼은 결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 종교 문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문제는 그가 가진 모든 직위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었던 황제의 자격으로 처리를 진행한 문제였다. 때문에 만년에 종교 문제 처리의 실패가 그에게 안겨준 좌절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종교 문제에서의 실패는 종교적 신념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황제로서의 권위 및 물리적인 힘의 실추와도 직결되었다. 종교 문제에서의 좌절은 결국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카를 5세에게 극도의 분노와 무력감을 안겨주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스스로 퇴위를 선언하며 모든 권력에서 물러난 카를 5세는 완전히 종교에 의탁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10.1. 보름스 회의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은 1519년 6월 27일∼7월 16일에 진행된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독일 전역으로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한편 라이프치히 논쟁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인 1519년 6월 28일 선제후 선거에서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가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틴 루터는 신임 황제가 교황과 사이가 안 좋은 데다가 개혁적인 성향의 아드리안 주교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카를 5세에게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루터의 기대는 완전히 헛된 것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비록 교황과의 관계는 껄끄러웠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이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교황 레오 10세는 카를 5세와 불편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종교개혁을 탄압해줄 것을 요청했다.
1521년 1월 21일 교황 레오 10세는 마침내 루터에게 파문을 내렸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파문 칙령을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때 젊은 플랑드르 출신 황제 카를 5세가 스스로 종교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나서기 시작했다. 카를 5세는 1521년 1월 27일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보름스 국회''')를 소집했다. 카를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 회의에 출석하여 소명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애초에 루터의 소명 따위는 들어볼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힘과 권위로 굴복시켜 루터가 종교개혁을 철회하도록 만들어 종교개혁 문제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 카를 5세의 의도였다. 회의가 소집되자 루터의 보호자였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중재자로 나서 황제 카를 5세에게 루터가 출석에 응하는 대신 그의 신변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고, 카를 5세가 이를 받아들였다. 3월 6일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신변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국회에 출석할 것을 명했다. 황제의 소집 명령에 대해서 루터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만류했다. 루터 본인도 신변을 보장해주겠다는 황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중재에 힘입어 목숨을 걸고 제국회의에 출석하여 4월 16일 2만여 명이 넘는 환영 인파 속에 보름스 회의장에 도착했다. 루터는 회의에서 최선을 대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그러나 황제는 루터에게 종교 개혁과 관련된 주장을 모두 철회하려고 강요했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루터를 압박했다.

“형제 한 사람이 고립되어 기독교 세계 전체의 여론을 거역할 때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 세계가 천 년 전 혹은 그 이전부터 오류에 빠져 있었던 셈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왕국들과 소유물들, 나의 친구들, 나의 육체와 피, 나의 목숨과 영혼을 모두 바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시대에 우리의 태만으로 인해서 기독교에 누를 끼치는 그 둘도 없는 이단의 조짐이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게 된다면 이것은 숭고한 게르만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나 당신에게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단 한글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면서 황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회의장 내의 많은 사람들이 루터를 그 자리에서 붙잡아 죽이자면서 여론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미 루터는 독일 전역에서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황제인 카를 5세도 그러한 루터를 함부로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카를 5세는 당초에 자신이 약속했기 때문에 회의 기간 동안 자신의 군대로 루터의 신변을 보호해 줬다. 그러나 회의기간 중 카를 5세는 루터를 정죄받은 이단자로 선언했다. 카를 5세와 가톨릭 세력은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루터를 도중에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예견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치로 루터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훗날 카를 5세는 "'''루터는 악마의 하수인'''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지키지 말아야 했다!!!"고 말하면서 보름스 회의 기간 동안 자신이 루터를 보호했던 사실을 크게 후회했다.
보름스 회의가 폐회된 직후인 5월 카를 5세는 '''보름스 칙령'''을 내려 루터를 이단자로 선고하고, 그의 저서를 소각할 것과 그에 대한 원조 금지하고, 그를 따르는 자를 모두 불법자로 규정하여 엄벌에 처할 것 등을 포고하였다. 그러나 직할 영지 이외의 영토에 대해서 황제에게 행정권이 없었기 때문에 카를 5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영지인 작센에 머물며 보호받고 있는 루터를 체포할 수가 없었다.
카를 5세는 황제 선거 당시 제국추방령 남발을 자제하고 적법절차에 따른 공소권 없이는 제국추방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약속과 달리, 400여 명의 제국 의회 의원들의 대부분 뜻과 상관없이 이단 명목으로 루터와 루터 추종자들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렸다. 당연히 신교도 제후들은 카를 5세의 제국추방령에 반발하여 추방령을 쌩깠고, 제국의 분열은 촉진되었다.[29] 그러나 1521년 스페인 반란 진압을 위해 카를 5세가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곧 레오 10세가 선종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일단 흐지부지 되었다.
1521년 12월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로마에서 개최되었는데 스포르차 추기경과 메디치 추기경[30](훗날 클레멘스 7세)의 표가 비슷하여 수십 일간 교황 선출이 무산되었다. 그러자 카를 5세가 자신의 스승 아드리안 주교를 추천하는 추천장을 보냈고, 타협으로 그가 교황 하드리아노 6세로 선출되었다.
하드리아노 6세가톨릭교회의 개혁파였지만, 마르틴 루터의 교리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명분인 가톨릭 교회의 타락에 대해선 '''"교회가 죄를 지었다"'''며 개혁 의지를 드러냈었다. 그러나 황제가 꽂아준 비 이탈리아인 낙하산 교황이라는 인식 때문에 하드리아노 6세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20개월의 기간 중 로마에서 통치는 겨우 1년이 조금 넘는 데다가 거의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31] 평화적으로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10.2. 슈파이어 항의와 슈말칼덴 동맹


카를 5세가 장기간 독일을 비우고 있는 동안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제국통치평의회 의장이자 황제의 대리인으로 실질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1526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초토화시키며 독일까지 위협하자, 개신교 제후들의 지원이 필요해진 카를 5세는 '''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1521년 내려진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유보하며 개신교를 인정하며 타협했다.
그런데 오스만군은 1526년 8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완전히 개발살냈음에도 의외로 추가적인 침략없이 신성 로마 제국 목전에서 자진해서 조용히 돌아가버렸다. 게다가 카를 5세의 군대는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군을 연신 처발랐고, 이어 1527년에는 코냑 동맹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응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 대약탈을 자행한 후 교황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1529년 8월 캉브레 조약이 맺어지며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단락되었고, 이어 1530년에는 볼로냐에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루는 등 카를 5세는 한동안 기세 등등한 시기를 보냈다.
이처럼 판세가 황제에게 매우 유리하게 돌아가자 카를 5세는 '''1529년 3월''' 다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열어 1526년 1차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을 전부 백지화했다. 그러자 1529년 4월 5명의 신교도 제후와 14개 제국 도시들은 카를 5세의 약속 파기에 분개하여 3년전(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 결의 사항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항의 서한'''(Letter of '''Protestation''')을 작성했다('''Protestation''' zu Speyer).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가 열린 후인 1529년 8월 오스만 제국이 다시 유럽 침공을 감행했다. 오스만군은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군에 승리를 거두고 그 길로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하여 빈을 포위하는 사태(1차 빈 포위)가 벌어졌다. 이에 황제 측은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기 위해 다시 개신교측과 일시적으로 협력해야 했다. 개신교측의 지원 속에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제국은 가까스로 빈 포위를 격퇴했지만,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추가적인 공세 위협이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가 계속해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존엄한 황제의 명에 항의(프로테스트)까지 하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까지 가중되자 카를 5세는 억압만으로는 개신교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개신교에게 눈속임용 당근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종교 일원화'''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즉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의 교리를 조금씩 양보하여 다시 교회의 통합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통합론을 내세워 개신교를 가톨릭에 흡수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황제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이 주창한 제국의 '''종교 일원화'''를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일단 황제의 통합론을 믿은 루터파는 자신들의 교리를 일부 양보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제출[32]했다. 그러나 가톨릭 강경파 때문에 회의는 공전으로 흘렀고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 세력은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채택을 부결시켰다. 신교와 가톨릭 양측이 조금씩 양보하며 타협이 이루어져 갔지만 5개의 핵심 사항에 가톨릭과 신교 양측이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이에 다수파인 가톨릭측은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하고 개신교 측에 5개 사항에 대해 가톨릭 교리를 따를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루터파는 크게 실망했고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실력 대결밖에는 없음을 깨달았다. 마르틴 루터는 그동안은 자신의 신학 이론에 따라 신교도 제후들에게 일단 황제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했지만 1530년에 이르자 "독일에 더이상 지도자가 없다"며 황제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1531년 2월 27일 마침내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주도하에 개신교측 제후들과 제국 도시들은 군사적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 Schmalkaldic League)'을 맺어 황제와 가톨릭 세력에 대해 저항하기로 결의했다. 가톨릭 제후들도 개신교의 군사 동맹에 대응하는 '''안할트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제국이 분열되었고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독일에서 종교 갈등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시점 이웃 스위스에서도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큰 호응을 얻어 스위스의 가장 큰 두 도시인 취리히베른이 개신교화 되었다. 스위스에서 개신교 세력이 확산되자 독일에서 루터파 개신교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츠빙글리에게 독일 개신교와의 연합을 제의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일부 교리 차이를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말았다. 1531년 마침내 스위스의 종교 갈등이 폭발해 본격적인 내전이 터졌다. 스위스의 가톨릭파는 자존심을 접고 오스트리아에 손을 내밀었고, 카를 5세는 기꺼이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이미 독일 개신교의 연합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1531년 10월 카펠 전투에서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스위스 개신교군은 병력의 열세로 패전하고 말았고 츠빙글리 본인도 전사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위스는 다시 가톨릭이 장악하게 된다.

10.3. 소강기


1531년 2월 27일 마침내 슈말칼덴 동맹이 맺어지며 종교개혁은 이제 종교전쟁 국면으로 전환되었으나, 오스만 제국 등의 위협이 높은 상황이라 당장 무력 대결이 일어나지는 않고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다.
종교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양측이 각각 군사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과 안할트 동맹을 맺으며 제국이 분열되어 버렸고, 바깥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계속되는 외우내환의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제국에서의 통치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차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를 미리 실시하기로 결정하고[33] 동생 페르디난트를 단독 출마시켰다. 오스만의 침공을 방어하고 페르디난트의 로마왕(차기 황제) 당선을 위해서 신교도 제후들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카를 5세는 일시적으로 신교도 탄압을 완화했다. 선제후 7명중 가톨릭 성직자가 3인이고 개신교 선제후는 작센 선제후 하나였지만[34] '''황제 선거 시 공약과 대관식 때 "세습은 포기한다"'''고 선언해 놨기 때문에 선제후 선거시까진 일단 조용히 지내야 했다. 1531년 1월 페르디난트 1세가 로마왕에 당선되면서 이후 차기 황제의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지배권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1532년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가 또다시 빈을 침공하기 위해 12만 대군으로 침공하면서 중부 유럽에 전운이 고조되었다.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제국하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8만 대군을 동원했으나 이로는 역부족이었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선 개신교측과 또다시 일시 화해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카를 5세는 '''뉘른베르크 칙령'''을 내려 신교도 제후들에게 종교상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 결과 '''뉘른베르크 종교 강화회의'''가 열려 개신교 세력과 카톨릭 세력 간에 휴전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신교도 제후들이 협력하는 것이 합의되었다(Peace of Nuremberg). 이에 오스만 제국이 철군하면서 2차 빈 교전은 무산되었다.
1534년 종교개혁의 회오리 속에서 황제에게 치이고 개신교에게도 치이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종했다. 새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개혁에 비교적 유화적이었다. 덕분에 교황령은 격렬한 저항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교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화하여 후에 적극적인 이단 심문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예수회라는 수도회가 창설되어, 스페인의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가톨릭을 전파한다[35].
1539년 카를 5세의 고향인 헨트(겐트, Gent)에서 가혹한 세금 징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자신의 고향까지 반발하는 것은 상징성 면에서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카를 5세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에 양해를 구하고 프랑스를 횡단하여 헨트에 도달했다. 카를 5세는 무자비하게 고향의 반란을 진압했다. 13명의 주동자가 모두 처형되었으며, 지역 유지들에게 굴욕을 주었다. 그리고 새로 요새를 구축했다. 이후 한동안 플랑드르의 소요는 멎게 되었다.
1541년 카를 5세는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를 소집했다. 카를 5세는 다시 한번 신교 측과 구교 측의 양보로 화해를 이루고 통합안을 이루자고 했다. 카를 5세가 이렇게 나선 것은 오스만 제국과의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신교도 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신교도측은 다시 한번 카를 5세의 평화시도를 믿고 회의에 참여했다. 이에 구교 측 황제의 특사가 신교도 의중을 반영한 '레겐스부르크 메모'를 제안했으나 신교, 구교 양측 모두 이를 거절했다. 신교도 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 다급해진 카를 5세는 양측이 동의한 내용만 추려내어 '레겐스부르크 임시선언'을 발표하여 당분간만이라도 이것을 따르자고 제안했으나 제국의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그런데 이후 상황이 카를 5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541년 카를 황제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신교도 측의 양대 지도자 중 하나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2번째 장가(중혼)를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당시 귀족 층에서 중혼을 하는 경우는 드문 일은 아니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1532년 자신이 반포한 카롤리나 법전에서 중혼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해 버렸다. 이에 마르틴 루터루터교회 측에서 1539년 이혼보단 중혼이 낫다고 말하면서 필리프 1세의 중혼을 용인했지만, 뒤가 매우 찜찜했던 필리프 1세는 카를 황제에게 면책 당하는 조건으로 신교도 동맹에서 빠져버린 것이다.[36]
1542년 카를 5세는 교황청에 트리엔트(트렌토)에서의 공의회 소집을 요청한다. 종교개혁 논리에 방어하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아울러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교황청을 단속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카를 5세가 공의회의 장소를 트리엔트(트렌토)로 정한 것도 그곳이 이탈리아 권역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 영지[37]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체면을 살리면서도 황제가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 종교개혁을 막기 위한 목적의 공의회였지만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게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공의회 소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교도 측 역시 가톨릭 주도의 교리 통합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에 공의회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공의회의 소집은 또다시 불발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독일 내 신교도 제후들과 가까워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카를 5세는 이미 개신교 국가가 된 잉글랜드헨리 8세와 손을 잡고[38] 프랑스로 쳐들어 갈 계획까지 세웠다.
1544년 카를 5세는 슈파이어 제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에 카를 5세가 제국 회의를 소집한 것은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와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 제국이 연합을 맺고 전쟁이 발발하여 신교도 측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카를 5세는 1531년 이후 신교도 측의 종교개혁 결과를 인정하고 신교도들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1544년 카를 5세는 프랑스와 다시 한번 일전을 치러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고, 크레피 조약을 맺으며 마침내 프랑스와의 오랜 분쟁을 종식했다.[39] 이어 1545년 오스만 제국과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서 독일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전쟁들은 일단락되었다. 게다가 마르틴 루터가 1546년에 사망하면서 독일 개신교의 구심점이 흔들렸고, 평생 카를 5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프랑수아 1세헨리 8세도 이때쯤부터 노환에 시달리다가 1547년 잇달아 사망하게 된다.

10.4. 슈말칼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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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나서는 카를 5세.
이렇게 외부의 위협 세력들이 모두 정리되었고 카를 5세의 권위는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카를 5세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종교개혁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개신교 박멸을 위한 마지막 총력전에 들어간다.
이를 위한 전초 작업으로 1545년 12월 13일 카를 5세는 오랜 숙원이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했다. 종교개혁에 따른 교회 분열을 수습하기 위한 명분으로 소집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가톨릭측의 일방적인 회의였고, 프로테스탄트 측은 사실상 배제되었다. 공의회가 개최된 사실상의 이유는 이단(개신교)의 근절이 주목적이었다. 이에 더해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가톨릭 자체의 정화를 위한 노력도 있었다. 1차 공의회는 1547년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한 카를 5세는 그동안 필요에 의해 다소 유화적이던 태도를 버리고 개신교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다시 한번 전환했다. 카를 5세는 이단 척결 명목으로 신교도 제후들에게 제국 추방령을 내리고 신교도 세력의 중심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40]에게는 궐석 재판서 사형을 선고했다(1546년 7월).
1546년말 카를 5세는 독일인 2만, 이탈리아인 1만 2천, 스페인인 1만, 네덜란드인 1만 명으로 구성된 5만 2천의 대군을 친히 이끌고 개신교를 끝장내기 위해 독일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국내분쟁에 외국군대로의 해결을 금지한다는 제국법은 물론이고 황제 선거 때 카를 5세 본인이 내세운 공약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카를 5세의 권세가 거의 정점에 이르렀던 때라 대놓고 이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지만,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독일 국내 제후들과 싸우는 황제에 대해서 독일 국내 여론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동안 카를 5세와 한편이었던 가톨릭 제후들마저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황제의 결정적인 약속 뒤집기가 시전되자 가톨릭 제후들 조차 다음은 내가 당할 차례 아닌가 하면서 황제에게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황제의 무소불위적 행동은 결국 나중에 극렬한 저항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어쨌든 카를 5세의 다국적 군대가 독일에 당도하면서 슈말칼덴 전쟁이 벌어진다. 객관적인 전력에 있어서 슈말칼덴 동맹군의 전력은 황제쪽의 전력보다 처참하게 열세에 있었다. 정예군으로 구성되어 일사분란한 체계를 갖고 있던 황제군에 비해 슈말칼덴 동맹군은 각 제후들의 이해관계가 제각각 얽히면서 지휘권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오합지졸을 넘어서서 난장판 일보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당시 신교도 동맹측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작센 공국은 당시 내분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작센 공국은 15세기 때 지배 가문인 베틴 가문이 에른스트계와 알브레히트계로 분열되어 공국을 양분하여 통치하고 있었는데, 당시 종가로서 선제후직을 보유하고 있던 에른스트 계열 군주는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였고,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 군주는 작센-마이센 공작[41] 모리츠였다. 작센 내부 영토 문제를 놓고 둘은 대립하고 있었는데,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모리츠와의 공동 통치 지역인 부르첸을 일방적으로 점령하면서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는 신교도였고 공국 내부에서는 종교 개혁을 실시했지만, 외교적으로는 신하 게오르크 폰 카를로비츠의 조언을 받아들여 국익을 위해서 구교 세력의 중심인 카를 5세 및 페르디난트 1세와 연합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가 1542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543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과의 전쟁, 1544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룰 때, 모리츠는 합스부르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전공을 쌓았다. 모리츠는 자신의 영지에서는 종교개혁을 추진하여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 자금으로 각지에 공립학교를 세워 공국 내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터지자 모리츠는 신교도였지만 불구대천의 원수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신교도측 지도자였기 때문에 슈말칼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다. 이때 카를 5세가 모리츠에게 접근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에게 작센 선제후 자리를 주고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는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신교도측 양대 지도자였는데, 필리프와 모리츠는 장인, 사위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 우정을 함께한 절친한 사이였다. 모리츠는 고심 끝에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는다.[42]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군대는 남부 독일을 휩쓸며 신교도 제후들을 하나씩 굴복시켰고, 마침내 최후의 보루인 신교도 동맹의 지도자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격파하기 위해 작센 공국을 침공했다.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령 비텐부르크 부근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의 군대를 포함하여 두배가 넘는 병력의 황제군은 1만 5천의 신교도 동맹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다. 카를 5세는 곧 비텐베르크에 입성했다.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영지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성문 밖으로 나왔다. 그가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카를 5세는 그 자리에서 그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카를 5세는 종교 재판을 열어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영지 대부분을 몰수하고 선제후직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놀란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 등이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사형을 철회해달라고 탄원했고, 이에 황제는 관대하게도(?) 사형을 취소했다.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더불어 신교도 동맹의 지도자였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도 자진출두해서 나란히 수감되었다. 두 제후는 수감되어 카를 5세의 고향인 네덜란드로 압송되었다. 두 제후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카를 5세의 개종 회유와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두 제후는 5년 후 카를 5세가 인스부르크 전투(1552년)에서 패하여 사실상 실권을 상실한 후 모리츠를 비롯한 제후들의 요구로 풀려나게 된다.
뮐베르크에서 대승을 거두고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 1세를 굴복시킴으로써 슈말칼덴 전쟁은 카를 5세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전후 조치로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잠정화의'''(Augsburger Interim, Augsburg Interim)'가 맺어진다. 프로테스탄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카를 5세는 종교전쟁의 최종 승자가 된 것으로 보였다. 이 때가 카를 5세의 권위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카를 5세의 몰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0.5. 개신교 동맹의 역습 (Fürstenaufstand)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전후 처리를 위해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카를 5세는 가톨릭 중심의 종교일원화를 선언하였고 이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화의'''(Augsburg Interim)'라 부른다. 카를 5세는 이미 1545년 가톨릭 중심의 종교일원화를 목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지만 신교측의 지지와 참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가 별 진전없이 계속 미적거리고 심지어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산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공의회에 대한 희망을 접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에 이어 슈말칼덴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된 카를 5세는 마침내 본인이 직접 나서 그동안 자신이 구상해왔던 방식대로 종교일원화를 선언하여 강요했던 것이다.
이 교리의 주요 내용이라 할 만한 것은 대충 가톨릭 기존 교리에 성체성사에서 평신도가 성혈(포도주)까지 영하는 것[43] 허용, 사제의 결혼 허용 등을 복합한 것이었다.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잠정화의로 인해 표면적으로 대립이 소강국면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이는 강력한 카를 5세의 강력한 권세에 의한 것일 뿐 개신교, 가톨릭 양측 모두 카를 5세의 통일안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신교도들은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화의를 군말없이 따르는 시늉을 했지만, 가톨릭과 사실상 차이가 없는 이 통일안에 대해서 내심 분개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 역시 많은 희생을 치르고 신교도를 제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 한 자라도 개신교와 타협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가톨릭 제후인 바이에른 공작마저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강력한 황권으로도 신앙만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슈말칼덴 전쟁(1546년~1547년)에서 신교도 제후들이 궤멸당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신교도 지역에서 황제에게 굴복하고 1548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화의를 따랐다. 그러나 아직도 북쪽의 몇몇 지역의 개신교 지역은 황제에게 격렬히 반발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북독일의 마그데부르크였다. 황제는 작센의 모리츠에게 마그데부르크 토벌을 명령한다. 원래 작센-마이센 공작이었던 모리츠는 슈말칼덴 전쟁 후 작센 선제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슈말칼덴 전쟁이 끝난 후 황제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약속을 믿고 신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황제 편에 가담하여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황제는 모리츠에게 약속했던 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모리츠는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차지하고 있던 작센 선제후직을 얻게 되었고, 에른스트 계열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긴 했으나 카를 5세는 모리츠에게 작센 공국 영토 전체를 주지는 않았다. 때문에 가문과 작센 공국을 완전히 통일하려던 모리츠의 꿈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황제가 신교도측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모리츠는 깜짝 놀라 황제에게 목숨만을 살려줄 것을 탄원했다. 비록 요한 프리드리히와 견원지간이었지만 그의 목숨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황제는 모리츠의 장인이자 오랜 벗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전쟁에서 끝나자 약속을 깨고 필리프 1세를 투옥하여 네덜란드로 끌고 갔다. 모리츠는 약속대로 필리프를 석방해 줄 것을 거듭 간청했지만 황제는 계속 이를 씹고 필리프를 석방하지 않았다. 또 황제는 마그데부르크를 탈환하면 모리츠에게 주기로 했지만 이 역시 씹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가문 방계 듣보잡에게 돌려줬다. 게다가 슈말칼덴 전쟁 후 신교들을 강력하게 탄압하고 가톨릭화하려는 조치가 이어지자 모리츠는 황제에게 분개하게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더욱 꼬장꼬장해진 카를 5세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모든 신교도 제후들을 굴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앙이 더욱 확산되며, 심지어 자신의 고향인 플랑드르에서도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개신교에 대해 더욱 극단적인 강경책을 펼치며 탄압했다. 카를 5세는 1550년 4월 29일 '피의 칙령(Blood Edict, Bloedplakkaat)'을 내려, '''루터파 신자들은 누구나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개신교 탄압의 강도를 더욱 높여갔다.
이때 황제의 결정적인 패착이 또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30년 동안 자신을 대리해서 독일을 다스리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토사구팽하고 자기 아들 펠리페(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모든 영토를 물려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독일 제후들은 모두 반발했다. 독일 제후들은 신교 구교할 것 없이 한결 같이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이방인인 데다가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제후들은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되면 독일이 스페인에 종속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이미 슈말칼덴 전쟁 때 카를 5세가 스페인 군대를 끌고 독일 내에서 전쟁을 치른 것에 대해 독일 내부의 반발이 상당했었다. 이는 명백한 외세의 간섭으로 제국법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애초에 1519년 황제 선거 때도 이런 우려가 재기되었고 카를 5세는 절대로 스페인 세력을 독일 국내 정치에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게다가 슈파이어 제국 회의나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회의 등에서 황제가 여러 차례 자신의 약속을 번복하는 행태가 반복되자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 제후들까지 황제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 5세가 또 차기 황제 선거까지 치러 당선된 페르디난트 1세를 물리고 펠리페 2세에게 제국을 물려주려고 시도하자 신교도 제후들은 물론이고 가톨릭 제후들 마저 모두 반발하며 황제에게서 돌아서게 된다.
제후들은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에게 훨씬 우호적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형인 카를 5세에 비해 훨씬 융통성 있는 정치력을 갖춘 데다가 인간성도 좋았다. 페르디난트는 스페인 출신으로 독일을 대리 통치해야한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독일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원만한 제국 통치를 위해 제후들과의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가톨릭 제후들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제후들과도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신교도 제후들이 페르디난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카를 5세가 후계자를 바꾸려하자 독일 제후들은 신교, 구교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이미 '''선출된''' 합법적 차기 황제이자,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을 지켜낸 업적이 있는 페르디난트가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카를 5세의 신교 탄압의 수위가 연일 높아지면서 신교도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졌고, 동시에 카를 5세의 약속 불이행 및 무리하게 펠리페 2세에게 황제위를 물려주려는 시도 때문에 구교 세력 역시 황제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다. 이때 독일에서 신망이 높은 제후였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배후에서 신교도 세력을 다시 결집했다. 1551년 5월 22일 신교도 제후들 간에 '토르가우 동맹(Alliance of Torgau, Vertrag von Torgau)'이 맺어졌고 작센-마이센 선제후 모리츠가 동맹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한편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 앙리 2세는 아버지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합스부르크와 전쟁(이탈리아 전쟁, 1551~1559)를 일으켰다. 토르가우 동맹을 체결한 독일 신교도 제후들은 카를 5세와 전쟁 중에 있는 프랑스 앙리 2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토르가우 동맹 측은 앙리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로트링겐(로렌) 지역의 프랑스어권 3 주교령인 메츠, 툴, 베르됭의 할양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했고, 이에 1552년 1월 15일 독일 신교도 세력과 프랑스 앙리 2세 간에 '샹보르 조약(Treaty of Chambord)'이 체결되어 반합스부르크 동맹이 맺어지게 된다.
샹보르 조약이 맺어진 직후 샹보르 동맹은 곧바로 황제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Fürstenaufstand).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가 남부 독일을 휩쓸었고, 앙리 2세의 프랑스 군이 라인강변으로 진주했다. 1552년 5월 모리츠는 신교도 군대를 이끌고 티롤을 점령한 후 황제가 있던 인스부르크를 급습했다(인스부르크 전투, Campaign against Innsbruck). 황제는 포로로 사로잡힐 뻔 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소수의 측근만 대동한 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알프스산을 넘는 개고생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수모를 겪었다.
알프스를 넘어 가까스로 도피한 황제는 오스트리아 최남단 국경에 위치한 필라흐에서 설욕전을 위해 다시 군대의 소집을 명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에게 등을 돌린 가톨릭 제후들은 다들 소닭 보듯 수수방관하며 황제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한때 황제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던 바이에른 공작과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조차도 황제의 소집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명에 반하여 신교도측 대표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와 강화를 추진했다.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1552년 8월 개신교 제후군과 카톨릭 제후군 간의 강화(파사우 조약/화의 Peace of Passau, Treaty of Passau)가 체결되었다. 파사우 조약을 통해 페르디난트 1세는 개신교를 인정했고, 슈말칼덴 전쟁 이후 수감되어 5년째 개종을 강요받으며 고통당하고 있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공작[44]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석방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후 설욕전을 준비하던 황제는 카톨릭 제후들 마저 자신의 명에 응하지 않자 그제서야 제후들의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카를 5세는 제후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 위해 지난날 자신이 씹었던 약속들을 뒤늦게라도 이행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시작했다. 파사우 조약에서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석방하기로 한 결정에 동의했다. 이어 1553년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펠리페 2세의 승계권을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돌아선 제후들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황제는 겉으로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파사우 화의가 맺어진 후 신교도 측 제후였던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후작 '벨라토르(Bellator, 전쟁광)' 알브레히트 2세(알브레히트 2세 알키비아데스, Albrecht II. Alcibiades)가 독단적으로 2차 후작 전쟁(Second Margrave War)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접근하여 군사적 지원 및 영토 보상을 제안했고 이에 카를 5세와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 간에 동맹이 맺어졌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를 진압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1세와 모리츠가 이끄는 신구교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1553년 모리츠가 전사하였으나 1554년 제국의회는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결국 벨라토르 알브레히트 2세는 패퇴하여 물러났고, 이로써 카를 5세의 마지막 시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0.6. 카를 5세의 좌절과 평화의 도래


이후 개신교, 가톨릭 양측 모두에서 진정한 평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페르디난트 1세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적극 추진했다.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추호도 용인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그에게는 더이상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기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1555년 9월 25일 마침내 신교도 제후들의 영지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 The Peace of Augsburg)'가 체결되었다. 가톨릭 측의 체결 당사자는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였다. 카를 5세가 완강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의는 황제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카를 5세의 권위와 실권이 완전히 유명무실해졌음을 보여준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체결 소식을 들은 카를 5세는 극도의 분노와 무력감을 느꼈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치욕이라 여겼다.

1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카를 5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의 최전성기였다. 비단 기독교 세계의 수장[45]과 이슬람 세계의 수장[46] 간의 격돌로 치부할 것 없이, 서유럽 최강국과 동방 대제국 간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과 반란 수습, 종교 갈등으로 분주한 와중에, 쉴레이만 1세는 동유럽으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발칸반도를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아 1526년 중부 유럽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가 결정적으로 패배해 이 죽고 나라가 무너졌다. 오스만은 이제 신성 로마 제국과 바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헝가리 왕실의 정통성은 훗날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했지만 헝가리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에 편입당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중핵인 은 오스만군의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쉴레이만 1세는 12만의 대군으로 1529년 최초로 빈 포위를 시도했다. 이때 오스만군과 맞서 싸운 이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대리인을 겸하고 있던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제국들의 지원을 받아 결사적인 수성전을 벌인 끝에 겨우 격퇴에 성공했다.
1532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칙령을 내려 개신교의 환심을 샀다. 그만큼 오스만군이 입힌 후유증은 대단했다. 이 해 그는 결전을 벌일 태세로 친히 8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이끌고 빈에 진주했으며, 마침 오스만 측도 쉴레이만 1세 본인이 다시 헝가리로 직접 나서 임전태세로 대치하고 있었다.
사실상 황제의 최종 교전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스페인에서 불온한 기미가 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카를 5세는 지휘권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기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후 쉴레이만 1세 또한 겨울을 지탱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군을 철수시켜 2차 교전은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쉴레이만 1세는 유럽 장악의 목전에서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영민한 그는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가 대립하는 정세를 읽고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1535년 지중해의 합스부르크 식민지를 겨냥해 함대를 보냈다[47]. 스페인북아프리카 거점 튀니지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카를 5세는 오스만군을 격퇴하여 승리했다. 그 결과 튀니스와 할크알와디가 스페인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튀니지는 반세기 뒤인 1574년까지도 계속 스페인령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교황과 베네치아가 주축이 된 신성동맹 함대를 물리치고 다시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카를 5세는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자 1538년 적국인 베네치아와도 연합했다. 뒤에 쉴레이만 1세와 휴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간신히 오스만 제국과의 화평이 맺어졌고 이는 1683년 2차 빈 포위까지 1세기 이상 불안하게 지속되었다[48].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사는 이런 아버지보다도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더 유명하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투입해 오스만 제국에게 대승을 거둔 것 때문인데, 빈 포위전이 수동적 방어전이었다면 레판토 해전은 능동적 반격전의 성격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레판토 해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의 아들 셀림 2세의 통치 아래에 있었는데 어찌 보면 세기의 대결 구도가 아들한테까지 물려받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들들이 아버지의 위업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펠리페 2세셀림 2세나 판박이일 것이다.[49]

12. 카롤리나 법전 공포


라이벌이자 '입법자'라는 별칭을 보유한 쉴레이만 1세를 의식해서인지 카를 5세는 재위 초부터 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정비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유럽 본토만 해도 서쪽으로는 스페인부터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직접 경영하는 제국의 지배자로서,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532년, 마침내 역사적인 그 유명한 '''카롤리나 법전(Constitutio Criminalis Carolina)'''이 카를 5세에 의해 공포된다. '카롤리나' 법전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를 5세의 적극적인 주도로 작업된 이 법전은 법 제도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로마법과 독일법을 망라한 통일법전으로서 무려 219개 조항을 담고 있었다. 현대 형법의 근본적인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법전의 중요한 의의는 '''개인의 복수권을 공권력에 위임한다'''는 형법의 근본 이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함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법은 너무 가혹한 처벌과 중세적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법에서 규정한 범죄의 종류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 많고, 처벌 방식도 잔혹하며, 오늘날에는 경범죄조차도 성립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사형을 때리는 등 너무 가혹한 법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고지식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카를 5세의 성향이 크게 반영된 법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전은 이후 나폴레옹 법전이 나타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법전으로 여겨졌으며, 또 신성 로마 제국이 18세기 초까지 3세기를 더 지탱하는 과정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이후의 형법은 사실상 이 법전을 개수한 것에 가까우며, 이러한 영향력은 진정한 근대법이자 대륙법인 나폴레옹 법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3. 르네상스


카를 5세는 공교롭게도 경쟁자인 예술광 프랑수아 1세, 쉴레이만 1세처럼 그 자신 또한 엄청난 예술 마니아였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말기인 16세기 초 군주들의 공통적인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당대 군주들 중 예술적 후원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카를 5세가 가장 강력했다.
카를 5세 이전의 스페인은 사실상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탈리아[50], 프랑스 등 이웃 나라들이 막대한 후원과 부를 바탕으로 르네상스기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찬란한 문예부흥을 뽐내고 있었던 반면, 수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로 전 국토가 전장이나 다름없었던 15세기까지의 스페인은 그야말로 예술의 깡촌이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중세 시대까지 고대 로마의 건축 유적 말고는 도무지 볼 것 없던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예술적 빈곤함이 카를 5세 치세에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일단 카를 5세가 예술사적으로 행한 최고의 업적은 '''말살 위기에 처했던 이슬람 문화재를 보존한 것'''이다. 16세기 초 당시 장기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스페인 국민들의 이슬람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이미 북부 스페인에 남아있던 이슬람 유물들은 엄청난 파괴와 훼손이 가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종교개혁 당시 유럽에서도 최강급의 열렬 가톨릭 신봉국가였다. 이교도의 유산은 파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슬람을 믿는 무어인들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카를 5세 자신조차도 재위 초 알함브라 궁전 일부를 훼손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별궁(카를로스 5세 궁전)[51]을 건립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카를 5세는 이슬람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자신도 열혈 가톨릭 교인이었지만, 신앙과는 별개로 이슬람 예술의 깊이에 매혹된 것이다. 그 결과 카를은 알함브라에 건립된 자신의 별궁을 끝으로 '''더이상 이슬람 문화재를 훼손하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러한 왕명 때문에 당시 이단심문관들을 비롯해 종교열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페인 사람들도 이슬람 문화 훼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이후로도 가톨릭의 이교도 박해가 지속된 스페인이었지만, 중세까지 만들어진 무수한 이슬람 유적들은 왕가의 비호 덕에 잘 보호될 수 있었다. 이슬람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도 카를 5세의 보호 조치가 아니었으면 지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52] 카를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아버지보다 훨씬 강경한 가톨릭 광신도였지만, 그도 결국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이슬람 문화재를 잘 보존했다.
유럽 회화-건축 예술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간 계기도 카를 5세 때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플란데런 출신으로 대륙 본토의 휘황찬란한 예술 붐과 달리 정작 스페인 내에서 볼 만한 작품이 드물어 아쉬워하던 카를 5세는 적극적으로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을 초빙했는데, 이들이 바로 근현대 내내 예술 강국으로 꼽히게 될 스페인의 예술인 1세대로서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훗날 유럽의 문예사조를 휩쓰는 바로크 예술이 첫 싹을 틔운 것도 이 시기이며, 절대왕정기 유럽 각국의 왕실은 스페인 궁정의 후원을 그 본보기로 삼았다. 이처럼 후원 정책으로 단기간에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급성장을 이룬 케이스는 스페인이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카를 5세의 예술적 심취와 이해도가 높았던 것이다. 회화계 최고 거장 파블로 피카소, 건축계 최고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가 모두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도 이런 역사적인 토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13.1. 티치아노와의 인연


카를 5세가 스페인에 초빙했던 여러 예술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당대의 대표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다. 티치아노는 본래 베네치아 태생이었지만, 그 활동 영역이 유럽 각지에 걸쳐져 있었던 '''세계 최초의 국제 화가였다.'''[53] 즉 그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진정한 월드스타가 바로 티치아노였다.
피렌체 회화와 쌍벽을 이루는 베네치아 회화의 최고 대표 작가로서 그는 독특한 유화 기법으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 뛰어난 화풍 덕에 각국 군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카를 5세는 물론이고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54] 여러 굵직굵직한 군주들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 일감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 위로는 황제와 왕들부터 아래로는 총독, 제후들에 이르기까지 권력 깨나 쓰는 이들이라면 티치아노에게 의뢰하려 안간힘을 썼으며 실제로 지금 남아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그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처럼 유럽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이었기 대문에 티치아노는 반농담조로 '재야의 권력자'로까지 불렸다. 실제로 16세기 유럽에서 이 정도로 부와 명성을 쌓아 출세한 화가는 없다. 그렇게 일생을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면서도 누군가의 전속 궁정화가로 한 곳에 매이길 거부해온 티치아노였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최대 후원자인 카를 5세와는 매우 각별한 관계를 맺는다.
1532년 첫 만남 이후 몇 차례 초상화 작업으로 카를 5세와 인연을 맺으면서 티치아노는 차츰 카를 5세의 예술적 열정에 감화되었는데, 그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한번 티치아노가 카를 5세의 초상화를 그리는 중 그만 실수로 을 땅에 떨어뜨리자 화가인 자신보다 모델인 황제가 먼저 몸을 숙여 떨어진 붓을 줍고서는 그것을 건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티치아노 정도의 거장이라면 기꺼이 황제로부터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지!"'''

(리돌피, 티치아노 전기 中)

이 때 티치아노가 느꼈을 정신적 감명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후 지금까지도 줄곧 미술가들에게 후원자의 가장 모범적인 전형으로 통하고 있다. 카를은 티치아노를 극진히 총애하여 화가인 그에게 기사 작위와 백작 작위까지도 수여했다.
이런 까닭인지 말년의 티치아노는 자주 스페인에 왕래하며 거의 궁정화가나 다름없는 예우를 받게 된다. 특히 카를 5세와는 교분이 두터웠기에 소싯적 카를 황제가 자신의 애견과 같이 노는 사사로운 모습부터 제후 반란을 진압하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영예로운 모습까지 온갖 초상화를 전담하여 도맡다시피 화폭에 옮겼다. 위에 올려져 있는 카를 5세의 이미지 상당수가 바로 티치아노의 솜씨다. 물론 군주의 초상화로만 작품을 한정한 것도 아니라서, 걸작 <신성과 세속의 사랑>을 비롯해 대담함이 넘치는 풍속화와 종교화, 누드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카를 5세 사후 티치아노는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의 후원 하에서 노년을 보냈다. 사이가 친밀하여 자주 만났던 카를 5세와 달리 궁정 안에 틀어박힌 펠리페 2세와는 평생 단 2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잦은 편지 교환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청년 시절 펠리페 2세의 모습도 티치아노가 작업한 초상화이다.
이렇듯 티치아노는 회화의 불모지인 스페인의 예술 환경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킨 1세대 화가로서 후대 스페인 화가들의 영원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으며, 피터 폴 루벤스를 비롯한 바로크 화가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이 티치아노를 자신들의 교범으로 삼고 흠모했다.
당연히 스페인 내에서의 상징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특히 스페인 미술사학자들은 오히려 벨라스케스나 고야, 피카소 같은 화가들보다 스페인 회화의 근본적 뿌리인 티치아노를 더 중요시 여길 정도다. 이 티치아노의 화풍은 이후 다음 세대의 거장인 엘 그레코에게 계승되어 본격적인 스페인 바로크의 포문을 연다.

14. 후계자 문제 및 퇴위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하며 그는 진정한 유럽의 최고의 지배자로 등극하며 생애 최고의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그의 몰락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만년에 잇따른 병크를 저지른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제후들이 그에게 등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실권을 잃어버렸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여 은둔한 채 쓸쓸히 남은 여생을 보내고 만다.
1546년에는 카를에게 가장 큰 짐을 지워주었던 마르틴 루터가 사망했고, 1547년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2달 간격으로 연달아 사망했다. 루터의 사망으로 개신교 세력의 구심점이 약해지고,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가 노환으로 드러누워 두 나라가 간섭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마침내 황제는 이것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기고 군대를 소집하여 장장 16년만에 독일로 돌아왔다. 황제는 이 기회에 신교파를 완전히 박살내어 종교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슈말칼덴 전쟁이 시작되었고, 1년여간의 전쟁 끝에 개신교 세력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이 슈말칼덴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는 종교전쟁의 최종 승자가 된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짐이자 가장 큰 목표가 해결되고 나자 그는 나사가 풀어져 버렸고, 이제는 더이상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그는 막나가기 시작했다. 슈말칼덴 전쟁이 끝나자 자신을 도왔던 제후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멋대로 파기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제후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때까지 헌신적으로 자신을 도왔던 동생 페르디난트와 나중에 그에게 치명타를 날리게 될 작센공 모리츠와의 약속을 씹은 것은 크나큰 실수였고,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만년에 그가 몰락한 결정적인 계기는 후계자 문제였다. 이미 카를은 오래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1531년 미리 황제 선거를 치러 페르디난트가 이미 황제의 후계자로 공인받은 지 20년 가까이 지난 상황이었다. 카를이 페르디난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통치를 맡긴 것은 제위 초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외부에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카를 5세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싸우는 동안, 독일에서는 페르디난트가 훌륭히 제국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온건한 통치 방식은 제후들의 호감을 사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더이상 유럽에서 그에게 대적할 세력이 없어지고 나자 황제는 페르디난트를 폐하고 장남 펠리페 2세에게 황제 제위를 넘겨주기 위한 절차에 들어간다. 페르디난트가 이미 20년 전에 황제 선거에서 차기 황제로 선출되었지만 카를 5세는 힘으로 이를 뒤엎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그런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후계자를 바꾸는 것은 카를이 생각했던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카를 5세가 과거 황제에 당선될 때 독일 제후들이 가장 우려했던 문제 중 하나는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이 황제가 되고 나서 스페인 세력을 독일 국내 정치에 끌어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카를 5세는 황제 선거와 대관식에서 절대로 외세(특히 스페인)를 독일 정치에 개입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재차 공약해야만 했다. 카를 5세가 페르디난트에게 대리 통치를 맡긴 채 독일 내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거의 직접 개입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프랑스, 교황청 등과의 전쟁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외세를 독일 정치에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 황제 선거에서의 공약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가 자신의 주력군인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독일 전쟁에 참전한다면 이것은 명백한 공약 위반 사항이었다.
그러던 와중 프랑스, 교황청을 차례로 제압하는 데 성공한 카를 5세는 마침내 최후로 남아 있는 적인 독일의 신교도 세력을 궤멸시키기 위해 1546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16년 만에 독일로 행차했다. 그리고 마침내 개신교 세력을 초토화시키고 독일에서 종교 개혁을 박멸하는데 (일시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 슈말칼덴 전쟁에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된 황제의 5만 대군이 독일 강토를 휩쓸고 다니자 독일 제후들 사이에 외세의 개입에 대한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가 동생에게 넘기기로 약속하고 황제 선거까지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파기하고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넘기려고 하자 제후들이 집단 반발하게 된다. 황제 선거를 물린다는 것은 카를 4세가 공포한 금인칙서에 명문화되어 있는 선제후들의 권한과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고, 이는 제국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였다. 게다가 페르디난트에게 폐위당할 만큼 결격 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페르디난트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업적은 제후들이 페르디난트 1세를 옹립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게다가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황제가 되기에는 여러가지 결격 사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완전한 스페인 사람으로 독일어도 전혀 할 줄 몰랐고 독일과는 문화적 접점이 없었다. 게다가 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지도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작용했던 오스트리아는 이미 1521년 페르디난트 1세가 물려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내에 있던 또다른 합스부르크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지가 없더라도 혈통을 이유로 황제 선거에 출마한 경우는 있었지만 실제로 당선된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애초에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 제도가 시작된 것 자체가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 서프랑크 왕 샤를 3세가 혈통을 내세워 독일 왕위에 오르려 하자 독일 5대 공국 제후들이 샤를의 즉위를 막고 독일인 중에서 왕을 세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이처럼 펠리페 2세는 황제로 선출되기에는 여러 가지 결격 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독일 제후들은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된다면 독일이 스페인에,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제후들 자신들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 1세는 30년간 독일을 통치하며 독일 제후들의 민심을 얻고 있었다. 그는 원래 독일어를 할 줄 몰랐지만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문화를 받아들여 이제는 완전히 독일에 융화되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황제의 의중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지만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황제의 지시를 현지 사정에 맞게 융통성있게 적용하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신교도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황제의 지시를 완화하거나 그 시행을 유보시켰다. 또 원만한 성격의 페르디난트는 독일의 여러 제후들과 친분을 쌓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구교파는 물론 적대 세력인 신교파 제후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신교 제후와 도시들도 그를 도와주었다.
이처럼 능력도 있고, 사실상의 황태자로 지명된 후계자를 뒤바꾸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왕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세력을 쌓게 되며, 이는 사실상 독일 내의 통치권을 동생에게 위임한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의 경우엔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만년에 경쟁 상대가 없어진 카를 5세가 지나치게 완고해진 데다가 자기 마음대로 약속을 씹어버리는 행동을 반복한 끝에 후계자마저 자신의 입맛에 걸맞게 갈아치우겠다 사실상 선언하자, 제후들은 당연히 황제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가 제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유럽의 봉건제는 동양적인 전제적 군주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중세 시대 유럽의 봉건제는 동아시아와 달리 근본적으로 주군과 봉신 간의 '''상호간 계약'''에 기반한 것이었다. 서로간의 계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봉신은 언제든지 영주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다른 영주와 계약을 맺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카를 5세가 제후들과의 약속을 자꾸 뒤집는 것이 결국 스스로의 권력과 권위를 갉아 먹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제후들이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정당한 이유를 제공했던 것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기세 등등했던 카를 5세는 나중에 실권을 잃은 후에야 이를 뉘늦게 자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후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을 지켜낸 공로가 있는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제후들과 황제의 대립이 정점에 있던 상항에서, 황제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슈말칼덴 전쟁으로 완전히 와해된 신교세력을 다시 규합했다. 1552년 그가 이끄는 신교군은 인스부르크에 있는 황제를 급습했고 황제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도망가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황제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조차도! 제위 계승문제로 형과 감정이 상한 페르디난트 1세는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를 노리던 황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신교파의 모리츠와 단독으로 휴전 협정(파사우 조약)을 맺었다. 이는 황제가 독일에서 실권을 잃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인스부르크에서 간신히 탈출하는 데 성공한 황제는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를 노렸으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파사우 조약이 맺어졌고 이에 독일의 종교전쟁은 휴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사우 조약의 체결로 황제의 복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 황제는 아들에게 제위를 넘기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또 과거의 자신이 씹었던 제후들과의 약속들을 뉘늦게 이행하는 등 제후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제후들은 황제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완전히 거두었고, 아무도 황제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황제는 독일에서 개신교도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쟁하길 원했지만, 독일의 제후들은 이제 소모적인 종교 전쟁을 종식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원했다. 그리하여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하에 신구교 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있어서 사탄인 개신교도들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를 5세는 신구교간 평화를 이루기 위한 화의를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1555년 화의가 체결되자 카를 5세는 이제는 황제로서 더이상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퇴위하고 은둔하고 만다.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갔고, 나머지 영토인 스페인과 네덜란드, 아메리카 식민지, 이탈리아, 필리핀 식민지는 펠리페 2세에게 돌아갔다. 카를 5세는 특히 마지막에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네덜란드를 기필고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 땅은 그의 고향이었으며, 황제가 되기 전에 요절했던 아버지 미남왕 필리프가 직접 다스렸던 영토였고, 또한 카를 5세 본인이 성년이 되어 최초로 다스렸던 영토였다. 결과적으로는 그 아들이 물려받긴 했으나 다 말아먹었으니(…).
1555년에는 어머니인 후아나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카를은 네 살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고모에 의해 자랐다. 그는 정신병자인 어머니를 싫어했고, 젊은 시절 아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할 때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어머니를 방문했던 것을 제외하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평생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를 계속 유폐시켰다.[55]
가족사적으로 그에게 실망감과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은 1556년 11살의 장손 돈 카를로스를 처음 보았을 때였다. 손자는 수두증에 곱사등에 다리까지 절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지능도 모자랐고 정신병까지 갖고 있었다. 미래에 스페인 제국을 이어받을 장손의 실체를 보았을 때 카를 5세가 느꼈을 슬픔과 고통은 이제까지의 어떤 실패보다도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1556년 수개월에 걸쳐 카를 5세는 자신의 제위를 하나하나씩 아들과 동생에게 양위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살아있는 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의 생전에는 대관식을 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국 의회에다가 카를 5세의 퇴위 가결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의로 퇴위하는 것은 그동안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를 5세가 퇴위하고도 2년 동안 제국 의회에서는 그의 퇴위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1558년 초에서야 승인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파사우 조약이 맺어진 후 카를 5세는 고향인 네덜란드에게 은거했다. 퇴위 후인 1556년 카를은 네덜란드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서 1557년 겨울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 곳이라 낙점한 유스테 수도원에 입소한다. 말이 수도원이지 왕궁 못지 않은 화려한 곳이었다.
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카를의 퇴위를 이렇게 평했다. "황제께서는 이리하여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모범을 실천하셨다. …황제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셨다. …주님께서 이제 황제께 자유를 주실 것이리라 믿는다."
퇴위 후에도 그는 아들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의 전투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포르투갈을 스페인 왕가로 끌어들여 이베리아를 통일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 등 뒷바라지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의 섭정인 카타리나가 바로 카를의 누이였기 때문에 친밀한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들 펠리페가 스페인을 떠나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기간에도 그는 당시 스페인 임시 섭정이었던 딸 후아나를 실질적으로 보조했다.
퇴위 2년 후인 1558년, 카를 5세는 유스테 수도원에서 조용히 사망했다. 향년 58세. 기록에 따르면 카를은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수도원 제단에서 풍겨오는 향 냄새를 맡을 때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재위 중에 권력이 분산된 독일을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이끌려 했으나 종교개혁이라는 흐름에 거스르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교황과 갈등을 빚으면서도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고, 즉위 후 10년이 지난 뒤에서조차 억지로 교황의 인가를 받아내고야 말 정도로 신앙에 열중했던 카를 5세는 종교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정치적 수단을 이용해 탄압하려고 했고, 이로 인해 독일의 절대왕정은 이웃인 프랑스보다 한참 뒤쳐져 영방국가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로 인해 그의 사후 두 개로 갈라진 제국은 얼마간 유럽의 패권을 노리다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그 자리를 프랑스에게 내주고야 만다. 동생 페르디난트가 계승한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30년 전쟁으로 유명무실해지다가 3세기 뒤에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고야 말았으며[56], 카를 치세에서 유럽 최강의 국력을 구가하던 스페인도 반대로 황제의 치세에서 발생한 막대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야 만다.

15. 평가


역사상 카를 5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를 단순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군주로서 장단점이 명확하게 갈리는 존재이며, 암군이라고도 명군이라고도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존재였다.[57]
이미 전술되어 있듯이 카를 5세는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 전역에 산재해 있는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게다가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로, 종교전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 신대륙 정복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들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의 한 복판에 카를 5세가 있었다.
그 때문에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면으로만 판단하자면 카를 5세 치세의 제국이 가진 화려함은 유럽 역사상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서 그의 이름은 자주 언급되지 않는데, 이는 그의 치세에서 발생한 가장 유명한 사건인 종교 개혁의 열풍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개신교 및 오스만의 입장에서 저술되는 경우가 다발한 것 이상으로, '''카를 5세의 치세 자체엔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다스린 영토에 비해 어디까지나 '전형적인' 군주였으며, 세계사적으로 별도 주목받을 만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적은 없다. 최고의 영토와 권력을 누렸다 할지언정 이전 시대와 유별날 정도로 다른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비록 카를 5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 그럭저럭 현상 유지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도한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착취와 수탈, 빚으로 썩어들고 있었고 이는 결국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대에 이르러 스페인이 수차례 파산하면서 급격히 몰락하는 계기로 이어지게 된다.

15.1. 종교적 측면


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종교 개혁 부분일 것이다. 카를은 일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거의 재위 기간 내내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 노력했다. 만약 그가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유럽과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훨씬 빠른 속도로 개신교가 확산되었을 것이다. 종교전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일단락되었지만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 년 후에 다시 폭발하여 30년 전쟁이 끝나고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물론 그 특성상 종교적 입장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황제의 행동을 판가름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가톨릭에선 가톨릭의 수호자로, 개신교에선 무자비한 탄압자로 여겨질 테니. 그러니 필연적으로 카를 5세의 종교 개혁 관련 치적은 정치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평가에서도 카를 5세는 좋은 평을 듣기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종교개혁에 대해 제국의 황제나 유럽의 패권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대응했으며, 그조차도 어정쩡했다. 정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오판을 연발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종교 개혁을 저지하려는 것을 넘어, 그 자신 스스로가 촉발한 종교 전쟁은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독일 전역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으며,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개신교도들을 1550년 내린 '피의 칙령(Bloedplakkaat)' 등을 위시로 한 탄압 정책으로만 일관한 것 또한 좋게 봐주기 힘들다. 그는 단순한 신앙인이 아닌 황제였으며, 당시 개신교도들은 이미 국가의 한 틀을 이룰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가 대륙의 지배자로서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선 속내야 어쨌든 그런 일파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했어야 할 테지만, 그는 그의 치세 전반에 걸쳐 개신교도들에 대해 단 두 가지로만 화답했다. 탄압과 숙청이었다.
종교 개혁과 관련한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그의 공이 아닌 전적으로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 및 그가 이끄는 독일 제후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카를 5세 치세하의 종교 개혁과 관련된 것들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으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가 있다. 그는 배신자나 유다 따위로 왜곡되어 서술될 때가 많은데, 사실 그의 배신은 처음부터 카를 5세가 모리츠에게 약속했던 영지나 약속 등을 떼어먹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리츠 입장에서는 정당한 배신이었다고 할 수 있는 셈. 이처럼 종교개혁 관련으로는 카를 5세 치세의 화려함에 파묻혀 부당한 평가를 받는 이들이 여럿 있다.
살아 생전 개신교를 타파해야만 할 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카를 5세는 이 종교적 평화안을 평생에 걸쳐 반대했으며, 이를 사탄과 손잡는 악덕으로 여겼다.

15.2. 군사적 측면


또한 그는 제위 기간동안 종교 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위 기간 중 유럽 본토에서 딱히 영토를 늘리지 못했다. '''콩키스타도르들의 신대륙 정벌'''이 그의 치세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제국의 영토는 역사상 유래없을 정도로 확장을 거쳤지만, 정작 유럽 본토에서 그가 치른 전쟁의 성격은 그런 화려한 영토 확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전쟁은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수비전이었고, 두 번째는 실익 없는 종교 전쟁이었다. 이 중에서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변국들의 견제나 오스만의 침략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촉발한 종교 전쟁 및 그로 인해 통치 지역에 부과된 가혹한 세금은 변명할 도리조차 없다.
그가 생전 치른 전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저 파비아 전투의 승리다. 이 파비아 전투를 들며 카를 5세가 군사적으로 뛰어난 군주였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일부 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역할은 적지 않았지만[58], 이 전투의 의의는 검과 창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몰락하고 화승총이 전쟁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스페인의 테르시오 편제 및 그러한 체제를 확립한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공이며, 이를 카를 5세의 전술적 혁신으로 평하는 것은 그다지 공정하지 못하다.
단, 그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감하고 있으며, 전술적 혁신가는 아니라는 것뿐이지 그는 충분히 전쟁에 있어 유능한 군주가 맞았다. 단지 그가 생전 벌인 수많은 전쟁들의 동기가 왕으로서 필요 하에 벌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심에 의한 것일 뿐.

15.3. 경제적 측면


그의 화려한 군공은 그러나 동시에 유럽 역사상 전무후무한 넓이를 자랑했던 그의 영토, 다시 말해 '''세금'''에서 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 전원보다 유리한 경제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낸 부실 군주였다. 생전 그가 일으킨 수많은 전쟁은 그의 넓은 영토에서 나오는 세금으로도 손에 부쳤으며, 신대륙에서 창출되는 금은은 제대로 된 제련법 따위나 당시의 사회 인프라로 인해 곧장 융통하기 어려웠다[59].
카를 5세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세금 착취와 식민지 착취 뿐만 아니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금융업에 힘쓰던 푸거 가문이나 벨져 가문 등에서 엄청난 양의 돈을 빌렸다.
물론 이러한 자금 융자는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은 아니다. 향후 갚을 능력만 있었다면 오히려 그 능력과 신용, 나아가서는 그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자신의 이름으로 빌릴 수 있다는 실적까지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융자해주는 측 또한 황제에게 돈을 대어줬다는 뒷배경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금 융자를 잘 이용해서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곤 했으며, 그의 고모 마르카레테는 어린 카를에게 가문의 전통적인 자금 융자 비결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를 5세가 그의 상환 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자금을 빌렸다는 것이었다. 그의 치세 하의 스페인 왕국은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 규모가 무려 3,900만 두카트 가량이나 되었다. 나중에 이 빚은 스페인 재정에 엄청난 부담으로 되돌아왔으며, 이로부터 말미암아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결국 몇 번이나 파산하고야 만다. 펠리페 2세의 첫 파산은 왕위를 물려받은지 불과 1년 후인 1557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카를 5세의 실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이베리아 연합의 큰 짐이 되는 막대한 빚은 사실상 카를 5세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을 무능한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키운 셈.
더 최악인 것은 카를 5세는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지는 카드 돌려막기 기술을 시전했다는 점이다. 카를 5세는 푸거가에서 빌린 빚을 갚기 위해 스페인에서 '후로'라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그 이자가 무려 10%였다. 당연히 이 공채는 남녀노소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매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몰았고, 나중에 후로의 이자율을 7%로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후로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한 채 스페인 내의 권리를 외국인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만다.

15.4. 종합적 평가


물론 오늘날 그가 지배했던 지역, 특히 그가 태어난 벨기에나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향에서 인기가 좋은 것과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 백정 스탈린도 고향 조지아에서는 인기와 평판이 좋다. 게다가 카를 5세는 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 개신교들을 피의 숙청으로 쳐낸 덕택에 가톨릭 세력의 미화 또한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카를 5세의 치세가 스페인 역사상 가장 화려한 황금시대를 자랑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농담으로도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는 스페인 역사 속에서 간신히 레콘키스타를 마치고, 한때 이베리아 전 인구의 9할 이상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었다는 흑역사 끝에 나타난 게 유럽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이베리아 패권시대를 연 황제였다는 걸 고려해 보면 스페인에서 평가가 나쁘기도 어려울 지경.
그와는 별도로 그의 치세 자체는 워낙에 드라마틱했던 탓에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는 역사물의 소재로 즐겨 다뤄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다소 두루뭉술한 카리스마악역 대마왕 기믹으로 설정하는 편. 대신 그 아들내미만큼은 확실하게 찌질이로 만들어 일점사로 깐다. 프랑스에선 '''흑태자 에드워드오토 폰 비스마르크 대마왕 계보 사이에 위치한 트라우마'''로 취급 중.[60] 터키에서는 자신들과 맞선 적의 수괴마왕 취급.
래리 고닉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는 카를 5세의 일대기 묘사에 거의 한 챕터(제22챕터 "선행?")를 할애[61]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면서 '''재위 39년간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하고 포토시[62]를 발견하였으며 루터파, 칼뱅파, 예수회가 발호하고 지동설이 대두한 데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2번이나 포위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라 평하였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설명조차도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16. 언어


지금의 벨기에에 있는 헨트에서 출생하여 자랐기 때문에 카를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64] 그 밖에도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의 전신)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에 이르기까지 5개 국어를 익혀 구사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는 에스파냐어로, 여자에겐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겐 프랑스어로, 그리고 내 애마에게는 독일어로 말한다[65]"'''는 엄친아스런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다만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는 유사성이 많고, 또 독일어와 플랑드르어 역시 유사성이 많기 때문에 이들 5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명목상 5개 국어를 구사했다고는 하지만 능숙하게 구사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그의 영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인 독일어 실력과 스페인어 실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독일어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름스의 제국의회에서 황제는 독일어로 오가는 대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66]
그리고 프랑스였기 때문에 파리에도 자주 다녀갔는데, 깊은 감명을 느꼈는지 '''"파리는 도시가 아니라 우주다(Lutetia non urbs, sed orbis)"'''라는 파리지앵스러운 말을 남기기도 했다[67]. 그의 또 다른 명언으로는 '''"저 넘어 더 멀리"'''(PLVS VLTRA)가 있는데, 이는 국경과 민족을 허물고자 했던 글로벌리즘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17. 부인과 가족관계


원래는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안 드 브르타뉴가 낳은 2명의 딸들과 약혼 관계에 있었는데 둘 다 결혼 전에 사망을 하게 된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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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콜럼버스를 지원했던 이사벨라 여왕의 외손녀가 된다. 부모는 포르투갈의 왕인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 어머니는 이사벨라가 14살이 되던 해 사망하고, 새어머니로 이후 시누이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여대공이 오게 된다.[69] 이 결혼을 계기로 스페인포르투갈합병하는 계기가 된다.
이사벨라와 카를 5세는 사촌관계인데, 당시 이사벨라의 오빠인 주앙 3세는 카를 5세의 여동생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겹사돈이 된다. 이사벨라는 아름다운 외모에 지적이고 영리해서 남편이 대제국을 다스리느라 부재중일 때는 정치를 잘 꾸려나갔다. 부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총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사벨라는 6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그녀의 나이 36세, 카를의 나이 39세)한다. 이사벨라를 많이 사랑했던 카를 5세는 이후 늘 검정색 상복을 입고 후처 없이 독신으로 지냈다. 유명한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도 칙칙한 검은 옷만 입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생아가 있기는 했지만, 결혼 전에 3명, 이사벨라와 사별한 후에 1명의 사생아를 낳았으므로 불륜관계에서 낳은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라와 얻은 6명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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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인 펠리페 2세와 여러 모로 성향과 정치적인 관점이 비슷하고 사이도 가까웠던 마리아는, 사촌이 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을 했다. 남편과 28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70] 마리아의 딸 안나는 오빠인 펠리페 2세의 4번째 부인이기도 하고, 안나의 아들이 펠리페 3세로 이후 후계자이기도 하다. 딸 안나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어린 아이를 놓고 사망했기 때문에 마리아는 남편이 사망한 이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스페인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리아는 펠리페2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2번이나 스페인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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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으로 사촌이 되는 포르투갈의 후계자 주앙 마누엘과 결혼을 한다.[71] 남편은 1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몇 주 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세바스티앙이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받는다. 요한나가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오빠 펠리페 2세는 영국의 메리 1세와 결혼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떠났는데 이때 요한나를 불러들여서 섭정을 맡기기도 했는데 요한나는 이후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고 아들 세바스티앙도 이때 본 것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연락과 초상화를 주고 받아 아들이 자라는 것과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다. 아들 세바스티앙은 3살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주앙 3세에 이어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고, 마리아의 시어머니이자 고모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72]가 섭정직을 맡는다. 요한나의 아들인 세바스티앙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는 세바스티앙 할아버지의 남동생인 66세의 헨리케에게 넘어간다. 헨리케는 추기경 출신으로 자녀가 없이 고령으로 사망했고, 다시 포르투갈의 왕위는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간다.
사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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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가 22살 때 얻은 사생아 딸. 카를 5세에게 인정을 받은 딸로, 파르마 공작부인이자 네덜란드의 섭정직을 맡는다. 고모 할머니인 네덜란드의 섭정 마르가레테[73]와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74]가 마르가레테의 육아를 맡았고, 마르가레테는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잘 받으며 잘랐다. 마르가레테는 2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역시나 사생아 출신인 피렌체의 공작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75]이고 두 번째 남편은 파르마의 공작인 오타비오 파르네세로 남편과의 사이에 2명의 자녀를 낳았다.

18. 그 외


그의 재위 초기인 1523년, 덴마크로부터 스웨덴이 독립했다.
그의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군매치락으로 박살낸 파비아 전투는 유럽사에서 최초로 화기인 이 전면에서 활약해 대승한 전투로 평가된다. 그 놀라운 위력을 실감한 유럽 각국은 재빨리 총의 제식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의 재위 말년에 이르면 총기가 이미 유럽은 물론 일본까지도 전파된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는 같은 냉병기가 몰락하고 본격적으로 총의 시대가 열린 급변기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파비아 전투에서 활약한 스페인 테르시오는 마지막까지 백병전을 염두에 둔 테르시오 전술을 유지했다. 이들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유럽 전술의 대세는 총기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선형진으로 넘어가게 된다. 역으로 생각하면 파비아 전투와 무려 120년의 격차가 있는 로크루아 전투까지 테르시오가 줄창 써먹힐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전술이었다는 얘기도 되겠다.
이렇듯 총이 뜨면서 자연히 기사 계급은 몰락을 걷고 경보병이 승패를 가르는 시대가 열린다. 이에 따라 기사가 중핵을 이루는 봉건제도 또한 구조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의 퇴조 크리와 맞물려 드디어 중세가 완결된다.
별로 긴밀한 관계는 없지만 러시아의 악명 높은 차르 이반 뇌제의 치세와도 겹친다. 조선으로 치면 11대 중종, 12대 인종, 13대 명종 연간에 걸친 시기이다.
예수회가 가톨릭을 명나라에 처음 포교하고, 일본이 처음으로 스페인 출신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가톨릭과 접한 시기도 바로 그의 재위 기간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스며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후 꾸준히 민중에게 파고들어 훗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일본의 시마바라의 난으로 이어진다.
그의 재위 중에 그 유명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발표했다. 훗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까지 경탄할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사회 전체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중세적 사고가 근세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코에이게임 대항해 시대 초창기 시리즈가 바로 그의 치세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로만 나오는지라 이토록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가뜩이나 생김새도 여러 왕들 중 평범하게 생긴 편이라.
베르디오페라 <돈 카를로스>에서는 카를 5세의 혼령이 자신의 손자인 돈 카를로스(주인공)의 조력자 역할로 등장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혼령인 그는 손자를 위해 자신의 유해가 이장된 엘 에스코리알 궁전 성당으로 인도한다.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이자 빅토르 위고의 운문 사극을 바탕으로 작곡된 에르나니에서는 늙은이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그것도 정략결혼) 한 여자를 꼬시려다 에르나니와 실바한테 발각되어 사각관계(…)까지 일으켜 버린다. 막판에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단념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연적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 물론, 비극 오페라답게 에르나니와 엘비라가 죽는 것이 진짜 엔딩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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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를 다룬 캐나다 드라마 튜더스에서도 당연히(?) 잠깐이나마 등장했다. 주걱턱을 보면 캐스팅 배역의 싱크로가 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영국에서도 합스부르크 하면 주걱턱은 상식 수준인지라 오히려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했을 것이다. 이건 한국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면 바로 원숭이가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스페인 방송국 rtve는 카를 5세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 드라마 카를로스, 왕이자 황제(Carlos, rey emperador)를 방영했는데 여기선 반대로 카를 5세가 미남으로, 헨리 8세가 싱크로율 가까운 뚱보로 묘사된다.
Paradox Interactive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능력치 4/5/5의 나름 명군으로 등장하며, 재위기에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1] 스페인에선 ‘카를’이라는 이름을 가진 첫 번째 왕이었으므로 카를로스 1세 (Carlos I).[2] 공식적인 1대 국왕이다.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이전 왕들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그리고 기타 등의 왕계로 분류된다. 카를의 모친 후아나 여왕이 유폐 상태에서도 형식상 공동 통치자였지만 그녀는 왕조 개창자로 볼 수 없는 데다 실권은 전적으로 카를이 갖고 있었기에 대체로 카를 본인만을 스페인의 1대 국왕으로 취급한다.[3]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명목상 선출직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라는 신분은 없다. 그러나 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프 공이 황제직을 계승할 것이 사실상 확정적이었으며, 그의 급사 후 그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이 직위를 물려받는다.[4]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인 마리(카를의 조모)가 계승권을 갖고 있었고, 마리가 사망한 후 장남이자 제국의 (사실상) 황태자였던 필리프(훗날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왕, 펠리페 1세) 공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덧붙여서 이 때의 부르고뉴는 그 전대의 혼인합병으로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일원인 플란데런을 꿀꺽한 상태였다. 참고로 필리프는 아라곤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1세로 즉위하였고 나중에 카를에게 오스트리아지역을 포함한 스페인의 영지를 물려준다.[5] 원조 정도가 아니라, '''"짐의 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도다"'''라는 말을 실제로 남겼다.[6] 통일 스페인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여전히 다른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카를 5세를 한 사람의 군주로 섬기는 동군 연합의 형태였다.[7] 훗날 보르본 왕조의 이사벨 2세가 즉위할 때, 이에 반발해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킨 카를로스 공도 자신을 카를로스 5세라 자칭하기도 했다.[8] 다만 스페인은 카를 5세 이후로도 카를로스의 이름을 가진 군주들이 많이 즉위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표기법이다.[9] 실제로 로트링겐을 통치한 적은 없다. 이는 카를의 증조부인 용담공 샤를 치세에 부르고뉴 공국이 로트링겐 공국을 점령하였을 때 참칭한 일종의 명목상의 작위로 할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자신의 아버지, 미남왕 필리프를 거쳐 자신에게 이어진 것이다. 용담공 샤를이 로트링겐을 점령했을 당시에도 로트링겐 가문과 로트링겐 공작은 멀쩡히 존재했고 이후 낭시 전투에서 샤를이 스위스 용병단과 로트링겐 공작에게 패배하면서 없던 일이 된다.[10] Prince는 보통 왕자로 번역되지만 대공 등 다른 의미도 있다. 자세한 것은 프린스 항목 참조.[11] 란트그라프는 보통 방백으로 번역된다. 궁중백이나 변경백보단 낮지만 일반적인 백작령으로 구분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후 발전한 제국 백작과도 구분된다(제국 백작은 제국의회에 투표권이 있는 직위.)[12] 참고로, 프랑슈 콩테 지역은 백작령으로 분리되어 있었다.[13] 그의 지위 중 쿠바·멕시코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아메리카, 포르투갈로부터 영유권을 넘겨받은 필리핀, 알제리·튀니지 등을 포함하는 아프리카 식민지는 제외한 것이다.[14] 황제가 된 직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독일의 대리 통치를 맡기면서 이 작위를 물려주었다. 물론 오스트리아의 Archduke 칭호는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차남 등도 사용할 수 있어 왕의 아들에게 내려지는 대공의 의미를 가진 Prince가 아닌 왕자라는 의미를 지닌 Prince가 내려지는 것처럼 사용될수도 있어 그 전부터 Archduke라고 불렸지만 1521년 1월 12일을 기점으로 페르디난트는 전과 다르게 왕자의 느낌으로 사용되는 대공이 아닌,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인 대공이 된 것이다.[15] 미남왕 필리프 대공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여걸 기질이 강해서, 프랑스가 플란데런을 깔보고 조공을 요구하자 전쟁을 벌여 프랑스군을 발라버리기도 했다.[16] 물을 잘못 마시고 앓다가 6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사위인 필리프 대공이 자신의 왕국을 물려받게 된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이 사위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오늘날 암살보다는 티푸스 감염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더 높게 보긴 하지만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17] 애초에 둘째 손자의 이름 자체가 외할아버지 본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18] 정확히 말하면 아들이 1명 태어났는데 요절해서 포기한 쪽에 가깝다.[19] 그러나 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까지 차지함으로써 발생한 전비 지출 문제로 인해 부분적인 저항은 이후로도 이어졌고, 결국 그는 어머니 후아나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완전히 통치하지는 못했다.[20] 꼬뮤네로 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1521년 1-3월 사이에는 반란 지도부 토르데시야스의 성스러운 대표회 (santa junta)가 카를로스 대신 후아나만 거의 납치에 가깝게 '모시고' 강제로 도장 찍게 만들려고 하다가 이것도 여왕과의 협상 결렬로 실패하자 아예 카스티야 전국 의회에 투표권 가진 18개 도시 중 13개 도시가 자신들 편이란 '''민주적''' 논리로 아예 단독으로 정부를 꾸릴려고 하였다. 꼬뮤네로 봉기는 단순하고 일시적인 반란이 아니라 이런 치밀한 르네상스 공화주의적 사상적 배경이 있는 근대적 '''혁명'''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카를로스의 왕실 정부는 이만큼 군주의 권위가 손상된 것에도 불구하고 당장 왕실 관료, 거대 귀족층이 전부 반란의 수뇌부들과 학교 동문, 인척 관계다 보니 적극적으로 처벌 할 수 없었다.[21] 다만 잉카의 왕족은 피신하여 항전을 계속하다가 1572년에 마지막 황제가 사망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22] 당시 코르테스는 신대륙에서 찾아낸 초콜릿을 진상하며 필사적으로 왕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초콜릿의 기원. 그러나 이미 카를 5세에게 너무 크게 찍혀버린 탓에 결국 죽는 날까지 박대를 당했다. 그 주된 이유가 신대륙에서의 하극상을 비롯한 월권행위 때문이었으니, 결국 자업자득이랄까.[23] 그 당시 독일의 대상인이자 대귀족 가문으로 슈탄데스헤어 공작이었다.[24] 푸거 가문에게 50만 두카트를 빌린 대가로 은광 구리광산 채굴권을 하사했다. 야코프 푸거는 막시밀리안 1세 시절 이탈리아 원정군 자금 15만 두카트를 대출해줘서 제국백작이 되었고, 같은 시대 종교개혁 시기 교황청독일 가톨릭 교구 사이 송금 역할을 맡아서 역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 위세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카를 5세의 면전에서 '''"제가 없었다면 폐하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패기도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펠리페 2세 시대에 가선 스페인에 자금을 대부해줬다가 영국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온 스페인이 금과 은을 대량으로 방출하면서 광산업이 망하여 파산당한 뒤, 빚을 갚아줄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금융업을 접고 그냥 귀족이 되었다.[25] 대공위시대 때 영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대립왕으로 추대된 적은 있다. 둘 다 전 왕조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모계 친척.[26] 중세 시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선거로 선출된 후 교황에게 직접 대관을 받아야만 황제로 인정받았고, 간혹 하인리히처럼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교황의 대관을 받지 못해 로마왕, 또는 독일 왕으로 머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카를 4세때부터 대립왕 예방을 위해 '''선제후 선거로만 황제 선출이 확정''' 되기 때문에 교황의 승인이 필요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 때부터는 아예 교황 대관식을 하지 않았으며 '''교황의 황제 대관을 받는 것과 상관없이 황제 칭호를 썼으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시대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선제후 선거에서 선출되면 '''선출된 로마 황제''' 칭호를 썼다.[27] 그러나 카를 5세의 만년에 이르러 형제간의 협력 통치는 큰 위기와 갈등을 겪게 된다. 카를 5세는 자신의 아들인 펠리페에게 제국을 온전히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이미 독일에서 확고한 기반을 내리고 있었고, 차기 황제로 선출되어 독일왕이 된 지 이미 20년이 넘었으며 독일에서의 입지가 탄탄했다. 결국엔 페르디난트를 너무 얕본 카를 5세의 이런 행동이 이후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셈.[28] 북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부 역할을 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29]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에야 황제 즉위를 승인할 정도로 카를 황제에 비협조적이었고, 루터는 처음에 카를 황제가 당선되자 기대감을 드러낼 정도였지만 그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30] 전임 레오 10세의 조카이다.[31] 이탈리아인들은 정치적으론 독일인(?)의 지배는 받아도 이탈리아인이 아닌 야만인(?) 취급을 했고, 막상 하드리아노 6세가 로마에 오자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데에 경악하고, 라틴어 발음은 끔찍하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부패한 이탈리아인은 참아도, 청렴한 야만인(?)은 못 참는다는 신조. 하드리아노 6세는 금방 선종했고, 그 후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 뽑히는 건 대략 460년이 걸렸다.[32] 가톨릭교회와 교리가 같은 내용을 주로 만들고 교황권 비난은 일체 적지 않았다.[33] 신성 로마 제국에서 차기 황제 선출을 미리 실시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다. 특히 황제의 권한이 안정되어 있을 때는 조기에 선거를 실시하여 후계자(주로 아들)를 미리 확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황권이 불안정한 상황일 때는 조기 선거가 실시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34] 팔츠 선제후는 카를 황제가 페르디난트와 함께 제국평의회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제국섭정으로 지정할 정도로 오른팔이었다.[35] 심지어 명나라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제들이 중국에 들여온 성경과 교리서를 조선 사신들이 접하게 되어, 선교사가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조선 땅에서 가톨릭교회가 자생하게 된다.[36] 그러나 필리프 1세는 나중에 결국 다시 신교도 동맹으로 돌아와 슈말칼덴 전쟁 때 신교도 동맹을 이끌었고 전쟁에서 패한 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나란히 투옥되어 네덜란드로 끌려가 개종을 강요받으며 오랜 고초를 겪었다.[37] 트렌토는 티롤 백국에 속한 도시였으며, 1364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다.[38] 이미 수장령으로 가톨릭은 떠난 상태였지만 가톨릭 국가 프랑스를 치기 위해 손잡았다.[39]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와 저지대(네덜란드 등) 영토와 종주권 주장을 모두 포기했다.[40] 루터를 보호했으며 신교도 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41] 작센 공작 겸 마이센 방백[42] 일각에서는 모리츠가 종가를 배신하고 선제후직을 얻었다 하여 마이센의 유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모리츠는 당대에 가톨릭과 신교도 양측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전쟁 후엔 신교도 측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사형을 막고,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43] 대개 미사 중의 성체성사에서, 사제는 성체(밀떡)와 성혈(포도주)을 모두 영하고 신자들은 성체만 영한다. 단 특별한 경우에는 신자들도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는데, 이를 '양형 영성체'라 한다.[44] 슈말칼덴 전쟁 후 선제후직이 모리츠에게 넘어가면서 그는 작센 선제후에서 작센 공작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45]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으로 전 유럽을 세속적으로 통치하는 자로서 교황과 함께 기독교 유럽의 투 톱이라 할 수 있었다.[46]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를 멸한 후 카이로 칼리파로부터 칼리파 직위를 받아내었다.[47] 사실 프랑스도 당시 종교문제로 인한 내부적인 갈등이 심했다. 종교를 우선하자면 사실 프랑스는 카를과 협력해야 하는데, 카를을 싫어한 나머지 반대로 행동했다. 자국의 내분보다 카를 5세에 대한 앙금이 더 클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48] 당시 오스만은 강국이라곤 해도 급작스럽게 영역을 확장하여 내부적으로 불안정했는지라 그 힘을 효율적으로 쓰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실제로 빈 포위 때만 해도 오스만군은 퇴각하기 무섭게 동유럽 각처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카를 5세의 경우는 총력으로 맞서긴커녕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 내부 반란 진압, 종교적 내홍 수습, 아메리카&아프리카 개척과 빈 포위 수성을 모두 '''동시에 수행했다.'''[49] 그러나 군주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펠리페가 훨씬 더 낫다. 펠리페는 아버지만큼은 아니었고 간혹 큰 실책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명군으로서의 능력은 갖추고 있고 군주로서의 책임감은 대단한 편이었다. 반면 셀림은 능력도 자질도 책임감도 거의 없다시피한 암군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주정뱅이 셀림'''이었을 정도.[50] 특히 피렌체베네치아[51] 정작 자신의 스페인 왕명은 카를로스 1세였지만...이후에 그라나다에 스페인 국왕이 오면 머무는 궁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52] 하지만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인해 알함브라 궁전의 지반에 영향이 간다고 한다. 조금만 일찍 깨달았어도 더는 손상을 입지 않았겠지만 말이다.[53] 지금이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등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덜치지만, 당대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로 활동 영역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 정도의 예술 마니아 외엔 타국 군주들에게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말년에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재정난에 시달렸다.[54]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도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다.[55] 먼나라 이웃나라 에스파냐편에서도 카를이 후아나를 계속 유폐했다고 설명하면서 "어머니라고? 여섯 살 때 헤어져 추억도, 미련도 없다! 당연히 정도 없다..."고 카를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56] 사실 페르디난트의 초기 독일 내 권력은 어디까지나 카를 5세의 임명에 의한 것이었으며, 반대로 현장에서의 실권을 구축하기 위해 맡은 제후들간의 중재역은, 당연하지만 최종적으론 제후들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양상을 불러왔다. 하물며 카를 5세를 퇴위시킨 이후엔 페르디난트의 권력 기반은 어디까지나 위업과 선출 등 제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유능하고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페르디난트의 치세까지는 괜찮았어도 그렇다는 보장이 없는 이후의 군주들의 치세에선 필연적으로 권력의 약화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57] 이러한 면은 아들인 펠리페 2세와 닮은 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58] 애초에 친정이었다.[59] 실제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는 쏟아지는 신대륙의 금은보화들을 제대로 가공하거나 화폐화할 능력이 없어, 누군가 값을 부르면 현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현찰 박치기'''. 실제로 이때 당시 기록에는 어떠한 상단이 물품값으로 막대한 황금을 받은 탓에 스페인 사람들이 "타국 놈들이 우리를 서인도 놈처럼 여겨!"라고 말할 정도. 당연하지만 이런 형태로 풀려나오는 엄청난 금은보화들을 국가가 마땅히 환원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마련이며, 실제로 그리 되었다. 이러한 금은을 관리할 수 있을 만한 제도 및 제련법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의 치세 당시의 일.[60] 아직까지도 적잖은 프랑스인들은 프랑수아 1세의 왕자들이 카를 5세에게 살해되어 발루아 왕가에 망조가 들었다는 카더라를 신뢰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다만 이건 '카더라'라고 할 수만은 없는데, 우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세자감으로 주목받고 있던 장남인 프랑수아가 스페인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기 때문. 게다가 '카를 5세에게 살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호하지만, 프랑수아 다음으로 부모나 귀족들로부터 사랑받았던 막내 샤를도 합스부르크 황가의 동맹이었던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61] 이것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저 책에선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스케일이 방대한 이 작품에서 각각의 챕터는 보통 수세대 동안의 사건을 다루며 각각의 인물에는 매우 짤막짤막하게 초점을 맞췄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조차 등장이 채 한 페이지를 못 넘겼다. 그런 책에서 카를 5세의 기록이 자세한 건 종교개혁 등 당대의 이슈가 워낙 풍부했기 때문이다.[62] 현재의 볼리비아에 있는 은광(銀鑛)으로, 19세기까지 매년 엄청난 양의 은이 산출되어서 가격 혁명을 일으키는 등 유럽의 경제를 뒤흔든 거대 광산이다. 현재는 은보다는 텅스텐 등 다른 금속을 주로 채굴하고 있다.[63] 남계 단절로 인한 부르고뉴국의 환수 및 해체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1세와 부계로 9촌이었는데, 루이 11세는 장 2세의 장남의 증손자, 마리는 장 2세의 막내아들의 현손녀이기 때문.[64] 프랑스의 방계 왕족이자[63] 부르고뉴의 마지막 상속녀였던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의 영지였는데, 그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지금의 영어 이상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웬만한 학계는 물론 대다수 나라의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게 당연시 여겨졌었다. 사실상 라틴어의 후계자이자 영어의 전임자 격의 위치였다.[65] 유럽의 문명은 로마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했기에 라틴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가 자부심이 있는 언어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독일어는 게르만어군으로 라틴어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지 않아 당시의 독일사람들도 자신에 대한 언어의 자부심이 없었다.[66] 참고로, 이 대사는 카를의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67] 실제로 이건 상당히 언어적 기교가 넘치는 표현으로, Urbs(도시)와 Orbis(우주)의 철자상 유사성을 적절히 활용한 명언이다. 적국의 수도인 파리에 대한 애착이 잘 드러나는 동시에, 그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68] 둘이 한 번에 결혼 아니고 차례대로 하나씩 [69] 주걱턱이 나왔던 엘레오노르는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고, 마누엘이 사망한 이후 2번째 남편이 바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다. 프랑수아는 이 부인을 너무 싫어해서 대놓고 무시했다.[70] 낳기는 많이 낳았는데 마리아가 사망하는 시점에 살아있던 아이는 5명...마리아가 저 시대에 74세까지 산 건 안 비밀.[71] 주앙 마누엘의 누나인 마리아 마누엘라는 펠리페 2세의 첫 번째 부인.[72] 카스티야의 공동왕인 필립과 후아나의 막내딸로 후아나가 정신이 이상하여 갇혀 있을 때 함께 갇혀서 자란 딸이다.[73] 미남왕 필립의 여동생으로 마리 드 부르고뉴가 낳은 딸.[74] 필립과 후아나의 딸로 고모에 이어서 네덜란드의 섭정을 맡았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헝가리의 라요쉬 2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20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 자녀없이 홀로 지냈다.[75] 일명 일 모로. 얼굴이 까매서 흑인 하인이 낳았다고 의심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