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부 케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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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당시(25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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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모습 (44세)
이름
야부 케이이치(藪恵壹[2])
생년월일
1968년 9월 28일
출신지
미에현 미나미무로미하마
학력
와카야마 현립 신구 고등학교 - 도쿄경제대학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1994~2004)
오클랜드 애슬레틱스(2005)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200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10)
'''1994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1993년
이토 토모히토
(야쿠르트 스왈로즈)

'''야부 케이이치'''
'''(한신 타이거스)'''

1995년
야마우치 야스유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 개요
2. 데뷔 이전
3. 데뷔 이후
4. 은퇴 이후
5. 기타


1. 개요


일본의 전직 야구선수이자 야구코치, 그리고 해설자.
막장 암흑기를 달리던 1990년대 한신 타이거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에이스 투수였으며, 메이저 리그에서도 뛴 바 있다.

2. 데뷔 이전


알고보면 꽤 힘든 시기를 어릴때부터 보냈는데 초등학교때 오른팔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후유증으로 비만 오면 심한 통증이 와서 경기도 제대로 못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팠었다고 한다. 게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엔 전혀 이름없는 우완투수에 불과한 무명 시절을 오래 보내야 했다. 어찌보면 이걸 딛고 야구선수로 성공했으니 인생의 승리자.
도쿄경제대학을 졸업한 뒤 아사히 생명 소속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해서 2년을 뛰었는데, 대학때까지도 별볼일없던 이 우완투수는 사회인야구팀에서 2년을 뛰는동안 구속이 일취월장하면서 사회인 야구 최고의 투수로 급부상하게 된다. 130km대 후반이었던 최고구속이 150km를 넘나들게 된 것. 그리고 다양한 변화구를 습득하면서 특히 프로에서도 위력을 떨치게 되는 고각도의 슬라이더와 고속 슬라이더를 갖추게 된것도 이시기이다. 게다가 이 시기엔 야구 성적뿐 아니라 업무 성적도 회사 내에서 1등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취직해서 먼치킨이 된 셈.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고등학교 & 대학 졸업때 어느팀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야부 케이이치는 드디어 199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1위 지명을 받아서 25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 데뷔를 하게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그가 역대 최초 도쿄경제대학 출신 프로야구 선수였다는 것이다.[3]

3. 데뷔 이후


신인을 '키운다'는 개념에 걸맞지 않게, 야부 케이이치는 이미 사회인 야구에서 완성된 선수였다. 신인때부터 선발 로테이션을 꿰차며 첫해인 1994년부터 9승을 기록해 신인왕을 획득하더니 이후 수년간 꾸준히 이닝이터로써의 면모를 보이며 한신의 주축 선발투수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야부는 전성기인 신인때부터 2004년까지 주축 선발투수로써 기복없는 투구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신이 리그 하위권을 찍어대던 기나긴 암흑기였기에 전력이 막장이었던데다 야부가 등판하는 날엔 타자들이 죄다 고인이 되었던 탓에 '''전체 커리어에서 3번이나 다패왕을 차지하였고, 아예 2001년까진 개인성적 승패마진이 단 한번도 +을 찍어본 적이 없는[4]''' 불운을 맛보기도 했다. 더군다나 다패왕 할때 야부가 못 던진것도 아니었던지라 더더욱 안습...
윤석민이 형님이라고 부를만한 야부 케이이치의 통산기록
2001년엔 혹사 여파 때문에 0승 4패로 극도의 부진에 머무르기도 했지만, 프로에서는 특별한 부상없이 2004년까지 잘 던져줬고, 2001년 이후 한신이 암흑기에서 벗어나 다시 전성기를 회복하면서 2002년엔 10승 6패로[5] 드디어 처음으로 승패마진 +를 기록(...)한데 이어, 2003년엔 비록 100이닝도 못채웠지만 선발, 구원 등을 안 가리고 뛰며 구단 사상 18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아쉽게도 단 1번도 등판하지 못했다.
2004년 시즌 이후 해외진출을 선언하면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입단. 메이저 리그 데뷔를 이룬다. 첫 해인 2005년엔 40시합 등판, 4승 0패 1세이브 1홀드를 기록했지만 4점대 중반의 부진한 방어율 때문에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이후 콜로라도 록키스와 계약을 맺었으나 얼마 안가 등판 없이 방출되었고, 이후 멕시칸 리그 등을 전전하며 2년간은 메이저 리그 등판 없이 보내게 되었다.
이후 2008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으며 다시 메이저 리그에 올라왔고, 60시합에 등판해 3승 6패 9홀드, 방어율 3.57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9년엔 스프링 캠프 때부터 부진에 시달리며 마이너리그로 강판되었다가 방출되었다.
이후 2010년 시즌 후반기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하며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나이를 이길 수 없었는지 등판기회를 많이 잡지 못하였고, 결국 시즌 종료 후 한신 타이거스에 투수코치로 복귀를 결정하며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2011년 한신 타이거스에 투수코치로 복귀했지만, 2013년엔 작년 팀 성적이 5위로 추락한 것의 여파로 2군 투수코치로 강등되었고 시즌 이후 퇴단했다. 이후로는 마이니치 방송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5. 기타


  • 일본야구계의 왕초 키요하라 카즈히로에게 쫄지 않는 몆 안되는 일본인 투수로도 유명했다. 의도적으로 기요하라에게 위협구를 많이 던졌다고도. 한번은 키요하라가 머리에 공을 맞은 뒤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이며 "야! 나 너한테 벌써 3번이나 공 맞았다" 는 제스처를 취했는데[6], 그 후 기자들이 이걸 가지고 야부에게 질문을 하자 "연봉 3억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ㅋㅋㅋ" 하면서 쿨하게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은퇴 뒤 코치로 재직하던 중인 2012년 열린 쿄진 vs 한신 OB전에선 키요하라를 상대로 140km의 속구를 빈볼(?)로 던지기도 했다. 물론 이벤트전이었는지라 예전 사태를 재밌게 재현해보는 의미에서 벌인 것이었고 실제로도 몸쪽이 아닌 엉뚱한 쪽에 던져서 당연히 키요하라가 다치진 않았다. 이후 양측이 벤클(?)을 벌이려고 나왔는데.. 정작 나와서 한 짓은 그냥 한신 광팬인 게닌 마츠무라 쿠니히로옷 벗기려고 나온 것이었다는(...) 후문. #
  • 딸이 19살로 현재 K팝 아이돌을위해 오사카댄스스쿨 우리집에서 연습하고 있다. 아버지인 케이이치가 도전해보라고 여름에 1달간 유학을 보내줬으나 소속사 오디션을 하는 기간이 아니었다고..
[1] LG 트윈스 소속 임정우 선수의 모습과 닮았다.[2] 본명은 발음은 동일하나 한자가 다른 '''야부 케이이치(藪恵一)'''이며 데뷔시즌인 1994년엔 마찬가지로 발음은 동일하나 한자가 다른 '''야부 케이이치(藪恵市)'''란 등록명을 사용했다.[3] 이전 문서엔 도쿄국제대학이라고 되어있었는데 전혀 다른 대학이다. 참고로 해당 대학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명장 고바 타케시가 감독으로 뛴 바 있다.[4] 이 시기의 승패마진 최고기록이 데뷔 첫해인 1994년의 9승 9패, 즉 '''0(...)'''이었다. 이 외의 시즌엔 전부 -만 찍었다. 안습...[5] 근데 이 해가 커리어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 승수를 찍은 해였다.[6] 두번째 맞았을때는 손가락에 직격당해 손가락 두개가 부러진채 병원으로 가는 기요하라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도...이러니 당연히 열받을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