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 타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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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바 타케시(古葉 竹識)[1]
생년월일
1936년 4월 22일
출신지
일본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8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1958~1969)
난카이 호크스(1970~1971)
지도자 경력
난카이 호크스 코치(1972~1973)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1974~1975[A])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1975[A]~1985)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감독(1987~1989)
도쿄 국제대학 감독(2008~2015)
'''1964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63년
타카기 모리미치
(주니치 드래곤즈)
50도루

'''고바 타케시'''
'''(히로시마 카프)'''
'''57도루'''

1965년
타카기 모리미치
(주니치 드래곤즈)
44도루
'''1968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67년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70도루

'''고바 타케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2])'''
'''39도루'''

1969년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35도루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역대 감독'''
조 루츠
(1975)

'''고바 타케시'''
'''(1975~1985)'''

아난 준로
(1986~1988)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역대 감독'''
곤도 사다오
(1985~1986)

'''고바 타케시'''
'''(1987~1989)'''

스도 유타카
(1990~1992)
1. 소개
2. 현역 시절
3. 감독 시절
4. 이후


1. 소개


前 일본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만년 하위권을 전전하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구단 사상 첫 우승을 포함,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히로시마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주인공.

2.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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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세이세이코 고교 졸업 후 센슈 대학을 중퇴하고 사회인야구 닛테츠 후타세에서 활약했으며, 1958년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하여 첫 해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전형적인 수비형 유격수 였는지라 타격엔 그리 능하지 않았지만 빠른 발을 자랑하며 2번의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또 1963년 나가시마 시게오와 센트럴리그 타격왕 경쟁을 벌이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한 적이 있다. 그 해 시즌 종료 13경기를 남겨둔 10월 13일 타이요 훼일즈 와의 시합 도중 고바는 상대 투수 시마다 겐타로의 투구에 턱을 정통으로 맞고 턱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 후송된 고바는 "난 그라운드로 돌아가겠다. 나를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어떻게든 타석에 서겠다" 라고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경쟁자인 나가시마로 부터 전보가 왔는데 "자네의 기분은 잘 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되길 기도하겠다" 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고바는 그해 타율 0.339를 기록하며 2리 차이로 타격왕 타이틀을 나가시마 에게 넘기긴 했지만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에 뽑히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1970년, 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고 2년 후 현역에서 은퇴하여 그라운드를 떠났다.
고바의 현역 14년간 통산 성적은 '''1369안타, 타율 0.252, 44홈런, 334타점, 263도루'''이다.

3.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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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히로시마의 창단 이래 최초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한 뒤 헹가래를 받고 있는 장면.[3]
은퇴 후 고바는 노무라 카츠야 감독 밑에서 2년간 난카이 호크스에서 코치로 활동한 후 1974년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수비 코치로 복귀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75년, 감독으로 취임한 '''조 루츠'''가 난데없이 15경기 만에 감독 직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사태 수습을 위해 그 후임으로 고바가 갑작스럽게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아무도 예상 못한 시즌 초반의 감독 교체, 게다가 후임 감독은 코치 경력 3년차에 불과한 초짜 지도자이고, 루츠의 퇴단 시점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성적은 만년 하위권 팀 다운 4할 승률(...)이라는 크나큰 악재를 등에 지고 후임감독에 취임한 고바는 빠르게 팀을 추스르며 잔여 시즌 지휘에 힘을 썼는데..
웬걸, 고바는 그 해 이른바 '''"빨간 헬멧군단[4]의 돌풍"'''을 이끌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1950년 창단 이래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안겼다. 다만 그 해 일본시리즈 에서는 한때 고바의 팀 동료이자 고바처럼 2년차 초보 감독이었던 우에다 토시하루[5]한큐 브레이브스에 2무 4패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6]
이후 고바는 현역 시절 자신의 주특기였던 기동력 야구를 중심으로 호타준족 타선, 일명 '''아카헬 군단'''을 꾸리며 히로시마의 쾌진격을 계속 이어갔고 결국 1979~1980년 2년 연속으로 7차전까지 가는 격전 끝에[7]킨테츠 버팔로즈를 물리치고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특히 1979년 히로시마 구단과 고바 자신으로써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은 3승 3패로 맞서던 7차전 9회말에 선보인 '''에나츠의 21구'''가 있었기에 더욱 드라마틱한 우승이었다. 히로시마는 1984년 한큐 브레이브스를 격파하고 한번 더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하며 고바 감독 재임시절 3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 구단 창단 이래 최고의 시기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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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는 1985년 시즌을 끝으로 히로시마를 퇴단했고, 1987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감독으로 3년간 팀을 이끌었지만, 팀 성적은 5위-4위-6위(최하위)에 그쳤고, 결국 1989년 시즌 종료 후 고바는 다이요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으로서 '''873승 137무 791패, 승률 0.525''' 의 통산 성적을 거두었다.
한편으로 고바는 평소 온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니시모토 유키오, 호시노 센이치 못지 않은 철권 통치의 아이콘으로, 선수들을 종종 사랑의 매(?)로 다스렸다고 한다(...).

4. 이후


프로 지도자 생활을 그만둔 후 고바는 도카이 라디오 방송, 주니치 스포츠의 해설가 및 평론가로 일했으며 마스터즈 리그의 삿포로 앰비셔스 감독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2003년에는 히로시마 시장 선거에, 그 다음 해에는 자유민주당 비례대표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인에 도전했으나 두 번 모두 낙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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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원 선거 당시 고바의 홍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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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국제대학 감독으로 야구계에 돌아온 고바.
2007년 도쿄 국제대학의 감독으로 취임하기로 결정 되었지만 마스터즈 리그의 감독 경력이 프로 활동으로 간주되어 규정상 2년 간 아마추어 등록이 유보되는 소동이 있었고 이에 고바는 대학시절 야구선수 였던 아들 고바 타카아키를 대신 감독으로 취임시켜 뒤에서 인스트럭터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2008년 4월 고바는 도쿄 국제대학의 감독으로 정식 취임하였고[8] 2015년까지 팀을 이끌면서 2011년 야구부 창설 이후 최초로 도쿄 대학 춘계리그 우승, 전국 대학야구 선수권 4강을 달성하는 등 대학야구 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했다.
2016년 1월 13일, 개인 사정을 이유로 도쿄 국제대학 감독직을 떠나며 약 70년 간의 야구인 생활을 마감했다.#[9]
고바가 히로시마 감독 시절 제자였던 츠다 츠네미의 아들, '''츠다 다이키'''가 도쿄 국제대학에 편입으로 들어오면서 2대에 걸쳐 같은 스승의 지도를 받는 흔하지 않은 기록을 세웠다. 유감스럽게도 다이키는 부상으로 인해 프로 입문을 포기하고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었지만.
[1] 본명은 古葉'''毅''' 였으며 읽는 방법은 같은 '''고바 타케시'''. 1964년부터 이름인 타케시의 한자표기를 竹識로 개명했다.[A] A B 시즌 도중 조 루츠 감독의 퇴임으로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2] 이해부터 팀명에 도요(마쓰다)가 붙었다.[3] 수정 전 몇 년 넘게 일본시리즈 우승 뒤 헹가래를 받는 장면이라고 잘못 적혀 있었다.[4] 그러나 사실 빨간 헬멧은 조 루츠 감독의 제안으로 도입된 것이었다.[5] 다만 고바와는 달리 우에다는 부상 등으로 인해 25살 때 조기 은퇴하고 바로 코치 임무를 시작해서 지도자 경력은 고바보다 훨씬 길었다.[6] 그러나 9년 뒤인 1984년 일본시리즈에서 다시 맞붙었을 때에는 7차전까지 공방을 벌인 끝에 결국 우승을 따내면서 복수에 성공했다.[7] 그것도 전부 '''2연패 - 3연승으로 - 다시 1패 - 7차전 승리=우승''' 루트를 탔다.[8] 아들 타카아키는 조감독으로 활동했다.[9] 고바는 명예감독으로 물러났고 후임 감독은 조감독이던 야마나카 키요시(히로시마, 니혼햄, 롯데 등에서 플레이한 포수 출신)가 승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