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신라)
良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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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선덕여왕 시대에 활약했던 승려로 주로 불상 제작에 종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불상 조각과 글씨에 뛰어난 예술가로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및 경내 전각과 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중[2] , 법림사의 주불 삼존상과 좌우 금강신상 등을 만들었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것은 문무왕 때의 일이므로 선덕여왕 사후 문무왕 시절까지 신라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천왕사지 소조 조각과 시기와 양식이 매우 비슷한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또한 그의 작품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역사스페셜에서도 이를 다룬 바 있다.
2. 꽃피는 불교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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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서라벌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오면서 풍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으며,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주민들이 방아찧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노동요의 원조인 셈.
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지는 불상 제작 작업을 하면서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처럼 잡념없는 상태로 작업에 몰두하면서, 시주가 필요할 때는 자신의 석장(지팡이) 끝에 포대를 걸어 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서 시주하는 집으로 가서 소리를 내고 그 집에서 쌀이나 돈을 포대에 담아두면 석장이 다시 알아서 양지에게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때문에 양지가 살았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불렀다고. 석장사는 조선 시대까지도 존재하였다고 한다.
3. 출신지에 대해
양지의 조각이라고 알려진 작품들은 전부 당시 신라 양식하고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이전의 도상보다 상당히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양지의 출신지가 서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양지의 작품들은 서역양식 보다는 양지가 활동하던 시기의 당나라 불교조각과 더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양지가 단순히 당 유학을 다녀온 신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 영묘사터에서 발굴된 얼굴무늬 수막새 기와로, 삼국유사에서는 영묘사의 불전과 탑의 기와를 양지 자신이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2] 사천왕사터에서 발굴된 흔히 알려진 사천왕상이라고 알려진 부조인데, 이에 대해서는 사천왕상이라고 하는 설과 함께 팔부신중을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