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

 

'''본명'''
전견명(全見明) [1]
'''자'''
회연(晦然), 일연(一然)
'''호'''
목암(睦庵)[2]
'''시호'''
보각(普覺)
'''출생'''
1206년 7월 18일 (음력 6월 11일)
'''사망'''
1289년 7월 26일 (음력 7월 8일)
(83세)
1. 소개
2. 생애
3. 여담
4. 시험 출제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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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경주 김씨는 아니다. [3]
고려시대 승려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다. 속명은 전견명(全見明). 자(字)는 회연(晦然), 일연(一然)인데 일연을 법명으로도 사용했다. 호는 목암(睦庵).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산시인 압량군 출생으로 원효 대사와 동향이다. 일연 본인도 삼국유사에서 원효에 대해 '원효의 살아온 내력과 학문이며 업적은 모두 당나라 승전과 행장에 실렸으니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썼을 정도. 대신 '이 나라에서 전하는 1~2가지 특이한 일을 적어 둔다.'고 썼다.[4]

2. 생애


1214년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재 광주광역시 인근) 무량사(無量寺)에서 대웅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14세의 나이로 설악산 진전사[5]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22살까지 공부한 뒤 1227년 승과 시험에 급제해서 22년 동안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비슬산 대견사에서 초임 주지를 지냈다. 1237년 삼중대사, 1246년 선사가 되었는데 이 시기는 몽골 제국이 본격적으로 고려침략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1249년 경상남도 남해군 정림사에서 대장경을 판각하던 분사대장도감에 3년간 참여했다. 세계유산 팔만대장경 제작에도 일연이 일정 부분 기여한 셈.
1259년 대선사가 되었으며 12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군 선원사의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1264년에 경상북도 포항시에 있는 오어사로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1268년 운해사에서 대덕 1백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를 조직해 맹주가 되었다. 1277년 운문사 주지가 되었으며 당시 경주에 와 있던 충렬왕의 부름을 받아 충렬왕을 1년 가까이 모시면서 충렬왕에게 법을 강론했다.
1283년 충렬왕을 따라 개성으로 돌아가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노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고향에 가기를 청해 반 년 동안 살다 일연이 78세되던 해에 어머니는 96살로 돌아가셨다.
1284년 경상북도 군위군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를 열었다. 1289년 군위군 인각사에서 84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이후 나라에서 보각국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고대 한국 신화, 설화,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현대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사기와 더불어 귀중한 자료이다. 대표작인 삼국유사 이외에도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사원 30권,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등 많은 불교 저서를 남겼다.

3. 여담


  • 현재 경산시에는 일연의 이름을 딴 도로인 일연로가 존재하며 경산시는 자기네 도시를 일연, 원효, 설총 등 삼성현이 태어난 고장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이름을 딴 도로인 원효로, 설총로, 삼성현로도 있다.
  • 징기스칸 4에서 한글판에서만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 72, 무력 33, 지력 86이면서 문화와 등용 특기를 가지고 있다.

4. 시험 출제 유형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하였으며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내용의 선지가 자주 나온다. 삼국유사김부식삼국사기로 바꿔서 출제가 종종 되며 단순 암기식으로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단골로 틀리는 문제. 생각없이 외우지 말고 제목을 이해하면 전혀 헷갈릴 일이 없다. 삼국유사의 '유사'는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라는 뜻이고 삼국사기의 '사기'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제목만 봐도 김부식이 편찬한 관찬 사서가 삼국사기이고 일연이 저술한 야사가 삼국유사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내용면에서도 삼국사기와 비교하는 문제가 출제되는데 삼국사기신라 계승 의식을 표방하고[6] 유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면 삼국유사고조선 계승 의식이 엿보이며 불교적이다. 역시나 서로의 내용을 뒤바꿔서 문제가 출제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기억해야 한다. 이 역시 각각의 시대적 배경과 특징을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문벌귀족 세력이 집권할 당시 편찬된 관찬 사서인데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전 시대의 왕조신라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삼국유사는 원 간섭기에 저술되었는데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나타났다고 이해하면 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승휴제왕운기 역시 고조선사를 다룬 것과도 연결지어 생각해두면 좋다.
일연 스님의 속성은 백제의 토성성씨인 全氏이다.(보각국사 비문에 속성 전씨로 사망 후 관후서사 全척을 보내어 장례를 했다.)
[1] 한자 하나때문에 김씨로 나왔지만, 전씨로 판결이 내렸다[2] 무극(無極)이 호라고 알려졌으나 일연의 제자로 밝혀졌다.[3] 한자 하나를 잘못 김씨로 알게 되었고 나중에 기사에서 전씨로 판결이 내렸고 경주 김씨 조상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4] 사실 삼국유사는 '이러이러한 책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는데 더 알고 싶으면 책을 읽어보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서술이 종종 등장한다. 문제는 앞에 쓴 원효의 행적이야 다행히 지금까지 다른 기록에 남아있지만 어떤 경우는 자세하게 쓰여 있다고 추천한 책이 지금은 소실되어 결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문제.[5]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선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9산 선문의 하나인 가지산파를 개창한 곳.[6] 물론 논란이 있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