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스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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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7월 14일 헤센의 엠스도르프에서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2. 배경


1760년 6월 말,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 육군은 헤센 침공을 개시했다. 7월 10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코르바흐로 접근하고 있던 적을 향해 공격해 코르바흐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했다. 7월 14일 밤,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마르부르크에 세워진 야전 포대를 운송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프랑스 여단이 마르부르크에서 지겐하인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에게 프리츨러에 주둔하고 있던 6개 대대를 이끌고 이 프랑스 여단을 공격해 적의 야전 포대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7월 15일 아침,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니콜라 뤼크네르 장군의 후사르 분대와 영국에서 막 도착한 제15 경기병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지겐하인 근처에 도착한 그는 포대를 이송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여단이 엠스도르프 마을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긴 행군으로 지쳐있던 군대를 하루 동안 쉬게 한 뒤 7월 16일 공세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사령관: 크리스티안 바론 폰 클라우비츠
  • 병력: 보병 4,200명, 후사르 990명, 대포 6문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프랑스군은 하츠바흐 계곡 어귀에서 북동쪽으로 향하면서 키르차인에서 프리츨라, 그리고 지겐하인까지 이어지는 두 개의 도로를 따라 진군하다가 엠스도르프 마을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들의 우편은 에크스도르프 마을 뒤쪽에 있었고 좌익은 엠스도르프 마을 앞에 있었는데, 그 길이는 약 4km 정도였다. 베르흐니 장군이 지휘하는 후사르 부대는 에크스도르프 마을 남쪽에 있는 우익에 배치되었고 안할트 보병대는 중앙을 맡았으며 바이에른 보병대는 좌익을 맡았다. 그러나 적이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지 전초 기지를 지키는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7월 16일 아침,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하노버 예거와 기마부대를 이끌고 적의 진지를 정찰했다. 공자는 뤼크네르 소장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 적 숙영지로부터 1km 근처까지 진군했지만 적의 전초 기지나 보초병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적이 방심했다고 판단하고 군대에게 스펙스윈켈에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기병대가 먼저 그곳에 도착했고, 보병대는 오전 11시경 스펙스윈켈에 도착했다. 한편 프랑스군 지휘관 클라우제비츠 장군은 적이 근처에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오전 10시 경에 바이에른 보병대 1개 대대를 마르부르크 쪽으로 보내 야전 포대 경비대에 배속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군 좌익의 전력은 약화되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엠스도르프 북쪽의 숲을 통해 프랑스 진영에 접근하기로 결심했고, 먼저 에크스도르프에서 프랑스 우익에 대한 기병 공격을 개시해 적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틈을 타 프랑스 좌익을 향해 총공세를 퍼붓기로 결정했다.
오전 11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에크스도르프에서 1.5km 떨어진 스펙스윈켈 근처의 공터에 베흐 보병대, 니콜라 뤼크네르 소장의 후사르 부대, 제15 영국 경기병대, 하노버 예거 분대, 그리고 대포 3문을 배치했다. 그는 이 군단을 뤼크네르 소장의 지휘 아래 두고 공격 신호가 올라오는 대로 에크스도르프에 주둔한 프랑스 우익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남은 5개 대대와 대포 11문과 함께 숲을 가로지른 끝에 12시 경에 엠스도르프 인근 숲에 도착했다. 10km의 행군을 마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엠스도르프에서 불과 2.5km 떨어진 부홀츠에 주둔한 후 부홀츠와 엠스도르프 사이의 숲에 있는 몇 안되는 프랑스 전초기지들을 신속히 공략해 그들이 본대에 위험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오후 1시 15분 무렵, 연합군은 프랑스 좌익에 대한 공격을 위한 배치를 완료했다. 이후 그들이 진군해오자, 프랑스군은 처음엔 그들이 아군이나 작센군인 것으로 오인했지만 곧 적이라는 걸 깨닫고 급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오후 2시 경, 연합군 포병대가 프랑스군 포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고 연합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총공격을 개시했다. 클라우제비츠 장군은 처음에 연합군 예거 분대와의 단순한 교전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적의 규모에 경악했다. 얼마 후 프랑스군 우측면은 적 기병대에게 공격당했고 바이에른 보병대 지휘관 헬펜베르크 백작은 적 포탄에 맞아 즉사했다. 바이에른 보병대는 황급히 후퇴했으나 그 과정에서 300명의 병사와 모든 대포를 상실했다.
안할트 보병대는 바이에른 보병대가 무너지자 엠스도르프 남동쪽에 배치되어 바이에른 보병대를 지원했다. 이에 연홉군 대포 6문이 그들을 향해 포문을 개시했다. 여기에 뤼크네르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가 출격해 적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 베르셰니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후사르 부대는 연합군 기병대를 막으려 했으나 곧 패퇴했다. 이후 프랑스 경기병대와 안할트 보병대 일부가 연합군 기병대를 향해 역습을 가했으나 제15 영국 경기병대에게 측면과 후방이 공격당하자 패퇴했다. 이에 프랑스군 전원이 진영을 버리고 후방의 숲을 지나 랑겐슈타인을 향해 퇴각했다. 그러자 뤼크네르 소장이 지휘하는 후사르 부대와 베흐 보병대가 그들을 추월해 서쪽으로 도주하는 길을 차단했고 제15 영국 경기병대는 아모네부르크로 가는 길을 가로질러 주둔해 적의 측면을 노렸다. 이에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돌파하려 들었고, 이때 베흐 보병대는 아직 전부 도착하지 않아 남쪽으로 도주하려는 적을 제때 추격하지 못했다.
엠스도르프 숲 남단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적 경기병대에 의해 모든 출구가 막혀 잇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그들은 다시 숲을 가로질러 서쪽의 개활지로 퇴각했다. 그러자 뤼크네르의 후사르 부대와 제15 영국 경기병대가 그들을 추격하였고, 그 중 제15 영국 경기병대는 단독으로 돌격해 프랑스 1개 대대를 와해시켰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적의 추격에 맞서 고전한 끝에 가까스로 추격자들을 몰아내고 후퇴를 계속했다. 그들 중 절반은 죽거나 붙잡히거나 탈진하여 쓰러졌으나 나머지는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기병대를 친히 이끌고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오후 7시, 클라우제비츠 소장은 7시간 동안 30km에 달하는 거리를 도주한 끝에 더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항복했고 프랑스 포로들은 지겐하인으로 이송되었다.

5. 결과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162명의 전사자와 152명의 부상자, 6명의 실종자를 기록했는데 그 중 제15 영국 경기병대에 소속된 125명의 병사와 116마리의 말이 희생되었다. 반면 프랑스군은 7명의 장교가 죽고 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34명의 장교와 577명이 부상을 입고 300명이 실종되었다. 여기에 177명의 장교들과 2,480명의 병사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또한 그들은 9개의 군단기, 대포 5문과 곡사포 1문을 상실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여세를 몰아 마르부르크의 프랑스 야전 포대를 탈취하려 했으나 프랑스 분견대가 끝까지 저항한 데다 적 구원병이 근처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리하여 연합군은 엠스도르프 전투에서 적을 격멸했으나 마르부르크의 적군 야전 포대를 파괴한다는 당초의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