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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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시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1. 개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 7년 전쟁 시기 20대의 나이에 대단한 활약을 선보인 명장이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무난하게 다스렸으나 늘그막인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프로이센 육군 원수로서 실망스러운 행적을 보이다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35년10월 9일 볼펜뷔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1세였고 어머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인 필리피나 샤를로테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서 "헤러디터리 프린스(Hereditary Prince)"의 칭호를 받았으며 다방면에 걸쳐 포괄적인 교육을 받았고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의 여러 공국들을 여행했다.
2.2. 7년 전쟁 시기
1757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후계자로서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지휘하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에 가담했다. 그해 7월 26일, 그는 하스텐벡 전투에서 중앙 보병 여단 지휘를 맡아 연합군이 전반적으로 밀려나는 상황에서도 적 포대가 설치된 고지를 성공적으로 공략해 대포 4문을 포획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하노버는 프랑스와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해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했지만,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인 조지 2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패전을 초래한 컴벌랜드 공작을 경질하고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삼촌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를 신임 연합군 지휘관으로 초빙했다.
이후 그는 삼촌의 지휘를 받으며 7년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비정규전의 명수로, 적진을 습격하여 타격을 입히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크레펠트 전투, 엠스도르프 전투, 바르부르크 전투, 클로스터 캄펜 전투에서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여러 번 있었고 크고 작은 부상을 여러 번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여러 기습 작전을 앞장서서 지휘했다. 그의 외숙부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런 그를 매우 총애해 "나의 왕자"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2.3.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7년 전쟁이 끝난 후인 1764년 1월 16일,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세인트제임스 궁전에서 조지 3세의 누나 오거스타 오브 웨일스와 결혼했다. 이후 1766년엔 프랑스로 가서 환영받았고 스위스에서 볼테르를 만났으며, 로마로 가서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관광하고 뒤이어 나폴리를 방문한 후 파리로 돌아왔다가 브라운슈바이크로 복귀했다. 그 후 몇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7년 전쟁으로 파산 직전까지 이른 재정을 복구시키는 데 한 몫을 보탰고 바이에른 계승 전쟁의 마지막 해인 1779년엔 트로파우 근처의 산악 지대에 주둔한 프로이센 산악 경보병대를 지휘했다.
1780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 등극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모범으로 삼고 계몽군주로서 국민들을 사려깊게 다스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프로이센 군부 내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외교 문제에도 힘을 기울여 자신의 공작 지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부대를 최대한 강건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1787년, 페르디난트는 프로이센의 야전군 원수로서 네덜란드를 침공한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이 군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명장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몇년 후, 그의 명장으로서의 명예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2.4.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
1792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프랑스를 침공하여 혁명 세력을 분쇄하려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스로 진격해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며 파리로 진격하면서 "국왕을 건드리면 파리를 불살라 버리겠다."는 내용의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발표할 만큼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 발미 전투 당시 그의 행적은 7년 전쟁 시기 위험을 무릅쓰고 적과 용감히 싸웠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했다. 그는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연합군의 대포 포격에도 결연한 자세를 유지한 채 진군하면서 다소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이유로 철수해버렸다. 이 때문에 향간에서는 그가 프랑스 혁명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1793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다시 군대의 지휘를 맡아 몇 차례의 승전을 거뒀으나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려 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프로이센 장성들과의 불화가 갈수록 심화되자 지휘권을 내려놓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프로이센 장군으로서 이름을 올려놓고 프로이센 군의 작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5. 나폴레옹 전쟁과 최후
1806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프로이센의 루이제 왕비의 요청에 따라 71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프로이센군 원수로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측근들에게 "임박한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총사령관직을 수락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전쟁 지휘에 소극적이었고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등 강경파에게 휘둘려 제대로 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애를 먹었다. 심지어 1806년 10월 8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18만 명이 국경을 넘었을 때에도 파리로 진격할 지, 국경을 사수할 지, 적절한 방어선으로 후퇴해 러시아군이 올 때까지 버틸지 등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으며 병력 집결 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0월 10일 총명받던 프로이센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 대공이 잘펠트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페르디난트는 10월 13일에 모든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프로이센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철수 승인을 받아낸 뒤 호헨로헤가 지휘하는 군대에게 예나 근교에서 적의 전진을 저지하고 주력의 후퇴를 엄호할 것을 명령한 뒤 주력을 나움부르크 방면으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헨로헤 대공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10월 16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군을 향해 적극적인 공세를 가했다가 대패했다.(예나 전투)
같은 날, 페르디난트의 프로이센 주력군 6만 명은 잘레 강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 2만 7천명과 아우어슈테트에서 조우했다.(아우어슈테트 전투) 페르디난트는 적을 쫓아내고 강을 건너기로 했지만 결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적을 상대로 축차투입을 일삼다가 여러 차례 각개격파되었다. 그러다가 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그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후 약 4km 정도의 전선에서 7~8만 명에 달하는 양 군대가 서로 격렬하게 맞붙었다. 다부는 전투를 이끌던 도중 날아온 대포알에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고,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에게 압살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페르디난트가 말을 몰고 최전선으로 달려와서 병사들을 독려하다가 옆을 돌아보던 중 프랑스군 병사가 쏜 머스켓 탄환 한발이 그의 두 눈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저격당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치명상을 입었고 전열에서 이탈했고, 그가 부재한 프로이센군은 지휘계통이 무너져 눈앞의 프랑스군을 어찌 상대할 지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다가 다부의 프랑스군이 대대적인 역공을 가해오자 패주하고 말았다. 이후 늙은 공작은 거의 한달 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11월10일 함부르크 근처 오텐센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1] 빌헬름 1세, 베스트팔렌의 왕비 카타리나 등[2] 웨일스의 공녀 샬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