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프랑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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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7년 전쟁
2.3. 프랑스 대혁명


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귀족이자 장성. 제2대 브로이 공작. 7년 전쟁 시기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는 프랑스군 장성들 중 그나마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으며 프랑스 대혁명 시기 국왕파로서 혁명 세력에 맞섰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브로이 공작은 1718년 제1대 브로이 공작 프랑수아 마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브로이 공작은 16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이끄는 기병연대에 들어가 이탈리아 전역에 참가해 6월 29일 파르마 전투와 9월 19일 구아스탈라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곧 룩셈부르크 보병대 대령이 되었고 1736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브로이 공작은 모리스 드 삭스 원수 휘하의 군단에 배속되어 보헤미아 전역에 참가했고, 그해 3월 보병대 참모로 진급했으며 11월 26일 프라하 습격전에도 참가했다.
1742년 4월 26일 준장으로 승진한 브로이 공작은 1743년 4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고 바이에른과 알자스 일대에서 근무했다. 1744년과 1745년에 브로이 공작은 라인강 전선에서 활동했고 1745년 5월 1일에 야전군 사령관이 되었다. 1746년, 브로이 공작은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지휘를 받으며 플랑드르 전역에 참가하였고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서 활약해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1747년 7월 2일 라우펠트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그리고 1748년 4~5월에 마스트레히트 요새 공략전에서도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748년 5월 10일, 브로이 공작은 중장으로 임명되었다.

2.2. 7년 전쟁


1757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브로이 공작은 백작 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어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고 7월 26일 하스텐벡 전투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 후 그는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의 군대에 배속되었고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 참가했으나 프랑스군의 완패를 막지 못했다. 이때 수비즈 공작이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도주하는 사이, 브로이 공작은 가까스로 병사들을 수습해 하노버로 철수시켰다.
1758년, 브로이 공작은 헤센에 주둔한 수비즈 공작 군단의 선봉대를 지휘했다. 그는 7월 23일 잔더스하우젠 전투에서 헤센의 이센부르크 왕자를 격파했다. 1759년, 브로이 공작은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스므의 휘하에서 독일에 주둔했고, 4월 13일 베르겐 전투에서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공격을 격퇴했다. 8월 1일, 브로이 공작은 민덴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지휘했으나 자신과 대치한 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본군이 적에게 와해되자 철수했다. 이후 루이 15세는 콩타드 후작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브로이 공작을 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12월 16일, 브로이 공작은 프랑스 원수로 승격되었으며 프란츠 1세로부터 제국의 왕자 칭호를 수여받았다.
1760년 7월 10일, 브로이 공작은 코르바흐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1761년 7월 15~16일 빌링하우젠 전투에서는 수비즈 공작과 연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참패를 면치 못했다. 당시 브로이 공작은 7월 16일에 합동 공세를 가하기로 수비즈 공작과 약속했지만 적을 정찰하던 중 적의 전열 배치가 허술하다고 판단하고 그 전날인 7월 15일에 단독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수비즈 공작은 브로이 공작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사전에 협의된 대로 7월 16일이 되어서야 공세를 개시했고, 그나마도 브로이 공작이 "오스팅하우젠으로 물러나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오자 브로이 공작이 곧 철수할 것이며 자신은 단독으로 적과 상대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 나머지 브로이 공작에게 알리지도 않고 철수해 버렸다. 그 바람에 브로이 공작은 연합군의 맹공을 홀로 감당하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패주해야 했다.
브로이 공작과 수비즈 공작은 이 참패에 대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는데, 프랑스 군사법원은 브로이 공작에게 참패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해 그를 면직시켰다. 반면 수비즈 공작은 퐁파두르 부인을 뒷배로 두고 있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브로이 공작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2.3. 프랑스 대혁명


전쟁이 끝난 후, 브로이 공작은 트루아 에베셰와 알자스의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아메리카로 파견될 프랑스군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나 전장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브로이 공작은 루이 16세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 주변에 집결된 부대를 지휘했다. 7월 11일 루이 16세는 그를 전쟁 담당 장관으로 임명했으나 겨우 며칠 동안 유지되었고, 브로이 공작은 7월 16일 해외로 망명했다. 1792년, 브로이 공작은 프랑스 귀족들로 구성된 반 혁명 연대의 사령관이 되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프랑스 침공에 가담했으나 프랑스 혁명군에게 격파되어 다시 해외로 도주했다. 이 시기 그의 장남 샤를 루이 빅토르 드 브로이는 아버지와는 달리 혁명에 적극 참여했고 국민 제헌 의회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같은 행보로 인해 그 역시 의심을 받았고, 결국 1794년 6월 27일 단두대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1797년 브로이 공작은 러시아로 망명했고 1798년에는 리가로 옮겼다. 이후 혁명 세력에 대한 비난을 담은 서적들을 출판하며 여생을 보내던 브로이 공작은 1804년 뮌스터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