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규호

 


성명
염규호(廉圭浩)
생몰
1880년 3월 23일 ~ 1941년 4월 6일
출생지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사망지
경기도 파주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염규호는 1880년 3월 23일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세군 신자로, 파주군 일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25일 교하리의 16살 학생 김수덕(金守德)과 24살 농민 김선명(金善明)이 염규호를 찾아와서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그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내 임명애(林明愛)와 함께 독립시위계획을 논의했다. 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격문을 배포해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염규호가 원고를 작성했고, 김수덕이 등사판을 가져와 격문을 인쇄했다. “동리 산으로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할 것이다”라는 게 원고 내용이었다.
인쇄된 격문 60여 장은 인근 마을 곳곳에 배포되었고, 이틀 뒤인 3월 27일 시위장소에 모인 이들은 700여 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대열을 지어 면사무소를 에워싸고 면 서기들에게 업무 중단을 요구하면서 유리창을 부수었다. 시위대의 거사를 보고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500여 명으로 불어난 주민들은 교하헌병주재소로 행진했고, 놀란 헌병들이 파주 헌병분소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일제 헌병대의 발포로 최홍주(崔鴻柱)가 현장에서 피살되었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 후 체포된 염규호는 1919년 9월 29일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파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1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염규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