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오강표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1841년, 1843년, 1848년 등 3가지 설이 거론되지만, 대체로 그의 절친한 친구였고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송암(松岩) 최종화(崔鍾和)가 그가 태어난 해가 '헌종 계묘생(癸卯生)’이라고 거론한 것에 따라 1843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그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 도덕골이라는 설이 주류지만,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라는 설,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이라는 설 등 여러 설도 제기된다.
최종화가 기술하고 송상도가 편찬한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따르면, 오강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의를 중시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는 1868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지냈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상을 마친 후에도 매일 관대(冠帶)를 바르게 하고 가묘(家廟)를 모셨다. 홀어머니를 섬기는 데에도 온순함으로 받들어 거스름이 없었으며, 집에서는 책을 가까이하고 말이 적어 바깥 사물에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
오강표는 처음엔 전재(全齋) 임헌회(任晦憲)의 문하에 들어갔지만 몇년 후 임헌회가 자신은 그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며 간재(艮齋) 전우를 추천했다. 이에 그는 전우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그는 스승을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했고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예절을 행하는 등 충의의 맘씨가 남 달리 강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문집으로 <무이재집(無貳齋集)>을 남겼지만, 시 한 두편을 제외하면 남아있지 않다.
2.2. 순국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오강표는 분노해 을사오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토적소(討賊疏)>를 지어 교임(敎任) 한정명(韓鼎命)으로 하여금 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게 글을 조정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이도재는 이를 거절하고 올리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오강표는 청국 상인에게 아편을 구입했다. 하지만 청국 상인은 그의 행색을 보고 의심을 품어 성분이 약한 아편을 내주었다. 오강표는 공주향교 명륜당(明倫堂)으로 들어가 대성통곡하고는 마침내 아편을 먹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이 그를 발견해 급히 구해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아편을 한꺼번에 삼킨 후유증으로 고통받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성토하는 장문의 글을 쓰려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만류해 그러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서 세상사에 뜻을 두지 않았고, 1907년 모친상을 당하자 항상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1910년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오강표는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금동서사(錦洞書社)에 있는 동지 최종화를 찾아가 함께 통곡하고는 오천역(烏川車站)에서 죽겠다고 밝혔다. 이에 최종화가 그곳은 선비가 인(仁)을 이룰 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리자, 오강표는 집으로 돌아온 뒤 아들 오병찬(吳炳瓚)과 작별하고 스승 임헌회의 묘에 글을 지어 고한 뒤 죽음을 준비했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오강표는 1910년 10월 12일에 다시 최종화를 찾아갔는데, 이 날은 비바람이 몰아쳐 몹시 추웠는데도 매우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최종화가 "왜 솜옷을 입지 않았느냐?"고 묻자, 오강표는 "망국의 노예가 되어 따뜻하고 배부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다음날 오강표는 유서 등을 지어 소매 속에 넣고 떠나갔다. 이때 최종화가 물었다.
오강표가 답했다.절개를 지켜 죽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후회가 없겠는가?
이에 최종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지어줬다.인(仁)을 구하고 인을 얻는 것에 또한 어찌 후회가 있겠는가?
오강표는 이 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어찌 선인(先人)들을 뵐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후 오강표는 최종화와 헤어진뒤 공주항교의 명륜당에 들어가 벽에 글을 붙이고 대성통곡했다. 향교의 직원 이정규(李鼎珪)가 찾아가 위로하면서 타일렀지만, 오강표는 끝내 듣지 않았다. 결국 이정규는 오강표의 글을 관청으로 보냈고, 관청에서는 이를 다시 경무관(警務官)에게 보냈다.창하고 높은 봉황산이여 천년의 상쾌한 기상 수양산 같도다
금강은 깊고도 푸르니 후세 사람은 원수(沅水)와 상수(湘水)에 견주도다
슬픈 노래 한 수로 그대를 보내는데 가을바람 쓸쓸하고 해는 차갑도다
긴 세월 속 지금은 어느 때인가 장사가 한번 가니 돌아오지 않도다.
1910년 10월 16일 밤, 오강표는 명륜당 강학루(講學樓)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 <절명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오강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오호라 내 금년 나이 칠순에 이르러 나라가 패하고 임금이 망하는 현실에서 아무런 묘책도 없이 난국을 타개치 못하고 백성들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구하지 못했으니 죽음만 같지 못하도다. 어찌 분노와 원한을 참고 왜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가 있으랴. 원컨대, 우리 2천만 동포는 총궐기하여 주권을 되찾아야 하느니라. 나는 나라가 패하고 임금이 망하였으니 어찌 내 자신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른바 나는 어디까지나 이씨 조선의 백성이오. 죽어도 이씨 조선의 귀신이로다. 일찍이 공자가 말하기를 뭇 사람은 성인(成人)하라 하였고 맹자는 의(義)를 취하라 하였으니 흰 머리에 붉은 충성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