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씨)

 


1. 개요
2. 한국의 오씨
2.1. 본관 별 특징
3. 국가별 오씨 표기
4. 오(吳)씨 인물 목록
5. 기타


1. 개요



중국과 한국의 성씨 중 하나[1].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2]과 베트남에도 있다.
기원전 1100년 대 주나라의 초대 제후인 오태백이 시조다. 그는 주나라(周)의 시조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중옹(仲雍)과 계력(季歷)이 형제이며, 주나라 2대 왕 문왕이 조카가 된다.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 경의 인물로, 왕위계승자였지만 조카에게 양보하고 제후의 한 명이 됐다. 현재 시조 사당도 의 수도였던 장쑤성 쑤저우에 있다. '오(吳)'는 '매우 높다, 고귀하다'의 뜻이다.
중국에서는 15억 인구 중 인구 순 10위[3], 한국은 11~13위 정도로[4] 김이박최정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성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인구 수가 꾸준히 증가해 지금은 서씨나 권씨보다도 많으며 한씨,신씨와 순위를 다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매우 번창하고 있는 씨족 중 하나이다.

2. 한국의 오씨


한국의 오씨는 모두 해주 오씨가 근본이 되며, 중국에서 온 때가 서로 다른 두 갈래로 나뉜다. 둘 다 해주지만 다른 집안이다. 하나는 향파로 신라 지증왕 때 온 오첨(吳瞻)을, 다음은 경파로 고려 성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온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한다. 본이 해주가 아닌 다른 오씨들도 각각의 해주 오씨에서 분적해 나갔다. 조선성씨통보에 210본까지 기록됐고 동국만성보에 의하면 20여본이 있다고. 향파는 오씨삼십세계도(1397)를, 경파는 해주오씨족도를 연원기록으로 한다.

1940년 전후로 공개된 '오씨30세계도' '''필사본'''에 근거하면 해주 오씨 향파의 도시조는 태백왕의 25세손인 오기의 45세손 오첨이다. 지증왕이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내려 경남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고. 내용을 보면 해주 오씨 향파와 거기서 분적한 성씨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까지는 이론이 없다. 다만 '오씨30세계도' '''원본'''을 근거로 작성된 족보들에는 '오첨은 동방으로 와서 김종지(金宗之)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다. 후한 건우 년간에 오첨은 중국으로 돌아갔다'고만 되어 있는데 필사본에는 함양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후한 건우 년간은 서기 947~950년인데 지증왕 원년은 서기 500년으로 시간적인 차이가 크고, 지증왕 원년 동래설을 최초로 오씨 족보에 반영한게 1962년 '오씨대동보'이다. 이후 1969년 '오씨원본'도 '오씨대동보'를 따르고 그후로 대부분의 오씨 족보는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따르나 문제는 시초가 되는 1962년 '오씨대동보'가 '오씨30세계도' 필사본을 근거로 하여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오응의 9대손 다련군 오희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했으며,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었다고 기록된 데서도 문제가 있다.[5] 장화왕후가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 건 팩트지만, 오응, 오희 등의 존재가 필사본에만 있고 원본에는 없어 조작이 아닐까 의심을 받고 있다. 즉, 송은당(松隱堂) 오탁진(吳卓眞)의 기록을 기초로 한 해주 오씨(향파) 정해보(1767년), 보성 오씨 병술보(1766년), 함양 오씨 족보서(1689년)에는 원래 없던 부분이다. 또한 지증왕 원년은 경진(庚辰)년인데, 필사본에는 신사(辛巳)년으로 되어있다.
이후 내용은 원본과 필사본이 같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980년 다시 송나라로 귀국해 그의 현손인 오연총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고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여진을 토벌해 1114년 추충공신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이 됐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이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이라는 세 아들을 두는데, 이들이 1216년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각각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에 봉해져, 해주 오씨 향파, 동복 오씨,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경파들은 해주오씨족도를 따로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조인 고려 대학자 오인유는 본래 중국 송나라의 대학사로, 성종은 특별히 고려로 건너온 그를 발탁해 군기감과 예부의 일을 맡겼다. 황해도 해주에 정착해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오인유의 14세 오정방(吳定邦)의 정무공파(貞武公派)와 오윤겸(吳允謙)의 추탄파(楸灘派)에서 특히 많은 인물이 나왔고, 서인이 주동한 인조반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세력이 또 다시 크게 늘었다. 오윤겸의 조카가 삼학사로 알려진 오달제(吳達濟)이다. 이후 영조때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1등 분무공신 오명항에 이르기까지 경파 역시 번성을 누렸다.
두 집안은 각 시조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고증하기 어려우므로, 별개의 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경기도 용인시에 경파 시조단이 있으며 충남 공주에 향파 시조단이 있다. 문과급제자 숫자나 상신 등 해주 오씨를 검색하면 나오는 수치들은 두 파를 모두 합한 것이다. 현대 해주 오씨 인구 수 역시 합친 것.

2.1. 본관 별 특징


  • 한국 오씨는 모두 해주 오씨에서 나오다 보니 해주 오씨(462,704명, 2015)는 전국구다. 북한은 황해도에 많다. 경파, 향파 둘이 합쳐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99명, 무과급제자 269명(중시 등 2번 이상 합격자 횟수까지 따지면 298번), 생진사 326명, 역과 56명, 의과 15명, 음양과 2명, 율과 5명, 주학 2명 등을 배출했다. 특히 조선 중기 인조~현종~숙종~영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정승과 대제학,판서를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세도 정치 때 중앙에서 멀어졌다. 현대에는 다시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 두 번째로 많은 동복 오씨(72,394명, 2015) 역시 향파. 고려조와 조선조에 정승을 배출하는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동복은 화순의 옛 지명으로 조선조 기호학파(서인)의 중심지 전남에 본을 뒀지만 해남 윤씨처럼 남인 집안이었다.
  • 세 번째로 많은 보성 오씨(71,162명, 2015)도 향파 집안이다. 서기 500년 지증왕 때 남제의 사신으로 온 오첨과 그 차남을 시조로 한다. 본은 전라남도 보성군이지만 집성촌은 대부분 충청도이며 중시조 오현필의 묘도 충남 공주에 있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제외하면 특히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구 청원군 지역)에 가장 많다. 집성촌은 전라도 2곳, 충청도 10곳이다.[6] 조선개국공신 오몽을을 배출한 집안이나 오몽을이 1차 왕자의 난 때 정안대군의 반대파에 섰다가 지면서 공신 작위가 삭탈된다.

  • 연일 오씨는 경파 출신이다. 시조 오연경은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의 6세손 오효성의 큰 아들로 연일(延日; 현 경상북도 포항시)에 세거하던 토착 사족이다. 연일 오씨에서 나온 인물인 오사충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후 평안도 영원에 땅을 받고 후손들이 세거한다. 그의 직계들은 자신들을 영원 오씨로 칭한다고.
  • 울산 오씨도 경파다. 시조 오연지는 해주 오씨(경파)의 시조 오인유의 6세손 오효성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동남 변경을 침범하는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학성군에 봉해졌다. 학성은 울산광역시의 옛 지명이다.
  • 군위 오씨는 향파로, 십중팔구가 제주도 출신이다. 특히 서귀포시에 많다. 성산읍을 비롯해 서귀포의 많은 지역에 집성촌이 존재한다.
  • 함양 오씨는 향파다. 경상남도전라남도에 많고 당연히 보성, 화순 오씨와 같은 집안이다.
  • 나주 오씨는 고려 건국 때 국구 오다련을 시조로 하므로 당연히 향파겠지만 지증왕 때의 오첨과 관련성이 있는 직접적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장화왕후가 낳은 혜종이 권력 다툼에 패하면서 집안이 위기에 처한다. 고려 조 때는 이후 잠잠하다가 조선 세조 때 오자치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킨다. 그의 손자 오겸이 좌찬성까지 올라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한 후 죽는다. 우의정이 추증된다.

3. 국가별 오씨 표기


  • 훈민정음 식 표기로는 ''(옛이응)을 썼다. 중국에서는 (우), ŋ 음가가 다른 형태로 계승된 광동어에서는 ng4(응)으로 발음되고, 일본에서는 (고)로 발음되고 くれ(쿠레)로 훈독한다.
    • 참고로 저 광동어 월병으로 쓴 Ng을 홍콩 사람들은 그대로 영문 이름으로 쓰는 만행(?)을 벌이기도 한다. 광동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대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여 직접 물어보거나 "잉" 정도로 발음을 한다는 모양. 그나마 발음이 비슷한 Ung이나 오우삼(吳宇森, Ng4 Jyu5 sam1)같이 Woo로 바꿔서 쓰는 경우도 있다.
  • 베트남어에서는 한자음의 ŋ 음가가 소멸되지 않아 Ngô(응오)로 발음된다. 한국에선 ŋ 음가를 일본의 영향을 받아 고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과거 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을 과거에 '고 딘 디엠'으로, 보응우옌잡을 '보 구엔 지압'으로 표기했었다.
  • 한국은 여권에 'Oh'나 그냥 'O'를 쓴다. 오승환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미국 사람들이 많이 신기해했다고. 외국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회원 가입 때마다 Last name란에 성씨가 너무 짧다며 불편을 겪기도 한다고. 불어 식으로 Heaux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아카이브).

4. 오(吳)씨 인물 목록




5. 기타


  • 역사적으로 윤관의 부사령관이었던 '오연총', 대종교에서 나철과 함께 언급되는 '오기호' , 김좌진과 더불어 항일 3대 만주맹장으로 남북한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받는 오동진 같은 인물 등, 긍정적으로 보자면 없어서는 안 될 소금과 같은 역할을 많이 해왔다. 그런데 현재 70만 명이 넘는 국내 인구 수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희귀 성씨인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며[7], 그 영향인지 과거에는 서브컬쳐에서도 중요인물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편이었다. 야구,농구,골프 및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계에서도 오씨의 성세(姓勢)가 커지는 것과 비례하여 중요인물로 등장하는 비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오씨가 주는 특유의 어감 때문인지 선역이든 악역이든 개성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오자룡이 간다오로라 공주처럼 제목에 내세워지기도 한다.
[1] 간화자로는 吴라고 쓰며, Wú(우)라고 읽는다.[2] 呉라고 쓰며 '쿠레'로 읽는다. 여기서 파생된 呉宮(쿠레노미야), 呉戸(쿠레토)라는 성씨도 있다.[3] 2000만 명을 훨씬 넘어가며 북한 인구보다도 많다.[4] 1985년 통계에서는 13위, 2000년 통계에서는 11위, 2015년 통계에서는 12위였다. 한씨와 엎치락뒤치락한다.[5] 해주 오씨 향파, 동복 오씨, 보성 오씨는 통일신라 때부터 호족이었지만 고려 초기 광종이 배다른 형이자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혜종을 죽이고 집권하면서 중앙에서 얼마간 멀어진다. 그러나 중서시랑평장사 오연총이 사돈 윤관과 함께 북진을 개척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가문이 중흥하게 된다. 조선 개국공신 2명을 배출하고 세도 정치 전까지 문과 급제자 219명, 상신 4명, 대제학 3명, 개국공신 2명, 공신 8명, 청백리 3명을 배출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6] 그 중에서도 충북 청원군에는 절반인 6곳, 또 그 중에서도 현도면에는 4곳 이상이다. 지역별 인구로 봐도 서울을 제외하고는 충북, 대전에 압도적으로 많이 산다.[7] 물론 이건 고만고만한 인구 수를 가진 다른 성씨들에도 거의 해당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