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학자)
1. 개요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다.
2. 상세
1841년(헌종 7년) 전라도 전주부 패서문 밖 청석동(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서 아버지 전재성(田在聖)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0세에 퇴계집을 보고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21세에 임헌회(任憲晦)를 소개 받아 제자가 되었다. 임헌회는 기호학파 낙론계의 거두였고 전우는 이러한 스승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아 이이, 송시열을 숭상하게 된다. 42세에 영의정 홍순목이 천거하여 선공감 가감역과 감역에, 이후에는 전설사 별제와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후 상주, 문경, 진천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 54세에는 사헌부 장령을 제수 받았지만 이 또한 거절했다. 다음해에 개화파였던 박영효가 수구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에 방해가 된다며 간재를 죽이라고 간언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하며 되려 전우를 순흥 부사, 중추원 찬의에 임명하였다. 전우는 이도 역시 거절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떨어지자 격하게 반대하며 문인들에게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1905년 전우의 나이 65세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참오적이라는 제목으로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68세에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부안 앞바다에 있는 왕등도로 들어갔다. 1910년 전우의 나이 70세에 결국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통곡하고 도학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고 다짐하였다.
72세에 계화도로 거처를 옮겨 계속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에 제주도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제자가 3천명이 넘었다. 전우는 이 제자들 중, 후에 개화를 따르거나 단발을 하는 제자가 있으면 문인록에서 삭제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가 사망하자 전우는 이 날부터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82세 되던 1922년에 전우는 결국 생애를 마쳤다. 전우는 전라북도 익산군 삼기면 기산리 소재 선영에 묻혔는데, 그의 영구를 따른 사람이 2천여 명이었고 장례를 보러 몰려든 사람은 6만이 넘었다고 한다.
3. 여담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전 국회부의장 윤제술, 국문학자 이병기 등이 그의 제자이다. 계화도에는 지금도 전우가 쓴 '단심가'가 적힌 바위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