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쿠마 사건
鬼熊事件
1. 개요
1926년 일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연쇄살인범을 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은닉했다는 점, 범인의 범행 동기와 행적으로 당시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2. 사건의 경위
1926년 8월 20일 치바현 카토리군 쿠가촌(現 타코정)의 방물가게[1] 에서 일하던 케이라는 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 범인을 말리려던 케이의 할머니까지 중상을 입는 한편 뒤이어 케이의 내연남과 그녀가 일하던 가게 주인도 살해당했으며, 케이와 내연남을 이어준 남성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작은 마을은 이 일련의 소동으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범인은 1892년생의[2] 이와부치 쿠마지로(岩淵熊次郎)라는 남성으로, 케이와 내연남, 가게 주인을 살해하고 도주중 자신을 추격한 경관을 공격해 중상을 입혔다. 이와부치는 세간에서 '오니쿠마(鬼熊)[3] '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경찰과 소방대, 마을 청년단 등 무려 5만 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대규모 수색에도 불구하고 이와부치 검거는 난항을 빚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와부치를 숨겨주거나 수사관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보내는 등 철저한 은폐공작을 벌여 수사를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와부치는 당시 가벼운 차림새였고 산의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허점을 찔린 수사관이 그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는가 하면, 사건 발생 약 1개월 후인 9월 11일에는 순찰중이던 경관이 피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오니쿠마'의 이름은 곧 일본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와부치의 범행이 상세히 보도된 이후에는 '오니쿠마의 미친 사랑 노래(鬼熊狂恋の歌)'라는 노래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면서 연쇄살인범 '오니쿠마'가 순식간에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와부치는 그렇게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26년 9월 30일 가문의 묘지로 도망쳤고, 그 곳에서 취재차 찾아온 신문기자들과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독이 든 모나카[4] 를 먹고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5] 이와부치가 사망한 후 그의 사망에 관한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자살 장소로 굳이 무덤 앞을 택한 점에 대해 일설에는 실제로 자살한 장소는 따로 있으며 마을 사람이 그의 시신을 무덤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한 면도칼로 목을 그은 상처도 사망에 이를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와부치의 실제 사인은 앞서 언급한 모나카에 들어있던 독이라는 주장도 있다.
3. 범인에 관하여
이와부치 쿠마지로는 마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견실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자주 술을 대접하는가 하면, 자신이 먼저 발벗고 나서서 마을 노인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등[6] 인정 많은 성품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여성편력이 심했다는 것으로, 여자 문제로 종종 마찰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와부치는 케이를 알게 되고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 케이라는 여성도 여러 모로 문제가 많았다. 특히 바람기가 심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이와부치와 케이의 사이를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부치는 케이에게 호감을 품은 다른 남성이 그녀를 포기하게 만들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지인이 케이와 다른 남성을 이어주려고 이와부치를 경찰에 고소해 버렸고, 3개월 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와부치는 케이를 만나러 갔다가 진상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이와부치는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이와부치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들 중 한 명인 가게 주인은 평소 미인계 같은 부정한 수법으로 장사를 하는 등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또한 후술하듯 이 시기 일본 서민들은 경찰에 대해서도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부치를 동정해서 그를 숨겨주거나 먹을 것을 주고 경찰에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등 수사를 장기화시키는 데 일조했다.[7] 게다가 사건의 영향으로 작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쿠가촌에 언론 관계자들 등 외지인들이 하나둘씩 몰려오게 되자, 상점이나 여관을 운영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와부치 덕분에 먹고 산다며 되레 감사를 표했다는 씁쓸한 뒷이야기가 있다.
4. 기타
당시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서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데는 이와부치에게 동정적인 논조였던 언론의 보도[8] 가 한 몫을 하기도 했지만 이와부치가 경찰을 살해했다는 점도 크게 일조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식민지였던 조선은 물론 본국인 일본에서도 인식이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관동 대지진 이후 극도로 혼란해진 정세 속에서 도시와 농어촌을 불문하고 각종 쟁의가 끊이지 않았고 그만큼 정부의 탄압도 심해졌으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언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렇다보니 군인과 관료, 경찰 관계자들에 대한 당시 일본 서민들의 반감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이와부치가 경찰관을 살해하고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는 일종의 영웅담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9] 또한 이와부치가 도피생활 끝에 경찰에 잡히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도 '깨끗한 최후'라며 극찬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27년 2월 4일 이와부치를 숨겨준 마을 사람들과 자살 현장에 있었던 신문기자, 이와부치의 지인들 등 사건 관련자들이 재판에 넘겨졌으나, 법원은 자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자살방조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범인은닉죄에 대해서만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으며, 그 외 마을 사람들에게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범인은닉 및 자살방조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는 그 당시에도 거의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이 판결에 대해서는 마을의 유력자가 뒤에서 손을 써서 이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게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다.[10]
5. 미디어에서
1973년 소설가 요시무라 아키라가 이 사건을 소재로 단편소설 《하현달(下弦の月)》을 발표했고, 1990년에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하현달-오니쿠마 사건-(下弦の月―鬼熊事件―)》이 니혼 TV계열의 화요 서스펜스 극장[11] 에서 방영되었다.
[1] 식당이었다는 설도 있다.[2] 출생 연도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출생일자는 불명. 사건 당시 연령은 33~34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3] 이와부치의 이름자 쿠마(熊)를 따서 붙여진 별칭. 사건을 보도한 당시 치바 지역신문의 기사에서 유래했다. 참고로 오니쿠마는 요괴의 이름이기도 하며, 오래 묵은 곰이 영력을 얻어 변화한 요괴이다.[4]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마을 사람들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5] 사망 2일 전에 이미 자살을 결심했으나 28일에는 술에 취한 상태로 잠들어 버려 실행하지 못했고, 그 다음날인 29일에는 목을 매거나 경동맥을 끊는 등의 방법을 시도했으나 평소 마부 일을 비롯한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몸이었기 때문에 쉽게 죽지 못했다고 한다.[6] 동료 마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변에서 다툼이 벌어질 때마다 주저없이 끼어들어서 힘없고 약한 쪽을 편들고 나섰다고 한다.[7] 당시 마을 사람들은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두 파벌로 갈라져 대립하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와부치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모두 같았다고 한다.[8]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벌인 복수극이라는 식의 논조로 보도했다.[9]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 문서에도 짧게 언급되어 있지만 대중들의 이런 인식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거리 곳곳에서 경찰(특히 특고)이나 일본군 헌병 출신들이 분노한 민중들에게 두들겨 맞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10] 참고로 현재의 일본 형법에서는 자살방조는 6개월 이상 7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형, 범인은닉죄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만엔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다.[11] 1981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2시간 드라마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