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토리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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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마르 에프린 토리호스 하레라(Omar Efraín Torrijos Herrera 1929년 2월 13일 - 1981년 7월 31일)
파나마의 독재자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대통령이 되기를 거부했던 실질적인 독재자로 유명하며, 1968년부터 그가 사망한 1981년까지 파나마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2. 생애


오마르 토리호스는 파나마 산티아고에서 태어나 엘살바도르에 있는 군사학교에 다녔으며, 미국베네수엘라에서 군사에 관련된 공부를 했다. 1952년 파나마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되었고 1969년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1968년 10월 아르눌포 아리아스 대통령을 타도하기 위한 국방 경비대의 쿠데타에 참여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파나마 정부 수반과 파나마 혁명 최고 지도자라는 직함으로 새로운 군사위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일방적인 친미노선과는 거리를 두어서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 몇 안 되는 남아메리카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파나마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지개혁 및 교육예산과 시설확충, 일자리 창출과 인프라 확충을 위한 건설사업을 통해 빈민층을 대대적으로 구제하고 파나마를 국제금융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금융산업 육성책을 시행했다.[1]
그러나 그도 여타 중남미의 독재자들처럼 독재정치를 펴기는 매한가지로 파나마의 좌파 운동과,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억압했고 야당을 불법화하면서 야당 진영의 주요인사들을 고문하거나 추방시키고 죽이기까지 했는데 이런 식의 탄압으로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200명 정도에 달한다. 그러나 토리호스는 미국과의 파나마 운하 협정을 타결지어 파나마의 숙원이었던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을 파나마 정부가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그가 도입한 빈민구제정책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파나마의 민족적 영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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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와 파나마 운하 조약을 체결하는 토리호스
1978년 10월 선거에서 토리호스는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사실상 파나마의 국가 지도자 였지만 주변인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토리호스는 파나마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사양했다.

3. 사망


러다가 1981년 군부대 시찰 도중 정글 지대에서 비행기 폭발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워낙에 급작스러운 죽음이였기 때문에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인데 한 때 자신이 미국 비밀기관에서 일했다고 한 사람인 존 퍼킨스가 저서 『경제 저격수의 고백』에서 사실은 미국에게 암살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아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는 비행기 사고로 숨진 파나마의 전 대통령 오마르 토리호스는 경제 자객들의 회유가 실패하자 ‘자칼’이 동원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사실 1970년대 당시에 미국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군부를 도와주어서 군부독재정권을 들어서게 만든 전적이 있던데다가 1980년대 와서도 미국이 니카라과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여러국가에서 이런저런 공작을 했던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지 않아 보이는 면이 강하다. 그렇다고 새로히 들어선 민주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와준것은 아니었기도 했고.

4. 사후


이후로 마누엘 노리에가가 오마르 토리호스의 후임이 되었지만 정작 그는 오마르 토리호스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한 주제에 부정선거를 일으키며 파나마 군부정권에 대한 지지를 깍아먹었고 결국 미국에 의해 강제로 축출당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에 오마르 토리호스 공항이 파나마시티 공항으로 격하되었기도 했지만 노리에가를 대신해 집권한 엔리다 정권이 썩 좋은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탓에 1994년에 민주혁명당이 재집권하면서 오마르 토리호스에 대한 평가가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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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토리호스 (Martín Erasto Torrijos Espino, 1963년 7월 18일 ~ )
그의 아들 마르틴 토리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한 군부 세력에 의해 세워진 민주혁명당(PRD)[2]의 후보로 출마하여 2004년 5월 2일에 파나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1999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혁명당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마르틴 토리호스는 2위였는데 그때 당선된 미레야 모스코소의 남편이 1968년 쿠데타 당시 오마르 토리호스가 축출한 아르눌포 아리아스라고 한다.

5. 평가


파나마 내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엇갈리는 편이다. 파나마 현대사를 통틀어 보았을때 토지개혁을 통한 빈민구제정책 및 교육정책을 통해 빈곤율과 문맹률을 어느정도 감소시켜놓았고, 미국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운하반환계획을 실현시켜서 파나마의 국부를 늘려놓는데 공헌하는 등 긍정적인 업적이 많다.
그러나 결국엔 그또한 독재자였고, 반민주적 행보를 보이며 야당 및 민주인사들을 탄압한건 사실이다. 그러나 칠레의 피노체트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군부처럼 국민들을 상대로 무작정 피를 뿌려댄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노동운동과 야당을 탄압하고 정적과 야당인사, 신부 등 200여명이 실종되거나 살해되는 사고가 일으키는 등 부정적인 그림자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1] 사실 파나마가 인구가 1970년 기준으로 150만명 안팍으로 매우 적었다보니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멕시코, 페루같은 나라들처럼 수입대체산업화 산업을 도모하기에는 규모의 경제가 받쳐지지 않아서 금융업 육성은 필수적이었을수밖에 없다. 특히 소비경제의 중심인 미국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파나마 운하가 있었으니 이러한 경제성장을 할 환경 또한 좋았다.[2]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파나마의 군부독재정당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나마 내에서는 그나마 진보좌파적인 정당으로 손꼽힌다(...) 이유인 즉슨, 민주혁명당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정당의 경우에는 우파성향인데다가 비 민주혁명당 좌파정당들의 득표율이 높아봐야 3%안팍에 그칠정도로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진보좌파적이라는 얘기지 사실 마르틴 포리호스대에는 미국과 FTA체결을 하는 등 친미정책을 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