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1. 개요
2. 과정
3. 변형된 쿠데타
3.2. 역쿠데타
4.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가능성
6. 이를 소재로 한 외국의 작품들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


Coup d'état / 軍事政變
'''지배층''' 내의 특정한 세력이 무력에 기반하여 정권을 전복하고 비합법적으로 통치권을 장악하는 행위.
프랑스어 관용구인 '''Coup d'État'''에서 유래된 말로 직역하자면 '국가(État)의 타격(coup)'이라는 뜻이 된다. 영어에서는 간단히 쿠(coup)[1]라고 표현하며,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부 세력에 대해서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훈타(junta) 혹은 군사 정권(military regim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 때는 반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자주 '쿠'''테'''타'라고 잘못 표기하는데, 아마 바리케이'''트'''포르투'''칼'''의 예처럼 앞 음절의 거센소리 때문인 것 같다. 설사 쿠'''데'''타라고 쓰더라도 발음할 때는 쿠'''테'''타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정치적 선진국에서는 문민통제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

2. 과정


쿠데타 세력은 일단 소수의, 믿을 만한 군사 지휘관들을 포섭한다. 의외로 규모는 전군에 비해서 그리 크지 않으나, 수도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예 병력이 필수적이다. 대체로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쿠데타 병력은 1개 사단 내외가 된다.[2] 쿠데타에 끼어든 사람의 규모가 너무 크면 보안 유지가 어렵고, 반대로 너무 적으면 일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벌어지면 사전에 계획된 방침에 따라 주요 요인들을 제압하고 병력을 동원해 방송국, 통신 시설, 공항 등 국가 기간망을 장악한다. 최종적으로 의회와 정부 주요 기관을 통제하고는 무력을 통해 반대파를 제압한다. 어떤 경우는 의회 같은 세력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정권 획득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일이 꼬여서 조기 정권 장악에 실패하고, 정권이 반격에 성공하는 경우에는 거의 쿠데타 군의 실패로 끝나게 된다. 쿠데타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는 한계가 있고, 보급 능력도 여의치 않아[3] 정국을 빠르게 장악하지 않으면 쿠데타 군의 군사력과 통제력은 빠르게 한계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쿠데타는 극비리에 진행해야 하므로 '''어지간히 문민 정부가 막장이거나 쿠데타 주모자가 어지간히 적이 없고 인망이 높지 않으면 모든 장성들을 사전에 음모에 끼워 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 과정이 지지부진하게 정체되면, 즉시 다른 장성들이 나서서 쿠데타 군을 진압한다. 이것도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영예를 얻게 될 '''기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사례과 같이 말 그대로 ''''국군으로서 국가에만 충성하는' 장성들'''[4]도 있으므로 이런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일을 벌이기도 전에 잡혀 들어갈 수도 있다. 또한 장군, 영관급의 지휘관들은 포섭할 수 있지만, 그 아래의 위관급이나 부사관, 일반 사병들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구체적인 계획은 모르고 단지 지시에 따라서 쿠데타 병력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은데, 상황이 지지부진하다보면 바보나 로봇이 아닌 이상 자신들이 명분이 없는 불법 행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이렇게 되면 쿠데타 병력은 통솔력을 상실하고 공중분해되어버린다.[5]
쿠데타에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야 하는데 명분이 있어야 장성들을 한 명이라도 더 음모에 가담시킬 수 있다. 가령 박정희의 쿠데타는 이승만4.19혁명으로 퇴진한 이후에 출범한 장면 내각에서 곽영주 등 이승만을 등에 업고 국가를 어지럽힌 무리들을 처벌하는둥마는둥 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박정희가 이런 곽영주 등의 무리들을 확실하게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한 전두환의 경우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이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빌미삼아,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최고지휘관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며, 박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와의 공모 여부를 철저히 밝혀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6]
일단 쿠데타에 성공한 다음에는 반대파를 제압하고, 중도파나 찬성파를 회유한다.[7] 이 과정에서 피아 식별이나 진압군의 병력 동원 문제 등으로 인해 상시 일정 병력을 통제하고 있는 소장 및 고급 영관급 장교들이 공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8] 쿠데타 과정의 복잡한 상황은 정치 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MBC)과 코리아게이트(SBS)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쿠데타 계획은 사후에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이 흘러갈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술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거꾸로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정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쿠데타 계획'을 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공한 쿠데타는 '정권 측의 더 어이없는 실수'가 겹쳐진 경우가 많다. 5.16 쿠데타장면 총리나 윤보선 대통령 둘 중 한 명이 결심했으면 즉각 진압할 수 있었으나, 장면은 수녀원으로 도망갔고, 윤보선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다가 쿠데타를 승인해주고 만다.[9] 12.12 군사반란의 경우도 반란군과의 신사협정을 믿는다는[10] 육군본부의 뻘짓이 아니었다면 반란군 측인 1, 3, 5공수여단보다 진압군 측의 9공수여단이 먼저 서울에 진입하여 보안사령부와 30경비단을 제압하고 반란을 조기에 진압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에 실패했던 것은 진압군의 총 지휘자인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동이 묘연했던 것도 큰 원인 중 하나인데, 노재현은 총소리가 들리자 가족들과 함께 도망 다녔지만 하나회 수중에 떨어진 육군본부로 왔다가 결국 붙잡혔다.

3. 변형된 쿠데타



3.1. 친위 쿠데타




3.2. 역쿠데타


반대로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쿠데타 정권을 뒤엎는 것은 역쿠데타라고 한다. 쿠데타 정권 대다수가 장기집권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역사의 후퇴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역쿠데타 크리까지 터지면 그 나라는 십중팔구 막장테크를 타게 된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바로 이런 경우인데, 남베트남은 북베트남과 싸우는 중에서도 하도 쿠데타가 많이 일어나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글라이스틴 前 주한 미국대사에 의하면 12.12 군사반란 직후에도 역쿠데타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 장성들이 미국에 역쿠데타 지원 여부를 타진했으나, 미국이 거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제5공화국(드라마)에서도 이 부분이 다루어졌는데, 역쿠데타를 추진한 장성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드라마에서도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로 등장한다. 여기선 하나회 이외 장교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항간에선 12.12 사태에 불참한 장성 일부가 주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한 하나회를 고깝게 보던 해군과 공군 장성들이 하나회가 없는 해병대 같은 휘하 육전부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요르요스 파파도풀루스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그를 몰아내기 위한 친위 쿠데타[11] 겸 역쿠데타를 사주했다가 축출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 쿠데타로 아들 이방원에게 축출되자 역쿠데타인 조사의의 난을 일으켜 이방원을 몰아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가능성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줄었다. 이에 대해, 2000년대 중반 어떤 잡지에 익명으로 실린 장군의 인터뷰가 있다.
일단 쿠데타를 모의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조직이 없다. 이는 과거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저지른 12.12 군사반란의 영향이 크며, 그 이후로 군내 사조직이 철저하게 금지된 탓이 크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한반도 어디든지 수 분내로 출동할 수 있는 대한민국 공군''', 그리고 '''인천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는 대한민국 해군''', '''반란행위를 색출하는 군사경찰대'''가 알아차리기 전에 기갑부대를 끌고 가서 대통령을 사로잡아야 한다. 공군해군, 군사경찰대, 그리고 그 밖의 군사조직을 상대하기 싫다면, 그들을 전부 포섭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들 중 하나라도 포섭하는 것에 실패할 경우, 자기 세력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군 전군을 전부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뜻이 되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금융 전산화 또한 쿠데타를 방지하는 큰 역할을 한다. 기껏 군을 움직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시민들이 폰카메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기만 해도 전국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가 퍼지게 된다. 비밀리에 동원할 수 있는 쿠데타 병력은 기껏해야 사단급인데, 일단 군 정보기관이나 지나가던 시민들의 제보로 쿠데타 정황이 포착되면 다른 부대들이 즉각 진압에 나서고, 쿠데타는 당연히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완전 전산화된 금융 덕도 크다. 국가 간 전쟁이든 내전이든 상관 없이, 전쟁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쿠데타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면 바로 돈의 흐름이 추적되기 때문에, 허가되지 않은 군 작전은 즉시 발각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그런 초헌법적인 만행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1년 현재는 시국과 각종 정보들을 실시간/초고속으로 생산/획득할 수 있는 모바일 정보화시대가 되었으며, 이미 5.16 군사정변12.12 군사반란과 같은 군사반란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명분으로 국민들을 속이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 시민들에는 '''군인들, 특히 젊은 군인들'''도 포함된다. 12.12 쿠데타 당시에는 정보 수준이 낮아 국방부북한군들이 침투했으니 진압하러 간다는 말을 정말로 믿었고, 5.18 민주화운동 때는 광주에 무장공비가 준동하고 있으니 때려잡으러 간다는 상관들의 말을 당시 공수특전여단 장병 대부분은 정말로 믿고 출동에 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 장병들의 스마트폰 사용이 허가되어 정보 접근 수준이 매우 높아졌으며, 장병들 대부분이 쿠데타의 역사를 역사를 잘 알고 있으므로 고분고분 말을 들을 가능성은 더 낮다.
예를 들어, 친위 쿠데타 모의 사건인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이 실제로 실행되었다고 해도, 성공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왜 이런 시위가 일어나고 있고, 얼마나 평화적으로 진행되는지 모두가 뻔히 아는 상황에서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져도, 과거와 다른 인식을 가진 장병들이 이런 위법한 명령에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도, 위헌/위법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범죄'''가 된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8월 쿠데타에서도 특수부대와 장병들이 쿠데타 군 상부에 항명하고 시민과 합세하기도 했다.
위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서울신문 백무현 만평.[12]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덕분에 쿠데타 방지책이 여러가지 마련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정타를 날린 사람은 집권하자마자 15일 만에 전격적으로 하나회를 해체해버린 김영삼이다.
현재 쿠데타 방지 업무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舊 국군기무사령부)가 맡고 있다.[13] 수도권 주위에 배치된 부대의 지휘관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기무사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이다. 대통령이 괜히 자신과 밀접한 연줄이 있는 인물을 기무사 사령관에 앉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는 항상 만약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 하므로 국가정보원이나 군사안보지원사령부와 같은 각 정보기관의 경우는 항상 국내의 군부대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습게도 12.12 군사반란하나회가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내 요직에 자신들 세력을 철저히 심어둔 것 이외에도 이들 정보기관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14] '''쿠데타를 막아야 할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주모자'''였기 때문에 이를 못 막았다.[15] 이후 청명계획이나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등을 볼 때, 민주주의가 정착된 현재라고 하여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래저래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해서는 안 된다.''' 5.16 군사정변12.12 군사반란은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주모자'''였기 때문에 못 막았고, 집권기에도 미국의 압박으로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친위 쿠데타를 준비하였던 적이 있으며, 김용갑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5공 말기인 1987년 11월에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노태우 정권에서도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에서 보듯 보안사가 '''청명계획'''을 수립, 노태우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준비했던 흑역사도 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 등 군인집단들은 쿠데타를 두 번이나 시도한 세력을 감싸고 도는 모습을 아직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등, 민주적 인식 개선에는 갈 길이 멀다. 당장 '''2017년에도 친위쿠데타를 모의한 전력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인식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론이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 차라리 독재자가 더 낫다!" 혹은 지금 정치는 독재다라고 돌아서는 순간[16], 쿠데타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최근 무능한 박근혜 정부의 사회 분위기가 극악으로 치달았음에도 쿠데타는 경계 대상이었으며, SNS 등의 발달이 물리적인 쿠데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2014년 태국 쿠데타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시민들의 제보로 쿠데타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이를 진압할 기무부대나 특수부대까지 쿠데타군의 편이라면? 쿠데타군이 기간통신시설을 장악하여 휴대전화망이나 인터넷망을 일시 차단한다면?[17] 여건만 되면 '''오늘 밤에도 일어날 수 있다.''' 펜이 아무리 칼보다 강하다고 해도 기갑부대와 특수부대를 동원한 대량살상은 당해내기 어렵다.
사실 한국에서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힘든 이유는 강국들의 입김 때문도 있는데 한국에서 군부가 쿠데타로 한국을 장악했다 쳐도 한반도를 둘러싼 강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일이 좀 꼬이면 각지에서 군부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 와중에 미국, 일본의 안보와 한반도 치안유지 명분으로 일본 해자대와 주일미군, 미국 7함대가 들이닥쳐 무력시위를 하고 거기에 더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고[18] 수출위주 경제에 타격을 입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즉 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주변국의 지지를 얻고, 사실상 일반 시민이나 다름없는 병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며 일반시민들의 폭넓은 지지까지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건 한국이 스스로 막장테크를 타야 가능하고 그 이전에는 아예 불가능하다.'''[19] 한국 현대사의 성공한 쿠데타 중 5.16 군사정변 당시엔 경제와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의 발전 정도가 낮아서 군 장교가 최고 엘리트 그룹 중 하나인 사대였기에 더 성공하기 쉬웠던 점도 있으나, 현재는 이미 장교가 독보적이지 않은 직업군이 된 지도 오래되었기에 5.16 같은 상황이 오긴 쉽지 않다. 5.16으로부터 불과 18년 후의 신군부도 계엄령 하에서 일단 군부를 장악한 후 다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완전히 탈취했지 바로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다.
사실 그 이전에 민주주의 시스템을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더 빠를 것이고 적어도 현 시점에는 아예 가능성이 없다 봐도 좋다. 설령 성공해도 쿠데타군 출신자들이 '''대통령 및 고위직 공무원에서 퇴임하는 순간, 과거 최초 문민정부 대통령어떤 식으로 그들의 사조직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한방에 증발시켜버렸는지는 이미 전례로서 나온 바 있다.'''[20][21]

5. 사례




6. 이를 소재로 한 외국의 작품들


워낙에 '''정치적인 행사'''인 관계로 여러 의미에서 논란을 일으키기 쉬워서 문화 매체에서는 그다지 즐겨 사용되는 소재는 아니다. 다만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반란' 과 '쿠데타' 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여럿 있다. 아무튼 정상적인 의미의 쿠데타를 다룬 작품들 중에서 유명한 작품은 명장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조국 그리스의 군사정권을 비판한 <Z>(1969)나 칠레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실상을 고발한 엘비오 소토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Il pleut sur Santiago. 1975)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군사독재 시기에 쿠데타를 부정적으로 다루는 건 금지됐다. 1967년 한국영화 <장군의 수염> 원작 소설은 쿠데타군을 다룬 것인데 영화에 나오던 군대는 쿠데타랑 상관도 없는 무슨 남북전쟁 당시 북군 차림 군대로 잠깐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해야 했다. 더불어 Z나 계엄령같은 코스타 가브라스 영화들은 20년이나 한국에 개봉금지됐다. 황미나는 만화에서 이세계를 무대로 했다고 해도 쿠데타군이 악역으로 나온 점으로 연재하던 작품(제목 미상)이 연재중지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말기에는 고원정의 소설인 '최후의 계엄령'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의 극우 쿠데타 음모를 다룬 정치 스릴러 <5월의 7일간(Seven Days in May)>(1964)의 예고편. 존 F. 케네디 재임시기 제작이 진행되었으나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개봉이 연기되기도 하여 유명해진 작품이다.[22]
미국의 군사사가 에드워드 루트웍이 쓴 쿠데타 연구의 고전 '쿠데타 입문서(Coup d'État: A Practical Handbook. 1968)' 를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 <Power Play>(1978)의 예고편. 한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에 공개되었다.
이 두 영화는 상기 한국 정치 드라마들의 참고서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게임 스플린터 셀: 컨빅션에서는 정체불명의 흑막인 메기도서드 에셜론의 국장인 톰 리드와 루시우스 갈리아드를 조종하여 워싱턴 D.C.EMP로 공격한 다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벌이려다가 샘 피셔에게 저지당한다.
배틀필드 4도 배경은 중국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설정으로 이를 둘러싼 미국 vs 중국 vs 러시아의 삼파전을 다루고 있다.
메탈기어 시리즈의 빅 보스도 일으킨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빅 보스는 쿠데타군형 정치군인이 아닌 자유의지주의를 군사집단에 부여한 것이라 일반적 쿠데타보단 분리독립운동에 가깝다.
블레이즈 유니온에서는 舊 브론키아 제국 황제 솔티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친동생 아이크를 시해하고 폭정을 일으켜 주인공 가롯트에게 저지당하는 일대기를 다룬다. 정사 엔딩에선 가롯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모함을 받고[스포일러], 가르카사에게 쿠데타를 당해 유그드라 유니온으로 이어진다. 비정사에서는 판타지니아 왕국이 극우 과격파 '신생교단'에 의해 쿠데타를 당하다가 사병단 그람 블레이즈의 도움으로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일본은 '''평화헌법''' 이라는 제한 & 문민통제 원칙 때문에 군사조직에 해당하는 자위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전개가 대표적인 쿠데타 시나리오인데, 1975년부터 연재되었던 부론손이 원작을 쓰고 히라마츠 신지가 그린 경찰 만화 도베르만 형사(ドーベルマン刑事)의 에피소드 중에도 주인공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경찰이 자위대의 쿠데타 부대를 진압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 등 현실의 일본에서는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있기 힘든 시나리오라 이를 다룬 창작물[23]은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자위대의 쿠데타라는 소재 자체는 역사가 좀 되는 편.
그나마 최대한 현대 일본의 현실을 따져서 창작된 '일본식 쿠데타' 가 나오는 작품으로는 시큐리티 폴리스를 소재로 다룬 일본 드라마 "SP(원제 : SP 警視庁警備部警護課第四係)" 시리즈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의 쿠데타 주도 세력은 일본에서 '''관료 양성소로 불리는 도쿄대학 법학부(관련 기사) 출신의, 국가 공무원 1종 시험에 합격한 캐리어 공무원들'''이다.
일본 국가 공무원 1종 시험(한국으로 치면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일본의 정부기관 여기저기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는 간부급 공무원 도련님들이 도쿄대학 법학부 시절 대학 생활할 때 결성한 정치경제연구회 서클 "웅상회(雄翔会)" 의 멤버들이 바로 쿠데타의 주도 세력인데, 웅상회의 리더가 방위대신 비서관(防衛大臣秘書官) 직책을 가진 방위성 고위 관료[24]다 보니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자위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쿠데타는 아니다(?).
극장판이자 완결편인 "SP 혁명편" 에서 묘사되는 이들의 쿠데타 계획은 이렇다. 정기국회가 열리는 날에 경시청 SP 중에서도 신변보호 요청을 한 국회의원들(이 중에 웅상회의 쿠데타 계획에 동참한 의원 - 여당 간사장이 끼어 있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경시청 경비부 경호과 제4계 계장(웅상회 멤버)[25]이 자신의 대의에 동참하는 SP 경찰관들[26] & 먼저 일반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해 들어가 있던 자위대 출신의 전직 자위관 테러리스트들로 구성된 혼성 부대를 현장에서 직접 이끄는 현장 지휘관 역할을 맡아 총기와 폭탄으로 국회가 열리는 의원동을 봉쇄하고, 국회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을 인질로 잡은 다음, 정치인들(총리 포함, 총리는 여당 간사장 그리고 SP 제4계장의 부모를 몰락시킨 원수이자 주인공의 부모를 조작된 암살미수 사건으로 죽게 만든 만악의 근원이라 쿠데타의 타겟으로 같이 들어갔다.)을 총과 폭탄으로 협박하여 국회를 생중계하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모든 비리와 범죄들을 자백할 것을 강요한다.
그렇게 부패에 찌든 정치인들을 실각시키고 정계를 물갈이한다는, SP 제4계장이 거사에 참여하게 된 목표인 "혁명" 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가 싶더니, 갑자기 SP 제4계장의 형제인 여당 간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4계장과 테러리스트들이 총과 폭탄으로 협박하고 있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기있게 그들을 훈계하는 참된 정치인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한다. SP 제4계장은 웅상회의 계획이 혁명인 줄 알고 거사에 참여를 결정했으나, 사실 웅상회가 계획했던 거사는 애초에 혁명이 아니라 그저 권력이 웅상회 출신 관료들에게 모조리 넘어가는 쿠데타에 불과했고, 여당 간사장은 이미 오래 전에 형제의 뒤통수를 치고는 웅상회와 내통하고 있었던 지 오래였다. 즉 웅상회 관료들이 기획한 쿠데타의 핵심적인 계획은, 웅상회와 내통한 여당 간사장이 국회의사당 테러 사태에서 "테러에도 굴하지 않는 참된 정치인" 의 모습을 일본의 전국민들에게 생중계로 보여줘서 국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차기 총리로 추대되고 나면, 웅상회의 훌륭한 바지사장이 된 이 여당 간사장을 자기들이 원하는 입맛대로 이리 저리 조종함으로써, 웅상회 관료들이 일본이라는 국가 전체를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뒤에서 몰래 지배하는 비선실세가 되는 것. [27]
결국 배신감에 치를 떤 제4계장이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친 여당 간사장에게 총구를 겨누고, 그 개판이 된 틈을 타 주인공 일행이 돌입해 내통자 SP 경찰관들과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고, 추적과 긴 실랑이 끝에 제4계장은 주인공의 손에 투항하며, 쿠데타를 기획한 웅상회 관료들은 모두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모조리 처참하게 죽음을 맞는다.[28]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도 왕정에 반하여 쿠데타가 이루어진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창 작품에 우익 논란이 일었지만 쿠데타 관련 내용 이후에는 별로 그런 구설수는 나오지 않는 편이다.

7. 여담


국가/정부의 중추만을 공격하여 들어엎기 때문에 파급력에 비해 실제 동원되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성패가 결정되는 시간도 기껏해야 하룻밤 정도. 그 이상이 되면 좌절하거나 역사에 쿠데타가 아니라 내전이란 이름으로 남게 된다. 교과서적인 경우가 처음에는 쿠데타로 시작해, 국토의 반쯤은 장악했으나 수도를 비롯한 나머지 핵심 지역 장악에 실패, 3년간 기나긴 피비린내나는 내전 끝에야 전국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쿠데타 세력의 구성도, 목적도 확연하게 변해 있었던 스페인 내전이다. 6개월 정도 걸린 대한민국의 12.12 군사반란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쿠데타'''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29]
위험성(?) 면에서 본다면, 당연히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의 혈투도 위험하지만, 사실 일개 보병으로서는 결국 쿠데타 세력도 조금 전까지는 정부군 또는 세력의 일부였다는 점이 정말 위험하다. '''피아식별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특제(...) 전투복이라도 만들면 당연히 도중에 들킨다. 그래서 쓰는 방법이 그냥 사단 하나를 통째로 빼돌려서 "X, Y, Z사단 빼곤 다 적이다!!"로 단정하거나, 원래는 안 쓰는 아이템(예 : 완장[30], 머리띠[31] 등)을 착용시키거나 반대로 빼도 되는 장비를 빼는 방법을 택한다. (예 : 방탄모 대신 전투모 착용.)
<공수부대 이야기>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1공수여단의 모 원사가 갑자기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서 '''뭥미? 북한이 쳐들어온건감?'''하고서 갔더니[32] 그 날은 1979년 12월 12일이었고 그들은 육군본부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렇듯 부대원들에게는 쿠데타 측에서 거사직전까지 전혀 낌새를 주지를 않는다. 병사들중 누군가 기무부대에 편지나 전화 한통 때리면 그대로 GG니까.[33] 오죽하면 장병들에게 스마트폰을 지급한 이유가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이유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쿠데타에 동원된 부대'에 우연히 소속되어 있다가 사태에 휘말린 일개 병사라면, 명령을 거부해도 군법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 아니, 오히려 '''거부해야 한다.''' 명백히 위헌이거나, 무효에 해당할 정도로 위법인 명령(고문 혹은 가혹행위, 포로 학대, 민간인 학살 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범죄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을 수도 있지만, 반란은 군인이라면 기본적인 상식 선에서 곧장 답이 나오는 극단적인 죄목이기에 그딴 건 기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물론 용서의 문제는 법정에서의 얘기고, 당장 현장에서 '두목님'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니(…) 명예와 목숨을 잘 저울질해보자. 법적으로도 '위협을 받은 증거'가 있다면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동참했다'는 것이니 면책사유는 된다고 한다.
의외로 냉전 시절의 공산주의 국가들, 정확히는 소련을 위시한 제2세계 국가들의 경우에는 이 쿠데타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은 정치장교 제도를 기반으로 한 문민통제가 매우 튼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 세력 내의 권력 투쟁도 무력을 동반한 쿠데타보다는 형식상 합법적인 정치 투쟁 및 숙청으로 행하였다.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쿠데타는 소련의 8월 쿠데타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친위 쿠데타 정도인데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인 군부 주도의 쿠데타는 아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라는 개념은 그리 틀린 개념은 아니다. 소련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안정을 확립하지 못했기에 기율과 군을 통한 사회를 통제해 왔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통제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지만 군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유복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중국, 북한 등의 국가들은 수많은 대중적인 저항에 직면했고, 이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제2세계의 패권국답게 사회가 안정화되어 있어서 군의 중요성이 많이 떨어졌었다. 특히 소련의 브레즈네프 시기는 비록 임금이 서구에 비해서 열악했지만 물가가 미친듯이 저렴해고, 맞벌이가 국책사업이었기에 가처분소득은 비슷했다.[34] 소련사람들은 당시 서구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열악했지만, 기다리면 일자리와 집, 차, 별장을 국가에서 지급해 주었다. 이러한 보장이 있었기에 많은 것이 열악하고 부족해도 소련사람들은 참고 지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에게는 3인가족용 아파트가 지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물량이 부족해 10년 후로 밀렸지만 그냥 1인 아파트에서 가족이랑 살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살 아파트가 나올테니까. 이러한 믿음은 소련사회가 많은 것이 부족하고 문제점이 촉발되는 지점까지 소련을 버티게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소련사회는 사회적 안정도가 매우 높았고, 그 결과 군에 의한 쿠데타는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쿠데타는 사회불안을 틈타 발생하는 것이지 사회안정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8월 쿠데타의 경우만 해도 장병들이 쿠데타를 거부했고, 시민에 합세했다.
하지만, 소련이 아닌 공산권국가는 이와 달랐다. 동구권이나 북한은 소련의 괴뢰정권이었기에 대중적 저항이 강했다. 중국은 독립적으로 성취했지만 이후 국가 운영에서 여러가지 병크로 인해 대중적 신망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군사력이다. 그래서 동구권을 비롯, 북한, 소련은 군을 강화했으며,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러한 대중적 봉기를 진압하고자 했다. 실질적인 예로 프라하의 봄, 천안문 사태가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다. 북한은 이런 와중에서도 더욱 특이하게 군을 특별히 우대하는 선군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쿠데타를 '국대타'(國大打)로 빗댔다. 쿠데타의 의미를 생각하면 해당 한자어는 적절한 번역인 듯(?).
비유적 의미로 회사나 단체에서 최상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끌려내려나거나 쫓겨나는 것도 쿠데타로 부른다.

8. 관련 문서


  • 내란
  • 반정
  • 찬탈
  •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 사변
  • 반란
  • - 군생활 당시[35] 물자수송중 병력까지 가득 태운 대규모 차량행렬이 물자를 가득채우고 서울로 이동했다. 군부대에선 쿠데타로 판단하고 제압에 나섰으나 헌병대가 출동해 확인해보니 선두차 운전자가 길을 잘못 보고 들어가는 바람에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서울로 진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연히 부대로 전원 복귀했고 그뒤 운전병들이 군기교육대 가는 걸로 마무리.

[1] 영어에서도 프랑스어의 영향으로 ‘쿱’으로 발음하지 않는다.[2] 예시로 5.16 쿠데타 당시의 병력은 약 6천 명이었다.[3] 전투부대 포섭도 바쁘고 잘 안 되는데 군수관련 부대를 포섭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다 쿠데타군이 아닌 3군 공병부대가 훼방을 놓으면 쿠데타군 소속 군수부대라고 해도 그 발목이 끊긴다.[4] 대표적으로 12.12 사태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끝까지 쿠데타 진압을 주장했던 김진기 육군헌병감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있다.[5] 대표적인 사례가 이괄의 난인데 한양까지 진격하는 와중에 병력이 이탈하거나 도주하는 바람에 수가 많이 줄어들은 상태였다. 사실 이괄 개인의 원한이 컷던 탓에 반군 세력내에 이괄의 협박 내지 엉겁결에 동참한 이들이 많아서 명분이 없다 여기고 관군에 투항하거나, 관군 측 선전에 넘어간 자들도 있었다.[6] 장포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장태완과 쿠데타 세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두고 설전을 벌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장태완 관점에서는 당연히 불법이지만 쿠데타 세력에게는 쿠데타 명분인지라, 애초에 쿠데타부터가 불법일지언정 정권 장악을 위해선 장태완이 뭐라 해도 풀어줄 수 없었다.[7] 실제로 5.16 당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해·공군만으로는 쿠데타를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끝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8] 군단급 정도 되면 예하 부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9] 당시 군부에서 박정희를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이한림 대장이 지휘하던 제1야전군에서는 본격적인 출동 준비까지 마쳤으나 끝내 군통수권자의 진압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서 결국 쿠데타를 인정하고 만다.[10] 육군본부 수뇌부들이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한 가장 큰 이유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서울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상대는 휴전선에 구멍이 나는 것을 알면서도 최전방 예비사단인 9사단을 무단으로 동원한 놈들이며, 또한 쿠데타가 실패하면 내란죄운명 뻔한 이므로 반란군들이 신사협정을 지킨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상대를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11] 물론 국왕에게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인 까닭에 친위 쿠데타로 분류할 수도 있다. 친위 쿠데타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12] 이 만평이 개재된 2006년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13] 물론, 바로 다음 문단에 후술될 내용을 생각하면 복선이 되버린 업무 체계였다.[14] 중앙정보부의 장인 김재규대통령암살초유의 사태 때문에 중앙정보부 자체가 보안사의 수사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한동안 보안사의 시녀 역할을 하는 반쪽짜리 정보기관이 된다.[15] 심지어 6.29 선언이 나온 뒤에도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제 실행하지는 않았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447 [16]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그 나라의 정치인들이 무능의 극치를 찍고 있거나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막장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17] 2021년 2월 1일 미얀마 쿠데타에서도 쿠데타군이 수도 네피도의 모든 인터넷과 전화망을 차단시켰다.[18]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 등 주변 아랍국가에서 쿠데타로 왕정이 무너지는 꼴을 지켜본 사우디가 군부쿠데타가 뭐가 예쁘다고 G20의 일원인 한국의 군부 쿠데타 세력을 지지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19] 만약 군인들의 민심이 악화되어 그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애초에 국민 민심이 역대급으로 최악이 된 상황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이건 한국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민주주의 선진국들도 마찬가지.[20] 명심하자. 육해공군을 총동원해 포섭한 사조직이라도 어차피 결말은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정권 출신자들이 타는 루트를 타는데, 바로 법정 앞마당 손님 루트를 죽을 때까지 욕을 쑤어먹고 플래시, 심하면 물건이나 음식 투척 세례를 받으면서 속으론 굉장히 불안하게 살아야 한다. 그나마 김종필은 사람이 양반이라 다행이지 노태우, 전두환 정도 되는 주축들은 그나마 좀 힘이 되니 그렇다쳐도 하나회의 12.12의 주역 헌병 수뇌부인 행동대장들인 신윤희나 조홍은 미국으로 도망다녔을 수준이었다. 어차피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양심적이고 본인이 싹싹 빌든 말든 사회인으로서의 생명도 완전히 아작나고 끝장나게 되는 셈. 당장 신군부와 하나회를 후원한 주영복이희성을 보자. [21] 설령 쿠데타를 주도하는 장군이 빅 보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국민들이 과연 고분고분 말을 들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설령 범죄조직 상대로 총부리를 돌려도 국민들의 의식이 성장한 지금 그런 짓거리를 했다간 국가 반역자+반란자+학살자에 영웅에서 전직한 정치군인+졸장이자 악장+일본군 헌병도 울고 갈 민사행정경찰권 침해자라는 최악의 오명을 그랜드 슬램으로 달성하고 명예 잃은 죄인이 돼서 부하들과 함께 무기징역 아니면 현장 사살로 생을 마감할 게 뻔하며 제2의 전두환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짓을 어느 덕장이 하겠는가?[22] 실제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 및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군상층부와 계속 대립했다. 쿠바 핵위기 당시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군부가 대통령의 지시없이 핵실험을 무단 실시해서 소련과의 대결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커티스 르메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는 내용의 대체역사물도 있을 정도이니.[스포일러] 가롯트는 가명. 가르카사가 진명.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모함을 받고 진명을 모르다가 알게 된 이후 선량한 성격이 180도 변모하여 냉혹한 패권주의 황제로서 솔티에에게 쿠데타를 성공시킨다.[23]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들, 세이기노 히로, 솔저 블루[24] 방위성의 간부급 공무원들은 정식 간부 양성과정(방위대학교)을 거쳐서 들어온 간부 자위관 계층(즉 자위대 장교 및 장군들)인 "제복조(制服組)", 그리고 국가 공무원 1종 시험에 합격한 뒤 방위성에 배정되어 근무하는 순수 행정관료인 "사복조(背広組)" 로 나뉜다. (자위대처럼 준군사조직인 해상보안청에서도 역시 간부 해상보안관인가 고시 쳐서 들어온 공무원인가에 따라 제복조와 사복조로 구분된다) 즉 이 웅상회의 리더는 방위성 사복조 간부들 중에서도 끗발이 센 고위급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방위성 내에서 사복조 공무원들은 '''방위청 시절부터 자위대의 문민통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복조 간부 자위관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행정관료들'''이고, 그래서 1997년 전까지는 방위청-국회 및 총리관저 사이의 연락 및 교섭 권한을 전부 사복조가 담당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25] 츠츠미 신이치가 연기했다. 웅상회의 쿠데타 계획에 동참한 여당 간사장의 형제. [26] 쿠데타에 동참하는 SP 경찰관들은 당연히 웅상회의 멤버인 경시청 경비부 경호과 이사관이 선발했다. SP 제4계장의 도쿄대학 법학부 후배로, 계급은 경시. 쿠데타에 동참하지 않을 게 뻔한 주인공 일행은 원래 국회의사당 경호 임무 때 제외되었어야 했는데 이사관의 행정 처리 실수로 끼어들어갔고 결국 이 주인공 일행의 활약으로 쿠데타를 말아먹게 된다(...)[27] 이 사실은 SP 제4계장만 모르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로 거사에 참여한 전직 자위관들 역시 웅상회의 진짜 계획을 다 알고 있었고, "그 사람(웅상회의 리더인 방위성 방위대신 비서관)이 빵에서 좀 살다 나오면 책임져 준다고 했다" 면서 SP 제4계장에게 총구를 돌리며 비웃는다.[28] 경시청 경비부 경호과 이사관은 본청 화장실에서 제복 넥타이로 자살당하고, 리더를 포함한 웅상회 멤버들은 공안경찰 소속 경찰관들이 들어가 체포하기 직전 집회 장소로 사용되는 맨션에 누군가가 배달한 폭탄으로 인해 공안경찰 경찰관들 눈앞에서 모조리 폭사당한다. 이 때 일부 파손된 웅상회 멤버들의 (서클 이름까지 적힌) 기념사진이 공안경찰 중 한 명의 손에 들어오며 후속작 떡밥을 남겼으나, SP 혁명편을 마지막으로 SP 시리즈 자체가 완전히 끝나버리며 미회수 떡밥으로 끝나고 말았다.[29] 이건 정권 장악까지 걸린 시간이 6개월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쿠데타가 6개월이 걸렸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2.12 사태 당시 군부의 장악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시간 정도였다. 12.12 사태의 결과는 군부의 장악에만 제한되었다. 물론 당시 한국은 군사독재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군부의 장악은 곧 정권을 절반 넘게 장악한 것과 같은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위해 5.17 내란을 또 일으켜야 했다.[30]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쿠데타군 팔에 혁명군이라는 검은글씨가 쓰여진 하얀완장을 메개 하였다.[31] 12.12 군사반란 때 쿠데타 군의 방탄모에 하얀띠를 두르게 하였다.[32] 지금 보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7, 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한 공포심은 어느 정도는 정부에서 부채질했던 것을 감안해도 현재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그걸 감안하면 저런 반응은 그리 이상한게 아니다. 평화의 댐같은 사기극이 먹혀들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33] 12.12는 좀 특수한 사례다. 군부 쿠데타를 막아야 하는 기관이 오히려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이기 때문. 굳이 대자면 면역세포가 신체를 공격하는 알레르기 같은 상황이었다고 해야 하니...[34] 소련사회에서 여성도 노동자의 한 명으로 노동을 해야 했다.[35] 나이를 생각하면 200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