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주(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석주는 1888년 12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평양신학교에 재학하다가 목치숙과 함께 서울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4월 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손재곤(孫在坤)·최세진(崔世珍)[1] ·조병학(曺秉學)·이석완(李錫琬)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한편 만세시위에 사용할 선언서를 작성하고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형숙의 자택에서 독립선언서 100장을 준비했고, 목치숙은 태극기 80개를 제작했다. 거사일은 4월 14일, 장소는 고흥장터로 정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새벽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시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과 순천 헌병분대 감독 보조원에게 익명으로 우송하였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6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순천성경학원(順天聖經學院)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서 신학(神學)을 수학하고 목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1930년대 말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는 1938년 2월 금산면 금천교회와 도양면 중앙교회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신을 우상(偶像)으로 여기는 것이므로 절대로 신사에 참배하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설교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불경죄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이와 별도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총 2년 4개월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 1952년 6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오석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