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치숙
목사.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885년 2월 23일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화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흥군 최초의 기독교인 신우구(申瑀求)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9년 3월 3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가한 뒤 기미독립선언서 1매를 가지고 고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고흥군 남양면 신흥리에 거주하는 예수교인 이형숙(李亨淑), 손재곤(孫在坤), 최세진(崔世珍)[2] , 조병호(曺秉鎬), 이석완(李錫琬)에게 국제정세와 독립만세시위의 필요성 등을 역설해 동의를 얻어낸 뒤 고흥읍 장날인 4월 14일에 거사하기로 약정했다.
4월 7일, 목치숙은 동지 오석주에게 태극기 80매와 독립선언서 100매를 제작하게 했고, 고흥읍과 강동면내의 예수교인에게 연락해 동지 규합을 부탁했으며, 4월 10일에는 동지 한익수(韓翊洙)에게 조선독립고흥단(朝鮮獨立高興團) 이름으로 자체선언서 10여 매를 작성하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4월 14일 당일에 비가 심하게 내리는 바람에 시위를 벌이지 못했다. 이에 그는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 순천헌병분대 감독보조원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발송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목치숙은 출옥 후 1920년 8월 25일에 고흥읍내 기독교 청년들을 모아 고흥기독교청년회(高興基督敎靑年會)를 창립, 총회를 열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아울러 조선청년연합회에 가입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동들을 위해 야학회를 설치하고 한글, 한문, 산술 등을 가르쳤다. 1923년 2월 26일에는 고흥기독교청년회 주관으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해 조선산 의복을 입게 하고 토산품 사용과 단연실행(斷煙實行)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25년 4월 19일 기독교의 교리를 전도하면서 교회 건립 확장을 위해 찬조금 460원을 모집했다.
1928년 4월 20일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사망했으며,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아동문학가, 시인이며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목일신(睦一信, 1913~1986)이 목치숙의 아들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1885년 2월 23일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화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흥군 최초의 기독교인 신우구(申瑀求)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9년 3월 3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가한 뒤 기미독립선언서 1매를 가지고 고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고흥군 남양면 신흥리에 거주하는 예수교인 이형숙(李亨淑), 손재곤(孫在坤), 최세진(崔世珍)[2] , 조병호(曺秉鎬), 이석완(李錫琬)에게 국제정세와 독립만세시위의 필요성 등을 역설해 동의를 얻어낸 뒤 고흥읍 장날인 4월 14일에 거사하기로 약정했다.
4월 7일, 목치숙은 동지 오석주에게 태극기 80매와 독립선언서 100매를 제작하게 했고, 고흥읍과 강동면내의 예수교인에게 연락해 동지 규합을 부탁했으며, 4월 10일에는 동지 한익수(韓翊洙)에게 조선독립고흥단(朝鮮獨立高興團) 이름으로 자체선언서 10여 매를 작성하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4월 14일 당일에 비가 심하게 내리는 바람에 시위를 벌이지 못했다. 이에 그는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 순천헌병분대 감독보조원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발송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목치숙은 출옥 후 1920년 8월 25일에 고흥읍내 기독교 청년들을 모아 고흥기독교청년회(高興基督敎靑年會)를 창립, 총회를 열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아울러 조선청년연합회에 가입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동들을 위해 야학회를 설치하고 한글, 한문, 산술 등을 가르쳤다. 1923년 2월 26일에는 고흥기독교청년회 주관으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해 조선산 의복을 입게 하고 토산품 사용과 단연실행(斷煙實行)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25년 4월 19일 기독교의 교리를 전도하면서 교회 건립 확장을 위해 찬조금 460원을 모집했다.
1928년 4월 20일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사망했으며,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아동문학가, 시인이며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목일신(睦一信, 1913~1986)이 목치숙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