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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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성술 (吳成述)
본명
오인수 (吳仁洙)
본관
나주 오씨
자 / 호
성술(聖述) / 죽파(竹坡)
생몰년도
1884년 5월 15일 ~ 1910년 9월 15일
출생지
전라도 나주목 삼가면 죽산리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죽산마을)[1]#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


오성술은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오성술은 1884년 5월 15일 전라도 나주목 삼가면 죽산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죽산마을)의 양반 가문에서 참봉을 지낸 아버지 오영선(吳榮善)과 어머니 나주 임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최익현의 창의연설[2]을 보고 감동을 받은 오성술은 그의 강론에도 참석하고 최익현에게 의병활동을 결심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대견해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고 하니 마음이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3]

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4]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

이 말을 듣고 오성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병서를 익히며 의병부대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1906년에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고, 이에 더욱 박차를 가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국가 흥망이 경각[5]

에 달려 있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나 혈기방장[6]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국적[7]을 몰아내고자 하오니 의병부대를 창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승낙해주십시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군자금을 마련해주었다. 오성술은 이 자금을 토대로 동료들을 모을 수 있었고, 1907년 2월에 마침내 격문을 띄우고 창의한다. 우선 자신이 수학했던 용진산을 근거지로 삼아 200명의 의병들을 이끌게 되었다. 그 다음 농민 출신이 많았던 의병들을 이끌고 경제 침탈을 하던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공격했다.
하지만 일본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의병운동에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실시한다.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사기가 꺾였고, 오성술과 같이 창의한 김태원도 붙잡혀 죽고 만다. 거기에 오성술이 이끄는 의병도 친일파의 밀고로 근거지가 탄로나고 만다. 이에 오성술은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1909년까지 일본군을 피해 근처에 활동하던 밀고자 및 친일파들을 잡아 죽이는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해 전국을 뒤지기 시작, 오성술과 30명의 의병부대도 일본군에게 공격받는다. 의병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오성술을 제외한 모두가 전사하고 그도 체포당한다.
오성술도 다른 의병장들과 마찬가지로 사형을 판결받고 1910년 9월 15일에 형이 집행되어 26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사후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72~174p

[1] 인근의 도덕동·명도동·오운동·지평동과 함께 나주 오씨 집성촌이다.[2] 의병을 일으키자는 내용의 연설.[3] 직역하면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꾀. 전반적인 나라의 상태를 이르는 말인 듯.[4] 한 목숨 바쳐 나라에 보답하다.[5] 아주 짧은 시간. 나라를 살리기에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의미.[6] 혈기가 아주 씩씩함.[7] 국가의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