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석(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원석은 1899년 1월 25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에서 독립유공자 오기호와 정6품 사과(司果)를 지낸 청주 김씨 김경수(金敬洙)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3] 그는 경성사립국성중학교(京城私立國星中學校)를 졸업하고 강진군 사립학술강습소의 강사를 지냈다. 그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소작문제에 자극되어 사회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1932년 강진군의 소작쟁의를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11월 조정구(趙政九)·김호기(金浩基) 등과 함께 무산아동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기 위해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할 것과 강진군 동면 호안공사(護岸工事)의 임금인상을 위해 노동쟁의를 펼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1934년 2월 중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회 전라남도지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다가 1972년 12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오원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