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아 사건
1. 개요
피델 카스트로 일당 독재 정권의 대표적인 정적 숙청 사건으로 일컬어지며, 사형제 논쟁으로까지 번진 쿠바를 뒤흔든 사건이다. 사건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위기를 모면하고, 권력 집중이 심화된다.
2. 아르날도 오초아의 부상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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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날도 오초아(Arnaldo Ochoa)'''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휘하에서 쿠바 혁명에 참전한 혁명 세대로서,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에서 봉기한 좌파 게릴라전은 물론 에티오피아와 앙골라에 파병된 쿠바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1] 공화국 영웅 오초아는 정치적으로도 부상하게 되었는데 강력하게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던 중 돌연 1989년 6월에 69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3. 오초아 재판
오초아가 체포된 혐의는 '''마약거래'''였다. 쿠바는 미국에 의해 봉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업에 필요한 부품들을 밀수를 통해 공급해야하는 경우가 잦았다. 쿠바 정부는 이를 위해 파나마 등지에서 소규모 회사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초아는 그 책임을 맡고 있었다.
오초아가 관리하는 회사들은 변질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내무부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였지만 오초아는 점차 내무부의 통제를 넘어 임의적으로 예산을 운영하였고 이 과정에서 마약 거래업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2] 문제는 이 마약 커낵션이 쿠바 국가 자체를 마약 관련국으로 고발당하게 만들 수 있는 중대사안이었다는 것.
오초아의 불법적인 계좌들이 탄로나고 이어서 콜롬비아 카르텔과의 커낵션은 물론 심지어 앙골라 파병기의 불법행위까지 드러나면서 공화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오초아는 허망하게 추락해버렸다. 국가평의회 31명 전원이 오초아의 사형에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오초아 등 공범자로 지목된 4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총살형에 처해졌고, 이어서 공범자로 지목되어 기소된 내무부 장관 호세 아브란테 등의 협력자들도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정계에서 지워졌다.[3]
특히 카스트로의 전직 경호원의 폭로중에서 오초아 장군이 끔찍하게 총살당하는 영상을 카스트로가 자신과 동료들에게 보도록 했다며, 이는 자신에게만 헌신하도록 하는 카스트로의 권력 유지 방법이었다고 지적했다.
4. 숙청과 사형 논쟁
한편 오초아 사건으로 오초아를 비롯한 주범들에게 사형이 집행되면서 너무 가혹한 판결이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이 사건을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대표적인 정적 숙청 사건으로 조명하는 시각도 나타났다. 물론 쿠바에서 정치범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사형까지 가는 경우는 없던 상황에서[4] 오초아 사건이 정말 '''정적 숙청이 목적'''이었다면 그 의미와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오초아 사건은 쿠바의 정적 탄압과 사형제 폐지 논쟁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의 전직 경호원은 카스트로의 호화생활과 비리를 폭로하면서 오초아 사건이 카스트로의 비리를 오초아에게 뒤집어 씌워서 숙청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기사
5. 관련항목
[1] 피델은 훗날 프랑스 언론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오초아 사건을 논하면서도 오초아를 '''역사적인 업적을 세운 장교이며 쿠바 공화국의 영웅'''이었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2] 피델은 오초아의 동기가 애국적이었다고 인정하였지만 그렇다고 오초아를 용서하지는 않았다.[3] 추가적으로 공범자가 기소된 건을 '제2사건'이라고 한다. 내무부 장관 아브란테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1년 1월 21일 옥사했다.[4] 물론 온건하고 평화적인 경우에나 그랬다는 것이지 '테러범'으로 지목되면 얄짤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