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역사
카리브 제도에 위치한 쿠바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선사 ~ 중세
스페인 제국이 쿠바에 도래하기 이전부터 타이노인 같은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통치와 전염병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감하였고, 살아남은 이들도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이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흑인들과 섞여서 완전히 동화되었다.[1] 이 때문에 이들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단지 고고학적인 유적 발굴을 통해 대충 이러이러하게 살았구나라고 추측하는 수준에 머물러있다.
2.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2.1. 초기
15세기 후반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방문하였으며 그후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의해 쿠바 총독령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되었다.
16세기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 모두 쿠바의 스페인 식민지에 최초 거점을 두고 일을 시작했으며, 멕시코와 남미가 정복되기 전까지 쿠바는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자 정치/경제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두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쿠바는 단번에 중심지 자리를 뺏기게 된다.
2.2. 중후반
쿠바 총독령은 누에바에스파냐로 편입되었다가, 쿠바 도독령으로 계승되었다. 쿠바는 당시 국제 상품이었던 설탕의 주 생산지였기 때문에 부유하였고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도 쿠바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은 쿠바에게 가혹하였기 때문에 18세기 때는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1776년 미국 독립전쟁, 1804년 아이티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이 줄줄이 독립해 나갈 때도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최후까지 스페인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쿠바 도독령 내 크리올과 페닌술라르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2]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스페인 지배의 불만을 품는 현지인들의 반란이 증대되고 있었으며, 미국은 독립 이후 국가적 확장이 시작되면서 일찌감치 쿠바 섬을 노리고 있었다. 쿠바의 전략적 중요성과 경제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사실 미국이 1850년대에 한번 건드려서 편입시키려 했는데 남북전쟁에서 쿠바가 합병되어 노예 주가 될까 봐 우려한 북부가 전쟁에 결사 반대했다. 때문에 미국은 1859년 상원의원 존 슬리델이 스페인에 1억 5천만 달러에 쿠바를 매각할 것을 제의했다. 생각해보면 이 가격은 루이지애나나 미국-멕시코 전쟁 후의 헐값 매각(1500만 달러)의 10배나 되는 가격이었다. 720만 달러의 알래스카의 20배 가격이고. 미국은 일찌감치 스페인과 협상을 통해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양도받은 적이 있어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으나 스페인의 반응은 "당신들 미쳤음?" 쿠바의 경우 그 다음 세기 프랑스의 알제리나 영국의 북아일랜드처럼 당시 스페인인들 머리 속에서는 단순한 해외 식민지가 아니라 스페인의 수 백년 동안 꾸준히 투자를 하고, 이민을 보내고, 현지 사회를 양성한 자국의 정당한 고유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거부와는 별개로 쿠바 섬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18세기 중기가 되면 스페인 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부유한 식민지이었던 쿠바에게 세금을 충당하였다. 쿠바인들 역시 스페인의 통치에 대한 부담이 점점 심해지자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을 원하였으며, 이 때마다 스페인군은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독립 게릴라들은 미국과의 자발적인 합방을 원하였다.[3]
1868년부터 1878년까지 벌어진 10년 전쟁으로 산혼조약을 체결하고 자치령임을 인정받는 건 성공했으나 이후에도 식민지 당국이 눈가리고 아웅식의 처사로 일관하자 결국 1895년에 쿠바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4]
1898년, 제국주의에 뒤늦게 눈뜬 미국이 메인호 폭파사건을 기회로 쿠바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사태는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발전한다. 이미 쿠바 독립당이 쿠바의 반 이상을 수복한 상황에서 스페인 식민지군에게 저항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고 결국 쿠바는 미국의 통제 아래 들게 된다.
미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스페인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1902년 미국은 쿠바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으로 쿠바를 자국에 편입시키는 대신 주권 국가로 독립시켰다. 물론 마크 트웨인 같은 이들은 개소리한다고 비웃었는데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던 미국이 정작 필리핀은 식민지로 만들었으니까'''. 일부 미국 사가들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처럼 미국에 귀속시켰어야 했다며 쿠바 독립을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 실수 중 하나라고 평하 고 있다.
쿠바는 19세기까지 무려 400년 가까이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았으며, 이 나라에 있는 도시는 99% 이상 스페인 제국 식민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스페인인들의 혹정과 학대, 질병의 창궐로, 타이노인 같은 섬의 선주민들은 혼혈 외에는 거의 전멸하고, 스페인인들의 후손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이 정착하였다. 지금도 원주민 문화를 지키는 비율은 소수점 수준에 불과하고 거의 다 혼혈이 진행되어 있는 상태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쿠바'라는 섬 이름이 선주민이였던 타이노인의 말(콜바)에서 따왔다는 점이다.[5]
3. 쿠바의 독립과 미국의 개입
쿠바는 미국의 군정 이후 독립하였으나 미국은 그 대가로 플래트 수정안을 삽입하여 쿠바를 미국의 종속국으로 만들었으며 1867년 알래스카를 살 때 그랬듯이 싼값에 관타나모 인근 땅을 사들여 미국 군사기지로 삼았다. 이후 1959년까지 반세기 이상, 쿠바는 세계사의 변방으로 남은 채 미국의 충실한 설탕공급기지이자 경제적 식민지로 존재했었다.
4. 공산 쿠바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공산주의 및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가 급속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쿠바에서도 점차 이러한 의식에 눈뜨게 된다. 특히 1933년에 이른바 '''중사의 반란'''으로 불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군사정권의 무능과 부패, 폭정에 대한 저항의식은 더해만 갔다.
1953년, 변호사이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여한 몬카다 병영 봉기'''(7월26일 사건:Movimiento 26 de Julio)는 바티스타의 권력 기반이었을 군대 조차도 바티스타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록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나 카스트로는 재판정에서 당당한 태도로 자기의 정당함과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쿠바 역사에 자기 이름을 처음으로 남기게 된다.'''[6] '''
바티스타는 카스트로를 그저 25살 애송이로만 보았는지 1년 뒤 특사로 석방했고, 멕시코로 탈출한 카스트로는 그곳에서 많은 반바티스타 동지들을 만난다. 맹우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이들은 1955년 요트 그란마(Granma, 할머니)를 타고 쿠바에 재입성한다. 상륙지점에서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에 82명의 동지가 12명으로 줄어드는 역경 끝에[7] 동부 산간에 거점을 마련하여 저항을 개시했다.
이 시기에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카스트로의 공산 게릴라군은[8] 대민봉사활동을 하며 지역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문자도 가르쳐주고 하는 식이었다. 이 시기에 총을 들고 싸우는 공산주의 게릴라가 되고 싶었던 체 게바라 자신의 열망과는 달리 체는 의료 대민봉사활동을 주로 했고, 이게 아주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이렇게 무력 투쟁이 아니라 대민봉사활동을 통해 확고한 지역 거점을 세운 공산 게릴라군은 산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로 정부군에 매우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9]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엄청난 연설 및 선전 능력을 발휘, 쿠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받아 1959년 1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추방하고 쿠바의 권력을 장악한다. 이것이 쿠바 혁명이다.'''
처음에는 카스트로는 미국을 공공연하게 적대시하지 않았지만 미국기업이 소유하던 공장이나 농장 호텔등을 죄다 몰수해서 국유화해버리자 미국에서 쿠바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경제적인 교류도 끊어지자 대안책으로 카스트로는 소련에 접근했고,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쿠바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힘으로 카스트로 정부를 뒤엎기 위해 CIA를 통해 반카스트로 세력(즉 바티스타 시절 친미 우익 세력)을 지원해 1961년 속칭 피그만 침공을 일으켰다. 이 침공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1961년 야심차게 출범한 젊은 케네디 행정부의 무능과 미숙함이 일시에 폭로된 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카스트로는 반미 친소 정책을 강화하고 공공연히 공산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여담으로 미국에서 금주법으로 밀주를 유통시키며 세를 키운 마피아들은 보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사업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가시적이고도 장기적인 이윤을 낼수있던 사업이 쿠바 호텔사업이였다. 미국의 마피아들은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쿠바에 호텔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비단 마피아뿐만이 아니라 쿠바의 산업전반은 죄다 스페인과 전쟁으로 쿠바를 할양받을때부터 미국이 세운 인프라에 비롯되어, 이를 쿠바가 공산화하면서 죄다 국유화를 하자 미국의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맛보게되었으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호화호텔을 세운 마피아들은 졸지에 공중분해당하게된다.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는 바로 이러한 괘씸죄에서 비롯되는것이기에 단순히 여론에 의해서 쿠바의 경제봉쇄를 풀수없고 쿠바의 직접적인 보상금과 함께하는 사과가 있어야만 미국의 경제봉쇄가 풀릴것으로 예상된다.
4.1. 쿠바 미사일 위기
카스트로는 이런 행보를 강화해 소련과 급속히 친밀해졌으나, 소련은 소련대로 쿠바를 이용해 미국을 엿먹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소련은 쿠바에 지원이라는 명목 아래에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미국의 정찰에 걸려들면서 영화에도 나왔던 그 유명한 쿠바 핵위기가 시작된다. 1962년 10월의 일이었다.
당시 케네디 정부는 쿠바를 해상봉쇄하고 마침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이 쿠바 영해에 접근하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소련 측이 이를 무시하자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강국이 순식간에 정면 충돌할 위협에 봉착했으며, 전세계는 쿠바를 주목하며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막판에 소련이 한 발 물러나 전쟁 위협은 가셨으며, 소련은 미국이 터키에서 미사일 탄도탄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가 다른 요인과 겹쳐서 2년 뒤 니키타 흐루쇼프는 실각하게 된다.
그런데 쿠바 위기의 진앙이 된 쿠바 국내의 중거리 미사일 기지 자체는 설치 및 통제를 소련의 관리를 받고 있어 카스트로는 크게 비위가 상했던 모양이다. 카스트로는 차제에 결판을 내자고 해 소련에 전쟁을 주문했으나 평화협상으로 끝나자 실망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 사건 이후 쿠바 혁명에 동참했던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의 혁명 운동에 가담했다가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포당해 사살된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1962년 이후에도 계속 쿠바에 남아 쿠바의 공산화 사업을 계속했다.
4.2. 이후의 쿠바
1970년대에 쿠바는 크리스마스를 공휴일에서 제외해 버렸고 이 정책을 1998년까지 지속했다. 그래서 공산화 이후 1998년까지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크리스마스가 평일이었던 유일한 나라였다.
1960~80년대 쿠바는 농업 개혁을 통해 소련에 설탕을 공급하고 소련에게서 석유와 기계를 제공받는 호혜적 무역관계를 맺었으며 1960~70년대 강소국 정책에 따라[10] 중앙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공산주의 게릴라 운동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앙골라, 모잠비크 등을 지원했으며[11] ,교육 및 의료 개혁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도 중장년층들은 이때를 잘먹고 잘 살았을 때이며 국제적으로 힘 좀 썼을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1960년대의 산업다각화와 공업화 실패로 인해서 큰 홍역을 치렀던 바가 있고 이로 인해 체 게바라 자신이 자아비판을 했을 정도였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어느 정도의 경제발전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잘먹고 잘사는 나라였지만 그럼에도 1980년 마리엘 항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는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12]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공산주의권의 경제침체가 가속화되면서 쿠바 경제도 침체되었고, 1991년 소련이 공중분해되어 원조와 지원이 끊어지자 쿠바 경제에 '''말 그대로 폭탄이 떨어졌으며'''[13] 정치적으로는 오초아 사건으로 대표되는 혼란이 잇따랐다. 여기에 장기화된 카스트로의 1인 통치 체제에 대한 불만, 공산주의 체제의 폐쇄성에 대한 불만, 미국의 경제봉쇄[14] 로 인한 빈곤과 실업, 자유와 탈공산화에 대한 열망 등[15] 이 겹쳐 1990년대 쿠바의 정치, 경제, 사회는 매우 불안했으며 소련이 존속했을 당시에 쿠바 페소와 달러화간의 환율이 1달러에 6페소 였으나 생필품을 구입하기 힘들어지면서 암시장에서의 환율이 급속히 치솟아서 '''150 페소 :1 달러 '''까지도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의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이 시기 쿠바인들이 별 수 없이 다이어트를 하게 되는 바람에 성인병이 줄어들어 건강해졌다는 연구결과도 나올 정도다.[16]
그래도 재빨리 관광산업 활성화 조치와 해외송금 자유화, 유기농 농법의 확산 및 협동조합 확산등의 조치를 취하고[17] 체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비를 축소했으며 그 비용으로 무상 교육제도와 배급제도, 무상의료 제도를 지속시켰기에 배급제의 붕괴와 사회복지체제와 산업기반의 전면적인 붕괴와 핵개발로 인한 경제제재, 그럼에도 지속되는 폐쇄적인 정책의 지속등의 요인이 겹쳐서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찍었고 2000년대 와서도 산업기반 자체의 붕괴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북한과 다르게 최악의 상황만은 피했고 결과적으로 1993년에 쿠바 경제는 바닥을 찍고 1994년부터 다시 성장세에 접어들게 되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플러스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플러스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배급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축소되었고 빈부격차 확대나 배급범위 축소가 겹쳐졌기 때문에 1980년대만 못하다는게 현지의 평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쿠바는 여전히 피델 카스트로의 통치를 받았으며, 이는 카스트로가 야심차게 추진한 사회, 교육, 농업, 의료 개혁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며 2000년대에 중국 - 러시아와의 교류증진과 함께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등 남미 전역에서 좌파정권이 대거 집권하면서 이들 국가와의 무역증진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나아져 쿠바 국민도 그럭저럭 먹고 살 수준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쿠바의 1인당 GDP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반에 2700달려였던 1인당 GDP가 2010년대에는 6000달러대로 진입하는 등 상당한 성장세를 보였기는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이중환율제도의 문제점과 자영업과 관광업 진흥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한 빈부격차 확산, 부정부패[18] 문제점이 자리잡고 있기는하지만 여하튼 2000년대 이후로 중남미 일대에서 입지가 다시 커져서 콜롬비아 내전에 대한 평화협상도 쿠바에서 중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카스트로는 그 결과 김일성이 세운 대기록[19] 을 갱신할 수 있을 듯 했으나, 갑자기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2008년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이양하고 물러났다.[20] 그러나 중국의 덩샤오핑이 그랬듯이 피델 카스트로 역시 여전히 막후에서 쿠바의 당정(黨政)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1년 4월 19일, 14년 만에 개최된 쿠바 공산당 제6차 당대회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당 제1서기직에서 공식 사임하고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취임함으로써 피델 카스트로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 1959년 집권 후 무려 '''52년''' 만의 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당연히 민주주의 체제인 미국은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이 10명이나 바뀌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모든 공식 직책에서 물러나 국가 최고원로로서 국가정책에 조언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였지만, 2011년 기준 85세의 고령이라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공산당 제1서기 겸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라울 카스트로(2011년 당시 80세)는, 새 지도부를 구성하고 300여 개의 경제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로써 공산정권 수립 이래 최초로 주택과 차량을 매매할 수 있게 됐으며 은행 대출도 허용되었다. 또 라울 카스트로는 그 자신을 포함한 고위 정치인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한다고 선언했는데, 10년 뒤면 라울 카스트로는 무려 90세다. 한편, 카스트로 형제의 독재가 계속되고는 있지만[21] 추후 라울 카스트로도 공직에서 은퇴하고 나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경제개방을 하면서 동시에 공산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집단지도체제로 점진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2013년 2월 24일, 국가 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는 차기 수뇌부로 50대의 디아스카넬 전 교육부장관을 지명하고, 자신의 임기도 2018년 2월까지로 공언하여 '''1959년 1월 이래 60년이나 이어진 카스트로 형제의 독재체제도 마침내 그 끝이 다가왔다.'''
한편,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하면서 쿠바의 개혁에 희망이 보이는 듯했으나, 그닥 큰 변화라는 건 없으며 쿠바의 개방은 카스트로 형제가 사망한 뒤에야 이뤄질 듯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에 이런 예측을 뒤엎는 대사건이 터졌다. 2014년 12월 17일, 쿠바 혁명으로 단절된 뒤 무려 '''53년 만에 미국과 국교를 맺음'''에 따라 냉전이 녹아 없어지고도 무려 23년이나 지나서야 간신히 쿠바에도 '봄'이 오게 됐다.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이날 국영 TV와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생중계한 특별 성명을 통해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45분 동안 전화통화를 나누고 양국 관계 정상화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특히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체제의 자주성과 국가 주권에 대한 편견이 없는 기반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쿠바가 바티스타 시절 미국의 '설탕 식민지' 신세로 돌아가는 일은 없게 할 것'''임을 강조했다. 라울 의장은 "서로가 견지하는 원칙을 하나도 저버리지 않은 토대에서 존중하는 대화를 통해 차이점을 풀어나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5년 7월 20일. 드디어 '''미국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쿠바-미국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다.''' #
[1] 쿠바인들의 대부분이 스페인계와 메스티소, 아프리카계가 대부분이다.[2] 아이티 독립 이후 아이티 대신 유럽에 설탕을 공급하는 기지로 부상하면서 쿠바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상황에서 쿠바의 부를 사실상 독점하던 크리오요와 페닌술라르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3] 하지만 쿠바의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는 쿠바 독립을 요구하였다.[4] 이때 쿠바 독립전쟁의 지도자로 있다가 전투 도중에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 호세 마르티다. 현재 아바나 국제공항의 이름이기도 하다. 현재는 독립 영웅으로 평가받는다.[5] 이렇게 타이노 원주민의 언어에서 국명을 붙인 나라로 아이티가 있다.[6] 이때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á)"라는 간지폭풍의 명언을 남겼다.[7] 사실 바티스타 군대가 상륙지역에 미리 잠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배신이나 정보가 새어서가 아니라 카스트로 본인이 상륙 직전 언론을 통해 쿠바에 곧 돌아간다고 설레발을 친 탓이다. 카스트로는 보안의 중요성을 잘 몰랐나 보다.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선전을 하려 했던가.[8]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부군에 대항해 제대로 싸울 무기조차 없었다.[9] 재미있는 부분은 군사적으로 바티스타 정권을 압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대민봉사를 통해 거점을 마련하고, 선전전과 선동으로 바티스타 정부가 스스로 붕괴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괴벨스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선전전의 승리.[10] 소련의 용병 노릇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제3세계의 공산혁명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가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전. 그래서 미국은 더욱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려고 발악했다.[11] 앙골라 등 신생 사회주의 국가에선 쿠바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12] 이 사건이 바로 영화 스카페이스의 배경이다.[13] 이때 쿠바 경제가 얼마나 막장화 되었는지 수출이 75% 감소되었고 전체 GDP는 35~48%(범위에 따라 다소 달라진다.)가 감소되었다고 추산될 정도다. 그래서 당시엔 쿠바도 곧 소련처럼 붕괴되는거 아니냐는 예측이 많이 나돌았다.[14] 2011년 국제적 반응은 이런 상태. [15] 이때 보트피플이 대량으로 발생했는데 탈북하면 일단 역적 취급하는 북한과는 다르게 쿠바에선 이를 '''방관했다'''. 일단 인구를 줄여서 세수감수를 메꿀수 있고(사실 70-80년대라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겠지만 당시 쿠바가 에너지난과 물자난에 시달렸던 시절임을 감안하자.), 탈 쿠바 난민들이 상당량의 달러를 보내주어서 쿠바가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하는 데다가(아이러니하지만 일단 결과적으로 그렇다.) 잠재적으로 반정부 세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총 한 번 쓰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데다가 먹여살리는 비용을 미국에 전가해 미국에 대한 압박카드로 쓸수있기 때문이었다.(1980년 잠재적 반정부 세력 청소 목적으로 마리엘 항을 개방시켜서 12만 5000명 가량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때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도 떠나보내게 만들어서 되려 미국 정부에게 엿을 먹인 전적도 있다. 결국 쿠바에 난민들이 대거 발생하자, 미국에선 GG치고(일단 난민들을 먹여살리는 비용 부담도 있고, 남부지역 주민들이 보수적인 것도 있어서) 결국 쿠바와 이민협정을 체결하고 보트피플들을 송환하고 있다. 하지만 금수조치 해제에는 실패했으니 뭐...[16] 물론 2000년대 이후로 쿠바 경제가 다시 나아지면서 비만율은 경제위기 이전 시기를 넘어서게 되었다.[17] 쿠바에서 이런 조치를 취한게 1993년이었고, 북한에서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한게 2002년에 와서부터였다. 사실 북한도 1993년에 라선-선봉지역에 경제특구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여러가지 여건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에 별 도움이 안 되었다.[18] 정확하게는 공장에서 적당히 쓸만한 물건을 몇개씩 암시장에 팔아서 이득을 챙기는 것. 일단 월급을 가지고 기본적인 생활자체는 가능하기는 하나 '''그 이상의 것을 누릴려면 암시장에서 돈을 벌거나 따로 자영업을 하지 않는 이상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암시장이 크게 발달해 있다. 물품을 적당히 몇 개씩 빼돌려서 암시장에 넘긴다거나 하는 식, 쿠바 당국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있기는 하나 암시장 자체를 막아냈다가 말 그대로 정권이 날아가기 딱 좋으므로 대놓고식의 막장짓을 저지르지 않고 일단 그럭저럭 생산량 정도나 맟추면 어느정도 봐주고는 있다.[19] 왕이 아닌 통치자들 중 최장기 집권기록. 김일성은 1945~1994년 집권, 49년으로 1위이다.[20] 북한 왕조세습과 쿠바의 형제세습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며 세습을 옹호하는 일부 견해도 있는데 쿠바의 경우, 라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의 시작부터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쿠바 혁명 계획 및 쿠바 상륙 때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체 게바라는 큰 비중이 없는 인물이었다. 게바라가 쿠바 상륙에 동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당시 카스트로의 혁명군에서 '유일한' 의사였기 때문. 쿠바 혁명을 일으키고 현재의 쿠바를 건설한 주역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다. 피델 다음으로 쿠바 혁명 및 공산주의 쿠바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라울이기 때문에, 북쪽의 왕조 세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21] '''막장 왕조국가인 북한'''이나, 권력을 위해 시위대를 무차별 살상하던 리비아나 그러고 있는 시리아에 비하면 양반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