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La Revolución cubana
1. 개요
쿠바 혁명은 일반적으로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으로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933년 마차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있었고, 이 때 혁명을 뒤엎고 친미정권을 세운 자가 바로 풀헨시오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통칭 바티스타 '''중사'''다.[1]
바티스타 정권은 1944년 실각한 후 1952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하지만, 국내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의 정권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뽑힌 정통 정부였던 데다 1933년과 달리 국내외 사정도 안정되어 있었고 실업률, 경제, 모든 것이 안정선을 달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바티스타의 쿠데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권력욕으로 비춰졌으며, 친미적인 태도는 오랜 기간 '''미국의 지배에 신음하던''' 쿠바 민중들에게 역효과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청년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였다.
2. 배경
쿠바는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세기 말에 호세 마르티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지만, 그는 1895년 스페인군에 잡혀 처형당했고 식민지 독립운동은 번번이 스페인군에게 토벌되었다.[2] 하지만 이 지역에서 세력 확대를 꾀하던 미국이 스페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쿠바의 독립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는데, 1898년 쿠바 독립군을 지원하던 미국 전함 메인호가 아바나 항에서 폭발[3] 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개시했다(미서전쟁). 전쟁은 5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결국 쿠바는 미국의 실질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군사통치를 실시했으며, 1902년 철수 이후 명목상 독립했지만 내정 개입은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내정 개입을 가능케 한 것은 1902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만든 ‘플랫트 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미국은 쿠바 내에 미 해군과 육군의 군사 기지를 설치할 권리, 쿠바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미국 철수 이후 쿠바 공화국이 출범하였으며, 이 공화국은 줄곧 친미 정책을 고수했다.
이후 1930년대 들어서 중남미 국가에 대한 선린정책을 주장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플랫트 법’은 무효화 되었다. 선린정책을 표방한 이후 미국은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자제했지만, 카스트로 혁명 이전까지는 쿠바 내 대다수 생산시설을 소유하는 등 실질적으로 식민지배와 다를 바 없는 정책을 폈다. 쿠바의 경제는 성장했지만 그 과실이 쿠바 민중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쿠바는 1958년에 컬러방송을 시작했을 정도였는데 당시에 미국에서 조차도 컬러TV가 사치품이었고 일반 쿠바인들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소련같은 국가에서 조차도 흑백TV가 아직은 사치품이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당대 쿠바의 빈부격차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있는 척도였기도 했다.
바티스타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혁명 이전 1950년대의 쿠바는 바티스타 가문과 미국이 양분하여 소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8년 통계에 비추어보면 미국 기업은 서비스 부분의 90퍼센트, 제당 산업의 40퍼센트, 그리고 경작 가능한 농지의 7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자본은 담배, 과일, 운송, 전기, 전신 및 은행 등도 장악하고 있었고 그나마 나머지 대부분의 국내 기업과 사탕수수 농지는 바티스타 일가의 소유였다. 사회적 부작용은 심각했다. 총인구 600만 명 중 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있었고, 초등교육을 받는 어린이는 전체 교육 대상 아동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며, 문맹률은 43퍼센트에 이르렀다. 반면 쿠바의 아름다운 해안 지대는 미국 부자들의 별장부지로 팔려 나가있어서 쿠바인들은 백사장을 밟을 수조차 없었다. 바티스타의 독재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정치권과 노조를 통해 조직적으로 확산되었지만 독재 정부는 암살과 처형 같은 수단을 동원하면서 국민의 불만을 억누르려 할뿐이었다.
3. 전개 과정
3.1.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서 무장봉기해 몬카다 경찰서를 습격했으나 실패해 잡히고 말았다. 당시 바티스타 정권은 군인 1명이 사망하고 게릴라 10명의 총살로 보복했다. 그런데 마침 카스트로를 생포한 군 수색대장이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카스트로는 덕분에 즉결처분은 면할 수 있었다. 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카스트로는 "너희들이 현재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말하는 당당함을 보였다.
3.2. 그란마 호 상륙 작전
바티스타는 뜨겁게 달아오른 여론에 굴복하여 카스트로를 석방했고,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했다. 망명이후 카스트로는 군대를 정비하기 위해서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퇴역장교 알베르토 바조를 교관으로 삼아 기습 작전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체 게바라와 만났으며, 이렇게 해서 정예화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1956년 82명의 동지들과 함께 그란마호를 타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다시 쿠바로 잠입했다. 그러나 이를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군에 의해 일행은 섬멸되었고, 가까스로 도주한 10여명만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기나긴 게릴라전을 시작하게 된다.
1957년 미국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스트로와 인터뷰를 하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카스트로는 하루아침에 무명의 게릴라에서 독재에 항거 투쟁하고 있는 ‘현대판 로빈 후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지하 세력을 구축해 그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다음은 상륙에 성공한 혁명군 명단이다.
- 대장 피델 카스트로
- 부장 라울 카스트로[4]
- 부장 에르네스토 게바라
- 대원 우니베르소 산체스
- 대원 후안 알메이다
- 대원 시로 레돈도
- 대원 라미로 발데스
- 대원 알만도 로드리게스
- 대원 레네 로드리게스
- 대원 프란스스코 곤잘레스
- 대원 라휄 챠오 산타나
- 대원 에피게뇨 아메이헤이라스
- 대원 카리스트 모잘레스
- 대원 까밀로 시엔후에고스
- 대원 레이날도 베니테스
- 대원 성명불명
- 대원 성명불명
- 대원 호세 모얀
- 대원 루이스 크레스포
- 대원 훌리오 디아즈
- 대원 카리스트 가르시아
- 대원 카를로스 베르무데스
- 대원 성명불명
3.3. 야과하이 전투
쿠바의 도시 전체에 탄탄한 지하 무장 세력을 구축한 카스트로 혁명군은 1958년 12월 체 게바라를 선봉으로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선을 제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전국에 숨어 있던 지하 혁명 세력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정부군을 습격했다. 사방에서 적을 맞은 바티스타 정부군은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줄지어 투항하게 되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혁명군은 마침내 1958년 12월 31일, 아바나에서의 시민봉기와 함께 아바나를 함락시켰고 독재자 바티스타는 쿠바를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4. 혁명 후
4.1. 카스트로 정부의 개혁
카스트로는 정권을 잡은 뒤 제일 먼저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어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대다수가 미국인 소유로 되어 있는 설탕, 석유 회사를 접수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또 집단농장 운영을 통해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동시에 군비를 강화해 미국의 침공에 대비했다. 집단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문맹퇴치정책을 통해 모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양질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보건과 복지정책 향상을 통해 중남미 지역에서 최고의 의료서비스와 주민복지정책을 추구했다.
이 같은 혁명정부의 노력과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뒤진 국가였던 쿠바는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교육과 체육, 의료 분야에서는 선진국에 버금가는 수준을 이뤘다. 60년대 말 일부 종속 이론가들은 쿠바를 그들 이론의 실천국가로 간주할 정도였다.
4.2. 쿠바 미사일 위기
자세한 내용은 쿠바 미사일 위기 문서 참조.
처음에는 쿠바 혁명의 개혁과정을 주시하기만 했던 미국은 1960년 7월부터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자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1961년 1월에 국교까지 단절하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이에 미국과 대립하는 소련과의 관계 확립에 주력했다. 소련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를 미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쿠바혁명정부방위위원회'''를 발족시켜 카스트로 지원에 나섰다. 또 대규모 자문단을 쿠바에 상주시켜 미국과의 대립을 본격화했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비밀리에 마이애미 거주 쿠바 출신 젊은이들을 규합한 후 CIA 요원들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을 시켜 쿠바 침공을 시도했다. 1961년 CIA 요원들에게 특수훈련을 받은 1400여 명의 쿠바 출신 군대는 피그만 침공을 감행했다. 이때 미국은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과소평가해 금방 전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10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전원이 카스트로의 혁명군에게 생포되는 참패로 끝났다. 피그만 침공 1년 반 뒤 카스트로는 53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받고 포로들을 미국에 송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고 미국은 미주기구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이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도록 했다.
미국의 압박에 불안을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소련은 미국의 코앞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소련에 미사일 기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은 쿠바에 설치하는 미사일이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용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 해상 밖에서 미사일을 선적한 소련 함대를 힘으로 저지했다. 소련 선박들이 해상 봉쇄선을 넘을 경우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최후통첩이 후르시초프 서기장에게 전달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극적으로 타협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신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던 것이다. '''쿠바의 체제 안전 보장이 이뤄진 것이다.'''
5. 여담
수영선수 출신의 배우 조니 와이즈뮬러는 하필 쿠바 혁명 당시 골프 대회에 초청을 받아 친구들과 쿠바를 여행하다가 카스트로의 군대에 붙잡혔다.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와이즈뮬러는 기지를 발휘해 자신이 타잔을 연기한 배우임을 알리려고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특유의 고함소리를 냈고, 알아본 병사들은 깜짝놀라 그에게 인사를 청하며 사인을 받고 풀어줬다.
영화 대부2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쿠바 혁명이다. 하이먼 로스를 비롯해 쿠바의 이권과 관계된 갱단ㆍ마피아 두목들은 혁명군을 과소평가하나, 주인공인 마이클 콜레오네는 쿠바 혁명의 승리를 점치고 사업에서 발을 뺀다.
[1] 바티스타는 중사가 쿠데타를 이끌어 쿠데타 성공 뒤 군최고 통수권자가 되었고, 1940년까지 쿠바의 최고권력자로 바지 사장 대통령 뒤에서 실권을 잡고 있다가 1940년에 직접 대통령 선거에 당선. 개발도상국에선 장성 계급은 명예직이고 실무는 영관급에서 하는 경우가 제법 흔하기 때문에 무하마르 알 카다피처럼 대령이 집권하기도 하지만 위관도 아닌 부사관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은 정말 희소하다.[2] 영토가 굉장히 방대하고 식민지 독립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져 스페인 제국의 제어 능력이 붕괴되어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였던 멕시코와 중앙/남아메리카 국가들(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등)과 달리 쿠바는 4면이 바다에 갖힌 고립된 지형의 섬나라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 독립운동 진압과 통제가 비교적 수월했다.[3] 폭발의 원인이 현재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미국이 자작극을 벌이기 위해 단순 폭발 사고를 스페인군의 공격이라고 속였다는 설도 있다.[4] 대장 피델의 친동생이다.